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영 박사]<남아공 역사가 주는 교훈들> > 기타

본문 바로가기
영문뉴스 보기
2024년 4월 27일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사이트 내 전체검색
뉴스  
기타

[유태영 박사]<남아공 역사가 주는 교훈들>

페이지 정보

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8-10-07 16:45 조회3,015회 댓글0건

본문

아프리카의 나라 <남아공-South Africa)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 이후 그 향방이 어떻게 될 것인가가 세계관심을
모으고 있다. 유태영 박사는 남미 나라들에 이어 아프리카 나라들을 연구하면서 케냐에 이어 이번에는 남아공에
대해 연구한 논단을 민족통신에 특별기고했다. 남아공 역사가 우리 민족에게 주는 교훈들이 듬북 실려 있다.
그 내용들을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남아공 아파타이드<인종차별제도>페지14년

인종차별제도 페지된 후 중도우파로 몰락




*글:유태영 박사(재미동포 통일운동 원로)


<##IMAGE##> 남아공(South Africa)의 미래가 세계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금 남아공이 중도우파로 인하여 몰락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도대체 무슨 말 인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현재 인구 4천480만명을 갖고 있는 나라로 대부분 흑인(79%)이고 백인은 9.6%에 불과하지만 오랜동안 백인통치하에서 지배당해 왔다. 남아공은 350여년동안 영국의 식민통치하에 있다가 지금으로부터 14년전인 1994년에 만델라의 감옥생활 27년의 장기 투쟁의 결과로 영국이 물러가고 남아공은 독립을 쟁취했다.

독립투사이며 건국의 아버지인 만델라는 초대 대통령으로 1994-2004년까지 집권하여 남아공의 신생 새 정부의 기초를 닦는데 성공 했으며 세계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그에게 1993년에 노밸평화상을 수여 했다.

2004년에 평화적 정권교체로 음베키 대통령이 정권을 인수하여 아프리카의 맡형이라고 불리움을 받는 남아공의 제 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런데 지난 5월11일부터 전세계에 머리기사로 퍼저 나가고 있는 소식은 남아공의 <아파타이드 에서 제노포비아>로 라는 뉴스가 전파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백인우월주의 인종차별 정책에 350년 동안이나 시달렸던 남아공에서 이제는 흑인들끼리 제노포비아, 즉 <외국인 혐오증>으로 무차별 학살만행이 벌어지고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소식이다.

이번 학살만행으로 인하여 5월16-19일 3일 동안에 22명의 외국인 <흑인>이 숨지고 수십여 명이 부상을 당하고 그리고 200여명이 체포 됐으며 3천여명이 주거지에서 피신을 했다.

남아공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하여 우선 알아보기 위하여 남아공에서 공부하고, 결혼한 후 직장생활 15년을 했다는 한 동포 여성이 인터네트(Inter-net)에 올린 글을 간추려서 소개한다.

<남아공은 몇 달 전부터 전기 위기를 맞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정전이야…어째든 결론은 예고 없이 정전 한번 되었다하면 두 세시간 넘게 전기가 안 들어와 가정집은 물론 사업체, 식당등은 음식물이 썩어 나가고, 공장들은 가동이 뒤죽박죽 이고… 남아공 밥줄인 광산도 올스톱(완전 중단) 이란다…>

<불 일찍일찍 끄고 일찍 자면 똑똑해 진단다? 백인들 자기네 집에 불 끌 생각 안 하고 지랄이다. 이것들은 정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르는건가?>, <아파타이드(Apartheid> 해체 이후 세상에서 최고로 유명하고 효율적이였던남아공 정권의 산업이 이렇게 맥없이 무너 지다니… 맞아, 수도물도 억망이고,인구 1/3이 시달리는 에이즈에 보건부 장관 미친년은 에이즈병 고치려면 감자양파 많이 먹으라고 지껄이고 있고, 경찰 수뇌부는 수장부터 말단까지 부정부 패에 대하여 조사 안 당하는 놈 없고…>

<이번에 수석졸업한 예쁜 여고생 강도에게 총 맞아 하반신 마비… 또 70 다된 할머니에게 팔팔끓는 물을 몇 번이나 부었다지, 그 할머니 집에 뭐 털것 있다고… 아니 하나 또 있지, 겁없는 남아공 도둑 대통령관저 털었다고 시가 4 백만원 하는 낙뇌예방용 알루미늄 철선을 훔쳐갔다고 하는데 이정도 범죄는 아침 뉴스의 자그마한 뉴스거리밖에 못 된다>

<그런데 남아공에서는 1년에 12만 6천여건의 무장강도 사건이 발생해도 특별 한 뉴스 거리가 될수 없고 보통 예사로 생각을 하고 만다. 강도 안 당한 놈 찾는게 더 힘들다. 예전에는 돈만 내주면 괜찮았다는데 요즘엔 다리미로 지지고 달아난다면서? 윤간도 말들 안하지만 엄청나게 자행된다고..그래 아직 난 당하지 않았서, 그렇지만 해 떨어지면 밖에 못나가. 누구라로 갑자기 무슨 변 당하고 경찰한데 뭘 바라는 것은 진짜 바보 짓 이야>

<능력 있는 놈들 다 떠나 가고 개판이다. 능력 있는 의사 좀 본지 오래다. 배공관 기술자 불러도 더 망쳐 놓지만 않으면 다행이다. 전문직중에서 외국에 연고 없고나 돈 지지리 없는 무능한 넘들이 남아 있다. 전기 기술자 부르느니 그냥 직접 한다는 친구 태반이다>

<그래서 난 남아공을 떠날 때가 된 거지>

<지대로 망하려면 아직 15년이 더 있어야 하겠지. 수도 끊기고 전기 공급 안되고, 무법 천지 변하려면 25년 걸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걸 그대로 참고 보아줄 만큼 난 남아공을 사랑하지 않나보다>

<남아공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도 가슴이 아프다.지난 해 만해도 이렇게까지 가슴이 아리진 않았다. ‘망하진 않을 거다’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이젠 두렵다. 내가 자라오며 내 한부분이 된 이 나라를 완전히 잃을가봐 가슴이 아프다. 그래서 욕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최대한 빨리 떠나야 한다는 마음은 바뀌지 않는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South Africa>

* * *

위의 한국인 여성의 인터네트 글은 오늘 남아공의 사회상의 일면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 맥락과 서구 제국주의와의 관계를 뿌리 깊이 파헤쳐 본다면 위에 인용한 글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 하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를 불가 한달여 앞 두고 있는 오늘 <흑백 대결>로 선거가 치러지는 상황을 바라보면서 남아공의 <흑백 대결>의 진상은 과연 어떠한가 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 보면 <미국의 흑백문제>와 <남아공의 흑백문제>는 근원적으로 동질의 문제이며, 시대적 으로도 역시 동시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1.유럽의 백인들 남아프리카 침범


유럽의 백인들은 아프리카의 최남단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은 해안선을 타고 케이프 반도 라고 새빨간 거짓 말을 하고 있다.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약 1만년전 석기시대와 철기문명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유품들을 남아공 지역에서 많히 발굴 했다.

쇼나 왕국이 1,200년경에 이곳에서 번영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또한 주요 부족들인 줄루족, 코사족, 바소토족, 바페디족, 벤다족, 츠와나족, 총가족, 스와지족, 은데벨레족들이 남아공 전역을 배회하고 있었다.남아공은 옛날부터 11개 공용어를 가지고 있는 다부족의 나라이다.

백인들의 최초의 침입은 1652년에 네덜란드의 "The Dutch India company"의 리비크가 130명의 남녀로 구성된 탐험대를 이끌고 상륙한 때 부터 시작 했으며 그 후 많은 네덜란드 인들이 본국에서 남아공으로 이주해 왔다.

네덜란드는 개신교 장로교 (Presyterian)의 나라인데 로마 가톨릭(Rome Catholic) 교회의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추구하여 1700년대에 미지의 나라 남아공으로 이민와서 정착 했다.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의 장로교는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Anglican Church) 와도 적대적 관계로 멸시와 박해를 받아 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남아공에 정착한 네덜란드인들의 이민역사가 보여주는 그들의 발자욱은 장로교의 신도들(Presbyterians)이라기 보다는 세속적 침략자들의 행위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장로교는 <선택론> 이라고 하는 특이한 교리를 주장하고 있다.

<선택론>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태어 날 때부터 운명적으로 신의 <선택>에 의하여 <나는 백인으로 태어 났고 너는 흑인으로 태어났다> 라고 해석을 한다. 백인은 구원을 받도록 선택을 받았으나, 흑인은 그렇치 않다고 주장 한다. 네달란드인들은 장로교의 기본 교리를 악용하여 침략 행위를 정당화 하는데 구실과 도구로 삼았다.

네덜란드인들은 영국인들 보다 약 100-150년 먼저 남아공에 상륙했다. 그들은 흑인들에게 철저한 인종차별적 교육과 장로교의 보수적 전통문화에 맹종하도록 교육 했다.

백인들은 신의 선택을 받은 우월한 인종이기 때문에 선택을 받지 못한 열등한 흑인들을 지배하고 교육 시킬 의무와 권리가 있다고 주장 했다.

학교에서 흑인들에게 백인을 위해서 봉사하는 노예제도를 가르칠 뿐 제대로 된 학과를 가르치지 않았음으로 흑인들은 읽고 쓰는 것도 모르는 문맹으로 만들었다.

남아공에서 네덜란드인들을 <보어인> 이라고 부르는데 네덜란드 어로 <농부> 라는 뜻이다.

현재 남아공에 살고 있는 <보어인>들은 수 세기동안 살아 온 네덜란드인의 후손들이다. 또 한편 혼혈된 후손들도 계속 번창하여 수가 많아 졌다. 혼혈된 후손들을 <보어족- Boer> 이라고 부른다.

혼혈이든 혼혈이 아니든 어째든 네덜란드의 후손들은 남아공 땅에서 절대 다수의 <터주대감> 으로써 네덜란드인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다.

영국인들의 출현

영국인들이 선교사들을 동반하면서 남아공에 처음 상륙하여 식민지 침략을 시작 한 것은 1795년경 이었다.

영국인들은 흑인 원주민들을 침략의 대상으로 여기기는 했지만 그러나 흑인 원주민들 보다 더 중요한 우선적 침략의 대상은 보어인들 이라고 생각 했다. 영국인들은 <보어족>이 강력한 경쟁자 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유럽의 중세기 역사는 종교들 간에 전쟁의 역사 였다. 대영제국의 국교인 "Anglican Church"는 "Rome Catholic Church"를 적대시할 뿐만 아니 기타 적은 나라들의 교회들을 이단시하여 적대하고 있었다.

특히 제네바(Geneva) 의 장로교 신학자 칼빈 의 국가관과 신학적 사상을 영국의 성공회는 반대했다. 특히 장로교의 전통과 장로교의 특이한 교리인 <예정론>을 영국 교회는 부인 한다.

무슨 말 인가하면 유럽의 두 교회의 전통적 싸움이 남아공에서 재현 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아프리카를 침략 하는데 있어서 <터주대감>인 네덜란드의 후손들과 그 후에 온 늦각이(New Comer)인 대영제국의 후손들이 서로 격렬한 싸움 을 벌렸다.

종교적 이질감이 문제이기도 했지만,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영토점령을 위한 영국인들과 네덜란드인들 사이의 대결이었다. 고래들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는 비극이 흑인 원주민들의 비극적 운명이 되고 말았다.

1790년경 처음 남아공에 상륙한 영국인들은 케이프를 전격 적으로 식민지화 하고 속도전을 감행하여 점점 북상하여 반투족을 정복하는 기새를 과시하고 있었다.

영국인들의 북상에 불안을 느낀 보어인들은 1830년에 노예들을 거느리고 새 지역으로 대이동을 했다. 보어인족들은 <오렌지 강> 과 <발 강> 을 건너 이른바 <대이동 Great Trek> 을 개시하여 서북 내륙 지대 <지금의 남아공의 수도인 요하네스버그> 에 정착하 여 그곳에서 두개의 공화국을 창건 했다.

<오렌지 자유국> 그리고 <트란스발 공화국> 두 나라를 창건했다.

영국 침략자들은 남아공 전역을 대영제국이 통치하는 식민지화를 목표하여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보어인들은 새로 창건한 두 개의 공화국만은 절대로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지 않는다는 확고한 정신으로 독립된 국가라고 강력히 선포했다. 네덜란드의 자존심을 분병히 밝힌 것이다.

보어인들이 독립국 이라고 강력히 선포한 <트란스발 공화국> 에 놀라운 행운이 찾아 왔다. 그 행운은 노다지(No Touch)라고 말할 수 있는 <무진장의 금광>이 처음 발견된 사실 이었다.

<노다지> 라는 말은 본래 일본인들이 조선에 들어와 금을 캐가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절대로 "손대지 말라", 즉 "NO Touch" 라고 공갈 협박 한데 유래된 말이다.

전 세계의 금 보급의 25%를 차지하는 금광을 <트란스발 공화국>이 보유했다. 금뿐만 아니라 다이아몬드도 대량으로 매장되어 있다.

마침내 1899년에 노다지 금과 다이아몬드 때문에 <영국>과 <보어인 족> 두 나라 사이에 큰 전쟁이 일어났다. 금광의 발견이 영국인 에게는 축복 이지만 보어인들과 흑인들 에게는 재앙 되고 말었다.

2. 보어전쟁



보어전쟁은 1899년에 시작하여 1902년 까지 1차 전쟁과 2차 전쟁으로 치러졌
는데 비전투원 어린이와 여성 2만7,927명이 강제 수용소 안에서 기근과 질병 으로 모두 다 죽었다.

전쟁은 어떻게 시작 되었나?

보어인들이 새로 창건한 <트란스발 공화국>에 무진장의 금이 묻혀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금에 목마른 영국인들은 물 밀듯이 몰려 들어 거주권을 달라고 강요 했는데 보어인들이 거절함으로 이를 구실삼아 전쟁을 일으켰다.

보어인들은 농부에 불과했지만 1차 전쟁때 민병대 5만명을 동원하여 총과 대포등으로 무장하여 영국군을 제압하고 물리쳤다.하지만 이것이 영국에게 큰 충격과 도화선으로 작용 했다.영국은 2차전을 개전하여 보어인 민병대를 사방으로 포위하고 217일 동안 계속하여 집중공격을 가하여 전멸 시키고 이 지역을 장악했다.

영국군은 보어인 민병대를 도와준 흑인들까지 원수로 취급하고 보어인과 흑인들의 주택 3만여 가구를 불태웠다.

1차 전쟁과 2차 전쟁이 모두 끝난 후 1902년 5월 31일에 영국과 보아인은 <베레니 킹> 조약을 맺고 보어인들이 창건한 <오렌지 자유국> 과 <트랜스발 공화국>은 독립국의 존엄를 상실하고 영국의 식민지에 소속되고 말았다.

영국은 남아공 전역을 장악하고 식민지 통치의 기반을 확립 했다.1910년에 영국은 드디어 남아공 <남아프리카 공화국> 을 창건 했다.새로 창건된 남아공은 백인 주권의 공화국이며 흑인들은 전과 다름없이 학대와 멸시로 노예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한 처지였다.

이 새로 창건된 남아공은 4대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케이프지여, 나탈지여, 오렌지 지역 그리고 트렌스발지역> 등 4개 지역 이다.

지금까지 초기 침략의 역사는 네덜란드인들과 영국인들 간의 세력 다툼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백인들 끼리의 전쟁 이었다. 흑인들은 싸움의 대상이 못되고 순전히 착취의 대상일 뿐 이었다.

하지만 1910년에 남아공이 처음 창건된 이후부터는 싸움의 양상이 크게 변화되여 백인과 흑인이 싸우는 <흑백전쟁>의 시대가 도래 했다. 물론 백인들 사이에 아직 남아 있는 사소한 이해 관계와 자존심 때문에 벌어지는 분쟁이 다소 있기는 했지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었다.

<흑백전쟁>에 있어에 보어인이든 영국인이든 하등의 차이가 없이 모든 백인들은 무조건 하나가 된다.

새로 수립한 남아공은 <정당정치제도>로 시작 했으며 처음 몇년 동안은 보어인계의 정당이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1915년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남아공이 영국편에 서서 독일과 싸웠다. 1948년 시기에는 우익 정당인 국민당 (National Party)이 정국을 주도 했다. 국민당은 <인종분리정책>을 제정 했다. 이 <인종분리정책>은 법률적으로 흑인 차별대우를 공식화 하기위한 법률이다.

3. 인종분리정책, 아파타이드


백인들이 지금까지 흑인들을 노예로 삼아 착취를 했지만 이제는 흑인들이 취급하기 곤란한 <애물단지>로 변했다. 그래서 백인들이 고안해 낸 것이 <인종분리정책: Apartheid> 이었다.

1948년에 <인종분리 정책>을 법률적으로 제도화 하는데 있어서 모든 백인들은 공동으로 역할을 했지만 그 정책의 가혹한 법률적 조항들을 채택하도록 한것은 뒤에 숨어 있는 영국 이었다.

영국인들은 케이프에서 식민 통치를 시작한 초창기부터 통행법( Pass Law) 을 제정하여 흑인들의 행동을 일일히 감시하고 통제하고 있었다. 이 통행법은 영국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흑인들이 절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길을 차단 하는 법이었다.


남아공이 새로 채택한 <인종분리 정책>의 여러가지 법적 조항들은 영국인들이 만든 <통행법>을 견본으로 삼아 작성한 것이다.

<통행법> 이란 어떤것 인가?
인도의 깐디는 영국이 인정하는 젊은 변호사 였다. 그가 남아공을 처음 방문 했을 때 흑인이라는 이유로 통행의 제한과 온갖 수모를 당했다. 깐디가 1등석 차표를 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3등석으로 옮기라고 명령 을 했다. 깐디가 명령을 거부하자 경찰은 그를 기차 밖으로 내던졌다. 남아공의 경찰은 <인종분리정책> 이라는 법률적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깐디에게 취한 조치가 법적으로 하등의 잘못이 없는 조치로 생각했다.

남아공이 제정한 <아파타이드> 의 주요 법률의 일부를 소개한다.

*인종간 결혼 금지 *백인과 유색인의 성관계 금지 *모든 등록증에 인종표
를 반드시 명시 한다 *반공법 엄수, *인종구역 거주제한, *공공시설의 흑인 공용 금지, *취학제한, * 이주제한, *시민권법에 의하여 남아공의 모든 흑인들을 외국인으로 간주 한다.

남아공이 제정한 <인종분리정책>에 의하면 백인들은 무소불능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 반면 흑인들은 노예뿐만 아니라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도록 되여 있다.

1948년에 시작 최악의 <인종분리정책> 은 42년 동안이나 계속 되었다. 1990년 2월 2일에 남아공의 마지막 백인 대통령인 D. 클레르크 대동령이 최악의 악법인 <인종분리정책>의 폐지를 선언 함으로 이것은 끝이 나고 말았다.

어찌하여 남아공 백인 극우 정권이 <인종분리정책>을 폐지했을까?
그 이유는 세계 2차 대전 종식후 국제정세의 변화로 인하여 남아공의 좌경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이었다. 선심이나 회개나 개혁이 아니라 좌경을 사전에 막기 위한 수단방법이었다.

1990년 2월 11일에 남아공의 백인 정권은 27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던 대표적
인 흑인인권운동가 넬슨 만델라를 석방 했다.



4. 인종차별 철페운동의 영웅 넬슨 만델라



<##IMAGE##>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의 철폐운동의 영웅 만델라는 누구인가?

넬슨 만델라는 1918년에 이스턴케이프에서 태어 났으며 34세에 변호사가 되여 정치 활동을 하다가 1963년 45세 수감되여 종신형을 받고 감옥 살이를 했다. 기나긴 투옥과 사형이라는 압제에도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온 삶을 희생 했다.

만델라의 27년 동안의 감옥살이에 대한 이야기는 태산처럼 많으나 꼭 이 하나만 이야기를 하겠다. 감옥에서도 인종 차별이 극심한데 만델라는 최악의 취급을 받아 음식도 나쁘지만 면회는 6개월에 한번 가족 면회이며 한 사람의 편지만 허락된다. 만델라는 많은 사람들의 편지를 거부하고 남미의 혁명영웅 체 게바라의 편지만을 받았다고 한다.

남아공의 백인 정권은 급변하고 있는 국제적 정세에 영향을 받아 할 수 없이 1990년에 <인종분리정책> 을 철페하고 만델라를 감옥에서 석방 했다. 석방된 만델라는 1993년 75살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며 77살때 1994년 4월 26일에 남아공의 역사상 최초로 모든 인종이 함께 참여하는 민주적 총선에서 당선되여 역사상 처음으로 초대 흑인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남아공 백인정권 시대의 마지막 백인 대통령 이였던 D. 클레르크 대통령은 이번 총선에서 부통령으로 당선 했다. 기적 같은 놀라운 사실이다. 백인이 흑인 밑에서 부통령을 한다는 이 사실은 지금까지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여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만델라 <흑인대통령> 정권이 처음 출범함으로 인하여 350년 동안의 백인 통치의 식민시대는 사실상 끝 났고 흑인들이 자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새 시대가 도래 하게 된다.

만델라 대통령은 집권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 ANC>의 당수로서 5년동안 집권을 하다가 1999년에 음베키 부통령에게 정권을 인계하고 은퇴 한다.

만델라 대통령은 수 없이 많은 공로와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그가 아직 완전히 성취하지 못한 그의 꿈과 과제들을 후임자에게 남겨 놓았다. 그가 남겨 놓은 꿈과 과제들에 대하여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흑백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기회를 제공 해야 한다.
* 성장보다 분배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 모든 국민에게 주택, 전기 수도등 기본시설 등을 제공 해야 한다.
* 보건과 교육에대한 사회적 제도화는 우선적 이어야 한다.

만델라 대통령이 뿌리 깊은 백인식민통치로부터 정권을 인수 받고 5년 동안의 짧은 집권기간에 이룩한 업적을 일일히 평가하기 보다는 차라리 그의 <이상과 꿈>을 평가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인간의 옳고 좋은 점은 감춰질 수 있지만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 만델라에 대한 평가는 아프리카 8억 흑인들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유색인(colored people)들의 마음속에서 결코 소멸되 않고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44세에 종신형을 선고 받고 27년의 옥중 생활에 백발이 되고 72세의 나이에 자유와 해방을 찾은 만델라의 굳은 신념과 정열, 그리고 민족애는 남아공의 흑인과 백인 모두의 기슴속에 영원히 남아 있게 될 것이다.


5. 남아공을 망친 타보 음베키 대통령


<##IMAGE##>타보 음베키 대통령은 1999년 6월 14일에 만델라 대통령의 후임으로 남아공의 제 2대 통령으로 취임했다. 음베키 대통령은 1994-1999년에 만델라 대통령 밑에서 부통령으로 있다가 대통령으로 취임 했다.

음베키 대통령은 남아공의 집권 여당인 <남아프리카 민족회의, ANC>의 총재이기도 하며 집권 초기에 공공 부문 부채가 60% 인것을 2005년에 35% 이하로 줄였고 외환보유고도 크게 증가하여 경제성장에 일정 능력을 발휘했다.

2005년 뉴욕 타임지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중에 남아공의 음베키 대통령을 포함 시켰다.

하지만 올해 65세인 음베키 대통령은 2005년에 제이콤 주마 부통령의 수뢰 스캔들을 문제삼아 부통령 자리에서 축출 했을뿐만 아니라 주마 부통령에 대하여 <좌경>이라는 의심을 나타내기도 했다.

하지만 축출을 당한 주마는 2007년 12월 민족회의(ANC) 총재 경선에서 현직 대통령 음베키 대통령을 밀어내고 승리하여 집권 여당의 총재의 위치를 차지하고 권좌에 복귀 했다.

음베키 대통령이 집권 여당인 ANC 의 총재직에서 밀려났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 하는가? 그리고 미국의 유력지 타임지가 흑인 음베키 대통령을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선정 했다는 사실이 또 무엇을 의미 하는가?

음베키 대통령은 2004년에 재선에 당선되여 2009년 4월까지 아직 6개월의 임기를 남겨 놓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음베키 대통령은 임기 6개월을 남겨 놓고 지난 9월 21일에 전국에 방영되는 테레비죤(TV) 방송을 통하여 대통령직 사퇴를 전격 발표했다.

뉴스에 의하면 남아공 집권당인 <민족회의 ANC> 는 9월 20일에 의회원 400석 중 2/3 회원들이 음베키 대통령의 퇴임안에 찬성 하였다. 지난 해 12월 전당대회에서 음베키 대통령이 집권당 총재직을 주마에게 빼앗긴 사건으로 인하 음베키 대통령의 입지가 약화되었다.

만델라 초대 대통령의 후광으로 부통령과 대통령이 된후 재선까지 당선되여 앞으로 임기 6개월을 남겨 놓고 있는데 갑자기 대통령직에서 쫓겨나는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원인과 이유가 무엇 일까?

음베키 대통령의 실정에 대한 요점만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과거에는 흑백의 빈부의 격차가 큰 문제였는데, 지금은 흑인들 사이에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고 있다. 음베키 대통령은 소수의 흑인 부유층과 자기 출신 부족에게만 편중 한다는 질타를 오래 동안 받아 왔다. 측근과 소수의 흑인 특권층만 혜택을 받았다는 것이다.

* 음베키 대통령의 집권 기간에 소수의 흑인부자들은 재산이 늘어 났고 수 없이 많은 서민들은 여전히 빈곤 하다.

* 음베키대통령은 물, 전기등 공기업들을 무리하게 사유화 하여 가난한 서민들을 암흑 속에 빠뜨렸다. 사유화한 기업주들의 횡포에 대하여 서민들은 분노하고 있다.

* 공기업들의 사유화로 인하여 늘어나는 실업자들에대한 정부의 대책은 전무하다. 정부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여 <외국인 인종학살>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남아공에서<외국인 혐오폭동> 발생은 전적으로 음베키 대통령에 대한 분노의
폭발이다.

* 외국 자본들의 무분별 유치로 인하여 정권은 강화되지만 민중은 또 다시 외국 자본의 노예가 되고 있다. 빈부의 격차로 인하여 사회는 양분대립되고 있다.

* 국제금융기구(IMF)와 같은 세력은 이 나라의 사회복지를 위한 지출을 못하게 함으로써 국가경제 는 호전이라고 선전을 하지만 서민들에게는 단지 그림의 떡으로 되고 있다.

* 음베키 대통령은 집권당의 총재인 주마에 대하여 좌경화 라는 색안경으로 중상모략을 하고 있다.

* 음베키 대통령은 만델라 전 대통령의 후광으로 집권 초기에는 성공 하는것 처럼 보였지만, 투쟁의 경험은 없고 외국 유학으로 쌓은 지식으로 인하여 서민층의 빈곤에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박약하다.

* 영국의 식민통치에서 벗어 난 남아공은 또 다시 미국의 신자유주의와 독점 자본주의에 의한 우파정권의 등장으로 인하여 흑백의 빈부격차는 여전하고, 또한 흑인사회 내부에서도 소수의 흑인들만 부자가 되고 있다.

*미국의 강요에 못이겨 음베키 대통령은 개방과 구조조정 정책을 비롯하여 공기업들의 무질서한 민영화 정책, 국제금융기구(IMF) 와 외국자본 도입 으로인하여 분배의 불공정등 허다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보다 더 큰 문제는 70%에 이르는 절대 다수의 흑인 빈곤층 실업자들이 음베키 대통령을 향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너에게 실망이야> 라고 외치면서 길거리에 뛰쳐나와 음베키 대통령을 향해 규탄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 큰 문제이다.

성난 민중들은 항의와 분풀이로 외국인 로동자들에대한 무차별 살인 행위,<제노포비아 폭동> 을 일으켜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민중항쟁 발생 3일에 22명 외국 노동자가 사망했고 수백명이 부상했고, 그리고 3000여 명의 외국인들의 난민이 발생하고 있다.


6. 남아공에 대안은 있는가?


음베키 대통령 축출에 앞장섰던 세력은 민족회의(ANC) 내 젊은 세력 이었다. 남아공의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경제헤택을 골고루 배분받지 못하는 빈곤층의 불만에 동조하는 세력이 바로 민족회의(ANC) 내 젊은 세력들이다.

2009년 4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주마 총재가 당선될것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 음베키 대통령의 사퇴로 친기업정책도 흔들릴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남아공은 민족회의( ANC)가 투표로 대통령을 뽑는데 임기는 5년이다.

주마가 내년 4월에 대통령이 될것으로 예상하고 있는데 주마는 어떤 인물인가?

주마(64세)는 음베키 대통령 처럼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음베키가 영국으로 피신하여 석사 학위를 받으면서 공부할 때 주마는 17세의 나이로 민족회의(ANC) 에 뛰어 들어 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을 철폐하기 위하여 투쟁하다가 투옥 되여 10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주마의 반대파들은 그의 경제정책이 <죄파 포플리즘> 이라고 비판 한다. 하지만 주마는 기득권층을 싫어하는 민족회의(ANC) 평회원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있다. 주마는 또 원주민의 절대 다수 부족인 줄루부족 출신이기도 하다.

음베키 대통령이 경제에는 성공 했지만 분배에는 실패했다는 여론이 점점 높아 지면서 공정한 분배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사회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주마는 서민층과 노동자를 대변하는 좌파적 입장을 강화하면서 청년과 여성동맹, 남아공 노조회의 그리고 남아공 사회당 으로부터 지지를 받아 정치세력을 확장 했다.

만일 주마가 예상한 대로 대통령이 된다면 그는 분명히 경제개혁을 앞세워 급진적 개혁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에서는 벌써부터 우려의 전망을 내놓고 있다. 미국은 남아공의 민족회의(ANC)가 좌파의 포로모양 아무힘도 못쓴다고 염려와 비난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남아공에 공식 방문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때 <남아공 사회당>이 클린턴의 남아공 방문에 앞서 그에게 보낸 공개편지는 매우 흥미롭다. 그 편지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당신의 남아공 방문을 환영하지 않는다. 클리턴씨, 당신이 미국 의회에 제출한 ‘아프리카기획조항’이라는 나쁜 조항을 우리에게 강요하면서 우리 나라를 방문하고 있다. 그 조항은 국제금융기구(IMF), 세계은행(World Bank )의 명령을 우리에게 강요하고 그것에 의해 우리나라의 주권과 경제적 간섭을 목적하고 있다.>

<당신은 우리나라의 모든 기업체들을 사유화 시키고 있으며, 당신의 제정책들은 우리나라의 빈곤층과 흑인들과, 다른 소수 민족들에게 더 많은 빈곤을 조장하고 있다>

만델라 대통령도 음베키 대통령도 흑인들의 <토지 무소유문제>를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했다.

2001년 7월에 <토지없는 사람들의운동 LPM> 이 결성 되였다. 이 운동은 역사적으로 백인들이 식민시대 불법적으로 토지를 강탈 했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되찾기위한 토지와 농지 개혁법을 제기하고 있는
운동이다.

오늘 남아공에서 실질적으로 토지문제의 해결없이 말로만 식민주의 청산을 논의 하고 있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45% 이상의 농촌인구에게 여전히 인종차별적 식민통치의 유산이 남아 있는데에도 불구하고 만델라-음베키 두 정권 하에서 토지반환의 약속은 전혀 이행되지 않았다.

백인으로부터 정권을 탈환한 민족회의(ANC) 는 공공연한 친자본주의적 거시경제 정책으로 재빨리 전환하여 계급적 커밍아웃을 했다. 음베키 정권은 신흥 흑인 중간계급 및 자본계급을 육성하는데만 정책을 수행하였을뿐 노동계급과 빈민들에게는 빵 부스러기 정도를 던져주었다.

음베키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으로 전환 했다. 음베키 대통령은 대규모 민영화만 진전 시키고 고용과 재분배 프로램은 전무 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노조 때리기 캠페인만 적극 추진했다.

주마는 앞으로 남아공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는 민심을 사로 잡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 남아공의 노동자들과 빈민 대중들은 점차 여러 모로 적극성을 띤 저항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다.

주마가 급진주의적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기는 하지만 남아공의 좌파의 과제는 적극적인 정치적 대안이 필요하다. 우파적으로 말 하나 좌파적으로 행동하는 풀뿌리 지지기반을 전국적으로 조직하여 주마를 위한 <정치적 대안>을 튼튼히 세울 수 있을지 향후 주목거리가 되고 있다.

음베키 대통령이 임기 6개월을 남겨 놓은 상태에서 민족회의( ANC)가 그를 축출 했다는 사실은 여러가지로 의미가 심장한 것으로 진단된다. 이것은 남아공의 운명을 좌우할 진보주의적 정치인들과 정치적 의식의 눈을 뜬 진보적 근로 대중의 미래가 세계 관심사가 되고 있다. 한편 우리 민족은 남아공이 걸어 온 발자취에서 많은 교훈들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특히 심하게 우경화되면서 신자유주의에 매몰되고 있는 이명박 정부가 남아공의 역사에서 배울점들이 많을 것 같다. (끝)



[유태영 박사]아프리카를 침략 해 온 제국주의자들(상)

[유태영 박사]아프리카를 침략 해 온 제국주의자들(중)

[유태영 박사]아프리카를 침략 해 온 제국주의자들(하)

[유태영 박사]아프리카<케냐>역사에서 교훈을 찾는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로그인

[부고]노길남 박사
노길남 박사 추모관
조선문학예술
조선중앙TV
추천홈페이지
우리민족끼리
자주시보
사람일보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한겨레
경향신문
재도이췰란드동포협력회
재카나다동포연합
오마이뉴스
재중조선인총련합회
재오스트랄리아동포전국연합회
통일부


Copyright (c)1999-2024 MinJok-TongShin / E-mail : minjoktongshin@outl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