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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앙골라: 친미반군이 망쳐 놓은 내전3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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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8-11-25 16:43 조회3,0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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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목사,재미동포통일운동 원로)는 이번에는 <앙골라>에 대해 연구한 특별기고를 민족통신에
송고해 주었다. 그는 서두에서 "검은대륙 아프리카 나라들을 연구하며 공통적인 것은 이들 나라들이 미국을
비롯하여 서방 강대국들로부터 막심한 피해를 입어 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번에 살펴 본 <앙골라>도
폴투갈을 포함하여 미, 영, 불의 침략, 간섭 정책으로 골탕을 먹어 온 나라로 분석되었다. 이 나라가
강대국들에 당해 온 지나간 발자취가 마치도 우리 나라가 외세에 시달려 온 역사를 반영하는 것 같아 더욱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피력했다. <앙골라>의 역사를 살펴본다.[민족통신 편집실]



[기획]앙골라: 친미반군이 망쳐 놓은 내전33년




앙골라 화려한 독립, 하지만 친미반군이 망처놓은 내전 33년
반군이 심어 놓은 지뢰 600만개, Miss 지뢰 선발대회


*글:유태영 박사(목사, 재미동포 통일운동 원로)


<##IMAGE##> 검은대륙 아프리카 나라들을 연구하며 공통적인 것은 이들 나라들이 미국을 비롯하여 서방 강대국들로부터 막심한 피해를 입어 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번에 살펴 본 <앙골라>도 폴투갈을 포함하여 미, 영, 불의 침략, 간섭 정책으로 골탕을 먹어 온 나라로 분석되었다. 이 나라가 강대국들에 당해 온 지나간 발자취가 마치도 우리 나라가 외세에 시달려 온 역사를 반영하는 것 같아 더욱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앙골라>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본다.

1975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한 앙골라는 이후 33년간 내전이 계속되고 있다. 그 동안 친미반군이 앙골라 전역에 마치 <물을 뿌리듯> 지뢰를 매설했는데 그 수
는 자그마치 6백만개가 넘는다고 한다.

어떤 마을이나 도시에 가드라도 목발을 이용하거나 의족을 한 주민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목발이나 의족을 갖추지 못한 불구자들의 수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더 많다고 한다.

유엔(UN)은 앙고라의 정부군과 친미반군 세력간에 내전을 겪고 있는 지역에서 광범위한 지뢰 제거 작업을 실시 했지만 아직도 2만3천 여개의 지뢰가 남아
있는 것으로 외신들은 보도하고 있다.

<다리 잃은 여성만 오세요> 라는 이색적인 행사가 앙골라 수도 루안다에서 2008
년 4월 2일에 개최되었다. 이 행사는 이른바 라는 이름으로 열렸다. 이번 대회에는 18개 주에서 한명씩 참가하여 모두18명의 미인들이 참가 했는데 이들은 모두 지뢰를 밟아 다리를 잃은 여성들이다.

<다리 잃은 여성 미인대회> 를 처음 생각해낸 사람은 노르웨이 사람 트라빅 인데 그는 4년전 앙골라를 여행하면서 수 없이 많은 지뢰피해자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그들의 삶을 위로하고 삶의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서 그리고 전 세계에 지뢰 피해의 심각성을 알리고 싶어서 라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앙골라에는 지뢰로 인하여 농사를 지을 수 없거나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약 2백만 명 이상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지뢰 피해자는 아직도 계속하여 속출하고 있기 때문에 피해자들의 수를 정확히 말 할 수 없는 것이 이곳 현실이다.

영국의 <기록영화 제작자> 인 샘 킬리(Sam Killy)는 2004년 11월에 영국 테레비죤(Britain Channel 4)에서 방영한 작품 에서 앙골라가 처해있는 사회와 정치의 비극적인 운명을 다뤘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앙골라는 450년 동안의 포르투갈의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 1975년에 독립을 했는데 그 이후 이 나라에는 자기민족을 중시하는 민족주의적 노선을 따르는 정부군과 이를 반대하는 친미반군 진영과의 갈등과 반목으로 장기간의 내전이 진행되어 왔다. 이 내분은 독립이후 1992년까지 17년 동안 소련과 미국을 위한 대리전 양상을 띄다가 쌍방이 휴전에 합의하였지만 그 이후에도 미국의 간섭으로 양진영간의 분쟁은 끝나지 않고 있는 것이 이 나라의 실정이다. >

<수도 루안다에 전쟁고아가 5천여 명이 길거리에서 배회한다. 지방에도 수많은 고아들이 있다. 희생자 가족들이 부지기수이다. 이들이 정부군인지 반군인지 분간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지만 앙골라 양민들은 끊임없이 살해당하고 있다. >

이 기록영화를 만든 킬리는 앙골라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대사와 면담을 했는데 미국 대사는 다음과 같이 말 했다.

<현재 미국은 아프리카에서 수입하는 석유의 6%를 앙골라에서 수입하고 있지만 앞으로 10년 안에 아프리카 석유수입의 20%를 앙골라에서 수입하게 될
것이다>

킬리 제작자는 그의 기록영화 결론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대사를 소개한다.

< 앙골라에 석유 판돈(Oil Money) 수억 달러가 흘러들어 간것은 분명하지만 전쟁은 끝없이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그 엄청난 돈은 다 어디로 가고 있는가?>

킬리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기록영화 제작자> 후랑꼬 타비아니(Franco Taviani)는 앙골라에서 일상적 사건으로 되어버린 살해, 기아, 아동학대와 질병등을 조명하여 <하나님은 병들었는가> 라는 작품을 제작했다. 이 기록영화가 제 13차 부산국제영화제 (2008년 9월) 에 출품되어 화제를 모은바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남한의 모 대형교회가 내분으로 복잡한 이 앙골라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기독교 선교를 해 왔다. 한 선교사는 앙골라 정세에 대하여 다음
과 같이 전하면서 기도 요청을 했다.

< 앙골라 정부(MPLA)는 좌파이며 기독교를 박해하는 악마적 정권이다. 이 악마
적 무신론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앙골라 우파 해방운동 (UNITA) 은 미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27년째 싸우고 있다. 하지만 내란의 끝은 보이지 않으니 남한
의 여러 교우님들은 앙골라를 위하여 기도를 간곡히 부탁 드리린다>

이에 대해 이탈리아의 후랑꼬 타비아니 제작자는 <병든 하나님> 에게 기도 부탁한들 그 무슨 응답이 있겠는가?

남한 선교사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앙골라 반정부운동 UNITA>이 지난 27년간 어떤 일들을 하고 있는가에 대하여서는 일체 알려고도 하지 않고 전혀 말이 없다.

미국이 지원하는 친미반군은 민주적선거를 통하여 세워진 <앙골라 합법적 정권> 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앙골라 구석구석을 찾아 다니면서 마을들을 급습하여 주민 들을 고향에서 떠나게하고, 부족민을 살해하고, 농작물을 불태우고, 길가와 들판 에 지뢰를 매설하고, 체포한 사랍들을 노예로 사용하여 미국이 제공한 군수품들 을 운반하게 하고, 많은 여성들을 강간하거나 아니면 강제로 반란군들과 결혼을
하게하는등 27년동안 가진 악행들을 계속 하여 왔다는 것이 국제사회 양심인들의 증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하나님을 믿는 유신론적 국가이며 그리고 미국이 지원
하는 반군은 반드시 승리를 해야하기 때문에 우리는 앙골라에 와서 선교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남한식 반공주의적 친미 사대주의보수신앙을
앙골라까지 가지고 가서 친미사대주의의 추태를 보이고 있어 국제사회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1.3 세기전 은징가 여왕의 나라 은골라


앙골라의 옛 왕국은 <은둠바왕국> 이었다. 은둠바의 왕의 맏 딸로 태어난 은징가는 어렸을 때부터 포루투갈 상인들이 자기 나라 해안에 배를 대고 옷과 술을 내놓고 대신 포르투갈인들을 노예로 붇잡아 배에 싣고 돌아가는것을 보면서 자라왔다.

그때 포르투갈 배에 싣고 떠나간 포로들은 거의가 다 미국의 북동부 지역에 있는 제임스 타운에 노예신분으로 팔려 갔다.

은징가는 자라서 성장하는 동안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등 유럽 나라들이 은둠바왕국을 노예 공급지로 확보할 뿐만 아 니라 아예 은둠바왕국>을 통채로 점령하려 했던 것을 관찰해 왔다.

포르투갈은 군대를 보내서 <은둠바왕국> 을 공격 했지만 생각했던 것처럼 쉽게
정복할 수 없었다. <은둠바왕국> 은 거의 30년동안 포르투갈 군대를 대항하여 싸웠다. 은징가는 34세가 되었을 때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고 잘 훈련된 여전사 부대를 조직하여 이끌고 포르투갈 군대를 대항하여 싸워 침략세력을 저지하기도 했다.

은징가는 드디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은둠바 여왕> 이 되었고, 그 이후 포르투갈과 평화조약을 맺고 얼마동안 왕국을 평화롭게 다스리는 정치력을 과시했다.

포르투갈인들이 노예들을 잡아 해변가로 가는 길에 그녀의 영토를 지나가는 길을 허락해 달라고 <은징가여왕> 에게 청원을 했다. <은징가 여왕> 의 허락 없이는 포르투갈 사람들이 노예들을 끌고 해변가까지 갈 수 가 없었다. 때문에 <은징가 여왕>의 통과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은징가 여왕> 은 포르투갈 사람들의 청원을 순수히 받아 들임으로서 화해의 정책을 쓰기로 했다. 그 때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끌려간 노예들은 포르투갈의 남미 영토인 브라질로 팔려가 사탕수수 재배를 위한 노예로 사용되었다.

1500년대 부터 시작 된 이지역의 노예무역은 <은징가왕국>의 해변가를 통해서만 무역이 가능했기 때 문에 <은징가왕국> 은 자연히 노예수출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은징가 여왕>은 은둠바 나라를 얼마 동안 평화적으로 통치를 하다가 그녀의 나
이 81세에 사망 했다. 은둠바의 백성은 <은징가 여왕> 을 기념하여 나라 명칭을 <은골라> 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전쟁군주> 라는 뜻 이다. 그런데 포르투갈 사람들이 19세기 말에 은둠바를 완전히 점령하여 식민지화한 후에 <은골라> 를 <앙골라> 라고 고쳐 불렀다.

2. 자주독립 투쟁과 사회주의 정권 등장


19세기 말에 아프리카 노예무역이 금지됨에 따라 유럽열강들은 아프리카 분활을 위한 새로운 분할정책을 시작 했다. 이 분할정책에 의하여 포르투갈은 오래 전 부 터 앙골라와 이미 관련을 맺고 있던 기득권을 인정받아 포르투갈은 자연스렵게 앙골라를 합법적인 식민지로 만들 수 있었다.

포르투갈은 앙골라에대한 식민지배 체제를 전보다 더 강화하여 식민통치의 경영
과 자원의 착취를 더욱 철저히 감행 했다.

1960년을 <아프리카의 독립의해> 라고 한다, 하지만 앙골라는 1975년에야 15
년 늦게 독립을 쟁취 했다. 왜 15년 동안 지체 했는가?

그 당시 포르투갈은 군사쿠테타로 인하여 본국의 정권이 불안정 상태에 빠져 있었고 또 앙골라에는 수 백만명의 포르투갈 사람이 정착하여 영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럽의 열강국들의 시민들도 50만명 이상이 앙골라에 뿌리를 내리고 거주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포르투갈 정부는 대내외적으로 정치력을 행사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었으며 또한 앙골라에 오래동안 영주하고 있는 백인들도 끝
까지 버티고 있기때문에 포르투갈 정부가 앙골라의 독립선언을 의도적으로 지연 시킬 수 밖에 없었다.

독재가 길어지면 저항도 역시 더욱 더 강화되는 법이다. 1900년대 초에 들어서서 앙골라의 저항도 만만치 않게 일어나 30년간 반식민투쟁이 거세게 일어 났다. 30년 동안의 길고 긴 항쟁의 결과로 앙골라에 다음과 같은 세 개의 다양한 독립운동 단체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1956년에 모로코에서 A. 네토가 지휘하는 앙골라 <인민해방운동 MPLA> 이 외국에서 창설 되었다. 1962년에 두번째로 앙골라에서 <민족전선 FNLA> 이 결성 됬다. 1966년에 앙골라에서 <독립민족동맹 UNITA>이 세번째로 J. 사빔비를 지도자로하여 창설되었다.

<인민해방운동> <민족전선> < 독립민족전선> 등 세 개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창
설되여 제 각기 독립운동을 맹렬히 진행함으로 인하여 앙골라의 독립을 쟁취했다.

하지만 독립후에 이 세 단체는 곧 두개의 진영으로 조성되여 한 진영은 반미반외세를 주장하면서 사회주의적 노선으로 국가건설을 할것을 주장 했다. 이에 반대하여 다른 진영은 친미와 친서방 노선을 선호하면서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역설 했다. 독립을 어렵게 쟁취했지만 독립국가 건설 과정에 있어서 노선문제로 인하여 초창기부터 난관에 봉착 하고 있었다.

인구 1,250만 이며 나라의 면적 미국 택사스(Texas)의 두 배정도 되는 앙골라는 1975 년에 꿈에도 그리던 독립을 성취하였다. 하지만 어렵게 독립을 성취한 앙골라는 그동안 각 운동단체들이 품고 있던 정견과 정치적 노선들이 숨김 없이 노출되었다. 국가와 민족의 희망과 번영보다 각 당파의 이익과 노선을 더 앞세우는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세 개의 통일운동 단체들 중에서 네토가 주도하는 <인민해방운동 MPLA> 은 건국 초기에 다른 두 단체들을 제처 놓고 앞장 서서 주역을 담당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을 가추고 있었다.

<인민해방운동> 은 단체를 창당한 역사적 경력에 있어 서나 민중 속에 뿌리를 깊이 내린 영향력으로 보아서나 또 지도자의 인격으로 보아서도 당연히 주도적 역할을 담당할 수있는 위치에 놓여져 있었다.

<인민해방운동> 의 지도자 네토는 의사이며 시인이다. 그는 1948년에 시집을
발간하여 국제적으로 독립투사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의사로써 빈민들을 위한 의료 봉사를 하다가 포르투갈 식민통치 정부에 의하여 구속되여 포르투갈에 끌여가 거기서 2년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그는 1962년에 포르투갈에서 탈출하여 모로코에 체류하면서 시집 제2집을 출판했다.

네토는 백절불굴의 애국심을 품고 모로코에서 1962년에 <인민해방운동 MPLA> 을 창건하고 의장으로 추대되여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가 독립을 쟁취하여 모로코를 떠나 앙골라로 귀국 했다. 그는 문학과 의료봉사와 독립운동을 위하여 전생애 를 다 바친 애국지사 이며 유능한 지도자 이다.

네토는 <사회주의적 지도자> 이며 소련과 쿠바의 절대적 지지와 후원을 받는 진보적 지도자로 자타가 공인하는 인물인 동시에 반제반미 투사 이기도 하다.

앙골라는 독립후 세 정파의 권력다툼이 심했다. 네토 진영은 1976년 11월에 <민족전선> 과 <민족동맹> 두 단체를 제압 하고 <인민해방운동 MPLA> 의 의장으로서 앙골라 인민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새로 취임한 네토 대통령은 앙골라 인민공화국의 정치적 지도 노선을 <과학적 사회주의> 노선 이라고 국민 앞에 천명했다.

네토 대통령이 어렵게 난관을 돌파하여 대통령에 취임을 하기는 했지만 앙골라는 초대 대통령이 취임을 한 그 다음 날부터 또 다시 분쟁이 일어났다. 좌파 우파로 양분되여 내전의 출발점이 조성되고 있었다. ‘분열시켜 점령하라’는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공식이 실감나는 현상들이 여기 저기서 발생하고 있었다.

네토 대통령에게 정권을 빼앗긴 <민족전선>과 <민족동맹>은 즉시 보수대연합을 결성하여 <민족동맹> 으로 단일화 하는데 전격 합의 하였다. 그리고 단일화한 <민족동맹>은 ‘사빔비’ 를 수반으로 추대하고 네토의 집권여당을 <좌파정권> 이라고 선전하며 정치공세를 강화하면서 반공친미 노선을 명백히 했다.

이렇게 되여 신생 앙골라인민공화국은 출생한지 1년 후에 과학적 사회주의노선
을 지향하는 <인민해방운동 MPLA> 과 이에 대항하여 싸우는 친미반공주의노선 의 추종 하는 <민족동맹 UNITA> 의 양대진영으로 갈라지고 분렬되여 정권의 쟁탈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3. 멀고도 험란한 길 내전 33년



1976년 11월에 <인민해방운동> 의 수반인 네토 대통령이 과학적 사회주의
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단독 집권의 첫 발걸음을 내디디면서 동시에 좌우 대결전이 전개된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가장 관심을 보인 것은 역시 미국이었다. 미국은 네토 대통령이 주도하는 좌파정권이 앙골라에 들어 섬으로 인하여 아프리카에 좌익세력이 확대 될것을 염려한 나머지 반대파 세력을 지원하며 내정간섭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우선 반공친미노선을 추종하는 <인민동맹> 의 지도자 J. 사빔비를 도와 주기 위하여 아프리카의 남아공을 비롯하여 친미 국가들을 동원하여 지원군으로 3,천명을 앙골라에 투입시키고 뒤에서 무기와 자원을 후원해 주면서 앙골라 정부를 흔들었다. 이것은 미국이 제3세계 나라들에게 보여 온 상습적인 방법이었다.

새로 독립하여 대통령에 취임한 네토 대통령은 군대도 없고 돈도 없고 정부의 조직도 아직은 불완전한 상태인데 미국의 공세를 혼자서 당해 낼 수 없었다.
네토 대통령은 소련과 쿠바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보조를 받아들여 위기를 면할 수 밖에 없는 다급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쿠바는 앙골라에게 지원군 5만명을 급히 파송 했다. 소련은 머뭇 머뭇 그러면서 정세파악만 하고 있었다.

앙골라의 분쟁은 종교와 부족간의 분쟁이 전혀 아니라 순전히 열강들의 이념과 이권 때문에 발생한 분쟁이다. 앙골라의 참혹한 내전의 발생은 미국의 작품이라고 말해도 틀림없다. 단지 미소간의 대리전으로 표출되긴 하였지만 이 내분을 만든 장본인은 결국 미국이었다. 다시 말하면 미국이 먼저 <내전의 불> 을 질렀기 때문이다.

특히 강대국들의 이권이 개입된 분쟁에는 해결할 길이 없음이 더 큰 문제이다.
이권이 없는 곳에서 핏빛 신음 소리가 들려 퍼지고 있어도 미국은 자국의 이익과
무관한 분쟁에는 절대로 개입하지 않고 못 본척 한다. 하지만 정략적 이권이 관련된 곳에서는 분쟁의 불을 질러 놓는 것이 미국이 지금까지 보여 온 대외정책의 일반적인 패턴이었다.

한편 그 당시 미국과 소련은 냉전시대를 종식 시키려는 시대적 변화에 처해 있었다. 그런 이유로 미국은 앙골라에 불만 질로 놓고 사태의 사후처리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책임이 없는것 처럼 일방적으로 앙골라에서 철수하는 연극을 연출 했다.소련의 태도도 사실 이점에 있어서 미국과 마찬가지 이었다. 소련은 미국과 정면 대결을 피하면서 앙골라의 내전문제에 대하여 소극적이며 관망적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쿠바는 소련을 제처놓고 앞장서서 앙골라 지원에 나섰으며 쿠바의 병력 5만명을 앙골라에 급파하여 소련을 놀라게 했다.

한편 미국은 겉으로는 <우리는 떠나 간다. 너희들끼리 잘 해 보라> 이런 식으로
앙골라 내전에 대하여 손을 떼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속으로는 소련도 원조를 중단하고 쿠바의 5만 병력도 앙골라에서 철수 시키기 위한 고등 전술 뿐 이었다. 미국과 소련과 쿠바의 병력이 갑자기 떠난다고 해서 이미 불 타기 시작한 내란이 쉽게 끝날 수 없다는 것을 미국은 다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은 미국이 지원하는 병력 3천명을 먼저 철수 시켰다. 쿠바도 1 단계 2단계로 나누어 5만명의 병력을 1991년 5월까지 완전 철수 시켰다.

한편 이와같은 혼란속에서 앙골라의 정국에 큰 이변이 발생 했다. 그것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네토 대통령이 갑자기 병으로 서거한 비보 이었다. 그는 짧은 집권 기간에 큰일을 했다. 우선 집권 여당인 <인민해방운동> 을 민중과 근로대중을 위한 튼튼 한 정당으로 요지부동의 터를 닦아 놓았다.

네토 대통령은 4백년 동안 유럽의 열강들에게 지배를 받아 온 식민통치의 잔재를 철두철미 하게 제거하고 말살 시키는데 총력을 기우려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그 누가 집권을 해도 <인민해방운동> 은 혼들리지 않을 것으로 확신하면서 그는 세상을 따나갔다.

네토 대통령의 후임으로 D. 산토스 대통령이 정권을 인수 했다.

외국 군대들이 완전히 철수한 후에 앙골라에 평화가 회복될것이라는 미국의 주장
은 거짓 말 이라는 사실이 곧 드러났다. 평화의 기회가 온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전이 날로 날로 격화되는 상황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1991년 5월에 ‘산토스 대통령’ 과 친미반군 지도자 ‘사빔비’ 두 지도자는 포르투갈 리스본에가서 미국의 중재하에 두 사람이 만나 <제1차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그리고 그 평화협정에 의하여 1992년 9월에 여당 야당 가릴것 없이 전국적으로 통합하여 민주적 선거를 통하여 대통령을 선출하는 대선을 실시하기로 합의 했다.
물론 UN 이 두 지도자의 만남을 중재하고 미국이 뒤에서 조정한 작품이었다.

산토스 대통령은 미국의 설득작전에 넘어가 다당제에 의하여 대통령을 선출하여
거국적으로 내각을 조직함으로 평화를 회복하기로 동의 했다. 그리하여 1992년 9월에 전국적으로 UN 의 감시하에서 대선이 실시되었다. 대선의 결과는 놀랍게도 <인민해방운동> 의 후보자 D. 산토스 대통령이 재선 되었다. (미국의 음모는 빗나갔다. 예상외에 산토스 대통령이 재선됨으로 미국은 당황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 인가? 야당인 <인민동맹> 은 UN 감시단 마저 공명선거 이었
다고 판정을 내렸는데도 불구하고 친미반군 지도자 ‘사빈비’ 는 부정선거라는 이
유를 내세우면서 선거에 불복종을 선언하고 내전을 계속하겠다고 주장했다.

사빈비는 선거에 불복종할 뿐만 아니라 1991년 5월에 UN 과 미국의 중재로 맺
은 제 1차 평화협정을 스스로 깨고 오히려 내전을 전보다 더 격화 시켰다.
사빈비는 도데체 누구를 믿고 그런 주장을 하면서 내전을 격화 시켰을까?

1993년 11월에 앙골라의 내전이 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UN 은 또 다시 양측 대
표를 잠비아로 불러 모아 제2차 평화협정에 조인 하도록 중재를 했다. 그 이후 1994년 10월에 UN 의 끈 질긴 중재로 인하여 앙골라 정부와 친미반군 사이에
<제2차 평화협정 가조인>합의가 이뤄진다. 그 결과 1994년 11월 부터 일단 내전이 중단 되었다.

1995년 7월 UN 사무총장은 앙골라에서 쌍방이 평화협정에 조인 했으며 20년 동안의 내전이 휴전되었다고 큰 소리로 발표 했다.그러나 UN 사무총장의 발표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것은 곧 미국의 위선을 드러내는 명백
한 쇼일 뿐이었다.

UN 사무총장의 발표와는 아무 상관 없이 앙골라의 내전은 날이 갈 수록 점점 더 격화되고 있으며 친미반군의 공격은 한 지방에서 또 다른 지방으로 확대되고 사
망자와 부상자 그리고 난민들이 증가하여 정세가 최악사태로 전환되었을 뿐이었다.

도대체 친미반군들이 33년동안 사용한 그 많은 무기와 군수물자들은 누구가 또
어떻게 조달해 주었을까? 그리고 미국의 중재로 평화협정이 두번이나 성사 되었는데 어찌하여 내란은 끝나지 않는가? 친미 반군들을 누가 어덯게 도와 주고 있을까?

빙산의 일각 이기는 하지만 2008년 3월에 발표한 태국의 보도에 의하여 위의 질문에 대한 답변의 윤곽을 그려 본다.

<죽음의 상인> 이라는 빅토르 부트는 1980년대 부터 전세계 테러리스트와 콩고와 앙골라의 반군들에게 대량의 무기를 거래 했다고 한다. 부트는 화물 수송기를 운행하면서 대량의 무기 판매를 해 왔는데 2005년에 부트를 소재로한 영화가 제작 되었다. 그 영화 제목이 매우 흥미 롭다, ‘전쟁으로 가는 길(Road of War)’이다.

그 것 뿐인가? 앙골라 친미 반군에게 무기를 거래한 프랑스인 42명이 최근에 무더기로 기소 되었다. 파리-연합뉴스에 보도에 의하면 이들은 앙골라 내전이 한창이던 1993-1998년에 탱크 420대, 포탄 15만개, 지뢰 17만개, 헬기 12대를 판매 했다고 보도 했다. 영불미 세 나라는 아프리카와 중동 전쟁의 한통속이고 또 전략적 동업자들인데 앙골라의 친미반군에게 무기가 대량 반입되는 것을 몰랐다는 말을 그 누가 믿겠는가?

1996년 11월에 앙골라의 산토스 대통령은 UN 의 끈질기고 또 한편 협박적인 강요에 또 못이겨 <제3차 평화조약> 을 맺기 위하여 친미반군 지도자 ‘사빔비’와 회동하여 이번에는 전 보다 더 적극적이고 과감한 평화협정에 합의 했다.

<거국 내각을 편성하여 친미반군 측에게 4명의 장관과 7명의 부장관 그리고 의
회 의석 70석을 친미반군 측에 배당하여 거국정부를 수립하고 내전을 즉시 종료시킨다. 위의 합의에 대하여 포르투갈, 소련 그리고 미국 세 나라는 연대 보증 을 한다>

이 얼마나 희망적이며 성공적 합의 이었던가?
1996년 11월의 협정은 그야말로 앙골라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장을 열어 놓는 획기적이며 역사에 길이 길이 남을 혁명적 협정 이었다.

하지만 이것 또 역시 세번째 사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역사적인 평화협정을 맺고 거국적 정부를 출범한지 2년을 넘기지 못하고 1998년 7월17일에 평화협정은 파기되기 시작 했다. 협정을 맺은 친미반군 세력은 앙골라의 멀고 어두은 지방을 구석 구석 찾아 다니면서 전투를 계속 하여 대량의 살해와 약탈과 강간등을 감행할 뿐만 아니라 지방행정구 68개 지역을 장학하고 반군의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친미반군 지도자 사빔비는 평화협정 보증국인 포르투갈과 소련과 미국
을 향하여 우리의 작전을 간섭하지 말라 라고 큰 소리를 쳤다. 미국은 유구무언 이었다.

이와같은 상황에 대하여 긴급 보고 받은 산토스 대통령은 1998년 9월에 거국 내각에 임명된 4명의 장관, 7명의 부장관 그리고 70명의 의원들을 즉시 해임 조치 를 감행 했다.

그리고 미국을 비롯하여 세 나라가 보증하여 친미반군지도자 사빔비와 맺은 평화 평화협정의 파기를 즉시 선언 했다. 뿐만 아니라 산토스 대통령은 UN 감시군과 UN에 속한 모든 인사들에게 즉시 앙골라를 따날것을 주장 했다. 앙골라 내전은 길고 긴 반복되는 이야기들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앙골라의 내전은 2002년에 친미반군 지도자 사빔비의 갑작스
로운 사망으로 인하여 일단 막이 내려 졌다.

그 동안 사빔비의 행적은 앙골라 인민들에게 불신을 주기만 했다. 25년 전인 1977년에 사빔비는 스스로 반군지도자로 등장하여 네토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고 내전의 역사의 창시자가 되었다. 1991년에는 산토스 대통령과 평화협정을 맺고 대통령 선거를 치루었으나 선거에 패배하자 미국의 배경을 등에 지고 선거에 불복종을 선언하여 또 다시 내전을 지속시키면서하여 11년간 친미 반군의 지휘자 역할을 해왔다.

사빔비는 어떤 때는 미국의 말도 고분고분 잘 듣지 않고 제 고집대로 미국을 난처
하게 만들 때도 많이 있었다. 한 예를 들면 앙골라의 ‘Lunda Norte’ 지역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는 곳인데 사빔비는 미국의 허락도 없이 무리하게 공격을 감행하여 사람들을 대량 살해하여 세계 여론의 비판을 받게 했다.

사빔비는 이곳에서 다이아몬드를 갈취하여 세계적인 다이아몬드 암시장과 거래
하여 1992년부터 1988년 사이에 37억 달러를 벌어 들이고 그 돈으로 역시 암시장을 통하여 무기를 사들였다.

2002년에 사빔비의 사망후에 산토스 대통령은 11년전에 파기되었던 제1차 평화협정의 정신을 다시 되살여서 아직도 남아 있는 반군잔재들과 평화협정을 다시 맺고 가까스로 총성을 멈추게 했다. 내전 33년동안 50만 명이 숨지고 수
없이 많은 난민들이 발생하고 국토가 황페해졌다.

2008년 9월 5일에 반군 지도자 사빔비가 사라진 앙골라에서 역사적 총선이 비교적 평화로운분위기 속에서 실시 되었다. 14개 정당에서 후보자들이 난립하는 복잡한 총선이었다. 총선을 통하여 집권당 <인민해방운동>이 의석 220중에서 129의석을 확보 했으며 친미반군 <민족동맹> 은 70 의석을 보유하는데 끄치고 말았다. 사빔비의 후임으로 계승한 친미반군의 새 지도자인 ‘사마쿠바’는 총선결과에 깨끗히 승복면서 산토스 대통령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전달 했다. 앙골라의 역사는 이렇게 변했다.

이제 앙골라는 어디로 갈 것인가?

그것은 1년 후 2009년에 예정되어 있는 대통령 선거이다. <인민해방운동> 의 창시자이며 건국의 아버지 이신 네토 초대 대통령의 후계자로서 30년 동안 반군
과 싸운 산토스 현 대통령이 과연 이번에 대선에 다시 재출마를 할것인가 하는 그의 결단 여부에 대한 예측이 최대의 관심 사로 떠 오르고 있다.

4.석유 다이아몬드 때문에 등터지는 앙골라



앙골라는 아프리카의 최대 원유 생산국으로 최근 급 부상 했다. 석유뿐만 아니라 앙골라는 다이아몬드와 철광석등 풍부한 부존자원과 비옥한 국토로 경제 발전의 잠재력이 풍부한 나라이다.

내전 상황하에서도 앙골라의 다이아몬드 채광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캐나다, 영국, 러시아 그리고 호주등이 줄곧 참여하고 있었다. 오래 된 통계이기는 하지만 1998년에 1년 동안 다이아몬드 생산량은 276만 캐럿(4억3천 달러 가치)에 달했다. 그러나 실제 수출해서 벌어 들인 총 수익은 1억3천만 달러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같은 해에 친미반군이 다이아몬드 밀매업자들을 통하여 벌어 들인 실수익금은 1억4천만 달러로써 앙골라정부 보다 1천만 달러 더 많이 벌어 들였다.

석유는 어떠한가? 앙골라가 아프리카에서 나이제리아를 제치고 석유생산 1 위
로 올라섰다. 앙골라는 2007년 1월에 석유수출기구 OPEC 에 가입했으며 현재
매일 192만 배럴을 생산하고 있다. 특히 앙골라는 심해 유전에 대한 탐사와 생 산 증가로 석유수출이 더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석유강국으로 부상한 앙골라에 대하여 미국을 비롯하여 중국과 프랑스등 세계의
석유소비 강국들이 경쟁적으로 구애작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미국은 지난 날에 친미반군을 지원하여 내전을 일으켜서 앙골라에게 끼친 상처에 대하여 모르는 척하고 있다. 그러면서 미국은 다만 막강한 군사력으로 이제는 석유의 이권을 위하여 앙골라 정부에 체면 불구하고 접근해 오고 있다. 이러한 앙골라가 언젠가 제2의 이락이 되지 않을까라고 염려하는 식자들도 적지 않다.

프랑스도 앙골라 반군에게 막대한 무기를 조달해준 과오에 대하여 아무 해명이나 사과의 말 없이 사꼬지(Sarkozy)대통령은 10년만에 처음으로 앙골라를 방문하여 막대한 해저유전 개발에 투자할것을 제안하고 있다.

미영불등 서방의 석유소비 강국들은 중동의석유 공급원 보다 더 안전하고 방대
한 나이제리아와 앙골라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이 강대국들은 아직도 개발되지 않은 미래의 원유자원까지 이권을 챙기려고 움직이고 있다.

중국은 앙골라의 안전과 재건을 향한 협력을 시종일관하게 강화할 것이다 라고 밝혔다. 이에 대하여 앙골라의 마트우스 총서기는 화답하여 말 하기를 앙골라 인민해방운동과 중국 공산당간의 친선관계는 역사적으로 오래이고, 특히 최근에는 호혜 상생의 협력관계를 확고부동하게 발전시켜 왔다고 치하 했다.

앙골라는 2004년에 전쟁으로 페허된 도로와 철도의 복구를 위하여 중국에서 20억 달러를 지원 받은바 있다. 그래서 앙골라는 다이아몬드 분야에 외국의 투자를 받아 들이는데 있어서 여러 나라들 중에서 중국을 꼽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또한 앙골라는 중국으로부터 2005년 11월에는 400 km 의 도로 보수공사를 위하여 2억4천만 달러 차관을 제공 받았다. 앙골라 수도 루안다 지역의 재건 사업에도 중국인 기술자 600 명이 투입되고 있으며 공항 사장에도 많은 중국인 들이 근무하고 있다.

중국은 2007년에 국내원유 소비의 28%를 나이제리아와 앙골라에서 수입했다.
2005년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앙골라에서 미국 다음으로 두번째로 석
유 수입국이 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은 석유수입과 동시에 앙골라가 27년 동안의 서방이 주도한 내전으로 인하여 전 국토가 파괴된 페허를 복구하는데 재원을 아끼지 않고 지원하는데 더 성의를 보이고 있어 양국의 관계는 대단히 우호적으로 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 프랑스등 나라들은 중국의 이와같은 입지 강화를 절대로 고
운 눈으로 보려하지 않는다. 미국은 중국과 앙골라의 유착이라는 측면을 부각시
켜 비판적 논평을 퍼뜨리고 있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악선전은 도를 넘고 있다.

미국 언론들은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다름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

<앞으로 2, 3년 내에 앙골라에는 중국인 노동자들이 수천명이 될것이다. 중국에
서 보내온 인력은 죄수들로 구성되 있다>

<앙골라의 수도 루안다의 밤거리는 중국인들로 차고 넘친다. 밤이 되면 카지노
와 오락장은 중국인으로 가득 하다>

<중국 자본에 의하여 건너온 인력으로 인하여 앙골라의 고용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등의 왜곡보도들이 난무하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는 앙골라가 석유와 다이아몬드로 급부상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앙골라에 대하는 태도들이 예전과 같지 않다. 중국이 미국의 위치를 추락시키고 앙골라의 동반자의 자리를 당당히 굳치고 있는것을 보고 미국은 불안해 하고 있다.

앙골라를 저들 마음대로 취급하던 미국과 서구의 열강들이 전에는 앙골라를 무조
건 목을 조르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이제는 중국과 맞대결을 해야만 하게 되었으니 이 곳에서 과거처럼 이익을 챙기기가 수월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불편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국제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앙골라는 이제는 내전이 아니라 그들 틈에서 어떻게 대처해 나 갈지 그것이 국제사회의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끝)



*아래 특별연재 논문들을 짤각하여 눌러서 열람하세요!

[기획]콩고:조세프 카빌라 대통령에 세계관심

[기획]친미독재 파벌 30년과 18년 내전 겪은 <소말리아>

[유태영 박사]<자주국가>로 방향전환한 <나이제리아>

[유태영 박사]<남아공 역사가 주는 교훈들>

[유태영 박사]아프리카<케냐>역사에서 교훈을 찾는다

[유태영 박사]짐바브웨의 독립 영웅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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