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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3천년 역사 지켜 온 <에티오피아>도 미국에 시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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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8-12-03 17:32 조회2,8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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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재미동포 통일운동 원로, 은퇴목사)는 민족통신 연재기획으로 남미 나라들에 이어서 아프리카
나라들 가운데 10번째 나라 <에티오피아>에 대해 연구한 글을 보내왔다. 그는 이 나라를 연구하면서도 "역시 미국이
이티오피아를 괴롭히고 있다.>고 고찰했다. 그의 특별연재기획을 여기에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기획연재]

3천년 역사 지켜 온 <에티오피아>도 미국에 시달려




에티오피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왕조 봉건국가
사회주의혁명과 미국침략이 서로 교차된 에티오피아의 비극


*글:유태영 박사(재미동포 통일운동 원로, 은퇴목사)


<<에티오피아의 3천년 역사>>


<##IMAGE##> 나는 <민족통신 연재기획>으로 남미 나라들에 이어서 아프리카 나라들 가운데 10번째 나라 <에티오피아>에 대해 연구하여 보았다. 3천년의 역사를 가진 이 나라가 봉건황제국가에서 탈피하여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였으나 그 이후 이 나라도 역시 미국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에티오피아가 걸어 온 역사를 간략하게 나마 소개해 본다.

에티오피아는 약 3000년의 역사적 기록을 가지고 있는 나라로서 고대의 역사적 기록에 의한면 BC 10세기 무렵 유대왕국의 솔로몬 왕과 아프리카의 스바의 여왕사이에서 태어난 메넬리크 1세가 에티오피아 왕국을 창건하여 초대 황제가 되었다고 고대역사는 전한다.

구약성경 열왕기 상 10장1:13에 아프리카의 스바 여왕이 솔로몬왕과 상봉하여 값진 아프리카의 보화를 선물로 솔로몬 왕에게 증정했고 솔로몬 왕은 그녀가 요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다 허락했다는 기록이 있다.

에티오피아의 헌법은 솔로몬 왕과 스바 여왕 사이에서 태어난 메넬리크 1세가 에티오피아를 창건하였다는 전설과 에티오피아 왕국을 창건하여 초대 황제가 되었다는 역사를 <신화가 아니며 역사적 실사이다> 라고 규정 하고 있다.

그리고 메넬리크 1세를 황제로 하여 시작된 에티오피아 왕국의 황제 계승을 3000 년 동안 연속 했으며 한번도 단절됨이 없이 1973년의 마지막 황제인 하일레 시라시에 1세에 이르기 까지 끊임 없이 이어져 왔다는 전통도 역사적 실사로 규정하고 있다.

에티오피아의 고대 전통에 의하면 팔라샤 라고 불리우는 유대교를 신봉하는 흑인 유대교 집단이 에티오피아에 살고 있었는데 BC 300년경에 유대교 선교사 성 프루티우스에 의하여 유대교의 전통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AD 시대에 들어서서 4세기에는 에티오피아의 에지나 왕이 기독교를 에티오피아의 국교로 제정 했다는 기록이 있다.

에티오피아의 <검은 유대교> 에 대한 이야기는 구약 성경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에도 있다. 사도행전 (사도들의 전도 8장 27-39) 에 에티오피아 정부의 한 고관 대작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교의 절기 예배를 드리고 마차를 타고 에티오피아로 돌아가면서 마차 안에서 구약 성경 <이사야>를 읽으면서 가고 있었다.

그러데 이 고관대작은 가는 도중에 노상에서 뜻밖에 기독교 전도사를 만났는데 그에게 세례를 받고 개종하여 유대교에서 기독교인으로 전환했다.

1800년대에 아프리카의 모든 나라들이 유럽의 열강국들이 제정한 분할정책에 의하여 강압적으로 식민통치를 받았다. 그런데 유독 에티오피아 만은 3000년 역사에 있어서 한번도 식민통치를 받아 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황제의 통치권도 끊어지지 않고 1973년 까지 3000년 동안 지속되었다.

에티오피아 사람들 중에 유대인 혈통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역사적으로 증명이 될만한 사건이 1984년에 이스라엘에서 발생했다. 에티오피아 에서 대대손손 살고 있던 <검은 유대인> 들 20만 명이 이스라엘로 집단으로 이주해 왔다. 이스라엘로 이주한 에티오피아의 <검은 유대인> 들은 1년간 이스라엘의 현대적 사회학 교육을 집단적으로 받은 후에 <검은 유대인 공동체> 를 형성하여 이스라엘에 정착 하여 지금 살고 있다.

위에서 인용한 구약과 신약의 성경이야기와 <에티오피아의 검은 유대교인> 들의이스라엘 이민에 대한 이야기들을 근거로 하여 에티오피아는 서구의 기독교 문명국 특히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특이한 나라 라고 생각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특히 기독교인들 중에 많이 있다.

이스라엘이 외국에서 유대인 혈통을 불러 들인 것은 에티오피아에서 뿐만 아니다. 이스라엘은 소련에 있는 유대 계 소련인들도 100만여 명을 같은 해에 불러 들였다.

<<이스라엘이 120만여 명 유대계 에티오피아, 소련인들 수용이유>>


이스라엘이 120만여 명의 유대 계 외국인들을 에티오피아와 소련에서 불러 들인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그 것은 종교적 이유가 절대로 아니며 또한 외국에서 기근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는 혈통들을 고난에서 구출해 내기 위한 자선의 목적도 절대로 아니었다.

이스라엘이 에티오피아와 소련에서 120만의 혈통을 불러 들인 이유와 목적은 이스라엘의 총 인구 500만의 적은 인구를 가지고는 팔레스타인과 대항하여 싸우는데 있어서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부족한 인력을 급히 보충하기 위하여 혈통이라는 명분으로는 집단이민을 받아 들인 것 뿐 이었다.

그럼으로 이스라엘과 에티오피아의 관계를 종교적 관점에서 본다든가 혹은 에티오피아와 미국과의 관계를 종교적 측면에서 해석하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에티오피아와 미국과의 관계>>


이 관계를 보려면 우선 국제연합(UN)이 에디오피아에 대하여 보고한 보고내용과 또 영국의 인디팬던트의 보고를 보면 그 관계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많은 병력을 보유한 나라는 에티오피아이다.에티오피아는 소말리아의 친미 과도정부를 돕기 위하여 병력 8000 명을 소말리아에 투입 시켰으며 지금도 계속 지원하고 있다.

에티오피아는 기독교 국가로서 주변 지역까지 점령해 친미 국가들을 도우면서 미국을 위한 대리 전을 치르고 있다.미국은 에티오피아에게 정보와 병참, 전투용 헤리콥터, 특수작전부대 파견 등무제한적으로 도우면서 아프리카의 좌파전환을 막기 위하여 지원하고 있다.

미국은 북조선의 핵실험을 규탄하여 안보리의 대북제재를 결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에티오피아가 북조선 무기를 구매한 것에 대해서는 눈감아주기도 했다.에티오피아와 미국과의 관계는 종교적 유대가 결코 아니라 종교를 이용한 침략 행위와 대리 전을 위한 이용물로 사용한 데 불과하다.

<<에티오피아 왕국의 시련>>


에티오피아 왕국은 3000년 동안 지속된 역사 속에서 수 많은 시련과 시대적 변천과 빈번한 열강들의 위협에 의하여 초래된 고난의 파도를 돌파해야만 했다. 때로는 고대에 발원한 큰 도시의 이름을 따 에티오피아의 나라의 이름을 <악숨 제국> 이라고 고쳐 부르기도 했다.

4세기경에는 기독교가 에티오피아의 모든 생활에 침투하여 국력이 강해져서 서쪽의 백 나일강과 청 나일강이 합류하는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기도 했다.하지만 7세기에 이르러서 이슬람 세력이 아라비아에서 출현하여 공격적으로 대두했다. 이때부터 에티오피아 (악숨 제국)은 시련에 빠져서 그리스도왕국이 3 대 종파로 분열되기 시작 했다. 이슬람교와 유대교 그리고 기독교의 3대 종교가 부족들 간의 대립과 분쟁으로 결부되어 사회적 불안과 혼란이 수백년 동안반복되고 있었다.

13세기 후반에 에티오피아 왕국은 혼란과 불안 속에서 황제의 지배권을 겨우 회복하기는 했다. 그러나 주변에서 끊임 없이 출몰하는 이슬람의 토후들과 소 왕국들과의 분쟁은 수 백년 동안 연속적으로 반복 해야만 했다.

15세기에 사하라사막 이남지역에 <아달 왕국>이 출현하여 여러 이슬람국들 끼리 굳게 뭉쳐 보호협정을 체결하여 에티오피아에게 큰 위협이 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세계적인 대 강국인 오스만 제국의 후원을 받으면서 에티오피아를 기독교국 이라는 이유 때문에 100년 동안 전쟁을 했다. 에티오피아는 한때 패전의 위기에 빠졌었으나 서방 나라들의 원조로 겨우 승리하여 황제의 통치권을 이어 나갔다.

한편 영국은 이때 에티오피아 황제의 금관을 탈취 했다. 그 당시 탈취한 금관은 지금 영국의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가 140년 후인 2008년 금년에 에티오피아의 요청에 못 이겨 돌려주는 사건도 일어났다.

1869년에 수에즈운하가 개통된 후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는 그 지역에 있는 모든 이슬람 토후들을 보호령으로 만들어 식민지화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유독 에티오피아만 제외되었다.

그 후 즉시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식민자화 하려고 공격을 시작했다.에티오피아의 황제 메넬리크 2세의 령도하에 에티오피아는 총력을 기울여 싸워서 1896년에 이탈리아군을 물리쳤다. 이 전쟁을 <1차 에티오피아 전쟁> 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1935년에 이탈리아에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이 등장하여 또 다시 에티오피아에 대한 침략을 감행 했다. 이탈리아는 잠시 동안 에티오피아를 점령했다. 이탈리아에 패전한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는 급히 영국으로 망명을 했다. 이 전쟁을 <2차 에티어피아 전쟁> 이라고 부른다.

에티오피아를 점령한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은 영국과의 전쟁으로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러한 사이에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를 물리치고 1941년에 다시 독립을 회복하여 5년 동안 영국에서 망명 중이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는 에티오피아로 다시 복귀하여 황제의 통치권을 지속 했다.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는 황제의 통치권을 겨우 복귀하기는 했지만 시대적 변천이 강요하는 혁명의 타오르는 불길을 끓수 있는 권위와 능력은 이미 전무한 상태에서 황제로서의 온전한 기능은 불가능 해 졌다.

황제통치의 무조건적인 봉건적 우월주의와 그리고 역사적으로 누적되어 온 교회의 부정축재에 대한 많은 농민들의 원한의 불길이 서서히 타오르고 있었다. 또한 서민층의 인권 회복에 대한 동요의 바람도 눈에 띄게 불기 시작 했다.

3000년 동안 통치한 황제통치의 장구한 역사성에 대하여 과연 에티오피아인들의 큰 자랑 이기는 하다. 하지만 다가 오고 있는 민중들의 역사적 변혁에 대한 불 붙는 열망을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는 없었다.

<<에티오피아의 혁명의 시대>>


1931년은 에티오피아의 역사상 처음으로 변혁의 문이 열리기 시작 했다.영국에 망명했다가 돌아 온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인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역사상 처음으로 헌법을 제정하여 에티오피아를 입헌 군주국가로 변형시켰다.

그 결과로 입법, 사법 행정의 3권 분리법을 제정하기는 했지만 황제는 여전히 절대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황제의 절대권력을 정점으로 한 귀족들과 상급 종교의 특권계급은 봉건적인 토지제도에 의존하여 막대한 부를 누리고 있었다.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는 시대적 요구에 못 이겨 용단을 내려 군주제도에 변혁의 뜻을 민중에게 시사 했던 것이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 아프리카에 독립의 시대가 찾아와 개혁의 물결이 파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가 제시한 개혁안은 절대로 민중의 요구를 만족 시킬 수 없었다. 1974년에 군인들의 반란에 동조한 노동자와 농민, 학생, 교원들의 항의가 전국적으로 계속 퍼져 나갔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민중의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한 마지막 황제는 6개월 이내로 보다 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여 민중의 요구에 응하겠다고 발표하여 민중의 화살을 일시 피하려 했다.

이렇게 반체제운동은 이미 농촌까지 파급되어 전국적으로 지주들과 정부관리들이 민중에 의하여 추방되는 사태가 발생하였으며 군부 내에서는 <군사조종위원회> 와 <혁명위원회> 가 결성 되었다. <혁명위워회> 는 특권 게급에 대한 숙청을 감행하여 마침내 1974년 9월 12일에 와서 에티오피아의 3000년 역사의 황제를 폐위 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와 같은 혼란 속에서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인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누군가에 의하여 암살 당하였고, 1992년이 되어서야 황제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1974년 12월에 군부는 사회주의를 선언하고 <사회주의공화국> 으로의 변혁의 방침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1971-1973년에 에티오피아 전 지역에는 극심한 가뭄으로 5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실업자들이 증가하여 혁명운동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큰 어려움이 되고 있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군부를 중심으로 공화국이 수립 되었다.<임시군사평의회>의 의장으로 H.M. 멩키스투가 추대 되었다. 군사평의회는 악질적 대지주들과 부정축재로 부자가 된 정부의 고관들을 숙청하기 위하여 강권을 발동했다.

1977년에 사회주의적 국가체제를 굳히고 1978년에는 소련과 쿠바등 고산권의 나라들과 국제적으로 상호 친선적 연대를 강화해 나갔다. 멩키스투 의장은 만난의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도시주민조직>과 농촌 <집단농장>을 기반으로 하여 에티오피아의 사회주의국가 건설의 기반을 구축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리하여 10년이 지난 1987년에 <에티오피아 인민민주공화국>이 창건 되었으며 초대 대통령으로 멩키스투 대통령이 취임을 했다. 뿐만 아니라 황제통치하에서 미국과 맺었던 여러 가지 조약과 관계설정들을 일체 취소하고 파기하여 새로운 진로를 확실히 했다.

그러나 새로 취임한 멩키스투 대통령에게는 넘기 어려운 태산 같은 난관이 기다
리고 있었다. 그 큰 난관은 무엇이었던가?

<<사회주의 에티오피아에 당면한 난관>>


첫째, 10년 기간 동안에 극심한 가뭄이 계속 닥쳐 왔다. 1974년과 1980년에 이어 1987년에 세 번째 연속하여 대 가뭄으로 인하여 만성적 식량부족과 기아가 확산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현상은 새로 나라를 건설하는 과정에 있어서 큰 난관이었다.

둘째, 급진적 사회주의적 변혁 운동으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과거의 기득권층의 불만이 쌓이고 또 사회주의적 구조조정의 급진적 변혁에 대한 무식한 일부 민중들의 인식부족 그리고 뿌리 깊은 기독교적 전통의 잔재들로 인하여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 하고 있었다.

셋째, 미국이 더 큰 문제로 등장 했다. 미국은 에티오피아에 사회주의 나라가 건설되는 것을 그냥 두지 않았다.그래서 미국은 에리트리아의 고질적인 오래된 분리주의자들이 잠자는 것을 깨워 일으켜 <영토분쟁> 의 불을 다시 붙게하여 에티오피아 와의 분쟁을 일으켰다.

에티오피아의 황제가 통치하던 옛시절에 발생했던 <에리트리아 독립분쟁> 이 오랜 잠에서 다시 깨어나 고개를 들고 일어 나기 시작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미국이 뒤에서 부추기기 때문 이었다.

에리트리아는 역사적으로 뿌리 깊은 분쟁지역 이다. 에티오피아 북쪽 홍해 연안에 위치한 조그마한 지역이며 AD 900년 부터 줄곳 에티오피아 왕국과 연합을 이루어 자치권을 지켜 욌다. 인구는 430만이며 9개의 부족들로 구성된 에리트리아는 1800년대 부터 이집트, 이탈리아, 영국 그리고 최근에는 미국이 침략하여 미국의 군사기지를 구축해 놓은 상태 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국이 에리트리아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추천하여 1977년에 아프리카에서 53번 째로 독립국이 되게 함과 동시에 또한 UN의 회원국이 되도록 적극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었다.

미국이 그렇게 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 이유는 에티오피아를 괴롭피기위한 미국의 음모 때문이었다. 1974년에 에티오피아 왕정이 무너지고 사회주의 혁명세력이 에티오피아에 새로 등장하는것을 보고 미국은 에리트리아를 성급하게 독립국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UN에도 제일 꼴지의 회원국으로 가입 시켰다. 그 이유는 에티오피아를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대항세력으로 에리트리아를 키워서 이용하려는 공작이었다.

인구 430만의 에리트리아는 50세 이하 남녀 모두 군인 이다. 독립적 신문과 TV는 존재하지 않고 친미적 정보 외에는 그 무엇이던 불법이며 법을 어기면 중범죄로 처벌을 받는다.

에리트리아를 독립시키고 군대를 양성하고 무장시키는 이유와 목적은 에티오피아에 새로 등장한 <좌파정부> 를 파괴 시키고 그리고 소말리아와 앙골라등 이웃나라에 있는 <좌파군>들과 지역분쟁 이라는 명분을 내새우면서 미국 을 위하여 대리전을 싸우도록 하기위한 작전계획인 것이다.

에티오피아는 면적이 한반도의 5배정도 이며 인구는 6천9백만의 큰 나라이다. 뿌리 깊은 3000년 봉건 사회를 개조하여 역사 이래 최초로 민중의 한을 풀어 줄 수 있는 기틀을 마련 했다. 하지만 에티오피아의 사회주의적 국가의 등장은 미국의 <눈엣 가시> 이기때문에 당장 제거의 대상이 되고 있는것이다.

<<미국의 에티오피아 사회주의국가 붕괴작전>>


멩키스투 대통령이 정권을 새로 잡고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위하여 동분서주 하고 있을때 에티오피아의 내부는 매우 복잡했다. 민생문제의 해결과 개혁추진 과정 등 갑론을박으로 매우 복잡했다.

미국은 이 복잡한 틈새를 이용하여 1977년 7월에 소말리아 우익군부를 동원하여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 와의 국경 분쟁지역인 오가덴으로 침입시켰다. 침입의 이유는 에티오피아 경내에 살고있는 소말리아 동족의 투쟁을 지원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아직 힘이 약한 에티오피아 멩키스투 대통령은 긴급조치로 1978년 3월에 소련과 쿠바의 지원군을 불러드려 소말리아 침입군을 격퇴시켰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88-1989년에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라 전역에 극심한 가뭄이 또 다시 엄습하여 욌다. 이로 인하여 멩키스투 대통령의 개혁운동에 큰 차질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미국과 친미 우익 반정부 세력들은 좋은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력을 규합하여 일제히 봉기 했다. 1989년부터 시작하여 에리트라의 우익 반에티오피아군과 그리고 에티오피아 내부에서 형성된 친미 반정부 단체인 <인민자유전선>이 서로 연합하여 1991년에 멩키스투 정권을 붕괴 시켰다.

1974년에 에티오피아 황제의 봉건주의 왕권을 무너뜨리고 사회주의 신생국을 창건한지 17년만에 미국의 음모와 미국이 만들어 낸 친미반군에 의하여 에티오피아는 황제의 봉건주의적 착취가 아닌 현대판 봉건주의인 미국 제국주의의 착취를 당하고 있다.

<<에티오피아 어디로 가고 있는가?>>


1991년에 멩키스투 대통령의 사회주의정권을 무너뜨리고 친미 정권을 세워서 지금까지 17년동안 제나위는 정권을 잡고 있다.

최근 유니세프(UNIEF) 의 발표에 의하면 에티오피아는 전 세계에서 최극빈국중 의 하나이며, 적어도 전체 인구의 23%가 하루에 1 달러 이하로 살아가고 있으며 평균 수명이 48세 라고 발표했다.

사회주의 정권을 타도하고 기독교 친미정권을 세우면서 제2의 해방이라고 웨치면서 출발한 멜라위 정권이 17년동안 이룩한 성과는 전세계중에서 최빈국이라는 불행한 기록 뿐이다.

2005년 5월에 실시한 에티오피아의 총선을 부정선고라 하여 온 나라 전지역에서 시위가 벌어졌으며 정부는 학생들과 민중들을 강제로 진압 했다. 국제 앰네스티 발표에 따르면 학생 26명과 수십명 시위 군중이 살해를 다했고 수 백명이 부상을 당하고 1,500명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경제정책이 억망이고 부정선거와 독재탄압으로 궐력을 유지하는 에티오피아의 정권이지만 그래도 끄떡 없이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와 근거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 이유와 근거는 미국이 에티오피아 군대를 이용하여 소말리아 내전에 투입시켜 위기에 빠진 친미정궈을 도와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미국은 에티오피아 정권의 튼튼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미국은 911사태 이후 에티오피아를 중요한 동맹국으로 역할 분담을 하도록 하면서 막대한 군사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현재 에티오피아는 미국에 의하여 잘 훈련된 20만 이상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에티오피아 정부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음을 자랑하고 있다.

미국은 소말리아의 내전에 대하여 처음에는 소수의 군벌과 다수의 부족간의 싸움으로만 단순히 생각하고 소수의 군벌들에게 지원을 제공하고 그 이상 관려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이슬람 법정연대> 가 세력화하여 <친미 과도정부> 를 공격하여 수도 모가디슈를 장악하게 되여 이슬람세력이 소말리아를 장악하게 되자 미국은 에티오피아를 소말리아에 투임시켜 <친미과도정부> 를 구출하고 있다.

아런 상황하에서 우익에는 < 친미과도정부-에티오피아-미국>이 연결돠어 있다.이와 반대로 좌익에는 <소말리아 법정연대- 에리트리아-콩고등 좌익 아랍동맹> 이 연결되어 있다.

미국은 이슬람법을 나라의 질서로 주장하는 세력이 소말리아의 지배세력으로 나타나자 이 세력을 제거하도록 소말리아의 친미 과도정부를 지원하고 에티오피아는 미국의 용병으로 소말리이에 투입 시킨 것이다. 미국은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의 민중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하여는 아무런 생각이 없고 다만 이슬람세력 이라는 귀신만 보고 있다.

에티오피아의 민중들이 최악의 빈곤과 고난속에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하여 보도한것 몇가지 추려본다.

에티외아 군인들이 소말리아 민간인들을 목를 졸라 죽이고 눈을 도려내고, 여성들을 집단으로 강간하는등 잔혹행위를 행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나라도 누구도 이에대하여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것이 더 큰 문제이다.

미국의 시대착오적 국제정치, 미국은 평화를 주장하지만 평화와를 위해서 전쟁을 한다면서 평화를 파괴하는 모순에 빠져 있다. 에티오피아 어린이 600만명이 영양실조 위험. 340만명이 당장 구호가 없으면 위기에 처해 있다. 에티오피아 어린이 12만명이 기아로 빈사 상태에 처해 있다.

에티오피아 총리와 외무장관이 소말리아에서 에티오피아군 철수에 대하여 의견 대립되고 있다. 현재 에티오피아의 640만명이 구호식량 의존으로 생존하고 있다.하지만 유엔은 식량구호 대상이 900만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2006년에 고아 해외 입양아 한국 1,362명, 에티오피아 732명. 부끄럽다.

<<글을 끝맺으며>>


에티오피아는 세계의 여러 나라중에서 유일하게 식민지 경험을 하지 않은 3천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그래서인지 에티오피아는 현행 태양력인 그레고리력을 사용하지 않고 고대 에티오피아 정교회에서 사용하던 율리우수력을 고집스럽게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율리우수력에 의하면 2007년 9월12일이 새천년 2000년을 맞이하는 날이다.에티오피아 현 정권의 제나위 수상은 새천년을 맞이하기 위하여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어 축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에티오피아는 새천년 축제를 준비하고 있는 순간에도 소말리아 내전에 억매여 있다, 남부의 오모로 해방전선과 동부의 오가덴 민족전선이 내전을 벌이고 있는
비극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이런 처지에서 막대한 돈을 투입해서 행사를 치루는것은 현실을 외면한 발상이라고 비판의 소리가 민중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당장 굶어 죽어가는 어린이들과 아무 대책이 없는 굶주린 대중에게 화려한 축제는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제나위 수상은 2005년 5월 부정 선거에서 추락한 정권의 위신을 성대한 행사를 통해서 만회 할 욕심으로 비판의 소리를 묵살하고 수상의 뜻을 관철했다.

이와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굶주림에 시달려 허약해진 가련한 에티오피아의 민중들이지만, 그러나 다 죽어 가는 듯 한 민중들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소리는 "우리들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이들 민중들은 <우리는 제나위 수상을 미워한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지도자 보다 더 미워하는 것은 미국놈들이다>라고 반미감정을 표출하고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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