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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민경석 교수, <통일은 우리시대 우리민족의 지상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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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9-01-18 02:46 조회2,9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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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이용식/김봉호 편집위원]17일 오전9시 시내 제이제이 그랜드호텔 강당에서 열린 <<자주평화통일
시국대토론회>>는 진보인사들은 물론 보수계 인사들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이날 토론회는 오전에는 우리 말 토론회,
오후에는 영어로 발표하는 토론회가 하루 종일 진행되었고, 오후7시에는 강연회가 진행되었다. 재미동포전국연합회와
6.15미국위원회 공동주최로 개최되었다. 양은식 박사의 사회로 진행된 토론회는 윤길상 목사의 인사말에 이어 주제
강연자들의 발표가 이어졌다. 오전 대토론회 제1주제발표한 민경석 교수의 <<통일은 우리시대, 우리 민족의 지상명령>>
발표전문을 아래에 전재한다.

<##IMAGE##>
타이틀은 여기에 들어가니 좋은 기사를 넣어주세요.




통일은 우리 시대 우리 민족의 지상명령이다:
통일의 필요성에 대한 민족의 의식 개혁과 합의 도출을 위한 몇 가지 성찰


민경석 (클레어먼트 대학원 신학 교수)


1. 문제의 두 가지 종류

<##IMAGE##> 통일의 절박성을 통감하는 모든 이 들에게 대단히 절망스런 사태의 진전이 있다면 그 것은 지난 일 년 동안의 이 명박 정부의 행태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을 경멸하는 언동, 상호주의 고집, 유엔에서의 북한 인권문제 채택 서명, 적극적 접근노력의 부족, 등 일련의 행동을 통하여 지난 일 년은 남북 관계에 있어서 지난 10년의 모든 진보적 업적을 상쇄하고 김영삼 정권시대로 돌아가는 느낌을 금할 수 없다. 역사를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서 또 하나의 안타까운 사실이 있다면 그 것은 2000년 10월 클린턴 행정부의 얼브라이트 국무장관의 평양방문과 북한의 제2인자 조명록 특사의 백악관 방문으로 고조되었던 조미관계의 해빙과 그 것이 내포했던 통일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부쉬 정권의 등장으로 몇 주일 사이에 완전히 산산조각이 낫던 대단히 암울한 기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두 가지 사실에서 통일 활동가들이나 정치학자들이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그 것은 무엇일가? 그 교훈은 지금 통일을 염원하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청하고 있는가?



본인의 의견으로는 그 교훈은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여론과 국민의 지지를 얻어 정권의 연속성을 획득하지 못하면 실천적인 효과가 없다는 것이고, 이 것은 동시에 현재의 통일 활동가들이나 정치학자들에게 정책의 개발 뿐 아니라, 그런 정책을 지지하고 궁극적으로는 그런 정책을 살지 않으면 아니 되는 국민의 여론 형성, 국민의 의식 교육, 국민의 합의 도출에 특별히 유념해야 된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그런 합의 도출이 어느 정책보다도 통일 과업의 완수에 가장 결정적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정치학자들이 아무리 기발한 정책을 고안한다 하더라도, 또 정치인들이 아무리 훌륭한 정책을 실천한다 하더라도 국민의 지지나 그에 상응하는 의식화가 없다면 그 것은 허망한 이론에 불과하다. 정권이 바뀌면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통일의 궁극적 주체는 통일 활동가들이나 정치학자들이 아니고, 대통령이나 통일원 장관도 아니며, 오직 국민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본인은 모든 정치적 문제에는 그 개별적 내용의 차이를 떠나서 근본적으로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한 가지는 해결돼야 할 문제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누가 그 것을 해결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첫째는 해결돼야 할 대상 또는 과제(agenda, things to be done)에 관한 문제들이요, 둘째는 그런 과제들을 해결할 주체 (agents, subjects)에 관한 문제들이다. 그런데 과제로서의 문제들을 파악한다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신문 방송의 여러 가지 토론을 통하여, 또 학자들이나 정책 실무자들의 분석과 대화를 통하여 무엇이 과제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진짜 문제는 이 문제의 해결을 실천할 주체를 어떻게 찾아내어 그 들을 교육시키고 그 들에게 권력을 주느냐 하는 것이다. 무엇을 문제로 생각하느냐, 그런 문제의 내용과 크기에 맞는 권력을 어떻게 갖다 주느냐, 또 그런 문제가 해결될 때 까지 어떻게 인내하고 희망을 갖게 하느냐 하는 문제는 바로 주체에 관한 문제요, 본인은 이런 종류의 문제가 모든 문제들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객관적으로는 어느 것이 시급히 해결돼야 할 과제라 하더라도 해결의 권한을 갖고 있는 주체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다면, 또 그런 문제의식이 전혀 없다면 그런 과제의 해결은 요원할 뿐이라 할 것이다. 문제의 해결은 무엇이 문제냐 하는 것을 아는 것에서 시작하여 한 걸음 나아가서 그 것이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 문제 해결에 맞는 실천과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주체들을 찾아내어 교육하는 것 까지 포함해야 한다. 해결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문제를 분석하고 나열하는 것 만 으로는 불충분하다. 현금의 많은 정치 토론을 보면 유감스럽게도 주체의 문제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우려된다.



문제에 관한 이 구별을 통일 문제에 적용시켜 보자. 통일에 관한 과제로서의 문제들에는 대강 이런 것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경색된 남북 관계를 어떻게 복원할 가? 어떻게 이산가족 상봉을 정례화 하여 한 분 한 분 세상을 떠나고 있는 이산가족들의 한을 풀어 줄 가? 북한의 비핵화 문제는 어떻게 풀 가? 금강산 관광은 어떻게 재개할 가? 개성공단은 어떻게 다시 활성화 할 가? 앞으로 남북의 경제 협력을 어떻게 촉진할 가? 어떻게 북남의 문화협력을 증진하여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할 가? 북남의 대표부를 평양과 서울에 설치하는 것은 언제 쯤 가능할 가? 조미 평화 조약은 언제쯤 체결될 수 있을 가? 남북의 상호군축은 어떻게 추진할 수 있을 가? 연방제의 제일 단계는 언제 쯤 가능할 것인가? 대체로 이런 문제들이 신문이나 전문가들 사이에 토론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문제들이 쉬운 문제가 아니면서 또 대단히 중요한 문제들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 중에 언급되지 않으면서도 이런 문제들의 해결을 어렵게 만드는 문제가 있다. 이 것은 바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주체들의 문제다. 누가 이런 문제들을 우선 문제로 인식하고 문제의 절박성을 고민하면서 그 것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할 수 있는, 다시 말하여 문제를 해결할 주체들인가? 보통 생각해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주체는 바로 정부의 실권자들이요 저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치인들, 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부의 실권자를 선택하는 것은 결국 국민들의 몫이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 국가에서 문제 해결의 제일차적 주체(primary agent)가 정부라고 한다면, 국민은 그 궁극적 주체 (ultimate agent)라고 할 수 있다. 정부를 선택하는 것도, 정부를 감시하는 것도, 정부를 지지하고 격려하는 것도 결국은 국민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를 보면 국민의 수준을 능가하는 정부는 없다. 그 국민에 그 대통령이요, 그 국민에 그 국회요, 그 국민에 그 여론이다. 박정희를 지지한 것도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뽑은 것도 결국은 국민들이다.



통일 문제와 관련하여 통일을 간절히 염원하는 많은 이 들에게 지난 일 년 동안의 이명박 정부의 행태는 바로 주체의 문제가 문제 해결에 얼마나 결정적인지를 알려 주고 있다. 그 동안 이명박 정부의 여러 행태를 보면 도대체 통일을 원하는지 안 원하는지 의문시 될 정도로 그 통일관이 불분명할 뿐 더러, 통일관이 있다면 그 것은 북한 정권의 붕괴를 은근히 기다리면서,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 하의 흡수 통일을 바라는 소극적, 계급주의적, 반민족적 통일관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명박 정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왜냐 하면 이명박 정권을 선택한 것은 결국 대한민국 국민들이기 때문이다. 국민들 중에는 많은 이들이 아직도 이명박 정부의 자본주의적, 반공주의적, 대결주의적 해결 방식에 지지를 보내고 있고, 이 것이 바로 한나라 당에 대한 지지로, 박근혜에 대한 지지로,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로 표현되고 있다.



이 것은 바로 한반도 통일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볼 때 통일정책이나 통일에 대한 기교의 문제가 아니고, 통일의 절박성과 통일의 민족적 의미에 관한 가치관과 의식의 문제라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그리고 이 것은 따라서 통일을 염원하는 진보 세력들이 얼마나 통일문제에 관하여, 통일의 절박성에 관하여, 통일의 민족적 의미에 관하여 국민의 의식 개혁과 민족적 합의 도출, 여론 조성에 특별히 유념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남북통일의 문제는 6자 회담이나 국제정치적 역학의 문제이기 전에 국내 정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진보세력은 유감스럽게도 통일의 긍극적 주체인 국민의 의식 개혁이나 사회적 합의 도출을 소홀히 하지 안 았나 우려된다. 통일 문제 있어서 지난 김대중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은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통일의 타당성과 절박성, 그리고 통일의 민족적 의미를 홍보하고 여론을 주도하는 데, 다시 말하여 궁극적 주체인 국민을 이념적으로 형성하고 양육하여 통일의 기반을 축적하는 것을, 게을리 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권이 바뀌자마자 남북관계는 다시 대결 구도로 전환되지 않았는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통일은 오늘 내일에 당장 이뤄질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통일에 대한 우리의 접근 방식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한 가지는 사건위주의 즉흥적 접근 방식이요, 또 한 가지는 가시적 조치위주의 정치적 접근 방식이다. 통일 문제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도 이제는 보다 성숙하고 보다 포괄적이고 보다 원시안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이 것은 통일의 궁극적 주체인 국민들에게 통일의 타당성, 절박성, 평화적, 민족적 접근의 필요성을 설득함으로서 통일의 장기적 기반을 확립하는 것을 포함한다.



통일의 궁극적 주체가 국민이라고 하는 말에는 아무리 좋은 통일 정책도 국민의 지지가 있어야 된다는 뜻 이외에 더 중요한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 것은 통일정책을 지지하는 것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통일의 현실을 사는 것도 국민이라는 뜻이다. 국민의 마음과 머리가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설혹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그 것은 외부로부터 강요된 통일이요, 그런 통일은 외부로 부터 강요된 분단 못지않게 혼란만 가져 올 뿐이다.



우리는 이미 60년 이상을 상이한 체제에서 살아 왔을 뿐 아니라 서로 죽기 까지 싸웠던 민족이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그 때의 원한을 잊지 않고 있다. 남한의 여론은 아직도 반북, 친미, 친자유주의의 사고에 빠져 있는 대다수의 보수파들과 민족 화해와 통일, 사회정의를 부르짓는 소수의 진보파들로 깊이 분열되어 있고, 이런 사실은 중요한 사건이 터질 때 마다 표면화 하곤 한다. 작년의 촛불 시위 사태를 보면 아직도 남한 사회를 분열시키고 있는 이념적 충돌의 깊이를 알 수 있다. 총 칼이 없어서 그렇지 총 칼이 있기만 하다면 서로 총질, 칼질하기에 충분할 만큼 남한 사회는 깊이, 깊이 분열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민족이 준비 없이 외부의 강요에 의하여 통일이 된다면 그런 사회가 얼마나 불안하고 얼마나 혼란스러울지는 너무나 자명하다. 남북의 통일은 우선 남남의 통일을 요청한다.



북남의 통일은 헌법의 일부 조항을 고치거나 대통령을 새로 선출하거나 하는 정도의 변화가 아닌, 우리 삶의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그 것은 경제제도의 통일, 정치체제의 통일, 문화, 사상의 동질성의 회복 등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변혁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더 큰 준비를 요구한다. 통일된 조국에서에 삶이 즐겁고 평화적이기 위하여도, 다시 말하여 통일이 분단보다 더 나은 사회를 가저 오기 위하여 국민의 마음과 머리를 준비시키는 작업은 통일과제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결정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이 혁명 보다 더 어렵다는 말이 있다. 어떻게 보면 어떤 특정한 통일 정책의 실천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 바로 국민의 마음과 머리를 준비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하한 통일도 국민이 지지하고 또 무엇보다도 국민이 살 수 있는 통일이어야 한다.



본인이 지금 까지 한 말은 남한의 통일 진보 진영의 정치인들과 학자들에게 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남한 동포들은 통일의 절박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을뿐더러 민족보다도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를 더 중요시하고 있다. 그리고 6.25에 대한 암울한 기억과 더불어 북한체제에 대한 원한과 증오를 아직도 되새기고 있다. 본인은 나머지 글에서 바로 이런 남한 동포들에게 두 가지의 호소를 통하여 통일에 대한 국민적 합의 도출에 기여하고자 한다. 하나는 정치적, 경제적, 민족주의적 이유를 들어 민족의 통일이 우리 시대 우리 민족의 지상명령임을 호소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런 지상명령을 수행함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는 공산주의에 대한 원한과 북한 체제에 대한 절대적 부정을 새로운 역사이해를 통하여 극복할 것을 호소하는 것이다. 이 것은 공산주의를 수락하거나 북한 체제를 지지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해하라는 말이다.



2. 통일은 꼭 해야 되나?



이 질문은 어떻게 보면 가장 자명한 것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질문인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같은 민족이니까 통일하는 것이 당연하다, 또 한 때 같은 나라였으니까 통일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통일을 하려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런 대가를 정당화하기에는 이런 대답은 너무 추상적이고 감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통일이 왜 절박한 것인지, 통일이 왜 이 시대 우리 민족의 지상명령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지금의 많은 젊은이들은 통일 없이도 그 동안 잘 살아 왔고, 다른 산적한 문제도 많은데 통일을 왜 굳이 해야 하는지 질문하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또 아직도 6.25 전란의 원한을 씻지 못한 많은 우리 세대의 사람들이 평화 통일 보다는 무력통일, 흡수통일을 주장하고 있고 이 것은 곧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직도 피에 맺힌 원한에도 불구하고 통일을 해야 할 지상명령은 무엇인가?



본인은 여기서 통일의 필요성에 대해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민족주의적의 세 가지 이유를 들고 싶다. 첫째로 경제적인 이유를 들어 보자. 여기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



(1) 북남의 군사적 대치 상황은 2007년 한 해에만 그리고 남한에만 250억불의 군사비 지출을 요구함으로서 막대한 예산의 낭비를 가져오고, 북한의 국방예산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비록 남한의 그 것 보다 작더라도 국가의 총 수입에 차지하는 비중은 남한 보다 훨씬 더 클 것은 분명하다. 그 만큼의 큰 예산이 한 두 해도 아니고 지난 몇 십 년 동안 보다 생산적인 용도에서 제외됨으로서 남한에서나 북한에서나 보다 건설적인 국가 발전을 크게 저해하여 왔음은 분명하다.



(2) 또 남북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은 경제 발전이 아무 때라도 중단될 수 있음을 의미함으로서 경제적 불안을 가중시키고 경제 발전을 저해한다. 지금도 150 마일 휴전선에는 몇 십만의 양쪽 젊은이들이 최첨단의 무기로 무장하고 서로를 위협하고 감시하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우발적이던 고의적이던 서해안에서 또는 휴전선에서 총성이 울리기 시작한다면, 외국자본은 순식간에 한국을 떠날 것이고 그 파급 효과는 얼마나 클지 상상도 하기 어렵다. 이 것은 결코 가상적인 것만이 아니다. 남북의 극단적 대결구도에서는 언제나 현실화할 수 있는 악몽이다.



(3) 무엇보다도 남북의 분단은 남과 북의 뛰어난 창조력과 노동력, 그리고 자원이 서로 협력할 때 생기는 엄청난 국가이익, 즉 엄청난 국제적 경쟁력의 제고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남한의 국제 경쟁력은 줄어들고 있다. 북한의 저렴하면서도 우수하고 훈련된 노동력과 북한 시장의 확장을 통한 내수의 촉진은 우리가 처한 국제적 경제 위기에 대한 점진적으로 더욱 절박한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정치적 이유를 들어 보자. 남북의 대치상황은 과거 50년의 역사가 증명하듯 안보의 정치학이 모든 것에 우선하였고 이 것은 곧 세 가지 의미에서 민주정치의 철저한 억압과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첫째로 안보의 정치학은 모든 비판을 억압함으로서 정권을 연장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국가 안보의 이름으로 무고하게 감옥에 가고 때로는 생명을 잃었든가?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는가? 이 것은 우리가 너무나 지긋 지긋하게 경험하여 온 바라고 할 수 있다. 수치스럽게도 1948년 12월 1일에 제정된 국가 보안법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어 언제나 정권의 억압 수단으로 이용될 소지가 있으며, 실제로 송두율 교수의 경우에서처럼 악용되었다. 지금도 대통령이나 검찰총장이 국가의 정체성을 논하고 좌익색출을 논한다는 것은 안보의 정치가 항상 정권의 필요에 따라 재생산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한나라당의 반대로 국가 보안법이 수정도 되지 않은 채 그대로 법으로 남아 있음은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수치라고 아니 할 수 없고, 이 것은 또 남북의 분단이 남북의 분단 만이 아니고 남한 자체의 정치적 분단까지도 불러 왔음을 말하는 것이다.

(2) 둘째로 안보의 정치는 정권에 대한 모든 비판과 반대를 국가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불법화함으로서 경직된 반공 이념이외의 모든 정치적 가능성을 부정하고, 따라서 긍정적, 건설적, 창조적 정치적 상상력을 고사시키고 정치적 사고와 정책의 빈곤을 초래하였다. 경직된 자유민주주의 이념 이외에 민족의 보다 희망적이고 사회적으로 절박한 공동선의 탐색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듦으로서 정치의 황무지를 갖어 왔다. 가난한 이 들을 위한 모든 복지 정책은 사회주의로 단죄되어 발설하기도 어려웠다.



(3) 셋째로 안보의 정치는 당대 자본주의의 종주국인 미국의 반공주의적 제국주의에 완전히 예속되어 남한을 미국의 속국으로 전락시켰고 국제 무대에서도 미국의 앞잡이로 만들었다. 아직도 미국이 한국의 젊은 이 들을 전쟁터로 보내라면 보내야 되고 미국의 장성이 한국군의 통수권을 행사하고 있다. 민족의 정치적 자주성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셋째로 민족주의적 이유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남과 북이 같은 민족이 아니고 다른 민족이라면, 아무리 경제적, 정치적 대가가 크더라도 서로 평화조약을 맺고 건설적 외교 관계를 통하여 서로 협력이나 하면 됐지 구태여 한 나라로 통일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싫던 좋던 한 민족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신라의 삼국 통일 후 적어도 천 삼백년 동안 같은 혈통, 같은 언어, 같은 문화 속에서 생활하였고 그 결과로 우리는 같은 운명 공동체로서 깊은 유대, 끈질긴 인연을 다져 왔다.



(1)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적으로는 우리는 반세기의 장구한 세월을 통하여 같은 핏줄끼리 사이에 원한과 소외의 관계만을 엄청나게 조장하여 왔고 반공주의의 이름으로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도 서로를 더 증오하고 불신하는 불행을 겪어 왔다. 나이 60이 넘은 사람들은 6.25 이후로 너무나 자주 불러 지금도 외우고 있는 노래가 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맻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지금도 흥얼 거리며 이 노래를 부르다가도 이 노래의 뜻을 가만히 생각하다 보면 충격을 받을 때가 있다. 이 노래는 북한의 형제들이 “원한이야 피에 맻힌 적군“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2) 뿐만 아니라 남북의 분단은 민족 역량의 분단이요 이 것은 곧 국제적 경쟁력의 분단을 의미한다. 이미 19세기 말엽의 무자비한 국제적 경쟁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 분열하여 국가의 총체적 허약을 자초함으로서 일본의 침략을 초래하는 민족적 비극을 겼었고, 20세기 전반기에는 미소에 의한 분단으로 나라가 둘로 갈라지는 비운을 겪었다. 동북아의 역사에서, 또 세계의 역사에서 우리는 굴욕을 당할 만큼 당했다. 조금이라도 같은 민족으로서의 긍지를 느낀다면 하루 빨리 통일을 이뤄 민족의 뛰어난 창조력, 노동력, 그리고 자원을 통일시켜 민족의 한을 풀고 국제 사회에서 민족의 긍지를 되찾고자 하는 데 반대할 사람이 있을까? 또 이 것보다 더 절박한 과제가 어디 있을까? 우리의 창조력과 노동력과 자원이 통일 된다면, 비록 중국이나 일본을 완전히 따라가지는 못해도 적어도 저들이 무시 못 할 만큼의 국력은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무한 경쟁의 비정한 국제 사회에서 굴욕과 천대를 당하지 않고 떳떳하게 살아가려면, 남과 북이 통일하여 국력을 신장하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국력의 통일 없이, 민족의 단합과 단결 없이 민족의 자주성과 정체성은 보전할 수 없다. 제국주의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필수 조건은 국력을 배양하는 것이고 그 것은 곧 국력배양의 최대 장애물인 남북의 분단, 다시 말하여 국력의 분단과 불필요한 낭비를 극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통일의 이유로서 이보다 더 절박한 이유가 어데 있을까? 우리 시대 우리 민족의 지상명령은 북남의 통일이요 화해임에 틀림없다.



3. 민족의 분단과 상호체제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이해: 원한을 넘어 화해에로 가는 길



그러나 지금 제시한 통일의 절박성과 이유의 설득력에는 한계가 있음에 틀림없다. 통일의 경제적 이유는 실용주의에 호소하기 때문에 이념에 집착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지닐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적 이유나 민족주의적 이유는 아직도 6.25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많은 이 들에게는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정치적 이유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믿는 이들에게만 신빙성이 있는데 반공주의 신봉자들에게는 북한은 가장 억압적 독재적 공산국가요 따라서 남한의 민주주의에 대한 걱정보다도 북한의 공산 독재를 더 걱정하라고 대답할 것이다. 또한 그런 이들에게는 민족주의적 이유도 통할 리 만무하다. 민족보다는 자유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들과의 대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북한 동포들과 통일에 대하여 대화할 수 있을 만큼 북한에 대한 저들의 적개심을 완화하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통일에 관한 북남의 대화는 첫째로 북남이 과거 60년 동아 축적되었던 상호 적개심을 버리고 서로 용서하는 것과, 둘째로 대화의 상대로서 북한 체제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남한의 반공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 공산주의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북한의 공산당들은 잘 사는 이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교회를 폐쇄하고 종교의 자유를 부인하고, 많은 죄 없는 이들을 인민의 적으로 몰아 죽이지 않았는가? 또 남쪽에서는 반란과 폭동을 주도하고, 심지어 동족 상잔의 전쟁을 일으켜 삼천리 금수 강산을 피로 물들게 하고 민족의 재산을 잿더미로 만들지 않았는가? 지금도 저들은 인민들을 얼마나 억압하고 있는가? 어떻게 저들을 용서하란 말인가? 어떻게 저들과 통일할 수 있는가? 그 것도 저들이 전쟁을 일으킨 죄에 대한 용서를 먼저 빌면 모를가? 남한의 많은 동포들이 가지고 있는 원한은 참으로 깊은 것이다.



이 깊고 깊은 원한과 마음의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 들은 북남의 분단과 6.25를 겪은 세대들이 살아 있는 한 통일은 어렵고 따라서 저들이 사라질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통일을 반대하는 세력들만 이 살아진다는 것이 아니고 저들과 함께 통일을 걱정하는, 그런 원한에도 불구하고 통일을 열망할 수 있을 만큼 북한 동포와의 민족적 일체감을 느낄 수 있는 마지막 세대도, 동시에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세월의 흐름을 무조건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다. 남북의 분단과 6.25를 겪었던 우리세대가 사라지기 전에 통일의 전기를 마련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에 대한 적대감과 원한을 초극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원한을 극복하여 용서하고 화해하는 데는 두 가지의 전제가 있다. 한 가지는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서로 양보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다. 과거의 일이니 무조건 잊으라거나, 종교적인 동기에서 원수라도 용서하는 정신으로 화해하라고 하는 것은 별로 현실성이 없다. 우리에게 그 많은 고통을 안겨준 그 참혹한 일들을 어떻게 잊으라는 것인가? 그리스도교에서 원수도 사랑하라는 말은 아무나 다 실천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닐뿐더러 그 사랑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다. 원수 사랑이 가능한 것은 원수 안에서 그 저 나를 못살게 군 또 하나의 인간을 보지 않고, 나에게 나쁜 짓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고통 받고 계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 어버이의 아들, 딸, 그리고 서로 서로의 형제들 발견하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너와 나는 원수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둘 다 죄 많은 인간들이요 또 서로의 형제, 자매들이다. 원수 사랑은 우리를 원수로 만드는 사실을 망각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고,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사실의 의미를 예수님과 하느님에 대한 신앙 안에서 보다 높은 차원의 상호 유대를 발견함으로서 새롭게 해석하고 승화시키는 데서 가능해 지는 것이다. 그 것은 무조건 사랑이 아니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의 새로운 유대로의 승화를 통한 근거 있는 사랑이요 화해이다.



그러면 우선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 들이자. 8.15 이후의 극심한 좌우 충돌 기간에, 또 6.25 전쟁 기간에 우리가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한 것은 모두 엄연한 사실이다. 죽임을 당한 사람들, 재산을 몰수 당한 사람들, 투옥되어 고통을 겪은 사람들, 모두 억울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국 동포치고 이런 일을 당하지 않은 가족이 어디 있을 가?



그런데 이념적 차원에서만 머문다면, 이런 원한을 극복할 방도가 없다. 반공주의 차원에서 보면 이 모든 죽임과 고통의 책임은 북한 공산주의 정권에 있고, 북한 공산주의 차원에서 보면 남한의 우익정권과 그에 아부하는 지배계급에 있다. 이념적 차원에서만 머물면 문제의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상대에 대한 책임 추궁과 저주만이 있을 뿐이다. 이념적 차원에서 상호 용서란 불가능 하다.



그렇다면 60년 동안 축적된 원한을 용서와 화해에로 승화시킬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충돌과 상잔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그 역사의 의미를 승화시켜 새로운 일치와 유대를 발견할 수 있는 객관적, 새로운 역사 해석은 가능한가? 본인은 역사의 새로운 해석이 가능할뿐더러 그 해석은 우리 모두에게 보다 높은 차원에서의 새로운 유대를 제공함으로서 상호 용서와 화해의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그리고 우리가 과거의 원한과 대립을 초극하는 방법은 바로 이러한 역사의 새로운 이해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역사의 새로운 해석은 무엇인가? 여기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분단의 이유부터 기억해 보자. 우리는 남북통일의 절박성을 따지기 전에 왜 우리 민족이 분열되어 통일을 논하지 않으면 아니되게 되었는지 먼저 반성할 필요가 있다. 통일은 분단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왜 분단되었는가? 분단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 점에 있어서 현금의 논의를 보면 통일 정책에 대한 논의는 많아도 분단의 원인에 대한 반성은 별로 많지 않음은 유감스러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 것은 아마도 분단의 원인은 제2차 대전 후 미소에 의한 한반도 분점이라는 널리 알려진 사실에 기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것은 분단문제에 대한 대단히 안이한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이 것은 모든 것을 외부적 조건으로만 설명하고 그러한 빌미를 제공한 우리 민족자체내의 분열과 책임에는 눈을 감는 단견이 아닌가 우려된다. 이 것은 남북분단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책임을 부인하기 위하여 하는 말이 아니다. 그 것은 오직 남북 분단 같은 큰 사건의 배후에는 민족외적인 이유뿐 아니라 민족내적 이유도 작용하였으리라는 역사적 설명의 상식을 존중하고, 그러한 내적 이유의 분석을 통하여 민족 자체의 약점과 책임을 반성하고 그러한 약점이 지금도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그러한 약점이 지금도 존재한다면 어떻게 거기에 대응하여야 할지를 성찰함으로서 앞으로 닥아 올 통일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필자는 비록 국사 전공자는 아니지만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을 기초로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다음의 설명이 신빙성이 있지 않을 가 생각한다. 본인의 생각으로는 미소가 진주하여 한반도를 남북으로 가르기 전에 우리 민족은 이미 내적으로 분열된 민족이었고 미소의 진주는 이미 존재하는 민족의 내적 분단을 외적으로 더욱 공고히 한 것 뿐이다. 이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조 말엽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않 된다. 19세기는 서양의 여러 식민주의 세력들이 극동을 침범하기 시작한 시기였고 이에 따라 일본은 재빠르게 서양의 기술문명을 받아드렸으며 중국과 조선은 그렇지 못하고 저 들 앞에 또 일본 앞에 굴복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외세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지배계급들은 시대의 징조를 읽지 못하고 민족의 공동선을 외면한 채 권력과 이익을 위한 당파싸움, 학파싸움, 가문싸움, 족벌싸움, 등에 몰두하여 국가의 총체적 허약을 초래하였고 급기야 경술합방의 민족적 수모를 겪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러나 어떤 다른 요소보다도 민족의 분열에 가장 큰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조선 민족이 10%의 양반 지배계급과 90%의 중인, 상놈으로 나뉘어 잘사는 이와 못사는 이들로 갈라지고 그러한 제도를 국가권력으로 유지하여 온 제도 악이라고 할 있을 것이다. 1812년의 홍경래 난을 위시하여 1813년의 제주민란, 1862년의 삼남지방의 농민들의 봉기, 그리고 1894년의 동학란에 이르기 까지 19세기의 조선반도는 가난한 백성들의 한과 분노로 가득 찼고 조선 민족은 이미 극소수의 지배계급과 대다수의 가난한 민중들로 분열되었다. 그리고 동학란으로 표현되는 이런 분열이 또한 외세의 간섭의 빌미를 주어 처음에는 청군이 다음에는 일본이 조선에 진주하고 결국에는 조선을 점령하게 되었다. 민족의 분열과 총체적 허약이 망국을 초래하고 말았다.



게다가 20세기 초반에는 가난한 이들과 노동자들의 조직적 혁명을 통한 계급타파의 열기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었고, 한반도에도 그런 운동이 도래할 것은 오직 시간 문제였으며, 또 실제로 도래하여 1925년에는 조선 공산당이 조직되기에 이르렀었다. 그리고 소수의 지주들과 신흥 자본가들을 포함한 지배계급과 소작인, 노동자, 도시 빈민들을 포함한 대다수의 민중들로 민족의 분열은 심화되어, 미소 양군의 진주가 없었더라도, 또 진주가 있기 훨씬 이전에, 조선 민족은 이미 크게 내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분열은 해방 직후 6.25에 이르기 5년 동안 한국 사회를 휩쓸었던 여러 사건들에 잘 나타나 있다. 대량 실업, 물가 상승, 노조들의 빈번한 전국 총 파업, 좌우익의 유혈충돌, 정치, 경제, 노동, 교육, 문화 모든 면에서 좌우익의 분열, 1948년 4월 3일의 제주도 사건, 300여명의 사망자를 낸 5.10 선거, 남북의 독립정권 수립, 10월 20일의 여수, 순천 사건, 3차에 걸친 대구 반란 사건 (11.2 - 1949. 1.30), 국가 보안법 제정, 지리산, 태백산, 오대산 중심의 유격전, 한국전쟁 발발당시 수만 명의 국민보도연맹원 학살, 그리고 수백만의 사상자를 낸 동족상잔의 한국전쟁 등은 당시의 한국 사회가 얼마나 내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는가를 극적으로 알려 주고 있다. 이런 현상들은 근본적으로 소수의 지주계급과 민족 대다수의 가난한 농민, 노동자로 분열되어 있던, 다시 말하여 극심한 빈부의 차이로 이미 분열되어 있던, 한국 사회의 근본적 모순이 겉으로 나타난 것 일 뿐이며 6.25 전쟁은 그런 모순의 정치적, 군사적, 사회적 표현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민족의 역사적 선택은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한 사회는 우익 독재를 통하여 가난한 이들의 조직적 저항을 억압하거나, 혁명을 통하여 저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회주의 정권이 출현하거나, 또는 한반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것처럼, 자본주의 국가와 공산주의 국가로 나뉘는 길 밖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것은 현대 세계사에서 너무나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는 사실이다. 여기에 당대의 미소 양대 진영의 경쟁과 대결이라는 국제정치적 맥락을 첨가할 때, 민족 분열의 정치적, 영토적 표현, 즉 민족의 분단은 거의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정의와 민주적 절차를 통하여 빈부의 차이가 해소될 수 없었을 바에야, 차라리 두 나라로 갈리는 것이, 오히려 한 나라 안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것 보다 더 낳은 역사적 안배였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여 정치적 민족분단의 책임은 미국과 소련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책임의 대부분은 잘사는 극소수와 가난한 대다수로의 분열을 야기한 우리 민족 자체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분단 상황 속에서 일어낫던 좌우익의 충돌과 6.25의 발발을 그저 남북의 대결이나 미소의 대결이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념적 대결로만 보는 것은 대단히 피상적인 관찰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런 관찰은 좌우익의 대립과 남북의 충돌의 궁극적 원인이 되는 빈부의 대립과 민족적, 사회적 모순이라는 역사의 진실을 은폐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사회적, 이념적, 정치적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당대의 얼마나 많은 지식인들이, 또 얼마나 많은 젊은 이 들이, 또 얼마나 많은 노동자, 농민들이 소위 좌익에 투신하고 싸웠는가? 그것은 당시의 상황 속에서 볼 때 사회정의를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봐야 한다. 당시 미 군정의 비밀 여론 조사에 의하면 70%의 대중들이 좌익정권을 선호하였다고 한다. 남한의 어느 가족치고 형은 우익, 동생은 좌익으로 분열되지 않았던 가족이 있었던가? 빈부의 극심한 차이를 보였던 당시의 사회적 모순 속에서 많은 이 들이 정의의 편에 서서 극심한 빈부 차별의 철폐를 웨친 것이 무슨 잘못일가? 빈부의 극심한 차별이라는 민족의 역사적 구조악은 모른체 하면서 저들을 무조건 좌익분자로 단죄하는 것은 위선의 극치가 아닌가?



좌우익의 충돌을 슬퍼하고 누가 잘했다 잘 못 했다를 따지기 전에 우리는 빈부의 극심한 차이를 조장하고 대다수 민중들의 고통을 방조함으로서 민족의 내적 분열을 자초했던 우리 민족의 총체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이조 말엽부터 6.25 발발까지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빈부의 차이는 일차적으로는 그런 구조악에 동참하고 그 것을 지지했던 귀족계급의 탓이지만 그런 구조악에 반항하지 않고 그 것을 숙명으로 받아 들였던 대부분의 우리 선조들의 탓도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민족의 분단과 충돌은 빈부의 극심한 사회적 모순을 만들어 내고, 제국주의, 식민주의의 침략하에서도 서로 단결하지 못하고 분열에 분열을 거듭했던 우리 선조들과 이런 선조들의 무능과 무지와 편견을 그대로 답습해온 그 후예들, 다시 말하여 우리 민족 모두의 공동 책임임을 우리는 겸손하고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좌우를 크게 분리시킬 수 없다. 민족의 상호 대립과 투쟁은 어느 한쪽의 잘 잘못을 탓하기 전에 우리 민족 모두의 수치요 비극이며, 우리 민족 모두의 공동 운명이요, 따라서 우리 민족 모두가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공동의 과제라는 것을 양쪽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민족 공동의 비극과 운명과 책임 속에서 서로 만나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다. 그리고 상대방의 체제도 당시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는 불가피 했던, 따라서 역사적으로, 제한적으로 정당성을 지니는 체제로 수용할 수 있다.



따라서 민족 간의 적대적 대립과 충돌이라는 민족 모두의 비극적 상황과 역사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분명하다. 우리 민족 모두의 잘못으로 저질러진 사회모순 속에서 계속 서로 대립하여 민족의 역량과 자원을 낭비하고 주변 강국들의 장단에 맞춰 뇌화부동하던 19세기 말의 우리 선조들의 무능과 무지를 우리는 답습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정신 바짝 차리고 빈부의 극심한 차이와 민족을 분열시키는 다른 모든 요소들을 청산하고 민족의 역량을 통일로 결집하여 비정한 국제적 경쟁 속에서도 민족의 자주성과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노력할 것인가? 다시 말하여 과거의 민족분단과 상호 충돌의 역사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이나 원한을 더욱 조장하고 흡수통일이나 적화통일을 통하여 민족을 더욱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고, 민족적 유대와 일치 속에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면서 조속히 평화적 통일을 이룩하여 민족의 역량을 신장하는 것이 바로 우리 시대 우리 민족의 지상 명령임을 인식하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미국 오바마 정권의 한반도 정책이 어떻게 전개될지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아직도 미국의 영향권을 벗어 날 수 없는 우리 민족에 있어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의 변화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강대국의 눈치만 보는 소극적, 피동적 자세에서 벗어나 미국의 대통령이 누가 되더라도, 중국의 실권자가 어떻게 바뀌더라도, 한반도 문제 해결의 궁극적 주체는 우리라는 신념을 가지고 단합된 민족의 역량을 행사하여, 저들의 대한 정책 형성 자체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주고 대응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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