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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음악가 안용구교수 방북: 65년만의 혈육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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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8-10-29 13:20 조회3,3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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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의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가들(정경화, 강동석, 김영욱 등)을 길러 낸 원로음악가 안용구 선생(전 피바디
음악대 교수)이 지난 9월 이북을 방문하는 기간 65년만에 혈육을 상봉한 소감을 쓴 글을 민족통신에 기고했다.
그의 방북기를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IMAGE##>
[특별기고]방북해 "65년만의 혈육상봉"




*글:안용구 선생(전 피바디 음대 교수)


<##IMAGE##> 나는2004년에 펴낸 나의 회고록의 제목을 ‘한 마리의 새 가 되어’ 라고 붙였다.

그 이유인즉 내가 한 마리의 새가 되어 남과 북을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싶은 소원을 그 책에 반영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조국을 떠나 미국에서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남한에는 열 번 이상, 그리고 나의 어린 시절을 보낸 그리운 고향이 있는 북한에는 다섯 번 다녀왔다.

남한은 연주, 특강, 가족방문, 제자들이 차려준 환갑잔치, 팔순잔치 등의 참석차 방문했고, 북조선에 처음 간 것은 작곡가 윤이상 씨와 같이Berlin과 Moscow 를 거처 조선민항을 타고 평양의 순안 비행장에 발들 디딘 1986년이었다. 반민족적 악랄한 반공교육으로 (머리에 뿔이 달린) 사람들이 사는 “저주 받은 나라”로 잘 못 인식되었던 북조선을 방문하는 데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도착해서 첫 인상이 내가 살고 있는 미국에 비하면 너무나 다른 모습의 나라일 것이라는 세뇌된 고정관념과는 달리, 그 곳 사람들은 말도, 생긴 것도, 먹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심지어 농담까지도 우리와 같아 반만년 역사를 함께 살아온 민족의 동질성을 확인했고, 더욱 깜짝 놀란 것은 Lorin Maazel이NY Phil의 평양공연을 마치고 나서 평한 바와 같이 북조선의 서양음악이 손색없는 국제수준이었다는 점이다.

북한의 국립교향악단은 김병화 씨의 지휘 아래 이해하기도, 기술적으로도 어려운 윤이상 씨의 교향곡을 거뜬히 연주해 훌륭한 녹음을 해냈고 현재 남아있는 윤이상 씨의 레코드 대부분은 평양국립교향악단이 녹음한 것이다. 한 가지 유감인 것은 현악기의 품질이 그리 좋지 않아 음색이나 음량이 부족했던 점이라 할까.

그 후 나는 그 곳에 갈 때마다, 또 인편이 있으면, 내가 쓰던 악기나 때로는 새로 산 악기를 북한의 교향악단이나 음악학교에 기증을 했다.

6.25 때 해어진 나의 은사 문학준 선생님과 서울대 음악대학 동문들과의 상봉했을 때의 감격은 내가 다 글로 쓸 수가 없다. 그 후 통일음악회, 특강, 연주, 원산 고향 방문 등, 여러 차례 다녀왔지만 2002년 후 6년 만에 지난 달 그리운 북녘 땅을 찾았다. 4월 축제 외에 9.9 건국절은 북의 가장 큰 행사이다. 더구나 이번은60주년을 맞아 미주에서 통일운동을 하는 인사들에 끼어 참석하게 되었다.

<##IMAGE##> 이번 평양 방문 중 북조선의 분위기와는 달리 국제사회에서는 갑작스러운 북미관계 이변, 그리고 납득할 수 없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악화 소문 등이 무성하였지만 모든 행사들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 도중에 내 개인으로서는 뜻하지 않은 감격스러운 일이 발생했다. 평양 고려호텔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새벽에 전화가 울렸다. “사촌 형 되는 안 용선 씨를 찾았는데 만나보시렵니까?” 하는 내용의 전화였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 직계 가족과 웬만한 친척들은 8,15나 6,25후에 월남하였는데 내 기억에 월남하지 않은 친척은 나의 당숙 님의 아들 안용선 씨뿐이었다. 그 분이 만일 살아있으면 나이가 나보다 6세나 위이니 현86세일 것이다. 나에게 남아있는 생생한 기억으로는 나는 아직 국민학교를 다닐 때 그 형은 원산상업학교 학생이었는데,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투옥, 2년 동안 가진 고문을 받고 죽기 직전에 걷지도 못하고 업혀서 나와 출옥 후 부친이 경영하던 고려병원에서 휴양하던 모습이다.

내가 연주 차 2002년 북조선을 방문했을 때 기억을 더듬어 용선 형의 주변상황을 설명하고 기회가 있으면 꼭 만나 뵙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한 적이 있는데, 지난 달 모처럼 평양을 방문한 다음 날 후에 불시에 연락이 왔다. 그처럼 그립던 용선 형이 지금 호텔 로비에 와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허겁지겁 아래 층으로 내려갔다. 순간 나의 시선은 로비 한 모퉁이에 호리호리한 키가 큰 노신사의 모습에 멈췄다. 그의 모습은 65년 동안 나의 기억에 침전되어 있던 희미한 옛 모습(이미지)와 겹쳐(오버랩) 서서히 기억 밖으로 되살아 왔다.

나는 말 한 마디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옆에 두 중년 여인이 있는데 딸과 며누리라고 했다. 86세 노인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젊어 보였다. 또한 딸과 며느리도 건강하고 표정도 밝아 보였다. 어제 아침 새벽에 연락을 받고 급히 기차를 타고 청진에서 하루 종일 걸려서 왔다고 했다.

우리는 손을 맞잡고 65년간에 지나온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몰라 고려호텔 다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한도 없이 가족, 친척 안부에 관한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우리 화제의 인물들 대부분은 이미 타계했고 살아있어도 서로 만날 희망도 없는 처지였다. 그 형은 나보다 기억력이 좋아서 많은 친척을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품에서 꺼내 보이는 65년 전에 우리 어렸을 때 사진은 참으로 감격스러웠다.

<##IMAGE##>나는 형의 손을 만져보았다. 그의 손은 무척 부드러웠다. 북의 고관들과 악수를 해보면 그들도 노동자들과 같이 작업 현장에서 노동에 참여하는 솔선수범하는 미풍이 있기에 대부분 손이 거칠었는데 용선 형은 예외였다. 형은 해방 후에 김책공과대학(미국MIT의 해당함) 에 입학하여 배 만드는 조선 설계를 공부해서 일생 동안 연필만 만졌다고 한다. 현재 자기 아들은 그가 직접 설계한 어선으로 어부로 일하고 있고 지금은 생선 장사를 하며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나의 형이 일제 때 감옥에 가서 고문을 받고 다 죽어 나온 기억을 이야기했더니, 형의 말이 당시 자기를 악랄하게 고문하던 조선인 앞잡이 형사가 둘 있었는데 한 사람은 그 후 ‘천벌을 받아’ 암으로 죽었고, 다른 한 사람은 월남해서 대전의 경찰국장을 지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나는 65년 만에 만난 혈육들과 냉면을 먹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평양의 옥류관은 잘 알려진 냉면 집이지만 고려호텔의 냉면도 천하의 일품이었다. 우리는 불고기와 냉면을 시켜먹었는데 모두들 어떻게 맛있게 먹는지 나는 한동안 흐뭇하게 쳐다 만 보고 있었다.

헤어지는 시간이 임박할 때 나는 ‘고난의 행군’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간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느냐고 물었다. 나의 안타가운 표정을 보면서 며느리가 “우리는 일 없어요” (북에서 쓰는 괜찮다는 표현) 우리는 잘 살고 있어요,” 하면서 오히려 나를 걱정해 주었다.

나보고 미국에서는 풍부하게 살겠지만, 그러나 조국을 떠나 객지에서 얼마나 고생하느냐고 도리어 나를 걱정한다. 나는 옆에 아무도 없을 때 조용히 물어보았다. 미국이나 남한에서는 북조선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백 명씩 굶어 죽는다고 하는데 그게 정말이냐“ 하고 물었더니 깔깔 웃으면서 무슨 터무니 없는 거짓말이냐고 반문하였다.

“물론 우리도 배고픈 어려운 시기가 있었지요. 그러나 사람들이 굶어 죽는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거짓말 할 사람도 아닌데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그런 질문 한 것이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서로가 착각을 하고 있고 행복이란 가치나 기준이 어디 있느냐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그런 풍문이 없었다고 치면 세 가지로 해석이 된다.

첫째로는 배고픈 북녘 동포들이 무릎을 꿇고 항복해 오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얘기거나, 둘째로는 북한 사람들이 다 굶어 죽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소리이거나, 셋째로 북한 사람들이 다 굶어서 북한이 금방 망한다고 악 선전을 하는 것이거나…그러나 나는 아직도 정답을 찾지 못했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기약을 했지만 우리가 얼마나 더 살아 또다시 만나게 될까 하는 의문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의 귓전에는 용선 형이 “나는 앞으로 몇 일, 아니 몇 달을 이 꿈 같은 상봉의 추억과 환상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야, 용구를 만났으니 이제 죽어도 한 이 없다” 라고 하신 말씀이 지금도 메아리로 남아있다,

나와 용선형이 겪어온 이산의 아픔은 우리 동포 1천만 이산가족들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무수히 들어 왔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뼈를 깎는 아픔으로 날이면 날마다 이산가족 상봉의 그날을 고대하면서 살아가는지를.

제1세 이산가족들이 고령화되고 있어 문제는 더욱 심각해 진다.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1988년부터 지난 달 말까지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는 모두 12만7321면으로 이 중 27.9 퍼센트인 3만5484명이 사망했다. 올해에만도 1-9월에 2184명이 숨졌다고 한다. 그리고 전체 신청자 4명 중 3명이 70세 이상이 고령자로 나타났다.

이 통계 자료는 이산가족 상봉이 절박한 상황이라는 사실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이산가족 상봉도 차단하고 있는데 이것은 가장 악랄한 반(反) 휴머니즘적 행위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차제에 이산가족들의 천추의 한을 푸는 최선의 길은 역시 통일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 깨닫게 되기를 기원한다.(끝)

<##IMAGE##>



*안용구 교수의 걸어 온 발자취--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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