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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콩고:조세프 카빌라 대통령에 세계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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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8-11-13 22:30 조회3,1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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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는 이번에 아프리카 나라 중 <콩고>에 대해 연구한 내용을 연재기고로 민족통신에 송고했다.
그는 서두에 "강대국들에 시달리고 착취당해 온 <콩고 민주공화국>, 세계유일의 지하자원 부유국으로 존재했지만
가장 가난한 나라로 평가되고 있는 이 나라는 지금 46만에 민주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된 조세프 카빌라 대통령의
향방에 대해 국제사회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아프리카의 콩고는 과연 어떤 역사를 걸어왔는가에 대한 문제를
이번에 다뤄보았다."고 설명하고 이 나라가 걸어 온 발자취를 더듬어 주었다.[민족통신 편집실]



[기획]콩고:조세프 카빌라 대통령에 세계관심

천연자원 세계제일의 나라...끝없는 내전


*글:유태영 박사(목사, 재미동포 통일운동 원로)

콩고 친미반군의 만행으로 급해진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
천연자원 세계제일의 나라 <콩고민주공화국> 끝없는 내전


<##IMAGE##> 강대국들에 시달리고 착취당해 온 <콩고 민주공화국>, 세계유일의 지하자원 부유국으로 존재했지만 가장 가난한 나라로 평가되고 있는 이 나라는 지금 46만에 민주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된 조세프 카빌라 대통령의 향방에 대해 국제사회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아프리카의 콩고는 과연 어떤 역사를 걸어왔는가에 대한 문제를 이번에 다뤄보았다.

콩고는 한 나라가 아니라 두 나라이다. 하나는 <콩고민주공화국> 이고 다른 하나는 <콩고공화국> 이다.

콩고는 14세기 부터 500년간 <부족왕국>의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단일 국가 이지만 1800년대에 들어서서 콩고강을 경계선으로 만들어 놓고 강 서편에는 <프랑스 식민지> 가 들어섰고 , 콩고 강 동편에는 <벨기에 식민지> 가 설정되는 비극으로 인하여 콩고의 운명은 두 개의 나라로 갈라지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 나라는 한세기가 훨씬 넘어선 시기인 1960년에 와서야 독립하게 된다. 당시의 상황은 아프리카 나라들 대부분이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시기라고 하여 그 때를 가리켜 <아프리카 독립의 해> 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그 시기에 분열된 두개의 콩고도 프랑스와 벨기에의 식민통치로부터 각각 독립을 쟁취한다.

콩고 강 동쪽에 있던 <벨기에령 콩고> 는 1960년 6월30일에 독립을 쟁취 했고, 콩고강 서편에 있던 <프랑스령 콩고>는 1960년 8월에야 독립을 쟁취 했다. 두 달 늦게 독립을 쟁취한 그 두 달의 차이 때문에 콩고는 두개의 독립국으로 분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두 달이 영원한 두 달이 될줄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다.

강 건너 서편의 <콩고공화국>은 동편의 <콩고민주공화국> 에 비교도 안되는 작은 영토였다. 면적으로는 8분의 1정도에 불과하고 인구는 400만명이다. 언어는 프랑스 식민통치의 유산으로 지금도 프랑스어와 함께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강 동쪽에 있는 <콩고민주공화국> 은 그 면적이 2,345,408 km²로 서유럽 전체와 비슷한 수준이다. 아프리카에서는 3위의 큰 나라이며 코리아 반도로 따지면 약 11배 가량 되는 큰 영토이다. 인구도 ‘콩고 공화국’에 비해 15배 가량 많은 6천200만명(2007년 통계)으로 집계된다.

프랑스와 벨기에 두 주인을 섬겨야 했던 가슴 아픈 식민지 역사와 그리고 독립 후에는 분열과 내전으로 피투성이가 되고 있는 비극적인 오늘의 역사를 콩고인들은 콩고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다 보면서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뼈저린 기억들을 속절 없이 흘러보내고 있다.

[1]콩고의 비극의 시작


15세기에 유럽의 <항해시대>가 열였고 1482년에 포루트갈인 디오고 캉이 콩고 강의 하구에 이르러서 주민들에게 접근한 역사적 기록이 있다. 그당시 콩고지역에는 콩골로 라는 한 무사가 정부를 수립하여<콩고왕국> 을 세웠다. 콩고왕은 처음에는 포루트갈인과 우호관계를 유지했으나 노예무역이 본격화되자 유럽인들과의 관계를 끊었다.

하지만 콩고왕의 지배하에 있던 여러 소왕국간의 협력이 쇠퇴해 지고 서방의 침략이 보다 더 적극적으로 전개됨에 따라 콩고왕은 하는 수 없이 서구인들의 식민지 진출시대를 막을수 없게 되었다.

1870년에 와서 프랑스의 탐험가 P. S. 브라자가 콩고강 유역을 탐험하고 바테계족 추장과 협정을 맺고 콩고강 서쪽 연안에 <프랑스령 콩고식민지> 를 세우고 그 이후 세계 제2차대전이 끝난 시기에는 이 지역을 <프랑스 해외령> 으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1958년에 와서는 프랑스 공동체 안에 속하는 <콩고 자치공화국> 으로 만들 었다.

프랑스는 콩고 땅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별의 별 수단을 다 쓰다가 국제정세의 흐름에 따라할수 없이 1960년 8월15일에 <콩고공화국>의 독립을 승인 했다.

한편 콩고 강 서쪽연안에 있던 벨기에의 식민통치 영토에는 <콩고민주공화국>이 창설된다. 이 지역의 역사를 보면 1878년에 벨기에 국왕이 영국계 미국인 스탠리의 아프리카 횡단탐험을 적극 지원해 주고 그 대가로 아프리카에 대한 자료를 입수하고 또 그를 통해서 콩고강 동쪽 유역에 <벨기에 기지>를 설치 하도록 구상했다.

벨기에 왕은 기지를 확보한 다음 <국제콩고협회>를 조직하고 콩고 지방 수장들과 조약을 맺음으로서 콩고강 동쪽 연안에 <벨기에령 콩고식민지통치>의 첫 발걸음을 내 딪는다.그리고 1884년에는 <콩고 식민지통치> 를 국제적으로 합법화 하기위하여 미국의 승인을 먼저 획득하고 그 다음에 1885년에 <베를린 아프리카회의> 에서 유럽 열강들로 부터 <콩고는 벨기에의 사유지> 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수순을 밟는다.

20세기에 들어서서 벨기에는 콩고를 식민지로 만들어 놓고 고무, 상아, 야자유 등을 수입하기위하여 콩고인들을 노예로 동원하여 야만적으로 노동력까지 착취했다. 벨기에의 노동착취와 야만적 침략행위는 콩고인들의 분노를 불러왔다.

그런데 유럽의 작은 나라인 벨기에가 자기 땅보다 77배나 큰 거대한 <콩고식민지> 를 혼자 통치하기에는 힘이 딸릴 뿐만 아니라 인구마저 희박한 광활한 땅을 개척 하는것은 간단치 않았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벨기에 식민지령> 에는 영국과 미국의 자본이 들어 오게 되었고 이지역은 점차 이들 미국과 영국의 경제식민지로 서서히 변화되고 있었다. 미국과 영국은 이웃 나라 르완다, 우룬디등 식민통치령 에서부터 많은 노동력을 콩고에 투입시켜 농업과 광업분야에 잠식하면서 경제적 지배구조를 착수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하면서 미국과 영국은 경제개발사업에 투입된 콩고인들에게 강제적으로 기독교 신봉과 함께 생산성 향상을 위한 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하면서 광대한 땅에 직선을 그어 놓고 그 직선에 따라 지역을 구분하는 정책을 설정 했다.이와같은 정책으로 인하여 강제로 만들어진 지역들은 자연히 지역간 분쟁이 일어 날 수 밖에 없었으며 그 분쟁은 미래의 분쟁의 씨앗이 되고 만다.

이런 과정에서 1921년 콩고의 민중들이 조금 씩 역사의 눈을 뜨게 된다. 민중들 속에서 <유럽 문명과 기독교 선교사 배척운동> 이 태동하면서 이 운동이 서서히 <민족자주 운동>으로 성장 한다.

아프리카 전역에 독립의 물결이 파도치고 있던 1960년대에 들어서서 콩고 민중들은 벨기에인들에게 <이제는 물러가라>라고 외치기 시작하면서 반외세 민족자주운동이 움트기 시작한다. 그 결과 1960년 6월 30일에 벨기에는 할 수 없이 콩고 국민들의 독립 요구를 승인하고 콩고를 떠나게 된다. 이 외세가 콩고를 철수했지만 콩고 강을 두고 두세력으로 분열되었던 양 진영은 <콩고 공화국>과 <콩고 민주공화국>을 창건하여 두개의 나라로 되고 말았다.

[2]<콩고민주공화국> 의 발자취


콩고 강 서쪽연안의 콩고 역사는 85년동안 벨기에의 식민통치를 받아오다가 1960년 6월 30일에 독립했지만 오랜 외세의 지배로 인하여 전체 민중의 교육수준은 낮으며 또한 과거의 지역간 분쟁으로 인하여 조성된 사회적 불안과 혼란은 자주독립국가를 새로 건설해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허다한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이 지역은 독립 직후부터 5년 동안을 <독립초기 동란시기>로 들어간다. 동란의 내용은 <조제프 카사부부> <루문바 총리> <모부트 장군> <촘베 총리> <카빌라 반군> 등 이 서로 물고 뜯는 내분의 시기로 다섯 사람들의 권력쟁취를 위한 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된다.

이 내분은 또다시 외세를 불러들인다. 그래서 1961년에 분파들의 싸움이 극심해 지자 벨기에군이 자동적으로 개입하고 미국은 UN 군을 불러 들였다. 그러나 UN 평화유지군은 콩고의 평화를 위해서 공정한 역할을 하기보다는 미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편에 서서 일방적인 역할만 한다. 그러다가 1964년에 UN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콩고를 떠나 갔고 벨기에군도 철수 했다.

1965년 11월에 <모부트 장군> 이 쿠테타를 일으켜 국가 수반의 자리에 앉음으로서 5년 동안의 동란은 일단 끝 났다. 1967년에 모부트 장군은 <혁명인민운동> 을 창설하고 1당제 체제를 만들어 놓고 1970년에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100% 지지를 얻어 군복을 벗고 민간인 자격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대통령에 취임 했다.

모부트 대통령은 취임 후 5년 동안의 비상상태를 선포하고 독재를 강화하면서 새로운 정치노선을 선택하는 과감성을 보였다.그리고 그는 나라 이름을 콩고가 아니라 <자이르 공화국> 으로 고치고 콩고강을 자이르강 이라고 부르도록 할 뿐만 아니라 국기도 바꾸 었다. 캐토릭 교회의 전통적 세례명을 금지 시켜 부르지 못하게 할 정도로 벨기에의 식민통치의 잔재를 일소하기 위하여 온갖 법률들을 다 뜯어 고치도록 강권을 발휘 했다.

모부트 대통령은 집권 초기에는 사회주의적 정책을 도입하여 <사회주의국가> 를 건설하려는 의지를 과시하면서 모든 면에서 과감한 개혁을 감행 했다. 그는 중요 기업체들을 국영화하고. 외교정책은 공산권과 접근하는 길을 선택하고,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용단을 나타 내기도 했다. 그리고 1974년에 헌법을 개정하여 <혁명인민운동> 의 당수가 자동적으로 대통령이 되도록 그 기틀을 마련 해 놓았다.

하지만 모부트 대통령의 사회주의적 노선은 몇일 가지 못하고 < 기회주의노선> 으로 선회하여 결국 <우파정권> 이 되고 말았다.

모부트 대통령이 <우파정권> 으로 선회하게 된 동기와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1975년 이웃 나라 앙골라에서 독립운동 단체들끼리 <우파좌파> 하면서 파벌 싸움이 격심하게 일어나 내란으로 번져 나가자 미국은 모부트 대통령을 끌어 들여 앙골라의 우파를 적극 지원했다.

당시 아프리카 지역은 동서냉전의 대결속에서 미국의 영향권에 놓이게 되었다. 그 때 콩고의 모부트 대통령은 영구집권의 야욕을 품고 미국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들여야만 영구집권에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 했다. 이 때문에 모부트 대통령이 가졌던 <좌파의 꿈> 은 일장춘몽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는 그 이후 미국의 강요로 앙골라 내란에 직접 참여하여 앙골라 우파를 지원 했다.

이 때문에 1978년에 모부트 대통령의 <우경화 정책>에 반대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콩고의 모이세 반군이 앙골라 좌파군과 쿠바군의 지원을 받아 <반모부트 대통령 반란> 을 시도한다. 그러나 미국은 프랑스, 벨기에, 모로코에서 우파지원군을 동원하여 모부트 대통령을 위기에서 구출해 줄 뿐만아니라 오히려 우파정권을 전보다 더 튼튼 하게 만들어 주었다.그 후 모부트 대통령은 단절 했던 이스라엘과의 외교관계를 원상복구하고 친서방국가의 노선을 공고히 했다. 그 대신 모부트 대통령은 아랍권 여러 나라들로부터 단교의 쓴 잔을 마셔야만 했다.

냉전시대에 들어와 모부트 대통령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1당 체제하에서 20년 동안 독재체제를 견지할 수 있었지만 그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자 미국은 냉전시대가 끝나자 모부트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하여 다당제 민주주의체제를 채택 하도록 강요했다. 그는 결국 미국의 압력에 못 이겨 1991년에 1당 체제의 종지부를 찍고 다당제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한다.

콩고 독립후 처음으로 다당제 민주주의 정권하에서 야당 후보자 치세개다가 총리로 당선되었지만 그 생명은 길지 못했다. 모부트 대통령은 선거로 당선된 치세게다 총리를 해임시키고 1993년에 대통령 권한으로 비린드와를 총리로 임명하여 2중권력 구조를 만든다.

그렇지만 1996년에 독재자 모부트 대통령이 암에 걸려 치료 때문에 정치를 지속하지 못하게 되자 정치권력을 그의 아들 <모부르> 에게 급히 넘겨주고 31년 동안의 권좌를 떠나 스위스로 떠난다.

한편 독재자 모부트 대통령을 반대한 죄로 20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던 로랑 카빌라가 20년 형을 마치고 1991년에 석방되여 다시 반미 반독재 게릴라전을 전개하며 정권쟁취를 위해 준비한다. 그는 드디어 1997년 5월에 32년 만에 아들이 물려 받은 친미 독재정권을 타도하는데 성공하여 <콩고민주공화국> 의 정권을 다시 회복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암치료를 받기 위해 스위스로 떠났던 모부트 대통령은 모로코에 피신하여 숨어 있다가 1997년 9월에 병세악화로 67세의 나이로 모로코에서 사망한다. 친미 독재자로 32년 동안 권세를 누리던 독재자는 이렇게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고 만다.

[3]주객이 전도된 정부군과 친미반군의 콩고내전


로랑 카빌라는 1997년 5월에 정권을 장악하고 대통령으로 취임 했다. 카빌라 대통령은 독재정권이 바꾸어 놓은 나라 명칭을 다시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복원시키고 국기도 이전 국기로 다시 사용하도록 했다.

카빌라 대통령의 시급한 과제는 32년동안 뿌리 박힌 친미 독재정권의 잔재를 청산하고 새로운 자주자립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하지만 새로 취임한 카빌라 대통령에게 주어진 과업은 <콩고내전>을 어떻게 끝 낼것인가 하는 문제가 당면과제였다.

카빌라 대통령이 새로 장악한 정부군대를 <정부 민병대> 라고 호칭하고 32년동안 친미독재정권에 속해 있던 군대는 <친미반군> 이라고 호칭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미국은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반군>을 적극 지원 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친미 국가들을 총동원하여 노골적으로 <반군>을 적극 지원하도록 했는데 이 나라들은 르완다 우간다 그리고 부룬디등 친미 국가들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콩고민주공화국의 <정부 민병대> 를 지원하는 반미국가들도 만만치 않았다. 여기에는 짐바브웨, 앙골라,나미비아, 수단, 잠비아 등 여러 나라들이 참가했다.

1998년 8월에 <반군>이 주동하여 카빌라 대통령 진영을 반대하여 무장봉기를 일으켰는데 이때 친미와 반미의 7개국들이 서로 충돌하는 바람에 내전이 더욱 확대 되었다.

이때 발생한 콩고 내전은 국제분쟁으로 확대 되어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1999년 8월에 평화회의가 열렸지만 정세가 호전되지 않고 내전은 지속되기 만 했다.

이런 과정에서 로랑 카빌라 대통령은 2001년 1월에 반군에 의하여 살해되고 만다. 그는 20년 동안의 감옥 살이를 했으며 그의 전생애를 반제 반독재 게릴라 투쟁에 헌신 해 오다가 결국 <미국이 지원하는 반군> 에 의하여 생을 마감한다. 미국은 여기에서도 분열과 암살을 통하여 침략정책을 계속하는 본색을 드러내고 만다. 미국은 <콩고내전>의 초창기부터 간여하기 시작했었다.

로랑 카빌라 세력은 <콩고민주공화국>의 비상사태를 맞아 신속히 대처하기 위해 살해된 로랑 카빌라 대통령의 아들 <조제프 카빌라>를 <콩고민주공화국>의 과도정부 수반으로 추대하여 위기를 극복한다. <조세프 카빌라> 는 그 당시 약관 37세였다.

5년뒤인 2006년 7월에 42세가 된 조세프 카빌라는 무소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 되어 <콩고민주공화국> 과도정부 수반에서 대통령으로 부상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한다. 이 선거는 독립한지 46년만에 처음 실시된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로 평가되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제 2대 대통령으로 취임 했다.

[4]미국의 얼굴을 드러내는 친미반군


콩고의 내전의 시작은 1998년에 <친미반군> 들이 로랑 카빌라 대통령을 몰아내기 위하여 무장봉기를 일으킨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때 이웃 나라들이 <친미> 혹은 <반미>의 이유로 서로 <콩고내전> 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어떤 서방의 언론은 콩고내전에 대하여 <아프리카판 세계 제 1차 대전> 이라고 지적 한다. 1998년-2003년 콩고내전 동안에 인종청소, 고문, 학살등으로 인하 여 400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난민이 2,500만 이상이 발생 했다. 2차세계대전후 발생한 <월남전> 보다 더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 했다.

이곳에 왜 그런일들이 벌어졌을까? 그 대답은 명확하다. <콩고는 세계 유일의 풍부한 지하자원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대국들의 관여했고, 콩고 국민들을 이리 가르고 저리 갈라 분열시켜 놓고 정복하는 방법을 택했다고 분석된다.

미국정부는 선전하기를 <콩고는 내전으로 위험한 곳이니 가급적 여행 금지>라고 선전 하고 있다. 하지만 콩고의 제2 도시이며 광업 중심지인 루붐비에서 호텔을 예약 하려면 1년전에 예약을 해야 만 방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미국과 유럽의 광업기술자들과 사업가들이 항상 초만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에게 콩고는 절대로 위험한 곳이 아나라 돈을 벌 수 있는 매혹적 나라이다.

콩고의 지하자원은 어떤것 들이며 얼마나 있나? 2008년 8월에 콩고민주공화국 광업부가 개최한 국제박람회에서 밝힌 자료에 의하면 구리 7500만 톤, 코발트 450만 톤, 철 10억 톤, 주석원광 4억5000만 톤, 아연 799만 톤, 금 600만 톤, 다이아몬드 2억4000망 톤, 니오브 3000만 톤, 리튬 3150 톤, 그리고 무진장의 골탄이 있고 우라늄,납, 보코사이트, 인, 망간, 오일샌드, 바나듐, 동 그리고 원유와 원목이 무진장 풍부 하다는 것이다. 이 자료는 현재까지 탐사작업을 통하여 국제적으로 확인된 자료일 뿐이며 앞으로 계속될 탐사를 통하여 매장량은 더 증가 될것 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지하자원들을 순위별로 분류한 자료에 의하면 콩고의 다아몬드는 세계 3위, 금은 10위, 구리 15위, 코발트5위, 산림자원 2위로 나타나 있다.

한가지 놀라운 이야기는 콩고산 우라늄이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에 투하한 원자폭탄 제조에 사용 되었다고 하는데 그 우라늄은 콩고 Katanga 주에 있는 광산에서 추출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이란이 콩고에서 우라늄을 수입해 가다가 적발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럼으로 미국을 비롯한 일부 강대국들은 콩고산 방사선 광물 거래에 대하여 지대한 우려를 하고 있다.

이러한 지하자원들 때문에 강대국들이 눈독을 들여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콩고의 내전을 지역 갈등이니, 종족문제니 또는 정파간의 권력다툼이니 하는 것은 모두가 다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이 조작해 놓은 구실에서 나온 것일 뿐이라고 진보적 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다시 말함녀 콩고 내전의 진짜 원인과 이유는 자원을 둘러싼 외세의 이해관계와 외국 기업들의 관계가 뒤엉킨 극열한 양상일 따름이다. 외세의 착취의 길을 열어 주기 위하여 콩고와 이웃 아프리카 나라들이 대리전을 치루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분석일 것이다.

지하자원이 세계 제일 이라고 하는 콩고이지만 콩고는 세계에서 가난하기 유명한 빈곤한 나라이다. 물가는 턱없이 비싸고 인구의 71%가 기아로 영양실조 상태에 있는 실정이다. 6천만의 인구중에서 3천7백만 명이 하루에 한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30%만이 안전한 식수를 구할 수 있다고 한다.

콩고를 역사적으로 빈곤으로 몰아넣은 것은 한 세기 동안 계속한 식민통치이다. 독립후 10년은 정파싸움으로 식민통치와 다름 없는 암흑의 기간 이었다. 그 후에 안정된 정권이 들어 서는가 했지만 민중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32년간의 친미독재의 폭정 하에서 부익부 빈익빈의 불의한 정치만 지속되어 왔다.

콩고 국민들은 묻고 있다. 도대채 그 귀중한 지하자원들을 채굴하여 생긴 돈들은 누구의 손에 들어 갔는가? 세계 제일의 천연자원의 나라가 가장 가난한 나라로 만든 장본인은 누구인가를 묻고 있다.

32년동안 독재정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버팀목이 되였던 미국의 지배세력이 챙겨 간 돈은 얼마이며 이들에 기생하여 자기 배를 불리게 했던 친미사대주의 세력이 챙긴 돈은 ㄸ 얼마나 되는가에 대한 물음이 이들 콩고 국민들 자신들이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미국인들이 콩고의 지하자원의 소유권을 몽땅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콩고민주공화국> 의 조세프 카빌라 대통령은 43세의 젊은 지도자이며, 민주주의적 선거에 의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여 집권 한지 2년밖에 안 된다. 하지만 지난 2007년 6월 12일에 외신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밝힌 그의 정책은 매우 분명하고 개혁적이며 희망적 이다.

40개 질문과 답변중에서 매우 중요하고 뜻 깊은 질의응답 몇 개를 소개 한다.


질문: 모부트 독재정권 32년동안 부패, 횡령, 행정문란등을 강하게 규탄했는데 그 대안은 무었인가?

답: 오늘의 콩고 정부는 민주선거의 산물이다. 민주국가의 과제는 사법개혁과 잘못된 <광물계약> 을 재검토하기 위하여 <재검토위원회>를 민주적으로 만드는 것이다.강요된 민주주의가 아니라 역사적 교훈에서 체득한 민중의 민주주의 이다.

질문: 국민들은 과거의 환멸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한 대안은 ?

답: 우리가 40년 너무 긴 좌절과 환멸로 살아 왔기 때문에 문제는 심각하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전쟁에서 막 나오는 순간에 놓여 있다. 오는 9 월에 있을 새로 출범한 새 정권에대한 평가서가 나올것 이니 좀 기다려 보라.

질문: 대통령 취임후에 강 건너 <콩고공화국> 을 방문 했는데?

답: <콩고공화국> 을 우리의 적이라고 떠드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적이 아니라
는 것을 보여주고 왔다. 대통령과도 친밀한 대화를 계속하기로 하고 왔다.

질문: 독재정권 시기에 외국 기업에게 60개 이상 <광산계약> 을 했는데?

답: 개인의 손익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 이다. 잘못된 계약을 콩고 정부가 재검토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광산자원을 콩고가 <재소유> 하도록 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다. <재검토위원회> 는 반드시 과거의 외국기업들이 불법으로 매수한 <광업권> 을 재검토 작업을 진행하여 목적달성을 할 것이다.

질문: <콩고민주공화국> 정부 장관들과 차관들은 모두 60명인데 이들중에서 직위를 이용하여 부정축재한 관리들은 없을지?

답: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전혀 없을 것이다. 32년동안 <독재와 부정축재> 는 쌍두마차격 이었다. 만일 아직까지 그런 자가 있다면 가야할 곳은 감옥이다 라고 나는 각료회의를 통하여 명확히 강조하고 있다.


[5]맺는 말


콩고내전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이념전은 양단간에 끝나기는 차라리 쉽다. 하지만 국제적 이권 싸움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악순환이 계속 반복하기 때문에 쉽게 끝나지 않을 것같다. 그동안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또한 콩고와 르완다 쌍방 사이에 휴전에 합의하여 조인을 했다고 몇 번이나 발표 했던가? 미국과 영국 그리고 UN은 그동안 몇 번이나 쌍방이 정전에 합의 했다고 발표를 했던가?

뉴욕타임스(11월 10일자)를 비롯하여 모든 언론들은 콩고내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오히려 더 격열해 지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콩고민주공화국> 의 젊은 지도자 조세프 카빌라 대통령의 숨은 정책적 지혜와 정치적 결단을 엿 볼 수 있다.

조세프 카빌라 대통령의 판단은 대략 다음과 같다.

• 미국은 절대로 콩고에서 손을 떼려 하지 않으며 제2의 이락전을 콩고에서 계속 하면서 라도 끝까지 콩고의 불법적 광업권을 유지하려 하고 있다.
• 미국은 르완다를 비롯한 친미적 나라들을 계속 끌어 들이고 그들도 역시 공고의 자원에 욕심을 부리고 있다.
• 오늘 현재 <콩고민주공화국>은 미국의 침략을 군사적으로 막을 힘이 없다.
• 미국 외에 콩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나라는 중국이며 또한 반미적 군사
강국들 이다.

이상과 같은 조세프 카빌라 대통령의 판단과 그의 결단은 얼마 전에 보도한 지의 기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기사에 의하면 중국은 최근 몇 년 동안에 콩고에 80억 달러를 지원하여 콩고의 낙후된 도로와 철도 그리고 학교와 병원등 기간 시설 사업에 큰 도움을 재공하고 있다고 보도 했다. 물론 중국도 콩고의 지하자원을 원하고 필요로 할 것이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 의 차이점은 판이하게 다르다. 미국은 불법적 기득권을 내세워 몇 십년 동안 강탈해 오면서 영원토록 지속하려고 욕심을 부리고 있다. 이에 반하여 중국은 콩고가 당면하고 있는 기본적 문제를 해결 해 주면서 상부상조적 외관계를 전개해 나 갈것으로 보인다. 그 동안 중국은 80억 달러의 지원외에 5천여개의 콘테이너에 가득 채운 물자들을 무료로 제공하여 낙후된 시설들을 복구하도록 도와 주고 있다.

그래서 불법적이며 불공정한 계약으로 <광산채굴권>을 거머쥐고 있는 미국과 영국의 광산회사들은 중국의 놀라운 접근을 저들의 기득권에대한 침해로 여기면서 전전 긍긍 하고 있다.

뉴욕타임스(2008년 10월 31일)에 의하면 영국과 유럽연합 그리고 미국등의 분주하게 콩고를 오락가락 하면서 카빌라 대통령과 반군 지도자를 번갈아 만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행보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그 귀추도 주목되고 있다는 것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이들 틈에 이곳을 방문하고 있지만 그의 행보 또한 앞으로 주목할 대상이 되고 있다.

이 나라와 북조선과의 관계에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46년만에 민주선거로 당선된 <콩고민주공화국>의 조세프 카빌라 대통령은 2007년 12월 15일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군 최고사령관 추대 16돌>을 기념해 축전을 보내 왔다고 북의 로동신문이 보도한바 있어 그 향방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도 높은 것으로 진단되고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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