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친미독재 파벌 30년과 18년 내전 겪은 <소말리아> > 기타

본문 바로가기
영문뉴스 보기
2024년 4월 27일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사이트 내 전체검색
뉴스  
기타

[기획]친미독재 파벌 30년과 18년 내전 겪은 <소말리아>

페이지 정보

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8-11-02 18:48 조회2,888회 댓글0건

본문

유태영 박사는 남미 나라들을 비롯하여 아프리카 나라들이 제국주의 나라들에게 침략당하고, 지배당하여 온
사레들을 차례로 연구하며 우리 민족이 이러한 역사적 교훈들을 통하여 민족자주권을 가지고 통일조국을 이룩하자는
뜻을 호소해 왔다. 그는 <제3세계 나라들의 발자취와 그 처지를 통해 우리 민족의 현주소를 조명해 보자는 취지>라고
강조해 왔다. 이번에는 아프리카의 나라, <소말리아>를 연구한 글을 특별기고했다. 전문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특별기획]친미독재 파벌 30년과

18년 내전 겪은 <소말리아>





*글:유태영 박사(재미동포 통일운동 원로, 은퇴목사)


<##IMAGE##> 제3세계 나라들의 발자취와 그 처지를 통해 우리 민족의 현주소를 조명해 보자는 취지로 그 동안 남미 여러나라들을 포함하여 아프리카 나라들의 역사를 고찰해 왔다. 이번에는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소말리아>에 대해 소개한다.

소말리아는 아프리카에서 보기 드문 단일민족 단일 언어 단일문화의 나라이지만 파벌 싸움과 국 내외의 전쟁과 내전으로 인하여 30만명 이상이 기아로 사망했고 6백만명 이상이 난민으로 전락하여 수난의 역사로 점철된 나라로 알려져 있다.

이 나라는 수니파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있으며 유목민이 많기 때문에 초등교육이 의무교육 임에도 불구하고 진학율이 낮다. 단일민족이며 단일언어와 단일문화의 나라 인데 어찌하여 독립후 오늘까지 장장 50여년동안 <친미독재> 와 <반미내전> 으로 참혹한 역사를 걸어 왔을까?

나는 소말리아의 역사영화 <불랙 호크 다운>과 소말리아 여류작가 <파라-Fara> 의 작품을 통해서 이 나라의 역사를 살펴본다.

소말리아의 역사영화 <불랙 호크 다운> 은 미국의 저널리스트 마크 보우덴이 목숨을 걸고 당시 소말리아 전투 현장에 뛰어 들어가 병사들과의 탐사대담을 바탕으로 하여 쓴 원작을 2001년에 제작한 미국 영화이다. 제작자 브룩하이머와 감독 스콧이 밝힌 <불랙 호크 다운> 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영국은 소말리아 북부를 식민지화 하고 이탈리아는 소말리아 남부를 식민지화 하고 있었는데 1960년에 독립과 함께 단일 국가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냉전 당사국 이었던 미국과 소련은 에티오피아와의 전쟁과 파벌싸움을 위하여 소말리아에 무기를 풍부하게 제공하였는데 이는 소말리아 민중의 빈곤을 초래했다.

소말리아의 시야드 바레 대통령의 부패하고 억압적인 독재 정권은 1991년에 유혈사태로 끝이 났지만 그후 권력을 얻으려는 경쟁자들 간의 파벌싸움으로 인하여 1991년-1993년 동안 기근과 파괴가 잇달았다. 1992년 유엔의 개입은 굶주린 사람들에 대한 원조를 허락받기 위한 노력 이었다. 1993년 10월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 파견된 유엔평화유지군 소속 미 특전단이 소말리아의 군벌 모하마드 파라 아이디드 대통령의 사령부를 파괴하고 그 측근들을 납치하기 위하여 작전을 단행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중무장한 수천명의 소말리아군과 전투를 벌리게 된다. 이때 “블랙 호크 헬기” 2대가 견추당해 추락하면서 구출에 나선 미군들이 하룻밤 사이에 18명이 죽고 1천여명 이상의 소말리아인이 목숨을 잃었다. 결국 미군은 이듬해 3월에 소말리아에서 철수하게 되였는데 당시 클린턴 행정부의 초기 대외정책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것이 <불랙 호크 다운> 이 말해 주는 소말리아 독립후의 참혹한 현실 이었다.

또 한 작품은 소말리아의 여류작가 파라(Nuruddin Fara) 의 소설 < 노출된 바눌- Naked needle> 이 있는데 이것은 소말리아의 참상에 대한 이야가를 말해준다.

서로 다른 인종과 문화 사이에서 사랑의 애달픈 이야기를 통해서 소말리아의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불안을 소설로 말해주고 있다. 거의 초월적인 사회와 인간의 유대가 불안과 공포에 의하여 단절되여 온것을 이데올로기적인 구호로 강압적으로 감추고 있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파헤처 주고 있다. 특히 소말리아의 독재정권하에서의 인간의 삶에 대하여 풍부한 상상력과 주목할 만한 유창함과 정확성을 지닌 언어로 소말리아의 참혹한 사회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정치성을 띤 소설 때문에 망명을 택할 수 밖에 없어서 유럽과 아프리카 등지로 떠 돌아 다니면서 교편생활로 생을 유지한다.

이 두 작품들은 소말리아의 불행한 과거에 대한 윤곽을 설명해 주는 작가들의 솜씨일 뿐이며 근원적 역사적 고찰로 참고하기는 미약하다. 그러면 역사가 말해 주는 소말리아의 비극은 무엇인가?

소말리아, 에티오피아 그리고 미국 세나라 사이에 몇 세기 동안 일어 난 오랜 앙금의 씨앗은 30년의 전쟁과 18년의 내전으로 이여지는데 그 참상의 역사는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 발자취를
알아본다.

1.소말리아 독립 이전의 침략자들



소말리아는 아프리카 대륙 동쪽 끝에 튀어나온 돌각 부분을 차지하며 인도양을 대면하고 있다. 서쪽 국경에는 에티오피아를 비롯하여 케냐, 지브티 그리고 예멘등 나라들이 인접해 있다. 종족은 소말리아족이 85%이고 기타 반투족과 아랍족이 약간 있을 정도로 단일 민족 국가이며 인구는 950만명이다. 소말리아는 단일민족국가로서 고대에 외부로 부터 침략을 받은 역사적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10세기 무렵부터 아라비아와 교역을 시작 했으며 고무와 목재등을 수출했다. 원래 소말리아인은 유목민 이었는데 이스람교가 그들을 교화 시켰다. 16세기경에 소말리아의 아달토후국이 에티오피아를 일시 침공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르러서 소말리아는 아랍인의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기 시작 했으며 그후 포루투갈도 소말리아에 진출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포루투갈은 세력확장을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물러 났다. 그리고 1800년대에 들어서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탈리아 세 나라는 소말리아에서 식민지 선취를 위하여 경쟁적으로 동분서주하면서 유럽문명을 무기로 삼아 소말리아의 평화로운 전통문화를 짓밟고 제국주의적 식민지를 열어 나아갔다.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먼저 보호령으로 삼은 후에 소말리아의 동부와 남부의 해안지대에서 침략의 세력을 확대했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침략의 야욕은 모가디슈, 브라바, 메르카, 바르세이크항등의 통치권을 계속 확대해 나아갔으며 1889년에 이르러서 소말리아 남방 전역에 대한 식민통치 토대를 완성했다. 이렇게 하여 이탈리아는 소말리아 식민지 개척의 선구자가 된다.

한편 영국은 1854년에 소마리아 북부에서 침략의 첫 발걸음을 시작 했다. 영국인 알 버튼이 침략의 선발대로 북부 하레르 고원지대를 통하여 소말리아에 들어가 소말리아 북방지역을 식민지 개척지역으로 만든다. 그 이후 영국이 1884년에 소말리아 북방지역을 <소말리아 보호령>으로 장악한다.

프랑스도 1860년대 초에 소말리아 북방지역에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고 영국과 지역분쟁으로 대결하데 된다. 그러나 1988년에 영국과 프랑스는 <영-불합의서> 를 통해 경계선을 확정하고 서명하여 분쟁을 끝냈지만 사실은 남의 땅을 빼앗아 가지고 서로 나누어 먹는 합의를 한것 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때 이탈리아는 북쪽에 있는 영국의 <소말릴란드보호령> 을 침공한다. 하지만 영국은 1941년에 이탈리아를 물리치고 영국의 보호령을 되찾는다. 그리고 영국은 이탈리아의 침공에 대한 보복으로 이번에는 남쪽에 있는 이탈리아 식민지 전역을 침공하여 이탈리아의 통치권을 빼앗았으며 1950년까지 소말리아 북과남 모든지역을 통치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탈리아는 유엔의 개입으로 1950년에 영국으로부터 다시 잃었던 식민지를 되돌려 받고 소말리아 남쪽의 식민지를 조건부로 지배하게 된다.

한편 소말리아족은 민족자결원칙을 주장하면서 150년 동안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탈리아에게 나라의 주권을 빼앗겼던 역사를 회복할 것을 요구하고 나선다. 특히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서 <소말리아 청년동맹> 은 소말리아 민족의 문화적, 정치적 자유를 외쳤는데 그 운동은 소말리아 전국토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그리하여 소말리아는 1960년 6월에 북부지역에서 먼저 독립을 선언했으며 유엔 관리하에 있던 남쪽의 이탈리아 식민지역에서도 한 달후에 독립을 선포한다.

소말리아를 끝까지 붙들고 있던 영국과 이탈리아 두 나라는 1960년 7월에 <식민지 통치시대의 막>을 내린다.


2. 소말리아의 독립을 망처 놓은 미국



1960년 7월에 소말리아 청년동맹(ARA) 의 지도자 <셰르마르케>가 소말리아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 되었지만 그는 태산같은 문제에 봉착 한다. 그 문제는 우선 극악에 처한 국가적 빈곤문제 해결이며, 둘째는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 분파들을 연합하여 소말리아의 <연합공화국>을 창건하는 과제로 제기되었다.

소말리아는 오래 동안 <영국, 이태리, 프랑스> 세 나라의 식민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소말리아 분파도 자연히 세 개의 분파로 분열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에티오피아와 서로 얽힌 관계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와의 적대 뿐 아니라 국경선 분쟁은 끝이 보이지 않는 역사적 분쟁지역으로 나타난다. 케냐도 역시 이해관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실정 이었다.

하지만 위에 기술한 태산같은 문제들 보다 더 크고 더 근원적인 소말리아의 당면한 문제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미국 이었다. 혹자는 말 하기를 <석유 있는 곳에는 미국도 있다> 라고 했다. 이말은 맞고도 틀린 말 이다. <석유 없는 곳에도 미국은 가 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이유삼아 에티오피아가 소말리아를 침공 하도록 개입을 하고 더 나아가 급기야 미국은 직접 소말리아를 공격하는데 까지 관여한다. 다시 말하면, 미국은 소말리아 독립 초기부터 간섭하고 지배정책으로 나왔다.

1969년 10월에 초대 대통령 셰르마르케 대통령이 암살로 쓸어졌다. 군부가 무혈쿠테터를 일으켜 엠에스(M.S.) 바레 군참모장을 의장으로 하는 최고혁명의회가 권력을 장악하고, 국명을 <소말리아 민주공화국>으로 개칭 한다. 그런데 바레 의장은 1970년 10월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즉시 사회주의국가를 선언 하면서 일당체재를 구축하고 그 이후 1974년에 소련과 <우호협력조약> 을 체결하여 정권을 튼튼히 강화하면서 <대소말리아주의>를 제창하고 나온다.

바레 대통령은 특히 에티오피아 경내에 살고있는 소말리아인들의 합법적 권리를 주장하면서 1977년 에티오피아의 <오간데>지역을 침공하여 <오간데 전쟁> 을 일으키고 소련이 소말리아를 뒤에서 지원해 줄것으로 요청한다. 하지만 소련은 오히려 에티오피아 편에 서서 수수방관한다. 그래서 바레 대통령은 실망하고, <오간데 전쟁>은 실패하고 만다.

그 이후 1978년에 미국이 개입하여 <에티오피아-소말리아 평화협정>을 맺음으로 일단은 바레 대통령이 체면을 유지하지만 나중에는 미국이 에티오피아를 지원하여 소말리아를 공격게 된다.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정세에는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다> 는 명언이 연상된다.

바레 대통령은 <오간데 전쟁>에 패배하고 1978년에 소련과의 <우호협력조약> 을 파기하면서 친미정책으로 선회한다. 그리고 1980년에 미국의 군사원조를 조건으로 소말리아에 미국의 군사기지 사용을 허락 한다. 이 때문에 또 다시 소말리아-에티오피아 관계는 적대관계가 된다. 이 틈바구니에서 미국은 겉과 속이 다른 입장과 자세를 보인다.

이러한 관계로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는 1982년-1983년에 충돌하게 되고, 그 결과 150만명이 넘는 난민이 발생 한다. 그리고 소말리아에서는 1988년 5월에 내전이 발생하여 <소말리아 민족운동> 과 <통일소말리아회의> 가 연합하게 되고 이 세력이 친미 정책으로 전향한 바레 대통령을 타도의 대상으로 여기고 투쟁하여 드디어 1991년에 그를 권좌에서 밀어낸다.

그리하여 이 나라는 두개의 진영으로 분열된다. <소말리아회의>는 남쪽에서 수도 모가디슈를 점령하여 혁명정부를 수립했고, <소말리아 민족운동> 측은 북부지역에서 독립국가<소말릴란드 공화국> 을 따로 창건 했다.

남쪽 수도 모가디슈에 창건한 새정부를 대항하여 아이디드 장군이 주도하는 반대파 사이에 내전은 또 다시 계속된다. 결국 <아이디드 장군파>가 승리하여 1991년 11월에 <소말리아 국민동맹>을 결성하고 남쪽의 주도권을 확립한다. 그렇지만 <소말리아 국민동맹> 의 결성에도 불구하고 내전은 끊임 없이 계속된다.

끝이 없는 내전이다. 뿐 만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보기드문 최악의 가뭄이 닥쳐 온다. 그리하여 소말리아에는 30만여명이 전쟁과 기근으로 사망하는 비극이 속출된다. 이렇게 되자 미국은 소말리아를 기근과 굶주림에서 해방시키겠다는 명분으로 1992년 12월에 <국제연합평화유지군> 이라는 간판을 들고 소말리아에 미군을 파송한다. 하지만 평화유지군과 소말리아 아이디드 장군파 사이에 오히려 갈등이 생기고 서로 전투가 벌어질 뿐 기근과 가난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 결국에 평화유지군은 명분을 잃고1995년에 소말리아에서 철수한다.

그 후 4년 뒤인 1996년 8월, 아이디드장군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아이디드 2세가 <과도정부의 대통령> 으로 취임한다. 이 과도정부는 2001년 12월에 모든 정파들이 무장해제등를 골자로 하는 <평화안>에 합의하고 모든 정파들이 가지고 있는 병력을 통합하여 2,100명 규모의 <소말리아 국군>을 창설한다.

그리고 앞으로 4년간 <과도연방정부의회> 형식으로 국가를 통치해 나아가기로 합의 한다. 하지만 모든 합의는 물거품이 된다. 전국을 지배하는 통일정부는 독립후 오늘까지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내부에는 분열과 파벌 및 갈등으로 4분5열된다.

이 때 또다시 미국이 간섭하기 시작한다. 2004년 9월 30년동안 계속된 분파간 전쟁을 근본적으로 종식 시킨다는 거대한 <설계 대회>가 미국의 주도하에서 이웃 나라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개최된다. 4개 분파의 종족대표 각 파에서 각각 61명, 기타 군소집단대표 31명등 모두 총 275명이 나이로비에서 <과도연방회의> 를 진행 한다. 이 회의의 보이지 않는 조종자는 미국이었다.

그러나 북쪽에서 최초부터 떨어저서 독립 해 있는 <소말릴란드 공화국> 은 미국이 주도하는 나이로비 회의에 초청되지 않았다. 이 세력은 <소말릴란드 공화국>과 관련하여 30년 동안 남쪽에서 싸우는 분파간 더러운 전쟁에 일체 개입하지 않고 독자의 길을 지켜 왔다. <소말릴란드공화국>은 독자적으로 카힌(Kahin)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이슬람 범연합 UIC, Union of Islamic Courts>을 정치적 모체로 하여 강력한 자주적 민족운동단체로써 30여년 동안 침묵속에서 꾸준히 성장해 왔다.

나이로비에서 미국의 주도하에 진행된 소말리아 <과도연방회의>는 미국이 원하는 대로 결실을 맺었는데 대통령 선출과 과도정부 명칭을 채택하는등 미국의 각본대로 진행되었다. 대통령에 유스프아메드 (Yusuf Ahmed) 를 선출하고 나라 이름은 <과도연방정부> 라고정했다. (TFG, Transitional Federal Government). 이것은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케냐에서 새로 구성된 <과도연방정부, TFG> 는 친미예속 정부이며 미국의 절대적인 지원하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는 반민족적 정치집단 이다. 이제부터는 미국의 허락 없이는 저들끼리 분파간 싸움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한편 북쪽에서 30여년 동안 침묵하고 있던 <소말릴란드 공화국 UIC>은 2006년 6월에 <이슬람범연합,UIC> 의 체제를 강화하여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이 세력은 드디어 침묵을 깨고 조국해방의 과업을 위해 행동개시에 들어갔다. 싸움의 대상은 케냐에서 미국이 조작하여 만들어 낸 반민족적 친미 정치집단인 <과도연방정부> 이며 동시에 미국지배세력이었다.

<이슬람범연합 UIC> 의 행동개시와 그의 공세는 2006년 8월에 어느새 소말리아남부 전역를 휩쓰는 위력을 발휘했다. 다급해진 소말리아 과도연방정부와 미국은 12월에 에티오피아 군대를 끌어 들여와 <과도연방정부(TFG)>를 지원하여 위기를 모면하도록 했다.

여기에서 에티오피아가 소말리아 내전에 재빠르게 끼어 드는 데는 세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두 나라 사이에 역사적으로 국경선 싸움의 앙금이 쌓여 있는 과거 역사 때문이고, 둘째는 에티오피아가 기독교국 이기때문에 소말리아 이슬람교의 세력화를 결사 반대하는 것이고, 셋째는 에티오피아가 미국의 요구를 들어 줌으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 때문이었다.

이제부터 소말리아는 내분과 외세들 간섭 때문에 세계의 난장판이 되고 만다. 미국은 이슬람범연합(UIC)을 알케에다(Al Qaeda) 와 연관이 있다라고 억지 주장을 하면서 소말리아 내전을 <테로와의전쟁> 이라고 확대 해석을 하고 소말리아 내전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회피했다.

그러던 중 미국은 2007년 8월에 이들에게 <화해회담>을 제안 했지만 UIC는 완강히 거절 한다. 2008년 6월에 미국은 UIC의 온건파를 접근하면서 휴전을 끈질기게 제안했다. 하지만 UIC 온건파는 미국에게 <에티오피아를 철수시킨다면 협상에 응하겠다> 라고 오히려 더 강경히 맞서왔다.

한편 에티오피아 총리는 미국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미국은 소말리아의 순진한 민중들에게 유엔이 금지하는 화학무기 를 사용하고도 그 책임을 우리에게 전가시키는 야비한 짓을 하고 있다. 우리 에티오피아군은 절대로 그런 위험한 화학무기를 소말리아에서 사용하지 않았다>고 반발하면서 <내일이라도 소말리아에서 철수하겠다>고 공격했다.

이에 대해 는 소말리아 내전의 참상에 대하여 이렇게 보도했다.
<미국 CIA 의 지원을 받는 소말리아 과도정부군 (TFG) 은 악명 높은 폭군이며 순진한 민중들에게 폭력, 탈취, 강간 그리고 살해등을 제멋대로 20여년 동안을 해 왔는데 아무도 제제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온 나라는 뒤죽박죽 되었고 종족간의 분쟁만 점점더 심화되고 있다. 여기에 에티오피아군 까지 합세하게 된것은 2006년 12월에 부시 대통령의 특별조치에 의한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UIC를 무력으로 제압하여 소말리아에 평화를 회복할것을 게획하고 있지만 소말리아는 오히려 미국의 평화를 파괴하고 있다>

3.소말리아 해적들 미국과 소련의 이중대리전




1977년과 1978년에 미국은 소말리아를 지원하고 소련은 에티오피아를 지원했다. 그러던 미국과 소련 양국은 자국의 이익계산에 따라서 돌변하여 이번에는 미국이 에티오피아를 군사적으로 지원하면서 소말리아의 <자주 자립 민주세력>을 <반군> 이니 <좌경> 이니 하면서 침공의 이유를 만들고 감행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는 미국의 이익을 위하여 <이중대리전> 을 치루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소말리아에 왜, 어째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해적들이 발생 했는가를 잠시 살펴본다.
그 발생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30년 전쟁과 18년 내전을 인하여 100만명 이상이 이세상 어느 나라에서도 난민으로 받아주지 않으니 이들이 살아남을 곳은 바다에서 떠돌이 인생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지난 1991년 소말리아가 내전으로 휩싸이면서 국가로써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자 자연히 해적들이 발호하기 시작 했으며 그 후 꾸준히 해적들은 생존을 위하여 자동화 무기로 무장하여 인근 해역을 통과하는 선박들을 공격하며 살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미국 크리스쳔시이언스모니터(CSM) 는 최근 소말리아 해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소말리아 젊은이들에게 해적이되는것 말고는 마땅한 대안이 없다. 3년 전에 100여명이던 해적은 1000명으로 늘어 났으며 그 수는 날마다 늘어나고 있다> 라고 보도 했다. 하지만 소말리아 해적의 수를 정확히 파악한 나라는 아무도 없다.

소말리아 해적이 벌어 들이는 돈은 반군에게는 물론 정부 쪽에도 상당액수 가 건네진다 라고 케냐의 정부 당국자는 염려의 말을 했다.

All Africa News 는 <소말리아 사람들은 나가고 무기는 들어오고> 라는 기사를 발표했다. 소말리아 분쟁지역에서 무기를 원하면 2주 안에 무기가 배달 되는데 해적들은 무기를 예멘등 여러 곳에서 50달러에 구입하여 230달러에 판매 된다고 한다.
<나이로비=로이터> 보도에 의하면 2008년 올 해 들어 소말리아 해적들이 각국 선박을 납치해서 벌어 들인 액수는 1800-3000만 달러 라고 보도했다. 금년 들어 지금까지 소말리아 해역 해상에서 30척이상의 선박들이 소말리아 해적에 의하여 납치되었다. 해적들은 선박 한 척당 50만 달러에서 200만달러 까지 받는 것으로 니타 났다.

미국을 비롯하여 세계 신문들은 소말리아 해역에서 선박 납치사건 보도로 신문에 도배질을 하고 있다. 그 많은 기사들 중에서 주요한 몇 개의 제목만을 뽑아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그리스 화물선과 선원 19명 납치됐으며 이달 들어 세번째 납치사건이 발생 했다.
• 한국 해양수산부 발표문 <소말리아 해적 조심하세요> 2007년도 해적 납치사건 263건 (2006년보다 10% 증가)
• 우크라이나 선박이 러시아 T-72 탱크 33대와 로켓 추진탄환을 싣고 가다가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 되었다. 몸값 2000만 달라에 교섭중이다. 미국은 러시아 탱크 33대와 포켓 추진 탄환의 행방를 감시하기 위하여 미해군 군함을 급파 했으며 소련도 자국의 화물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전함을 파견했다. 이래저래 소말리아 해적은 <미국-소련의 이중대리전>을 치를 운명에 놓여저 있다.
• 2007년10월에 북조선 선박 대흥단호가 해적에게 납치되었다가 다행히 몇일만에 풀려 나온 사건이 발생 했다. 풀려 나온 데흥단호 선장은 평양에 돌아가 용감히 싸워 풀려난 데 대하여 노동자에게 수여하는 <노력영웅칭호> 를 받았다.
• 프랑스는 5개월 만에 두번째 발생한 자국인을 납치한 소말리아 해적을 공격하여 구출에 성공 했다.
• 남한 어선 <동원628호>가 해적에게 납치됬는데 선원 8명이 지난 19일동안 잡혀 있는데 한국은 미국산 소고기 문제에만 온통 관심을 돌리고
언론들은 납치된 선원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라고 납치자 가족들은 하소연 했다.
• 남한의 마부노선 1.2호가 납치되여 174일간 억류되여 동물처럼 취급당하고 있는데 몸값 교섭때문에 사경을 헤메고 있다.
• 일본선박 골든 노리호는 선원23명과 강한 벤젠 4만톤을 싣고 가다가 해적에게 납치되었다고 보도 했다.

위에 열거한 짧은 기사들을 통하여 소말리아의 해적문제는 단순한 소말리아의 해적문제가 아니라 미국과 소련등이 관련된 국제 문제임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소말리아-에티오피아 전쟁도, 소말리아 18년 내전도 그리고 소말리아 해적의 운명도 모두다 하나 같이 미국의 이익을 위하여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대리전을 치루고 있는 것이다.

4.미국의 진지한 자성을 바란다.


세계 반전평화운동가들이 이락전쟁에 대하여 <수렁에 빠졌다>라고 말하듯이 미국은 소말리아 전쟁에 있어서도 역시 <수렁> 에 빠져 있는 실정이다.

아흐메드 소말리아 과도정부 대통령은 <이제는 미국의 도움을 받아 해적들과 싸우고 싶다> 라고 어처구니 없는 말을 했다. 해적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 해적과 싸우갰다는 생각은 역시 또 미국이 강요하는 생각이다. 미국은 <우리는 신의 자식들이고> 테러리스트들은 <악마의 무리들이다> 라고 하는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 국제사회에서 미국을 <신의 자식> 으로 보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

미국은 세계 인구의 5%에 불과하지만 세계 자원의 25% 이상을 소비하면서 지구환경에 엄청난 온실까스를 배출하여 해악을 끼치고 있는 국가 이다. 미국때문에 그 얼마나 많은 나라들이 기근에 빠저 있는가? 미국이 지금까지 세계에서 일으킨 전쟁 횟수는 1백여 차례가 넘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들은 처음 아메리카 대륙을 강점하면서 숱한 인디언들을 학살했다. 1636년의 인디언 대학살을 비롯하여 50만명의 필리핀인 대학살, 멕시코 침략 대학살, 과테말라 학살, 도미니카 공화국 공격 때의 학살, 파나마와 이락 침략만행 등을 포함하여 미국 지배세력이 전개한 학살 및 침략행위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리고 1991년부터 오늘까지 소말리아 침략은 모두 다 무단침략 행위들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신임 포터 고스 국장은 취임 1주년 기념연설에서 직원들에게 말 하기를 <미국은 앞으로 세계 정보 확보를 위해서 상상 못할 지역까지 전세계 구석 구석 까지 미국 정보요원을 파송 시키겠다> 고 언명 했다. 그는 또 말하기를 <미국에게 필요한 것은 (민주냐 독재냐) 가 아니라 (친미냐 반미냐) 가 더 중요하기때문에 여기에 초점의 잣대를 두고 정보 활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역설 했다.

미국의 대외정책은 겉으로는 인권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인권과는 거리가 멀다. 민주적 절차에 의하여 수립된 정권이라도 미국의 필요에 따라서 데모나 군사작전 또는 암살 등의 방법으로 그 나라의 정권을 전복시킨다. 미국의 MIT 대학의 존 터몬 교수는 미국의 이러한 정책에 대하여 <미국의 기독교 복음주의적 새로운 형태의 식민침략이다> 라고 규정한다. 사실 존 터몬 교수의 규정대로 오늘 남한 교회는 비도덕적이며 비이성적 열성으로 무장한 복음주의자들이 마구잡이로 나서서 인종차별 문제나 사회정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현지의 토착종교와 사회제도를 무조건 공격하면서 미국찬양과 강자논리의 호전성만 드러내고 있다.

미국의 양심을 대표하는 진보적 사회학자 하워드 진 교수는 말 하기를 <미국을 깡패국가 라고 인식한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점차 많아지고 있다. 나는 우리가 강자의 오만에서 벗어나 우리 스스로를 정직하게 바라보는것 이야말로 국가에 진정으로 봉사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라고 말 했다.

침략을 일삼아 온 미국의 지배세력, 이 양키들에게 있어 정의는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 민족을 침략한 일제도 가쯔라-태프트 밀약으로 뒤에서 사주한 미국 지배세력, 그러고서도 우리 민족을 분단한 미국지배세력, 이 미국 지배세력은 오늘에 와서도 독도의 영유권이 일본에 있다고 뒤에서 두둔하는 미국 지배세력, 코리아 전쟁을 경험하고서도 또 다시 한미군사훈련을 벌이며 조국반도에서 제2 코리아전쟁을 추진하고 있는 미국지배세력, 이 세력은 지구촌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잔인한 침략전쟁을 일으키며 작은 나라들을 수도 없이 괴롭혀 왔다.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소말리아>도 그 중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밝힌다.

<소말리아>의 발자취와 그 처지를 통해서도 우리 민족이 하루 속히 분단과 분열을 종식하고 통일조국을 만들기를 간절히 호소한다. 그리고 이제 미국지배세력도 정신차리고 반성하지 않는다면 미국의 운명은 고마제국의 멸망과 같은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진지하게 돌아보기 바란다. (끝)




*아래 특별연재 논문들을 짤각하여 눌러서 열람하세요!


[유태영 박사]<자주국가>로 방향전환한 <나이제리아>

[유태영 박사]<남아공 역사가 주는 교훈들>

[유태영 박사]아프리카<케냐>역사에서 교훈을 찾는다

[유태영 박사]짐바브웨의 독립 영웅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

[특별기고]인종청소와 학살이 난무하는 비극의 나라 수단(하)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로그인

[부고]노길남 박사
노길남 박사 추모관
조선문학예술
조선중앙TV
추천홈페이지
우리민족끼리
자주시보
사람일보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한겨레
경향신문
재도이췰란드동포협력회
재카나다동포연합
오마이뉴스
재중조선인총련합회
재오스트랄리아동포전국연합회
통일부


Copyright (c)1999-2024 MinJok-TongShin / E-mail : minjoktongshin@outl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