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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노성걸 선생 장례식 31일 로스엔젤레스에서 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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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9-12-31 18:05 조회5,7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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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손세영 편집위원] 31일 오전11시 윌셔연합감리교회에서 진행된 고 노성걸 선생
고별예배는 유가족, 친지, 사회단체 회원 등 150여명이 참여한 본 교회 정영희 목사의 집례로 개최되었다.
이 고별예배에는 양은식 박사, 육재규 선생 부부, 조경미 선생, 노길남 박사, 손세영 선생 등 통일운동권
인사들도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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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노성걸 선생 장례식 31일 로스엔젤레스에서 거행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손세영 편집위원]31일 오전11시 윌셔연합감리교회에서 진행된 고 노성걸 선생 고별예배는 유가족, 친지, 사회단체 회원 등 150여명이 참여한 본 교회 정영희 목사의 집례로 개최되었다. 이 고별예배에는 통일운동권에서 양은식 박사, 육재규 선생 부부, 조경미 선생, 노길남 박사, 손세영 선생 등이 함께 해 조의를 표했다.

사회자의 예식사를 시작으로 찬송(200장-주의 피로 이룬 샘물) 합창, 기도(에디 노 목사), 1부성가대의 조가, 성경봉독(계시록 7:9~17), 정영희 목사의 설교(이 일 후에-After this!), 집례자 기도, 그리고 노길남 박사(우리 말 조사)와 조카 노 어니씨의 영어조사, 가족 광고, 찬송합창(188장:만세반석 열리니), 폐회 축도로 진행되었다.

고별예배가 끝나고 참석자들은 고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다음 유가족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서라벌 식당에서 참석자들은 오찬을 나누며 고인을 회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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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사]



*노길남 박사(민족통신 대표)


<##IMAGE##> 먼저 사랑하는 동생, 오빠, 형을 잃은 유가족(봉걸,순옥, 준걸, 정걸, 문걸, 혜옥, 신옥 등) 여러분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합니다. 저는 이시간 노성걸 권사님, 저에게는 성걸 형이 걸어 온 길, 그 발자취를 간략하게 더듬어 보려고 합니다.

1935년 평북 철산 출생, 대광중고등학교 졸업하고 연세대 입학했다가 재학 중, 1959년 2월 아버지 노의선 목사님과 사모님 임실내 여사의 미국이민을 따라 24살 때 도미하였습니다.

고인은 이민 온 이후 미군에 입대하여 복무했고, 제대 후에는 아버님 노의선 목사님(1997년 12월27일 별세)을 따라 통일촉진회(One Korea Movement) 활동도 했고, 조국통일북미주협회에서 양은식 박사님 회장하실 때 초대 총무로 활약했고, 노의선 목사님과 가족들이 이북의 고향 방문한 이래 북한바로알리기 운동의 일환으로 북한비데오 나눠보기 활동에 앞장섰던 분입니다.

2년 전 뒷마당에서 일을 하다가 사고가 나기 전에는 북한 어린이 돕기 등 인도주의적인 지원활동에 솔선수범하였습니다.

노성걸 형은 로스엔젤레스에서 에스코로 캄파니아에서 오랜 동안 일하면서 <윌셔연합감리교회>의 권사님으로 봉사하였고, 과외 활동으로는 YMCA 등산클럽, 윌셔등산클럽 회원으로 산악등반을 즐겼던 낙천가이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지난 36년 동안 노성걸 형과 사귀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노의선 목사님이 살아 계실 때에는 1월1일이면 세배를 가곤하여 마치 노성걸 형의 가족처럼 지냈습니다.

먼저 저는 성걸 형을 만나면서 역사의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을 간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빌려 준 북한 비데요, 북한 도서 등을 통해 민족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 고별예배를 통해 내가 아는 노성걸 형에 대해 몇가지를 추억하고 싶습니다.

(1) 성걸 형은 신학자 수준의 성경 박사이기도 합니다. 신약구약 60여권을 달관한 신학자(Bible Scholar)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성걸 형을 생각하면 이 북한 성경책과 찬송가를 생각합니다. 고인을 생각하면 나는 이 귀절을 읽고 싶습니다. <<<성경 보이며 봉독>>>

(2) 성걸 형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방면에 박식한 지식인(Intellectual)이었고,

(3) 성걸 형은 언제나 약한자를 돕는 선한 사마리안(Good Samaritan)이었습니다.언제나 일상생활에서 돈을 아끼면서도 남을 돕는 일에는 아끼지 않았습니다.

(4) 성결 형은 독실한 크리스찬이었지만 기독교나 이슬람교 등 다른 종교를 비하하지 않았던 아량 있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특히 성걸 형은 우리 민족종교인 동학, 천도교, 대종교, 원불교 등에도 조예가 깊고 우리 민족종교도 존중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불자들 친구, 믿지 않는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5) 성걸 형은 모든 것을 절약하는 분입니다. 미국생활 50년 살면서 에스크로 회사에서 돈도 많이 벌었지만 그가 번돈은 절대로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가난한자 불상한 자들에게 사용했습니다. 자동차도 털털거리는 자동차였습니다.

(6) 성걸 형은 분단조국에 대해 무척 안타까워 한 나머지 미국에 살면서도 조국통일 운동에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간의 대화모임에도 참석하였고, 일본과 유럽 등에서 열리는 동포통일운동 행사들에 열심히 참가하였던 애국자였습니다.

(7) 성걸 형은 4남4녀 중에서도 효자였습니다. 부모님이 생존하였을 때 평생을 같은 집에 살면서 부모님을 모시며 봉양했던 분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성걸 형이 사랑해 주셨던 후배의 한사람으로 그가 남긴 족적을 가슴에 안고 그의 본을 받아 남은 생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성걸 형은 나중에 천국에서 만나 이 세상 이야기, 그리고 오늘의 이야기를 다시 나누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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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노성걸 선생 운명, 31일 오전11시 라성에서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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