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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삶과 죽음의 구분이 없는 나라 <우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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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8-12-17 16:41 조회3,6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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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재미동포 통일운동원로, 은퇴목사)는 이번에는 민족통신 특별기고로 아프리카 나라 <우간다>에 대해
연구하고 집필한 내용을 송고했다. 그는 서문에서 "나는 이번에 아프리카 나라들 중 열 번째 나라로 <우간다>를
고찰했다. 아프리카 나라들도 남미 나라들처럼 숱한 외세의 간섭과 지배정책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발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자주적인 지도자들이 외세에 기생한 사대매국 분파들에 의하여 고통을 받아
왔다는 사실도 발견했다"고 지적했다. 기고문 전문을 게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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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삶과 죽음의 구분이 없는 나라 <우간다>


*글:유태영 박사(재미통일운동 원로, 은퇴 목사)


<##IMAGE##>나는 이번에 아프리카 나라들 중 열 번째 나라인 <우간다>를 고찰했다. 아프리카 나라들도 남미 나라들처럼 숱한 외세의 간섭과 지배정책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발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자주적인 지도자들이 외세에 기생한 사대매국 분파들에 의하여 고통을 받아 왔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다시 말하면 강대국의 노예신분에서 벗어나 자주독립국가를 유지하자면 외세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함께 올바른 지도자를 가져야 하며 동시에 외세의 간섭과 지배를 막고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국민역량이 튼튼해야 한다는 것을 또 다시 절감했다. <우간다>의 지난 역사를 개괄해 본다.



서구제국주의가 낳은 인간백정독재자 이디 아민
삶과 죽음의 구분이 없는 나라 우간다의 어제와 오늘


유럽인들이 아프리카를 침략하여 노예무역을 행하고 원주민들의 종족과 문화를 완전히 무시하는 분할정책의 악행을 저질렀다. 이에 대하여 여러 번 논의를 했는데 우간다도 예외일 수 없었다.

우간다는 여러 종류의 부족들이 이질적인 문화와 상이한 언어를 소유하고 살아온 나라인데 외부 침략자들이 이들을 강압적으로 한 영토에 묶어 괴롭혀 왔다.

우간다는 유럽인들이 물러간 후에도 독립국가를 건설하면서 여러 가지로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우간다 의 어제와 오늘의 비극적 역사 또한 이러한 식민지 통치의 유산에서 비롯된 맥락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1.우간다의 초기 역사



우간다는 동서남북으로 네개의 나라들 (케냐, 자이레, 탄자니아, 수단) 을 이웃으로 한 나라이다. 인구는 2천3백만명 이며 한반도의 1.1배의 넓은 국토를 가진 나라이다. 한 때 우간다를 아프리카의 진주라고 불리울 정도로 이 나라는 아름다운 땅이다. 이곳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빅토리아 호수를 갖고 있다. 이 호수는 이웃 나라, 케냐와 탄자니아와 공유하고 있다.

우간다에는 원시 종족인 랑고족, 아콜리족, 피그미족과 바간다족이 살고 있었다. 14세기 이후에 토착왕국으로 버뇨로왕국, 토로왕국, 망콜레왕국, 버소왕국등이 통치를 했으며 그리고 마지막 왕국으로 <바간다족>의 <카바카왕>이 19세기 초반까지 통치를 하고 있었다.

우간다는 또 고원평지의 비옥한 농경지 그리고 흩어진 관목 숲이 꽉 차있는 아름다운 지리적 환경을 소유한 나라이다. 영국인들이 우간다의 아름다운 땅을 식민지화 할 때 우간다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여왕의 목걸이>라고 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녹지가 풍부한 비옥한 땅 이었다.

우간다 역사를 살펴보면서 이곳에는 1850년경에 아랍 상인들이 찾아오기 시작 했고 1860연대와 1870년대에 유럽의 탐험가들과 기독교 선교사들이 이곳에 오면서 침략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은 시기를 접하게 된다. 그 당시 유럽인들은 이곳에서 상아무역과 노예무역으로 돈벌이를 했다.

1890년대에 들어와서는 베를린 조약 (Treat of Berlin)맺어졌다. 그 이후에는 우간다와 잔지바르 그리고 케냐 가 영국의 보호영으로 되었다. 영국은 커피와 목화를 환금 작물로 재배하며 이 나라 농민들을 착취하면서 식민통치를 진행했다.

영국 식민통치자들은 처음에는 우간다의 여러 종족들에게 상당한 자치권을 허용 했다면서 이들 일부에게는 공직을 맡기는 등 <바간다 부족> 에게는 특권을 부여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영국은 <바간다 부족> 에게 거대한 토지를 주어 부를 축척하도록 특별 대우를 했다. 그 이유는 왕족인 <바간다 부족>과 <카바카왕> 을 포섭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다른 부족 구성원들은 영국의 식민통치하에서 일자리를 얻는 것도 어려웠다. 영국 침략자들은 부족들간에 각이 한 직업을 가지게 함으로써 서로 이해관계에 얽히도록 교묘하게 관리해 왔다. 예컨대 <랑고 부족> 은 <군대> 에만 종사하도록 하여 분열주의 정책을 펼쳤다.

이와 같은 영국의 분열적 통치 방법은 훗날 우간다가 독립을 쟁취한 후에 나라를 건설하는 시기에 분열의 씨앗을 뿌려 놓았던 것이다.

그 결과 우간다는 1962년 10월9일 독립을 쟁취하였지만 내부분열로 진통을 겪어야 했다. 독립한 우간다는 <랑고 부족> 출신인 오보테를 선두로하여 독립정부를 수립했다. 오보테는 식민통치 이전의 <바간다 부족>의 왕권의 봉건주의적 전통을 무시하고 새로운 헌법을 도입 제정하여 국무총리로 취임했다. 오보테는 영국의 식민통치자들로 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은 <바간다 왕족>에대한 견재와 그들의 <친영국적 사고방식> 을 배격하고 자주자립의 국가건설을 위하여 용감하게 나섰다.

오보테 총리는 1966년에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여 <바간다 옛 왕국> 의 봉건주의적 잔재를 완전히 소멸하고 새시대의 대통령으로 취임을 했고 그 이듬해인 1967년에는 또 다시 헌법을 개정하고 <우간다 공화국>을 선포 했다.

대통령이 된 오보테는 1969년에 사회주의 인민헌장을 발표하고 봉건주의적 낡은 체제의 일소를 주장했다. 나아가서 1970년에는 사회주의 노선을 선포하고 주요 외국기업의 국유화를 강행하고 경제력을 장악하고 있는 외국인의 추방을 추진하고 있었다.

오보테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교에 입학은 했으나 독립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졸업을 하지 못했다. 그는 장학금을 받으려 했으나 영국 식민통치자들이 방해하여 받지 못하고 1950년에 케냐로 건너가 그곳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57년에 우간다로 돌아와 <우간다 민족회의> 에 가담하여 입법의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는 영국정부에 용감하게 항의하는 정치활동을 전개했다 그때 <바간다>왕족들은 우간다의 독립보다는 영국 연방으로 예속된 국가로 남아 있기를 원하고 있었다. 오보테의 투쟁의 대상은 영국뿐만 아니라 사대주의 세력인 <바간다 왕족> 과도 싸워야 했다.

오보테는 마침내 군대를 규합하여 <바간다왕국> 의 마지막 왕인 <무테사 2세> 의 왕궁을 공격하였고, 이 때문에 <무테사 2세>는 영국으로 도망갔다.

오보테는 대통령이 된 후에 사화주의 노선을 선포했으나 영국으로 도망간 <무테사 2세> 를 옹호하고 추종하는 보수주의자들과 <바간다 옛 왕국> 에 대하여 미련을 가지고 충성하려는 일부 반사회주의적 반대세력에 부딪쳐 난관에 처하게 되었다. 그는 그 후 대통령으로 집권한지 겨우 4년이 경과 되었다.

그 때 이디 아민이 일으킨 쿠테타로 인하여 오보테 대통렁은 1971년 초에 실각했고 영국을 등에 엎은 이디 아민이 미국의 후원을 받고 사회주의 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2.영국과 미국의 간섭



이디 아민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1946년에 영국의 식민지군대인 <왕립아프리카소총부대> 에 입대하여 군인생활을 시작 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때는 영국군으로 동남아 미얀마 전투에 참가하여 미얀마 민중들의 독립운동을 말살하는 영국군으로 활약했다.

<##IMAGE##>그는 1953-1959년에 이웃 나라 케냐에서 케냐의 독립을 위해서 싸우는 마우마우 저항세력을 소탕하는 영국군에 가담하여 공을 세워 1961년에는 영국 <육군 중위> 로 진급했다. 그 당시 영국군에서 유색인들 중에서 최고의 계급을 받은 군인이 될 정도로 친영사대주의 인물이었다.

이디 아민은 1962년 우간다가 독립한 후에 오보테 대통령 정권하에서 대령으로 진급하여 우간다군의 총사령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콩고의 친미우익 반란군에 대한 원조에 연루되어 오보테 대통령은 그를 총사령관에서 해임 시켰다.

그러나 이미 아민은 1971년에 오보테 대통령이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동안 영국의 지원을 업고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사대매국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영국과 미국, 이스라엘은 이디 아민의 쿠테타 성공을 즉시 승인 하고 축하 했다.

그 당시 에티오피아에서 멩기스투 좌익정권이 출범 했고, 탄자니아에서 줄리어스 니에레레 대통령이 아프리카식 사화주의를 주장하고 나섰으며, 수단의 누메에리 정권이 수단식 사회주의 건설을 시작했고, 콩고민주공화국의 모부트 정권의 사회 주의 전향 등 아프리카 나라들은 온통 사회주의 성향의 나라들로 전환하고 있었다.

영국과 미국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사회주의 물결이 요동치는 것을 보고 아프리카 대륙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을 수 있는 우익 독재자 이디 아민 이라는 인물을 출생 시켜 물귀신 작전을 계획 했던 것이다.

이디 아민은 드디어 악명 높은 독재자로 되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국제사회는 서구 문명이 낳은 역사적 괴물이라고 평가했다. 그의 독재 8년 동안에 우간다 내에서 자주와 자립을 원하는 양민 30-50만 명이 희생되었다.

이 때문에 서구 문명이 낳은 정치적 괴물, 아민에 대한 <화제의 정치 영화> 2편이 나오기도 했다. 아민이 등장하여 발생한 공포정치와 그리고 독재자의 비참한 몰락에 대한 영화들이다. 그 중 한 영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영화제목 “스코틀랜드의 마지막 왕 The last king of Scotland”
<2> 주연 배우 이디 아민역: 포레스트 휘테터 (오스카 남우주연상 수상자)
<3> 감독 케빈 맥도널드

이 영화는 38년전의 아프리카 우간다에 헤성처럼 나타난 독재자 이디 아민의 무서운 폭정을 그린 영화이다. 왜 영화 제목이 “스코트랜드의 마지막 왕” 인가?

이디 아민이 쿠테타를 일으켜 우간다의 권력자 대통령이 되기는 했지만 그는 본래 스코트랜드의 용병부대의 일개 병사였다. 그런데 이디 아민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요구하여 영화제목을 “스코틀랜드의 마지막 왕”으로 정해 달라고 원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요구는 곧 이디 아민이 심리적으로 우간다 보다 오히려 스코틀랜드의 용병이었다가 후에 <육군 중위> 로 진급한 스코틀랜드의 장교 군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마음속 한 구석에 깊이 간직 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했다.

이것은 마치 <박정희 일본군 소위> 가 쿠테타로 한국의 대통령이 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친일파적 정체성> 을 끝 까지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과 일맥 상통하는 이야기같이 느껴지는 대목이다.오늘 날 남한의 이명박 대통령이 일본 천황에게 머리 숙여 경배한 경우와 유사한 내용이다. .

이 영화 내용에 등장하는 이디 아민의 주치의사인 니콜라스 게리건은 스코틀랜드인 이며 백인인데도 이디 아민의 권력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 하면서 마치 자신이 왕처럼 행세함으로써 위선적 백인들과 위선적 지식인들이 오히려 더 큰 문제인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영화의 중요한 메시지는 이디 아민의 폭정으로 인하여 무죄한 양민들이 8년 동안에 30-50만명이 희생되었는데 영국과 미국은 이디 아민을 지원하고 묵인한 사실을 폭로 해 주고 있다. 오늘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테로와의 전쟁> 은 그 모양과 형식만 다를 뿐 마치도 이디 아민의 폭정이 오늘 이라크와 아프칸에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형국이다. 이 영화는 또 이디 아민의 폭정이 아직도 우간다에서 바르게 청산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밝혀 주고 있다.

이디 아민에 대한 두 번째 영화는 다음과 같다.

<1> 영화 제목 “이디 아민의 홍망성쇠 Amin: The rise And Fall”
<2> 주연 조셉 올리타
<3> 감독 샤라드 바델
<4> 각본 웨이드 휴이 (정치학 저널리즘 전공)

이디 아민 (조샙 오리타 분) 은 영국군의 소총부대의 병사 이었는데 우간다에서 쿠테타로 대통령이 된다. 권좌에 오른 이디 아민은 국민의 기대를 배반하고 가공할 독재자로 변신 한다.

이디 아민은 비밀경찰을 창설하여 지식인들과 학생들을 투옥하여 입에 권총을 넣어 살해하고, 독사 뱀을 날로 회쳐 외교 사절에게 권하는 등 잔혹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권좌에 앉은 후 8년 동안 탄압과 대학살의 역사를 전개한다. 아민 정권은 30-50만명을 대량학살한 살인광으로 검은 히틀러, 미친 알라신, 인간 백정, 영국이 승인한 살인마 등의 악명 높은 독재자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영화는 너무나 적나라한 잔인성을 표현했기 때문에 나이로비에서 촬영하는데 2년 반이란 촬영 기간이 들었다고 한다. 이 영화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재판 없이 쏴 죽이는 것 * 사람을 죽여 구덩이에 처넣고 거름으로 쓰는 것 * 애인의 살을 칼로 베어 먹는 끔직한 장면 * 사람을 세워 놓고 목을 쳐서 냉장고에 저장하는 장면 * 귀에서부터 차례로 까 내리는 생체 해부 * 흑 백 여성 두 사람과 동시 동침을 즐기는 변태 성욕 등… 인간으로 도저히 상상 못할 충격적인 장면들로 가득 차 있다.


당시 상영 전에 기자들만을 위한 시사회를 가졌을 때 사실에 충실 하느라 잔혹한 이야기와 화면을 가감 없이 그대로 재현 해 상영 여부에 대하여 상당한 논란이 있었고 미국에서도 상영 여부에 논란이 되여 상영 금지국들도 속출되고 있었다.이 영화의 감독 샤라드 바델은 40대 인도인 이지만 실제로 아프리카 기니아에서 살면서 이디 아민의 폭정을 직접 체험한 산 증인 이라고 한다.

1976년에 이디 아민은 자신을 종신대통령이라 선언 했다. 하지만 1978년부터 외국에서 이디 아민을 반대하는 운동이 거세게 시작 되었고 국내에서도 내부적 권력기반이 기울기 시작 했다.

이디 아민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사우디 아라비아로부터 원조를 받아 성대한 이슬람 회교 모스크를 건설하면서 이슬람 교도가 되는 또 다른 변신을 했다. 이디 아민은 1975년에 로마 교황을 접견하여 교황의 축복을 머리 숙여 겸손하게 받는 천주교(Catholic) 신도 이기도 했다.

이디 아민 대통령의 폭력적 탄압을 피하여 탄자니아등 외국에 피신하여 집결해 있던 오보테 전 대통령의 추종자들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1979면 4월 13일에 이디 아민 대통령의 독재를 반대하는<우간다 민족해방전선> 의 의용군들이 탄자니아 군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에 진격해 들어 갔다.

다급해진 독재자 이디 아민은 처음에는 리비아로 급히 도망을 했다가 얼마 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에 피신하여 마지막 망명지로 삼았다. 사우디 아라비아는 이슬람교로 변신한 이디 아민에게 그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종신토록 살 별장을 제공해 주었다. 하지만 이디 아민은 그곳에서 고혈압과 신경마비로 혼수 상태에 빠져 있다가 2003년 8월 16일 사망 했다.

이른바 서구 문명국이라는 강대국들은 수백 년간 아프리카의 자원을 수탈하며 그들이 자의적으로 그어댄 직선의 국경선을 만들어 분쟁의 씨를 뿌려 놓았다. 침력자들은 분쟁이 있는 곳마다 독재자를 낳아 키우고 지원하면서 은밀히 내전을 부 추켰다.그리고 독재자와의 분쟁을 통하여 무기장사를 하며 숱한 이익을 챙겨 갔다.

무기 장사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그 반대 세력에게 또 무기를 제공해 주고 있다. 기독교를 전하는 선교의 손길 뒤로 슬며시 살상무기를 건네주어 온 서구 강대국들은 서구의 문명국들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대외정책에서 약한 나라들을 침략하고 착취하는 야만의 나라들로 평가 받고 있다. 말이 내전이지 실은 외세와 반외세의 싸움이며 위선과 진실의 싸움이었다.

2003년 8월 16일에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비참하게 사망한 이디 아민에 대하여 또 하나의 놀라운 뉴스가 영국에서 들여 왔다. 영국의 BBC 방송은 이디 아민의 사망 후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도 했다.

< 영국 정부는 그 당시 오웬 외무장관의 제안으로 이디 아민 우간다 대통령을 암살 할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이디 아민의 정권은 아프리카의 최악의 정권 이었으며 그의 학살 규모도 트메르루주 정권에 버금갈 정도로 큰 살인 행위 이였기 때문 에 이처럼 많은 인명을 앗아간 폭군을 이토록 오래 집권하도록 놓아 둔 것은 우리의 수치다>

어디 한 때 해가 지지 않던 대영제국의 수치는 우간다 에서 뿐이 겠는가?

3.무세베니 우간다 대통령은 어디로?



1979년 2월에 탄자니아 북부 모시에서 이디 아민의 독재를 대항하는 반군세력인 <우간다민족해방전선>이 결성 되었다. <우간다민족해방전선>은 탄자니아 군의 지원을 받아 그 해 4월에 이디 아민 정권을 타도 했다.

<우간다 민족해방전선> 은 룰레 대통령을 영도자로 세웠다. 하지만 룰레 대통령은 곧 물러나고 비나이사가 룰레 대통령의 후임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우간다 민족해방전선> 의 내분은 당분간 계속되고 있었다. 이디 아민의 쿠테타로 인하여 권좌에서 물러 났던 사회주의 신봉자 오보테가 1980년 12월에 다시 복귀하여 세 번째로 대통령에 취임 했다.

사회주의 신봉자 오보테 대통령이 재차 등장하는 것을 보고 영국과 미국은 또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들은 우간다의 정치적 불안의 틈을 이용하여 오켈로가 지휘하는 <무명의 군인 집단> 이 쿠테티를 일으키는데 후원하면서 1985년 6월 오보테 대통령을 해외로 추방하는데 일조했다. 오보테 대통령은 재집권한지 5년 만에 다시 권좌에서 물러나는 수모와 비운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1986년1월 26일 무세베니는 <민족저항운동 NRM> 을 조직하여 반대 세력을 물리치고 우간다의 과도정권을 수립하고 대통령에 취임 했다.

무세베니 대통령은 1944년에 목축업을 하는 농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초등교육은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를 거처 대학 졸업 후에 사회주의자 오보테 대통령 밀에서 일한 경력을 갖고 있다. 학생 시절에 진보 학생단체의 회장을 지낸 경력도 있다. 청년 시절에 마르크스주의 신봉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대통령이 된 후에 집권 초기에는 한때 쿠바와 리비아 등 사회주의 나라들과 관계를 중요시 하기도 했다.

무세베니 대통령은 집권 초기 5년 동안에 정치불안을 이유로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키고 경제회복과 사회안전을 위하여 강력한 정책을 써서 어느 정도 효과를 이루었다. 그 동안 정치적 불안으로 외국으로 피난했던 많은 사람들이 귀국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1996년 5월에 우간다 역사상 최초로 실시된 대통령 및 의회 직접선거에서 대승한 무세베니 대통령은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는데 주력 했다.

그런데 무세베니 대통령은 어느새 경제부흥을 제일주의로 한다는 목표 하에서 서방의 <자본주의 전도사> 로 변신하고 있었다. 무세베니 대통령은 그의 내각에 골수 보수주의 인사들을 상당수 임명하고 우간다의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천주교(Catholic)공동체를 키우는데 힘을 기울였다.

무세베니 대통령이 서방의 언론으로부터 호의적 평판을 받는 이유는 그가 문호를 개방하여 국제금융기구(IMF)를 비롯하여 서방의 투자를 무조건 받아들이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무세베니 대통령을 < 새로운 아프리카의 지도자> 라고 칭송을 할 정도로 친서방주의자로 변신하고 전향 하고 있었다.

서방과의 우호적 관계에 힘입어 무세베니 대통령은 2001년에 2선 대통령이 되었고, 2005년에는 3선 대롱령이되어 2010년까지 장기집권을 하게 되었다.

1986년에 쿠테타로 정권을 장악한 후 24년 동안 집권할 수 있는 그 힘은 어디에 있는가? 이디 아민을 암살하려 했던 영국이 무세비니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묵인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무세베니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우간다 시찰단을 남한에 보내 경제성장의 비법을 배워 오도록 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남한의 모델을 배워 갔는데 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고 한다.

무세베니 대통령은 정권을 장악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부를 대항하는 4대
반정부조직에 시달리고 있다. 이 조직들은 (1) 로드저항군, 수단을 근거지로 한 최대의 저항세력, (2) 우간다 국가구원전선, 북서부 지역을 거점으로한 저항 세력, (3) 서부 나일지역전선, 전통적 반정부 세력, 그리고 (4) 연합민주군, 콩고민주공화국을 거점으로 한 반정부운동. 그 외 많은 반정부 군소단체와 조직 등이다.

<우간다의 박정희>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무세비니 대통령은 최근 세가지 스캔달로 인하여 곤경에 처해 있다. 첫째, 그는 대통령의 전용 비행기를 4,820만 달러에 구입 한다는 여론의 비판을 받고 있다. 둘째, 그의 딸과 며누리는 독일 원정출산 이라는 소문이 전 세계에 퍼졌는데 출산 비용이 9만 달러가 되는데 이것을 국가 비용으로 지출했다고 한다. 셋째, 우간다 판 <개발독재 30년 GO> 라는 말이 우간다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다.

최근 한국의 국민배우(영화배우) 안성기가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친선대사로 우간다를 방문하고 방문기를 쓴 것을 몇 구절 소개한다.

<30년 계속 되는 우간다 내전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최악의 지옥이었다. 내전의 최대 피해자는 아이들이었다. 정부에 맞서 게릴라전을 계속해온 반군들은 밤마다 아이들을 납치했다. 그 수가 수만 명에 이를 정도다.소년들은 끌려가 총을 잡아야 했다. 소녀들은 밤마다 반군들에게 강간을 당했다. 이렇게 아버지도 모르는 아이를 낳은 15-19세의 소녀들은 소녀 엄마(차일드 모더)가 되었다.>

<내전이 종식된다 해도 이들은 난민 촌에서 또 다른 전쟁을 치뤄야 한다. 굶주림과의 싸움, 질병과의 전쟁이다. 그 중 가장 큰 적은 에이즈다. 소녀 엄마들은 아이를 데리고 오지 않았다. 소녀 엄마들은 에이즈에 대한 공포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아사를 막기 위하여 젖을 물리고 있었다>

<우간다 내전의 상처는 참혹하다. 창문도 없는 집에서 난민들은 흙 바닥에서 생활하고 있다. 화장실이나 상하 수 같은 것은 기본 위생시설은 상상도 못한다. 열악한 환경은 전염병의 위험을 증가시키고 있으며 기초예방은 턱없이 부족 하다.

그래도 아이들은 꿈을 꾼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지방에서도 촛불에 의지하여 책을 읽고 있다. 머리에 난 총상조차도 아이들의 미래를 굴복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위 글은 최근의 우간다 사정을 표면적으로 묘사한 대목으로 볼 수 있다. 나는 이번에 아프리카 나라들 중 열 번째 나라인 <우간다>를 고찰하면서 세 가지를 느꼈다. 하나는 이 지역 아프리카에서도 강대국들의 약소국들에 대한 침략과 수탈 현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나라들이 겪는 현상이다. 둘째는 강대국들의 간섭과 지배정책을 저지하고 돌파할 수 있는 자주적인 지도자들이 국내 분파들에 의하여 좌절되어 온 역사를 발견할 수 있었던 점이다. 마지막 하나는 외세를 저지하며 주권을 견지할 수 있는 주체역량이 튼튼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강대국의 노예신분에서 벗어나 자주독립국가를 유지하자면 외세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함께 올바른 지도자를 가져야 하며 동시에 외세의 간섭과 지배를 막고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국민역량이 튼튼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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