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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획]미국의 잔인무도한 역사 안고 온<캄보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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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9-04-06 11:21 조회3,1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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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는 남미, 아프리카 나라들에 이어 이번에는 아시아 나라들 중 <캄보디아>를 연구고찰하며 또 다시
미국의 잔인성을 발견했다고 지적하고, <미국 지배세력은 해도 너무 해 왔다.>고 꼬집으며 베트남 전쟁 때문에 가려져
왔던 캄보디아 침략행위의 잔인성을 폭로하면서 미 제국주의자들의 비양심적이고 비윤리적인 행태를 신랄하게 지적한다.
전문을 게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연재기획]

미국의 잔인성으로 참혹한 역사를 안고 온 <캄보디아>



*글:유태영 박사(은퇴 목사, 재미동포통일운동 원로)


숨겨진 캄보디아 전쟁과
전범자 닉슨 대통령과 키신저
캄보디아에 투하한 폭탄 64만톤


<##IMAGE##> 미국 지배세력은 해도 너무 해 왔다. 남미 나라들, 아프리카 나라들, 아시아 나라들 할 것 없이 세상 구석 구석을 다니며 잔인성을 보여왔다. 미국이 캄보디아에 투하한 폭탄의 수는 2차 대전 때 보다 4배나 더 많은 64만 톤을 캄보디아에 투하했다. 베트남전의 뒷전으로 밀려 미국이 캄보디아에서 벌린 전쟁과 투하한 폭탄이 64만 톤 이라고 하는 사실이 완전히 은폐되고 있었다.

미 의회가 알지 못했고 언론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이러한 사실을 닉슨 대통령과 백악관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져 오직 두 사람만 알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캄보디아의 영토를 침범하면서 활약하는 <호지민 루투>를 봉쇄한다는 명분으로 미국은 캄보디아를 공격 했는데 목표로 선정된 지역은 마치 도장을 찍듯이 무차별로 폭격을 했다. 캄보디아 농민들은 밭에서 일을 하다가 죽고 혹은 집에서 잠자다가 <네이팜 탄>에 죽음을 당했다.

사망자의 수는 10만에서 15만으로 추정된다. 뿐만 아니라 죽음은 겨우 면했지만 집과 논밭을 잃고 고향을 떠난 난민의 수는 200만이 넘는다.

1968-69년에 베트남전쟁에 투입된 미군의 병력은 55만에 이르렀다. 베트남전쟁을 하루 속히 끝내겠다는 구실로 닉슨 대통령과 안보보좌관 키신져는 오히려 베트남 전선을 캄보디아로 넓혀 나갔다. 캄보디아에 숨어 있는 <베트공>을 겨냥한 대규모 작전아래 B-52기들이 캄보디아를 맹 폭격 했던 것이다.

캄보디아 공습계획은 식사시간과 관련된 공습 계획을 세웠는데 <메뉴 Menu> 라 는 암호를 정해 놓고 아침공습, 점심폭격, 스낵공습, 저녁작전 그리고 식후출격 등으로 공습계획을 세워 놓고 캄보디아 양민들을 무참히 살해 했다.

1973년 마지막 공습 기간 6개월 동안에 폭탄 25만 톤을 집중투하 했는데 미국이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에 투하한 폭탄 16만 톤보다도 9만 톤이 더 많았다. 10여 년 동안 캄보디아에 투하한 폭탄은 총 64만 톤이었다.

캄보디아 공습이 베트남전쟁을 끝나게 하는데 하등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 사실을 닉슨 대통령과 키신져는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의 캄보디아 폭격은 오히려 캄보디아 민중의 반미감정을 고양시키는 역할만 했을 뿐 이었다. 캄보디아 폭격은 베트남 전쟁에 숨겨진 또 하나의 비참한 전쟁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캄보디아에서 저지른 미국의 무차별 폭격에 대하여 그 당시 캄보디아 주재 미대 사 에모리 스원크는 대사직을 그만 두면서 말하기를 <캄보디아 폭격은 가장 헛된 짓이다> 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리고 캄보디아를 방문하여 현지에서 비참한 사실 을 목격 했던 맥클로스키 미 하원 의원은 이에 대한 소감을 <미국이 캄보디아에서 저지른 악행 때문에 전세계에서 악명을 얻게 됐다> 라고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예일(Yale) 대학의 도서관은 미국의 캄보디아 폭격에 관한 자료들을 마이크로 사진(Microfilm)으로 제작하여 학생들과 학자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1965-1975년 10년 동안에 미국이 캄보디아에서 실행한 군사 작전에대한 문서와 사진자료들을 자세히 편집 했다.

이 자료들에 의하면 폭격을 당한 동네 수는 13,000 개이고, 폭격을 당한 장소들은 115,000개, 미군 폭격기가 폭격한 회수는 23,100 번, 소비한 탄약의 수는 총 2백75만 톤으로 집계되었다. 캄보디아는 10년 동안 매일 평균 6회 이상 공습을 당한 셈이다.

닉슨 대통령은 캄보디아 양민학살에 대한 책임추궁을 당하지 않고 사과의 말 한 마디 없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캄보디아 작전을 직접 명령했던 헨리 키신져는 아직 살아 있는데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다. 국제관계에 양심이 살아 있다면 무덤 속에 있는 닉슨과 함께 키신져는 반드시 캄보디아 법정과 국제적 전범재판정에서 준엄한 재판을 받아야 한다.

1. 캄보디아의 간추린 역사


BC 2000-1000년 경에 지금의 캄보디아에는 신석기 시대에 속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이 살았던 동굴과 사용하던 빗살 무늬의 항아리들이 발견되었다. 선사시대는 BC 50-AD 사이에 끝났고 인도의 문화와 중국의 영향을 받는 새로운 시대에 들어 섰다.

1세기에서 8세기에 이르는 수 백 년 동안에는 이곳 사람들은 집단을 이루고 살면서 벼농사와 철기문명을 이루기 시작 했다. 그러는 사이에 중국과 인도가 해양로를 통하여 교역을 함에 따라서 캄보디아도 자연히 중국과 인도의 문화와 접촉하게 되었다.

3세기에 와서는 <후난> 으로 알려진 캄보디아의 조상인 <크메르인> 들이 국가를 형성했으며 5세기까지의 기간 중에는 인도문화와 힌두교가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이때 크메르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6세기에 들어와 <후난>은 내분으로 인하여 분산 되여 <첸타국>이 새로 창설되어 200년간 통치하면서 통치영토를 넓혔고 8세기에 첸타국이 크게 번성했다.

825년(AD )에 첸타국 이후에 <앙코르 제국>이 새로 창건되어 꿀린산 고지에 제국의 수도를 건설하여 힌두교 전통을 가진 제국의 막이 새로 열렸다. <앙코르 제국> 은 600년의 화려한 문화를 창건하고 막강한 정치력으로 지금의 라오스, 태국, 베트남 그리고 인도에 이르기 까지 지배했으며 앙코르에 인구가 총 100만에 이르는 대도시를 이루어 그 당시 세계최대의 도시가 되고 있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앙코르 와트> 가 이 시대에 지어졌으며 또한 <앙코르 톰> 같은 고도로 발달된 건축기술이 지금까지 유적으로 보존되어 있다.앙코르의 신비롭고 웅장한 유적들은 오늘 세계에서 유명한 관광지로 수백만의 광관객들을 유치하고 있다.

하지만 앙코르 제국은 지나친 토목공사와 집권층의 부패로 인하여 쇠퇴하기 시작했다. 앙코르 제국이 쇠퇴하는 틈을 타서 태국의 이유타족이 1431년에 침공하여 앙코르 제국을 함락하였다. 앙코르 왕은 앙코르의 화려한 지역을 모두 포기하고 프놈펜으로 수도를 옮겨 피신 했다.

1471년에는 베트남이 캄보디아로 세력을 확장하여 지배했다. 캄보디아는 피지배국으로 전락하여 태국과 베트남 사이에서 꼼짝하지 못하는 약소국이 되었다. 앙코르 왕국은 650년 동안의 화려한 문화와 위세 당당했던 대제국의 역사는 허무하게 몰락하는 운명에 이르렀다.

캄보디아는 그 후 400년 동안 스페인과 태국 그리고 베트남 등 여러 나라들에게 시달리다가 1864년에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어 왕정을 유지했다. 프랑스는 왕정을 조건부로 승인하면서 캄보디아를 지배하는 바탕을 마련했다.

캄보디아는 제 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침략을 잠시 받았으나 프랑스령으로 계속 존속되어 왔다.. 프랑스는 1941년에 프랑스에서 교육받은 18세의 나이 어린 시아누크를 왕위에 앉게 하여 친프랑스 노선을 견지하는 캄보디아 왕국을 존속시켰다.

하지만 프랑스는 작은 나라들의 독립운동이 펼쳐지던 시대의 변화를 막을 수 없어 할 수 없이 캄보디아의 독립을 승인하고 1954년 2월에 권력을 시아누크 왕에게 이양함으로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식민통치 90년 만에 독립을 쟁취 했다.

독립을 쟁취한 시아누크 왕은 <왕정사회주의국가> 를 세우고 대외적으로 중립국의 노선을 선택했다. 그리고 시아누크 왕은 10년 후인 1963년에 불교를 바탕으로하여 <사회주의 국가건설> 을 하는 것을 캄보디아의 정책으로 삼았다.

시아누크 왕은 미국과 전쟁중인 북 베트남을 측면으로 지원하면서 1965년에는 미국과 단교를 선언하고 미국이 지원하는 남 베트남과도 단교를 결의 했다. 시아누크 왕은 대외 무역과 모든 산업들을 국유화 하여 사회주의 정책을 세웠다.

시아누크 왕은 자신이 실질적으로 정권을 잡기 위해 왕위를 포기하고 평민의 자격으로 선거를 통하여 수상과 외무장관의 직책을 맡아 캄보디아의 정치를 주도 했으며 국가안보를 중요시하여 비동맹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시아누크는 왕족 출신이며 또 왕위를 포기한 평민으로 사회주의 지도자로 부상하여 국제적으로 유명한 정치인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캄보디아의 경제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미국, 태국, 남 베트남과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어 경제는 최악에 이르렀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시아누크 수상은 미국과의 관계개선 방향으로 선회하자 국민들은 미국에 굴복하는 게 아닌가라는 의혹과 함께 이에 대한 비판여론이 일기도 했다.

이와 같은 혼란 속에서 시아누크와 캄보디아에 어두운 운명의 날이 다가 왔다. 시아누크 총리는 그의 심복이던 <론놀> 이 친미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 했다.

1970년 3월 22일 시아누크 총리는 러시아에 친선 방문 중이었는데 그 사이에 론놀이 쿠테타를 일으켰던 것이다. 이 때문에 시아누크 총리는 일단 귀국을 포기하고 중국과 북조선을 오가면서 잠시 방랑객이 되고 있었다.

친미 쿠테타를 이르킨 <론놀> 은 누구인가?

론놀은 미국에서 교육받은 직업군인으로 미국의 후원과 원조를 약속 받고 쿠테타를 일으키게 된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의 비호 하에서 론놀은 캄보디아의 왕정제도를 완전히 철폐하고 <왕정 옹호파>와 <사회주의자>들을 모두 다 체포하여 처형했다. 미국의 후원으로 정권을 잡은 론놀은 캄보디아의 국명을 <크메르 공화국 으로 개칭하기도 했다.

미국은 론놀 정권에게 1970-1975년 사이 12억 달러를 지원해 주었으며 군사훈련과 군수물자를 무진장 제공해 주었다. 이로 인하여 캄보디아는 끝이 보이지 않는 내전의 시대를 시작했으며 그 후 수십년 동안 계속 되었다.

미국은 미국이 세워 놓은 론놀 정권을 경제와 군사적으로 막대한 지원을 제공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론놀 정권을 반대하는 게릴라를 소탕하기 위하여 캄보디아에 무지막지한 폭탄을 투하 했다.

또 미국은 캄보디아 영내에 있는 북 베트남의 <호지민 루트>를 봉쇄한다는 명분으로 캄보디아를 10년 동안 맹폭격하는 범죄를 자행했다. 이런 사실은 유명한 베트남전에 숨겨져서 세계는 전혀 알지 못했다.

미국은 1965-1975년에 <네이팜 폭탄> 64만 톤을 캄보디아에 투하 했다.미국의 무자비한 폭격으로 인하여 애매한 캄보디아 양민들만 희생되었다. 공식통계상으로 나타난 사망자의 수는 15만 명으로 나와있으나, 실제로는 50만 명 이상이라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사망자뿐만 아니라 논밭과 집을 잃은 난민들의 수는 200만 명 이상으로 집계되었다.

이와 같은 엄청난 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캄보디아의 반정부 내전은 끊임 없이 계속 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막대한 원조 달러로 인하여 정권 내부와 기득권 세력들 사이에서 발생한 부정부패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친미적 론놀 정권> 은 오래가지 못 하고 5년 만인 1975년 4월 17일에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지난 5년 동안 지독한 독재와 부정부패로 인하여 극도의 혐오감을 받고 있던 론놀 정권의 마지막 날이 되였는데, 론놀은 4월1일에 이미 수백만 달러가 들어 있는 가방을 챙겨 가지고 미국이 주선해 준 해외로 도망가고 말았다.

미국은 론놀의 생명을 구해 주었지만 미국과 론놀이 함께 세운 <크메르 공화국> 은 이미 깨끗이 버리고 있었다. 미국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새 정권을 새로 세우기도 하고 또 세운 정권들을 쉽게 버리기도 한다.

론놀이 외국으로 도망가자 캄보디아 민중들은 환영했지만 론놀 정권 하에서 기득권을 누려왔던 관료들, 어용지식인들, 친미성향의 시민들, 서구문명에 젖었던 엘리트 층의 사람들 그리고 돈 많은 부자들은 모두 다 론놀 정권의 붕괴를 슬퍼하고 있었다. 이것은 마치도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이 하루 아침이 무너진 다음에 나타난 남한의 사회모습과도 유사했다.

2. 폴 포트 정권의 등장


<론놀 정권> 을 붕괴시킨 힘은 무엇이며 또 어떤 힘 이였던가?

친미적인 론놀 정권을 붕괴시킨 힘은 첫째, 무지막지한 미국의 폭격에 대하여 반미감정이 폭발한 민중의 힘이었다. 둘째, 사회주의적 지도자로 등장한 시아누크 왕에대한 민중의 존경심이 큰 힘 이었다. 셋째, <폴 포트> 가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던 <크메르 루즈> 공산주의 게릴라의 조직적인 역량들이 결합하여 론놀 정권을 붕괴 시켰다고 분석할 수 있다.

폴 포트는 누구인가?

폴 포트의 본명은 살로스 사 "Saloth Sar 1925-1998" 이다. 폴 포트는 캄보디아 공산주의 정당인 <크메르 루즈>의 지도자 이었다. 폴 포트는 론놀 정권을 붕괴시킨 후에 캄보디아의 국명을 <민주 캄푸치아 공화국>으로 개칭하고 새로 세운 공화국의 총리로 취임 했다.

폴 포트는 1949년에 프랑스에 유학하여 무선 공학을 연구하는 장학생 이었다. 그는 유학 중에 프랑스 공산당 내부에서 결성된 크메르 공산주의 그릅에 참가했으며 1953년에 캄보디아에 귀국하여 프랑스어 교사로 일했다. 그는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 후 캄보디아 비밀 경찰을 피하여 12년간 지하활동을 하면서 사회주의 조직활동을 전개했다. 1960년에 캄보디아 공산당 중앙상임위원, 1962년에 서기로 취임했고, 1967년에 중국이 지원하는 반정부 무장투쟁을 시작 했다.

캄보디아 공산당의 정치조직체를 <크메르 루주> 라 부른다. 폴 포트의 사상적 배경은 <모택동 주의>이다. 하지만 캄보디아에서 모택동주의는 약간 변형되어 적용되였다. 크메르 루주의 정책은 완전한 평등주의이며 토지의 균등분배와 캄보디아식 사회주의적 이상을 달성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었다.

폴 포트 정권은 서방에 물 들거나 자본주의에 세뇌된 세력을 캄보디아에서 근본적으로 뿌리를 뽑으려고 무리한 숙청작업을 전개했다. 그의 무리한 숙청작업 이후에 서방세계에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론놀 친미정권에 협력한 모든 서람들은 상하와 빈부 남녀를 막론하여 모두 다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화폐의 통화를 폐지 하였으며 부자들의 사재는 몰수했다. 교육은 오직 공립학교에서만 허용했다. 도시에서 농촌으로 강제이주를 시킴으로 큰 도시는 갑자기 유령도시로 변했다. 이와 같은 혁명운동에 조금이라도 반대하거나 불순하면 무조건 숙청의 대상이 되여 처형을 당했다.

폴 포트 정권은 농업현대화 및 산업에 있어서 기술개발을 기치로 내걸고 국민들로 하여금 도시를 떠나 대규모 농업협동조합이나 산업체에 종사하도록 강요했다. 그는 세계역사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최대규모의 국민 대이동 계획을 강제로 집행하여 모든 도시 거주자들을 지방으로 이주시켰다. 뿐만 아니라 노동을 거부하는 사람, 외국서적 가지고 있는 사람, 양담배 피우는 사람 등 부르주아로 구분되는 사람들은 처형했다. 그 당시 캄보디아에 있던 외국인들도 거의 다 간첩의 협의로 처형 당했다. 시아누크 국왕이 론놀 정권하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귀국했는데 폴 포트 정권은 시아누크국 왕도 가택 연금시켰다.

폴 포트 정권은 봉건적 원시종교를 옹호하는 종교인들도 숙청의 대상으로 삼았다. 종교도 봉건적 전통을 고집하여 혁명에 협조하지 않으면 불교 승려들을 강제로 환속 시켰다. 대외적으로 폴 포트 정권은 중국과 북조선과 유대를 강화하였으며 캄보디아의 외교 관계는 오직 반미반제 국가들과만 국교를 개설하고 있었다.

<폴 포트 크메르 루주정권>은 1975년4월부터 1979년 1월까지 3년 9개월 동안 집권 했다. 필란드 조사단이 발표한 조사기록에 의하면 3년 9개월 동안 숙청으로 처형된 사람들과 기근과 질병으로 인하여 사망한자는 총 100만 명 이상이라고 했다.

폴 포트가 정신병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악행을 저질렀을까? 노동자들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꿈으로 혁명을 일으켰으며 친미정권을 붕괴시킨 영웅적 혁명가이다. 미국인들을 캄보디아 에서 쫓아낸 영웅적 혁명가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찌하여 사망자 100만 명이 발생하게 했을까?

학자들은 폴 포트에게 잉태된 잔혹의 원인을 캄보디아의 독특한 소승불교의 규범의 눈을 통하여 마르크스 주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스스로를 <악을 물리칠 선민의 화신>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해석을 한다.

서구문명과 미국의 자본주의적 화려함에 빠진 사람들이 웃거나 즐기는 것을 보고 분개하면서 소승불교적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속세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도시인들에게 육체노동을 강요하면서 프롤레타리아 의식을 연마하는 수단으로 착각했다라고 해석을 한다.

폴 포트의 혁명형태를 보며 나는 좌경모험주의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느끼게 된다. 우리 나라의 사회주의 역사에서도 북조선이 주체사회를 건설하는 동안 좌경모험주의자들 때문에 김일성 주석이 골머리를 앓아 온 지난 시대가 상기된다. 항일투쟁시기에도 그리고 조국해방을 맞은 시기에도 이북 사회주의 건설과정에 화요파, 목요파, 엠밀파, 연안파, 서울파 등 수많은 종파들이 존재하였다. 이들은 거의가 과격모험주의자들이거나 좌익사대주의에 빠져 파벌을 일삼는데 정력을 소모해 왔다. 그리하여 김일성 주석은 훗날 자신의 머리가 희어진 것 중 절반은 그러한 종파주의자들 때문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과격모험주의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인류역사에서도 증명되어 왔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나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같은 이치로 적용되는 것 같다.

미국의 기록영화 제작자 죤 필거(John Pilger)는 캄보디아 폴 포트정권이 저지른 100만
명 대학살 사건을 기록영화로 제작했다. 영화의 제목 "The killing Fields, 대학살" 이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세계 60개 나라에서 방영되었다. 하지만 정작 미국에서만 이 기록영화의 방영이 법으로 금지되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폴 포트 정권이 저지른 학살과 악행보다 미국이 캄보디아에서 폭격으로 저지른 양민 학살과 악행이 보다 더 심하고 가혹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 상영은 미국에서 금지되었다. 미국이 캄보디아 에서 저지른 악행은 <숨겨진 전쟁>의 행위이기 때문에 미국 국민들에게 폭로되지 않으려고 기록영화 상영을 법으로까지 금지했다.

미국이 캄보디아에 투하한 폭탄 64만 톤과 탄약 2백75만톤 그리고 캄보디아 인 사망자가 60 내지80만 명을 살해하고 난민 200만 명 이상을 발생시킨 사실이 미국인들에게 폭로 되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에 미국 정부는 라는 기록영화 상영을 미국 내에서는 불허하기도 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 뒤에 숨겨진 또 다른 끔직한 <캄보디아 전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극구 숨기고 싶은 것이다. 에 대한 국제재판을 준비 하고 있는 캄보디아의 현 정부는 미국과 또 한판 강제적 심리전을 벌이고 있다.

캄보디아 학살 사건을 년대 순으로 기술하면 첫번 범죄자는 미국이고 두 번째 범죄자는 폴 포트 정권이다. 미국의 범죄행위는 제1기로 1969-1973년에 자행한 사건이다. 폴 포트 크메르 루주 정권이 저지른 범죄 행위는 제 2기로 1975-1979년에 발생했다.

캄보디아 범죄사건 발생 후 30년 만에 겨우 열리는 전범 재판에 대하여 재판관 은 몇 명이고 누가 재판관으로 선정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5년 동안 결정을 못하고 대립되어 왔다. 2009년 2월 23일에 국제연합(UN)이 개입된 판사 13명과 캄보디아 판사 17명으로 모두30명으로 구성되여 첫 재판이 어렵게 시작되었다.

300명의 취재 기자들이 모여 들었다. 앞으로 재판이 지속될지 국제적 관심이 되고 있다. 미국이 범죄국으로 되기 때문에 미국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재판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범죄행위가 제 1기에 해당함으로 미국의 범죄에 대한 재판부터 먼저 시작되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은 1기와 2기에 대한 논의는 있을 수 없고 오직 폴 포트 정권이 저지른 범죄행위만 재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의 이와 같은 주장은 마치도 <핵 폐기와 사찰은 북조선만 해야 하고 미국은 사찰을 받을 필요가 없다>라는 주장과 똑 같은 억지 논리와 같은 것이다.

국제재판정에 출두하여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캄보디아 측에서는 주범인 폴 포트가 1998년에 72세의 나이로 사망 했으니 불가능하고 현재 생존해 있는 폴 포트 정권에서 실권자 이였던 ‘누온 체아’ ‘키우 심판’ 그리고 ‘이영 사리’ 등 세 사람이 재판정에 출두해야 한다. 이 세 사람은 벌써 법정에 출두하여 선서를 했다.

그런데 미국측의 전범자는 누구인가?

캄보디아 양민 60-80만 명을 살해하고 200만 명의 난민을 발생시킨 전범자는 닉슨 대통령과 키신져 두사람이다. 그런데 닉슨 대통령은 1994년에 사망했으니 불가능 하고 키신져는 생존해 있으니 반드시 국제법정에 출두하여 선서를 하고 재판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미국은 키신져를 절대로 법정에 세우지 않으려고 별별 구실을 내 세울 것이다. 미국의 비양심적이고 비윤리적인 자세는 이 경우에도 그대로 노출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대하여 아시아 네트 워크 보도진에서는 미국이 개입된 국제재판은 <20세기 거짓말> 이라고 대서 특필로 보도하고 있다.

"Menu 작전"으로 B-52기 들이 출격하여 10년 동안 60-80만의 무죄한 양민을 살해한 책임자 <닉슨>과 <키신져>를 비껴가는 재판은 <최악의 사기극> 이라고 웨치고 있다.

<킬링 필드>재판은 반드시 미국이 저지른 폭격도 포함시켜야 한다고 캄보디아 현 정부의 훈센 총리가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어김 없이 훈센 총리에게 <경제제재>를 들먹이면서 달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훈센 정권을 두들겨 패 기도 한다. 미국의 범죄행위는 죄가 아니고 오직 폴 포트 정권만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 하고 있다.

미국의 지성인 노엄 촘스키 교수는 <1970년대 초 캄보디아 농촌을 상대로 역사상 가장 집중적인 폭력을 지시했던 사람들도 당연히 전범 재판을 받아야 한다>며 정의로운 심판을 촉구 했다. 그러나 당시 그들을 살해한 자들과 유엔 등 국제 기구와 관련된 사람들은 모든 책임을 폴 포트에게만 전가 시키고 있다라고 촘스키 교수도 지적 했다.


3. 오늘의 캄보디아


폴 프트 정권의 과격모험적 숙청과 그 통치방식으로 캄보디아가 위기에 빠졌었다. 그는 대외정책에서도 무모한 자세를 보이며 역량도 타산하지 않고 베트남에게 빼앗겼던 메콩 텔타를 다시 찾겠다고 베트남을 공격했다가 1979년 1월에 베트남에게 패전하고 말았다.

베트남은 10년 동안 캄보디아를 통치하다가 1989년에 10만 병력을 철수하면서 캄보디아의 평정을 마련해 주었다. 그 결과 캄보디아는 국가 최고 평의회를 조직하여 시아누크를 의장으로 추대하여 안정을 되찾는 계기를 맞이했다.

캄보디아는 유엔(UN)의 감시하에 선거를 실시하여 정당들 참가하는 연합정부를 창설했다. 하지만 과격모험주의의 길을 고집해 왔던 <크메르 루즈 공산주의파>는 연합정부에 가담하지 않고 게리라 활동을 계속 하면서 독자적 길을 선택했다.

1993년에 캄보디아는 왕국을 복귀하고 시아누크를 합법적인 군주로 좌정했다. 라나리드 왕자와 정당 대표 훈센 두 사람이 수상이 되여 쌍두마차의 연립정권을 수립했다.

1998년에 캄보디아 총선을 실시하여 인민당의 훈센이 수상이되고 라나리드 왕자는 하원 의장으로 취임하였다. 게릴라로 활동하던 크메르 루즈 공산주의파도 이 때에 와서는 정부군에 편입하여 평화를 되찾았다.

한편 새로 구성된 정부는 유엔(UN)에서 시작한 폴 포트 크메르 루즈에 대한 국제전범재판을 거부하고 캄보디아 문제는 캄보디아 자체 내에서 해결하겠다고 요구했다.

캄보디아 정치권은 새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2004년 7월에 캄보디아 역사에 있어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 놀라운 변화가 발생했다. 18세의 어린 나이로 프랑스의 추천을 받아 1941년에 왕위에 앉게 되었던 시아누크 왕은 63년 동안 지켜온 왕위를 둘째 아들 시하모니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다.

새로 왕위에 오른 시하모니 왕은 13세기에 창건 된 앙코르 왕국으로부터 이어지는 왕정국가의 후예가 되었다. 9명으로 구성된 국왕선출 위원회는 시아누크 왕의 뜻을 존중히 여러 아들들 중에서 시하모니 왕자를 선출하여 왕위에 앉게 했다.

흥미있는 사실은 새로 왕위에 앉은 시하모니 왕은 1976년에 북조선으로 유학 가서 평양에서 1년 동안 영화촬영공부를 했다고 한다. 시하모니 왕은 소학교와 중고등 학교를 체코에서 공부했고, 프랑스 대학에서 음악과 연극을 전공해 폭넓은 식견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그는 또 안무가와 촬영감독 등으로 활약한 예술가 이기도 하다. 시하모니 왕이 평양에서 영화공부를 할 때 틀림없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영화예술에 대한 사사를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인 시아누크 왕은 망명시절 중국과 평양을 오가면서 정치활동을 할 때 김일성 주석이 시아누크 왕에게 평양에서 편히 쉴 수 있도록 특별한 별장을 제공해 줄 정도로 북조선과 관계는 아주 친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국의 헤리티지 재단연구소의 아시아 전문가 데이나 딜린은 캄보디아의 시아누크 왕이 김일성 주석과 절친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대하여 관심을 가지면서 말 하기를 <두 지도자의 친분 관계는 두 나라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라고 논평 한바도 있다.

시아누크 왕은 지난 2004년 8월에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캄보디아 최고의 훈장 2개를 증정할 정도로 북조선과 캄보디아의 관계는 일반적인 국제관계 보다 아주 밀접한 관계로 이어져 왔다. 시하누크의 아들, 시하모니에게 왕위를 이어 준 것도 북조선 지도자의 자문과 방조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캄보디아 왕가와 정치지도자들은 북조선을 마치도 형제의 나라로 생각할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보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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