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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명 주필 강연]<오바마 시대의 개막과 북미관계 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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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8-12-23 09:27 조회3,22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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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명 유에스뉴스(Us News)주필은 지난 21일 재미동포동부지역연합회(이준무 회장) 총회 초청강사로 초대되어
<오바마 시대의 개막과 북미관계 정립>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해 참석자들의 감동적인 호응을 받았다. 그는 이날 강연을
통해 국제사회의 진보적 흐름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진단하고 남북관계와 관련하여 "언제까지 남북대결로 민족 에너지를
낭비해야 정신을 차리겠습니까?"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강연 전문을 싣는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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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오바마 시대의 개막과 북미관계 정립



*발표자: 이선명 US News 주필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저는 미국의 네오콘이 신자유주의라는 그럴듯한 기치를 내걸고 자본과 군사력을 휘둘러 아시아와 중남미,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제3 세계 국가들을 침탈하던 월 스트리트의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펜타곤의 군국주의 체제가 붕괴하고, 중국과 인도의 부상으로 전 지구적인 국제질서와 경제 체제의 재편을 통해 정의에의 접근을 모색하는 새로운 질서, 즉 민중들의 메인 스트리트 체제의 시대가 밝아오는 이 새 역사의 여명을 오늘 여러분들과 같이 맞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IMAGE##> 지난 11월4일 미국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의 당선이 확정된 이후 워싱턴과 파리 및 런던과 모스코바, 서울과 평양, 베이징과 도쿄, 뉴델리와 팔레스타인, 그리고 바그다드와 멕시코 시티, 리스본과 부에노스 아이레스 등을 위시한 미국과 세계의 주요 도시에서 타전되어 온 뉴스를 종합해 보면 전 세계의 민중들이 월 스트리트식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가 국제질서에서의 정의를, 그리고 사회 전반의 모든 계층에게 균등한 기회와 균등한 분배를 보장하는 새로운 경제체제와 민족국가들의 각기 상이한 전통과 가치체제 및 문화와 종교가 존중되고, 보장되는 새 질서, 새 시대의 도래를 기대하는 민중들의 희망이 마치 베스비우스의 화산처럼 분출되고 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계는 이제 더 이상 미국의 막강한 경제와 군사적 침략과 수탈의 위협 때문에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지난 대선에서 미국의 민중들은 미국의 네오콘들에게 영원히 회복이 불가능한 치명타를 가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한번도 투표를 해 본 적이 없는 국외자들까지 포함해서 수 많은 민중들이 뉴햄프셔에서, 뉴욕 주의 엎 스테이트에서, 펜실베이니어 주의 알리게니 산맥에 파묻힌 산동네에서, 콜로라도 주의 눈 덮힌 로키산맥에서, 분노의 포도를 따던 캘리포니아주의 모하비 사막에서, 그리고 조지아 주의 스톤 산, 테네시 주의 루크 아우트에서, 또 미시시피 강 연안에서, 그들의 염원과 기도를 담아 던진 표심이었습니다.

저는 1995년 KPI 통신의 워싱턴 특파원으로 부임하기 1년 전에 미국과 한국에서 동시 발간되던 월간지 <퍼시픽 라이프>의 주필로 초빙을 받고 시애틀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서북 지역을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는 웅장한 럭키 산맥을 배경으로, 평온한 푸제 사운드 해협을 바라보고 선 아름다운 도시 시애틀에는 저 광활한 우주에의 도전을 상징하는 "스페이스 니들"의 위용이 미답(未踏)의 천체(天體)에 새 지평을 열 기회를 탐색하고 서 있었습니다.

시애틀에 이주해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이 바로 이 스페이스 니들이었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이 첨탑의 꼭대기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전망대를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서 푸제 해협 저 멀리 북 태평양의 수평선에 펼쳐진 비경(秘境)의 섬들이 연출하고 있는, 마치 세잔느의 수채화 같은 한 폭의 아름다운 절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을 때 한 벽안의 안내원이 다가와 "동부에서 중부를 거쳐 서부의 북태평양 해안까지 진출한 미국의 개척자들이 이제 더 이상 개척할 땅이 없어 애석하게 생각하다가 지상의 개척지 종점에서 우주 개척의 새 지평을 열겠다는 의지를 모아 이곳에 스페이스 니들을 세우게 되었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 도시에 미국 우주 항공산업의 기함(旗艦)회사인 보잉과 컴퓨터 시대를 이끌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 사가 위치하고 있는 것 또한 시애틀이 개척자의 기상을 가지고 있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제3의 산업혁명이랄 수 있는 미국의 우주산업의 개척을 대표하는 도시 시애틀의 다운타운에서 1999년 11월 29일과 30일 대규모의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1960년대 월남전 반대시위 이래 가장 최대 규모의 시위로 시애틀 시 전체가 혼란에 빠지자 워싱턴 주 당국이 이 지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음모


<##IMAGE##> 이 대규모 시위는 이 도시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무역기구 WTO 각료회의를 무산시키기 위해 미국 전역에서 몰려온 비정부 기구 NGO들의 공동작전이었습니다. 미국의 소위 팍스 아메리카나에 기초한 신자유주의의 또 다른 이름인 세계화에 숨겨진 음모를 투시하고 이 음모를 널리 알리고 이를 저지하기 벌린 이 대규모 시위를 취재하면서 저는 이 사건이 바로 IMF를 내세운 미국 자본주의 세계적 경제 침탈을 끝장낼 수 있는 세계 인민들의 마지막 시민혁명의 예고편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장벽이 없는 자유무역, 통칭 세계화는 엄밀히 말해서 미국의 패권적 이익을 최대로 반영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전략입니다. 일부 국제정치 학자들은 이를 후기 제국주의라고 부릅니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제프리 하코트 교수는 "19세기말의 제국주의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나고 있다"며 미국의 세계화 정책을 "제국주의적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함정"이라고 경고한바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제국주의는 19세기 말, 미국, 독일, 일본 등 후발 산업국들이 인도와 중국을 비롯한 세계 전역에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한 영국의 선점(先占) 시장을 잠식해 들어가면서 지구상의 5대양 6대주에서 새로운 시장과 값싼 원료를 확보하기 위한 식민지 쟁탈전을 부추겼습니다. 이에 따라 일본과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은 한반도와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남미 등 세계 도처에서 살상과 압제, 무한 폭력과 수탈을 자행하면서 전지구적인 재앙을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는 단순한 주권침해, 폭압, 수탈 이상의 비인륜적 만행을 수반했습니다. 종교와 교육, 심지어 예술까지를 빌미한 제국주의의 "전도사들"은 세계 구석구석을 파고들어 "식민지의 미개인을 문명화시켜 주는 도덕적 의무를 실천한다"며 전통문화와 가치관을 파괴했습니다.

자본주의를 앞세운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체제는 두 번의 세계대전 과정에서 민족주의에 눈을 뜬 피압박 민중의 민족해방 운동으로 와해되었습니다. 그것은 역사발전의 필연이었습니다. 러시아의 볼세비크 혁명으로 점화된 봉건주의적 구체제에 대한 민중들의 투쟁은 마치 들 불처럼 전 지구를 휩쓸어 한 때는 드디어 억압과 수탈의 긴 밤이 막을 내리고 문명의 새벽을 밝아 오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제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구 소련과 더불어 세계를 양분해서 소위 자본주의 체제의 종주국이 된 미국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국주의적 이익을 추구하여 식민통치라는 칼을 들이대지 않고도 "자유시장과 "자유무역"이라는 이데올로기만 "전도"하면 충분한 초과이윤을 확보할 수 있고, 민족국가 개념을 희석시켜 강대국의 자본이 세계를 지배하는 후기 제국주의 시대를 주도하면서 세계는 또 다른 침탈의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후기 제국주의 하에서는 물리적인 힘에 의한 식민주의적 영토확장과 시장확대는 불필요할 뿐 아니라 비생산적이기까지 했기 때문에 미국의 자본은 약소 국가의 경제를 매판 경제로 전락시키는 작정으로 강권적 방법을 쓰지 않고도 세계 시장에 대한 독점적 통제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거대한 자본을 배경으로 한 금융 마피아들이 세계 시장의 독점적 통제를 행사하는 과정에서 제3세계 국가들의 시장을 좌지우지 교란시키자 이에 항거하는 운동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났습니다.


제2 십자군 전쟁



9/11 사건은 이러한 미국의 오만과 불의에 대한 즉 채찍이었습니다. 일본이 은자의 나라 조선을 침탈하고 수백만의 백의민족 조선인들을 태평양 전쟁의 총받이로 내몰고, 수십만의 순진무후한 조선의 처녀들을 성노예로 부려먹은 일본의 초대 조선통감 이토히로부미를 1906년 10월26일 하얼빈 역에서 쏴 죽인 안중근 열사와 같은 제3세계의 순국 열사들이 2002년 9월11일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을 타킷으로 삼은 것은 세계의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미국 자본주위와 아랍 세계를 도살장으로 만든 미국 군사력에 대한 응징이 그들의 목적이었음을 만천하에 선언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나 부시 정부는 미국의 잘 못된 대외정책을 사과하고 이 사건을 반면교사로 삼아 국제정치의 방향을 수정하는 용기를 보여주는 대신 이 사건을 빌미로 제2의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부시 부자의 이라크 침략전쟁, 이른바 제2의 십자군 전쟁은 1백50만의 인명의 살상을 자행했고 1천만 명에게 이산의 비극을 안겨줬고, 약 1억의 이슬람 교도들이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심어주었고, 전비의 과다지출은 미국의 월스트리트 경제체제의 붕괴를 가져온 직접적 원인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실 대자본과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세계를 지배하려던 월스트리트식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는 일찍이 칼 마르크스가 예견한 당연한 귀결입니다. 어쨌든 지금 세계를 휩쓸고 있는 이 금융위기는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새 정부 구성 과정에서 아니 심지어는 부시를 포함하여 런던과 파리, 본과 모스코바, 그리고 도쿄에서 정부의 적극적 개입에 의한 사태 수습에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미국의 시장경제주의자들이 금과옥조로 알고 있는 아담 스미스의 자유방임 시장경제에서 케인즈적 정부개입 쪽으로 선회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가 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에 무릎을 꿇은 것은 의미합니다.

소위 제1차 산업혁명 후 무산계급은 생산을 위한 한낱 노동의 도구로 전락하였으며, 자본가들은 이들을 제도적으로 착취했습니다. 더구나 종교가 인간의 비인간화의 수단으로 악용되던 19세기 자본주의의 혼탁한 물결에 익사하지 않으려는 인류의 몸부림은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는 사회를 지향하는 정치적 이상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 때 마르크스는 신분적 불평등과 사유재산에 의한 인간의 보편적 가치의 파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정치적 제도와 질서를 구축할 수 있다는 꿈과 낭만을 인류의 가슴에 심어 주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이때 자유의 구속, 노동의 착취, 빈부의 격차, 인간성의 파괴, 그리고 자본주의의 착취에 맞서, 민주주의의 허구에 대한 대안으로 인간이 계급의 신분적 제약에서 해방되기 위한 투쟁의 깃발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자유와 평등의 정치적 이상의 횃불로서 절망의 골짜기에서 신음하던 노동자들에게 희망에의 창을 활짝 열어 준 것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마르크스는 그의 스승 헤겔의 관념론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고 공격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마르크시즘의 이해는 그가 자본주의 타도를 외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월스트리트식 자본주의 체제가 몰락하고 있는 현재도 마찬가지 입니다.

통일운동, 혹은 통일에의 접근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그런 주관적 관점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서로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차이점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북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우리 통일운동권에서도 이 원칙이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같이 운동을 하면서도 나와 생각이나 접근 방식이 다소 다르다고 해서 적대시하거나 거리를 두는 것은 좋은 방법이 못 된다고 생각됩니다.

통일운동은 갈라진 땅을 서로 끌어다 붙이듯 그렇게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도 어울리고,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도 인간적으로 더 가까워지도록 노력하고, 자주 식사도 같이 하고, 심지어는 생각이 다른 친구가 다니는 교회에도 찾아가고,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통일운동입니다.

남과 북은 일란성 쌍생아입니다. 남한이 북이 밉다고 북을 때리는 것은 바로 남한의 자멸을 의미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이고 중국과 러시아가 버티고 있는 한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에서 볼 때 미국과 남한이 북한이 미워 때리려 한 들 그 건 무모한 짓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공존의 묘미를 찾아야 합니다. 지금 득세하고 있는 뉴라이트 등 남한의 수구세력들이 이 사실을 인식하는 게 현명한 일입니다. 남은 북이 대화의 상대이고 북은 남한이 대화의 상대라는 사실, 아니 좀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새 구도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서로가 파트너라는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언제까지나 남북대결로 민족 에너지를 낭비해야 정신을 차리겠습니까?

그리고 통일의 주체가 어느 정파나 주의가 아니라 서로 다른 체제에 살고 있는 동포라는 사실을 전제해야 합니다. 이것이 산의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자는 것이지요. 남한의 반통일 세력이 북한의 김정일 체제가 싫어서 통일을 못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무만 보고 숲을 외면하는 짓이요, 북한의 통일세력이 남한의 수구꼴통이 싫다고 대화를 꺼린다면 그 것 또한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격이 됩니다. 서로 상대의 체제에 살고 있는 나의 동포, 나의 형제자매와 동고동락하는 새 시대를 열겠다는 각오가 선행되면 차이점, 그 자체가 통일운동의 시너지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요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안티고네의 정리(定理)



저는 파리 특파원으로 활약하던 1973년 여름 독일에 인접한 아름다운 도시 스트라스부르그의 소극장에서 고대 그리스의 소포클레스가 쓴 <안티고네>라는 연극을 관람하고 큰 감명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소포클레스는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와 더불어 고대 그리스 3대 극작가 중 한 사람으로서, <안티고네>에서 그는 인간의 사회적 동물로서의 집체(集體)적 관계에서 형성된 의무와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가치추구 문제를 무대에 올려놓고 있었습니다.

이 드라마는 자신의 천부적 양심과 신념에 어긋나는 크레온 왕의 명령을 거부하는 주인공 안티고네가 겪는 주변 상황의 격동과 파장에 조명하여 우주적 가치체제, 즉 자연법의 질서에 기초한 인간의 양심과 윤리, 그리고 실정법에 근거한 전제적 체제의 상이한 원칙과 이해관계의 충돌에서 발생되는 비극을 다뤘습니다.

프랑스 극작가 J. 아누이는 이차대전 중 앙드레 지드, 지롱드, 장 꼭또 등과 함께 안티고네를 민족해방 레지스탕스의 상징으로 등장시켜 고대 신화를 그의 드라마에 재현했고, 독일의 시인 겸 극작가인 베르크홀트 브렉트는 그의 작품에서 안티고네를 평화주의자로 형상화했습니다.

안티고네는 인륜과 도덕, 그리고 인간의 양심과 정의를 타협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로 신봉하고, 이 같은 신념에 따라 그녀는 실정법과 충돌하는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안티고네가 경험주의를 배격하고 생명을 초월하여 불의와 타협하기를 거부한 인류 구원의 히로인으로 우리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류역사의 발전은 진리와 정의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전리품입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 프랑스의 7월 혁명, 미국의 독립운동, 링컨의 노예해방,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 그리고 우리 민족의 동학혁명, 3.1독립운동, 4.19학생혁명, 5.18광주민주항쟁 등은 모두 우주적 가치를 기초로 한 시대정신의 현시이며, 도덕적 우위에 기반한 이들 성전은 어떤 폭압도 결코 좌절시킬 수 없음을 역사는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 통일은 절대선입니다. 정권의 권위주의와 망국적 지역갈등과 경제정의 부재와 매판경제 등 현재 우리 조국의 남북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가 구조적으로 분단에서 연유되고 있고, 따라서 통일은 절실한 민족적 과제이며 하늘의 명령입니다.

벌써 17, 8년 전의 일이지만 평양축전에 참가한 임수경의 활동상을 담은 기록영화 "통일의 꽃"을 보면서 나는 안티고네를 연상했습니다. 그녀는 남한 정부의 북한방문 불허방침을 무시하고 가냘픈 소녀의 몸으로 골리앗과 같은 분단체제와 대결했습니다. 평양축제 참석 후 철창 행을 두려워하지 않고 판문점을 걸어서 넘어오던 그녀의 의연한 모습에서 나는 일제에 맞서 산화(散華), 저 하늘의 별들을 유영(游泳)하는 우리 민족의 잔다크 유관순의 높은 기상을 보았습니다.



민족애, 그 고결한 사랑



기록으로 남은 인류 최초의 시인인 고대 그리스의 시성 삽포는 사랑은 높은 가지 끝에 매달려 있어, 사람들의 손이 미치지 못한 빨간 사과라고 했습니다.

(신은 죽었다!) 라는 선언으로, 유럽 문명의 몰락을 예언한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초인," "권력에의 의지," "영겁회귀" 등의 작품을 통해 시적인 언어로 새로운 인간상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새로운 원칙들을 제시합니다. 그 가운데 한 예는 조로아스타교를 신봉하는 차라투스트라는 10년간의 산중 명상을 마치고 그가 터득한 새로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인간 세계로 내려옵니다. 그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저자를 서성거리며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실패합니다.

우리의 선조들에게도 사랑은 밤의 어두운 장막에 숨겨야 할 비밀스러운 코드라도 되는 것처럼 사랑의 표현을 금기시 했습니다. 그래서 고려의 참요에는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어느 집 며누리는 말도 많더라/ 어느 집 며누리는 낮에는 못 놀고/ 밤에나 실컷 놀아보세. 어럴럴 상사디야, 어럴럴 상사디야

이것은 사랑을 발랄하게 표현하는 행위 자체가 억압되었던 시절 이 노래는 우리의 할머니들이 쏟아내야 했던 깊은 자조의 한숨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타부시 되던 사랑의 코드가 20세기의 새벽과 함께 마치 현대의 신흥종교처럼 전 세계를 덮쳐왔습니다. 그래서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현대인은 신분과 전통의 굴레는 벗어난 대신 자유라는 막연한 선택들 강요받고 있다. 인간은 이제 자유라는 불확실성을 끝장내기 위해 사랑을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인기영화 <타이타닉>에서 여주인공 케이트 윈슬렛은 19세기식 상류사회의 위선과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천지 아메리카 대륙의 방문 길에 오릅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사랑을 발견합니다. 거대한 기성 질서를 상징하는, 20세기 초 인간의 지혜를 총동원하여 제조된 대영제국의 "자부심" 타이타닉 호는 첫 항해에서 침몰의 비운을 맞습니다. 그러나 타이타닉의 침몰도 케이트 윈슬렛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사랑은 침몰시키지 못했습니다. 그 동안 편협한 기존관념의 벽에 갇혀있던 은밀한 사랑의 코드는 마침내 포박을 풀고 자유를 쟁취하였으며, 20세기의 역사에 소위 페미니즘의 지평을 연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2년 전 저의 모교 서울대의 60주년 행사에 초청을 받고 서울을 방문했을 때 이 같은 세기적 추세인 여권의 신장이 한국에서도 삼강오륜에 꽁꽁 묶여있던 남녀간의 관계를 수직적 관계에서 수평적 관계의 새 틀로 정립하게 된 것을 목격했습니다.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오랫동안 짓밟힌 여성들의 한이 과거에 대한 반발을 일으킨 격랑 때문인지, 남녀의 수평적 관계를 넘어서서 여성상위의 새 풍조를 가져와 미국식에 익숙해 있는 저 마저 몹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오늘 잠시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이처럼 아름답고, 강인한 사랑 가운데 가장 숭고한 사랑은 다름 아닌 민족애가 아닌가 생각을 피력하기 위해서 입니다.

네오콘을 청소한 쓰나미



지난 2004년 12월 26일 수마트라 연안의 해저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쓰나미가 인도네시아, 태국, 스리랑카, 및 인도의 해안을 덮쳐 17만 5천 명 이상의 사망자와 근 200만 명의 이재민을 냈습니다. 그 때 저는 뉴욕의 딸 집을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이날 아침 TV에서 본 피해 현장은 가위 전율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같은 쓰나미 현상이 조지 W 부시의 악정에 대한 항거와 버락 오바마의 "변화"에 대한 기대의 격랑을 일으켜 지난 11월4일 대통령 선거에서 21세기의 히틀러 부시와 그를 배후에서 조종하던 네오콘이라는 정치 쓰레기들을 한꺼번에 쓸어버린 통쾌한 사건이 발생해서 우리가 모두 열광했습니다.

저는 지난 대선을 일종의 민중혁명으로 보고 싶고 이 민중혁명은 버락 오바마를 통해서 우리 세대의 가장 위대한 민권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깜깜한 밤 하늘에 반짝이던 그 영롱한 꿈이 실현된 위대한 사건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드디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의 그릇에 담긴 내용이 선별의 기준이 되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선별적으로 적용되던 미국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새로운 질서가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지난 11월4일 밤, 그토록 기다리던 그 기나긴 밤, 우리 모두 뜬눈으로 지샌 새 역사의 전야였다. 그 날 새벽부터 웅크렸던 국외자(局外者)들이 활짝 기지개를 켜고 워싱턴과 보스턴에서, 시카고와 달라스에서, 로스앤젤레스와 시애틀에서, 아니 미국의 전 도시, 교외, 농촌, 그리고 산간벽지에서 긴 줄에 서서 한 시간, 두 시간, 심지어는 세 시간을 기다리던 민중들의 가슴 깊숙이 오랫동안 내연하던 염원을 한 표에 묶어 던진 민심.

이들이 던진 한 표 한 표가 민심이 되고 천심이 되어 자본주의의 노예로 아프리카에서 손발 묶여 팔려온 흑인의 후예를 미국의 대통령으로 만든 이 이 정치 쓰나미 현상은 동서고금을 초월하여 가장 위대한 시민혁명이었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불가능하게만 보이던 그 것을 우리는 기어코 해냈습니다.

우리는 미국의 민권운동이 사실은 극히 미미한 사건에서 연유된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알라바마의 몽고메리 시의 어느 거리에서 1955년 일어난 조그만 사건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로사 팍스라는 한 가냘픈 흑인 부인이 몽고메리 시를 운행하는 버스에 타고 비어있던 앞 좌석에 앉았을 때 그 자리는 백인들만 앉는 자리니까 뒷좌석으로 옮기라고 버스 기사가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런 부당한 요구를 받아드리기를 거부했습니다. 이 자그만 사건이 킹 목사의 민권운동으로 발전했어요. 저는 바로 여기에서 오늘 교훈을 찾고자 합니다.

우리가 오바마의 등장에 열광하는 것은, 그의 등장이 지금까지는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미답의 가치체계를 국제질서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가능성이 저 대서양의 수평선 넘어 검붉은 해조를 헤치며 떠오르는 새 역사의 여명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몇 주 전 저는 우리 통일 운동의 사표(師表)이신 안용구 선배님이 코리아 모니터에 실린 기고에서 밝힌 65년만의 해후의 글에서 안 교수님이 그토록 오랜 세월 헤어져 있던 북녘의 형을 만난 감격의 기쁨과, 그러나 이제 이산 가족 일세대가 거의 대부분 타계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사실을 밝혀 주셨습니다.

실정이 이러한데도 남한의 이명박 정부가 남북교류를 완전히 막고 나선 것은 시대착오적인 행위이며, 심지어는 부시까지도 북한과의 화해를 원하는 마당에 남한 정부가 북한과의 일체의 대화까지 중단시키고 있는 것은 퍽 역설적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명박 정부의 구성과정에서 통일부를 없애려고 했을 때부터 이 정부의 대북 정책이 부정적이라는 사실을 예견했지만 지난 50년 이상의 장구한 노력 끝에 이룬 6.15 선언과 10.4 남북합의를 깨고 민족 화해 및 통일에의 그 장엄한 행진을 일시에 중단시키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사태입니다.


개성공단은 통일대장의 이정표


개성공단은 이 지난 50년에 걸친 통일운동의 결실이자, 남북이 민족의 번영을 향해 전진할 수 있는 도약대와도 같은 상징적이고, 또 실질적인 민족 공존의 시험대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금융시장의 악화로 난관의 벽에 부딪친 남한 경제의 활로이기도 합니다. 남한에서 한 사람의 인명을 잃었다고 해서 이천오백만 북한 동포와 4천5백만 남한 동포의 기대와 염원을 무참히 짓밟는 것은 홧김에 서방질하는 것과 같은 자학행위에 다름 아닙니다. 그것이 남한의 도발작전에 의한 것이라는 설도 있고 북한의 도발이다 라는 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분석해 볼 때 남북한, 어느 쪽도 그런 도발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개성공단은 한마디로 통일 대장정의 가장 중요한 이정표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것을 허무는 일은 남북의 어느 정권도 삼가야 해요. 남한의 이명박 정부가 그것을 트집잡고 늘어지면, 아니 그러기 전에 북한 쪽에서 "이건 실수다. 한 사람의 인명이라도 잃게 된 건 정말 미안한 일이고 사과한다"고 한 마디 못하는 이유는 도대체 뭡니까?

우리의 통일운동은 5천년 전 단군왕검이 신시(神市)에 나라를 세울 때 펼치신 홍익인간의 이념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원칙에 확고히 서서 이제 우리는 개성공단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고 북한 전체에 제2의 마샬 플랜과 같은 대규모의 경제개발 계획을 세워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정치학도로서 가끔 조국의 미래에 이상적인 정부형태가 어때야 하는 지 생각해 봅니다. 무엇보다 지역적으로 균등한 대표성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각 도를 단위로 해서 각 도에서 동일한 수의 지역 대표를 내세워 연방의회를 구성하고 통일 정부를 세워 연방국가로 통일을 이뤄야 한다. 인구수가 많은 일부 지역을 대표하는 정부가 무한 횡포를 계속하도록 용인되는 정부 구도가 더 이상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오바마의 등장에 열광하는 것은 그의 새 정부가 그 동안 미국 역대 정부가 소홀히 해 온 한반도 문제의 결자해지의 책임을 충실히 할 수 있는 이성적인 정책을 펴 주리라는 기대 때문 입니다. 오바마 정부는 2차 세계대전의 종식에 따른 국제질서 재편 과정에서 한반도를 분단시킨 책임이 전적으로 미국에 있다는 것을 통감하고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통일에의 접근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줄 것을 기대해 봅니다.

북한은 미국의 군사 및 외교정책 실패의 대표적 상징입니다. 이제 대결이 아니라 평화의 문을 여는 작업을 같이 협력하는 파트너라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결자해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제를 만든 자가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미국의 변화이고 새 역사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우주의 모든 주역을 완성시킨 천부경을 가진 자랑스런 민족입니다. 주역을 보면 음과 양이 있고, 천부경을 보면 항상 상대가 있어요. 두 개의 대상이 충돌하면 어둠 속에 빠지고 두 개의 대상이 화합하고 협력하면 새로운 역사가 열립니다.

오바마는 그 동안 북미 당국자 간의 대화 부재가 한반도 문제 해결의 기회를 차단해 왔다고 선언하고, 그가 취임하면 "조건 없이" 당국자 대화를 문을 열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오바마가 그의 대선 경쟁자인 힐러리 클린튼을 국무장관에 임명한 것은 민주당의 화합 효과를 의식한 점도 있지만, 그것은 무엇보다 2차대전 후 미제로 남아있는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미국의 절실한 역사적 사명, 혹은 필요성을 해결한다는 실효적 고려가 앞섰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이 때 가중 중요한 조처는 바로 한국전의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의 대체입니다. 이것은 한반도 문제를 해결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보다 큰 구도에서 보면 중국의 한국전 참전 후 58년 동안 양국간 미제로 남아있는 마지막 법적 장애를 제거하여 동북아의 평화체제 구도를 구축하겠다는 민주당의 원대한 전략과 직결됩니다. 그리고 한반도의 문제가 악화를 계속하면 중국과 일본의 관계, 그리고 중국과 남한의 관계가 더욱 악화될 소지가 많기 때문에 오바마 외교팀으로서는 이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란과 팔레스타인 문제는 그 동안 네오콘의 외교정책 미숙으로 얼키고설킨 이해관계의 난마에서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데 앞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동북아 문제는 그의 외교팀이 착수만 하면 그 효과를 즉시 거둘 수 있기 때문에 오바마는 대통령의 첫 외교관계 조처는 아시아에 초점을 맞추리라고 상정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한반도, 더 크게는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에만 성공해도 오바마는 국제정치에서 큰 점수를 딸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북미 관계의 쓰나미 현상도 시간 문제입니다. 휴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대체되면 자연히 그 후속 조처는 북미간의 관계 정상화이고, 평양과 워싱턴에 쌍방의 대사관이 개설됩니다. 이렇게 되면 서울과 도쿄는 평양행 버스를 먼저 타려고 다름박 질을 칠 게 뻔합니다.

기원전 49년 줄리어스 카이저가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았으면 로마사는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함께 손을 잡고 루비콘 강을 건너십시다.

통일을 위한 우리 민초들의 역할은 로사 팍스의 역할과 같은 것일 지도 모릅니다. 한 가지 예를 들고 싶습니다.

석가가 사위국의 한 정사에 머무르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부처님께 공양을 바치고 있었으나, 난타라는 가난한 여인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몹시 안타까웠습니다. 그녀는 시장에 나가 품을 팔아 간신히 동전 한 닢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난타는 부처님께 등불 하나를 바칠 수 있다는 기쁨이 충천했습니다. 그러나 등유를 파는 가게 주인은 그렇게 적은 양을 팔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난타는 자신의 간절한 심정을 주인한테 털어놓으며 사정을 했습니다. 그녀의 정성에 감동한 주인은 그녀에게 등 하나를 채울 수 있는 양의 기름을 주었습니다. 난타는 정성껏 등을 만들어 부처님께 공양했습니다. 그녀의 등불은 다른 많은 등 사이에서 밝게 빛나는 것을 본 난타는 몹시 기뻤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밤이 지나면서 다른 등불이 모두 꺼져 갔는데, 난타의 등만은 세찬 바람 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계속 밝게 타고 있었습니다. 석가는 난타의 정성을 알고 그녀를 비구니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빈자일등의 정성을 다한 보시는 새벽 하늘에 보석처럼 빛나는 샛별처럼 우리의 주위를 밝혀주는 것입니다.(끝)


발표자 소개:
■ 주요 약력 및 저서: 서울대학교 국제정치학과에서 수학한 후 "The Korea Herald" 기자, 동화통신사 기자(1964),London Daily Mirror 서울특파원, "Korea News Service" 파리 특파원, KPI 통신 위싱턴 특파원, "The Pacific Life" 주필, "The Washington Weekly" 주필, 현 "USNEWS" 주필로 활약중인 언론인으로 재미동포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영문도서: 『The Descendants of Cane』, 『Epics of Korean immigrants』, 『Korea at A Crossrode』, 『The Age of Burning Ambition』등이 있다. 이선명 주필은 언론계에 첫발을 들여놓은 후, 1970년 전태일 열사 분신사건 당시 한국의 모든 언론이 침묵을 지킬 때 전태일씨의 일기를 단독 입수, 영국의 명망있는 "21st Centry"지(사상계와 같은 월간지)에 발표하여 한국의 열악한 노동문제를 국제적으로 부각시킨 횃불같은 언론인이다.결국 그로 인해 박정희 군사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1970년대 중반 프랑스를 거쳐 1979년 도미, 망명객의 신분이 된 언론인 이선명씨. 그러나 그 어떤 탄압과 어려움도 역사의 파수꾼이기를 자처하는 이선명씨의 칼날같이 선 지성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관련 보도자료 보기-아래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재미동포연합 3개지역총회서 각각 임원진 구성
제13차 전국총회는 2009년 1월16-17일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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