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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 진단]후지모리가 망친 페루의 미래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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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7-11-08 19:37 조회3,2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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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는 그 동안 민족통신 특별기고를 통해 남미의 진보운동 흐름에 대해 심층적으로 진단해 왔다. 이번에는
일본계 2세가 남미 폐루에서는 최초로 대통령 직까지 역임하였으나 그와 관련해 일어난 사건들은 납득하지 못할
내용들이 산재해 있다. 페루 대통령까지 역임한 사람이 일본으로 도망가 일본 시민권을 취득하는가 하면 피신하는
동안 일본 국회의원에 출마해 낙선되고 그리고 일본 당국으로부터 추방명령을 받아 남미로 돌아가 지난 9월 22일
페루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다가 오는 11월 26일 재판정에 서게 되었다. 과연 그의 발자취를 통해
제3세계 시민들은 무엇을 교훈으로 여겨야 할까. 유태영 박사의 후지모리 인물론과 페루의 미래를 진단하는
특별기고를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후지모리가 망친 폐루 어디로 가고 있는가?

*글: 유태영 박사(615미국위원회 공동위원장)


1. 후지모리는 누구인가


<##IMAGE##> 후지모리는 1938년에 페루에서 출생한 일본게 2세이다. 그는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국립농업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하여 위스콘신 대학에서 농업학을 전공 했으며 그 후에 페루에 돌아와 농업기사로 사회에 진출한 명철한
일본계2세 페루의 희망주였다.

일본 이민 2세인 후지모리는 농업경제학자로서 페루에 정착한 일본농민들이 본격적으로 농경사회의 바탕을 형성하는 과정들을 놓치지 않고 관여하고 지도하
면서 일본인들이 페루의 그 광활한 땅을 소유하고 개척하도록 선구자적 역할 을 담당 했다.

1980년대 초 후지모리는 페루국영 TV 방송국에서 대담프로의 사회자로 활약했으며, 그 후에 페루국립농과대학 학장이 되었다. 1989년에 후지모리는 개혁운동 단체인 <변혁90운동>을 창당하여 처음으로 페루 청치계에 입문했다.

후지모리는 1990년 6월 페루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경쟁자와 치열한 선거전을 벌인 결과, 압승함으로서 페루 뿐만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 역사상 처음으로 동양계 대통령이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5세기 전 1500년대에 스페인의 침략자 피사로는 160명의 병력
을 거느리고 남미에 상륙하여 원주민 잉카제국의 황제를 붙잡아 사형시키고 페루
에 식민지 국가를 건설 했다. 놀랍게도1990년에 일본계 후지모리는 겨우10만정도 되는 일본계 이민자들의 힘을 배경삼아 전체 인구가2천6백만 이 되는 광활한 페루 국가를 손에 쥐고 지배하고 통치하는 대통령이 된 것이다.

잉카제국의 원주민들은 본래 아시아에서 건너 온 우리처럼 동양 문화권에 속하는
사람들이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후지모리가 페루의 대통령으로 당선이 된것은 옛날 원주민들이 스페인 침략자들에게 빼았겼던 잉카제국을 오늘 다시 후지모리가 되O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같은 사실은 우리 동양인으로서 참으로 기뻐하고 축하할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2. 후지모리의 야누스 두 얼굴



<##IMAGE##>일본계 이민자로서 1990년부터 2000년까지 페루의 대통령을지낸 알베트로
후지모리는 2007년 9월22일 페루 당국에의해 체포되여 현재 감옥에 갇혀 있으며 ,11월26일에 예정된 재판에서 30년의 감옥생활과 3천3백만 달러의 벌과금을 선고 받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어찌하여 후지모리는 이렇게 큰 죄인이 되였는가?

후지모리는 재임 10년간에 그를 대통령으로 투표하여 당선시킨 빈곤층의 희망을 완전히 저버리고 배신하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시장개방 지향적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무모 하게 추진하였다. 또 다른 한편으로 후지모리는 실로 어마어마한 인권적 차원의 범죄들을 많이 저질렀다.

후지모리는 1992년 4월에 앞으로 장기집권을 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기 위하여 의회와 대립하여 친위 군부쿠테타를 일으켜 의회를 강제 해산시키는 범죄를 강행했다.

1993년12월에는 군부의 힘으로 국민투표를 통하여 새 헌법을 제정하고 공포하여 드디어 장기집권을 할 수 있는 정치적 법적 발판을 마련했다.

후지모리는 2000년 4월에 3선에 도전하여 1차, 2차 재 투표까지 실시하여 억지로 3선 대통령에 당선하게 되었다. 하지만7월28일, 3선 대통령으로 취임식을 거행하는 당일에 전국적인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으며 이로 인하여 경비원 6명이 사망하는 비상 사태가 일어났다. 사태가 이와같이 번지자, 그동안 후지모리가 저지른 숨겨진 많은 범죄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기 시작 했다.

후지모리 정권이 야당 의원들을 돈으로 매수하는 장면이 담긴 비데오 테이프가 공개되었다. 그의 부정부패는 나날이 폭로되고 말았다. 언론을 강제적으로 장악하는 사태를 비롯하여 의회를 불법적으로 해산한 사건, 야당 후보들에대한 도청, 유권자 수천명 명부조작, 군인과 경찰의 신분증 위조 발급 조작, 국고 유용 승인등 집권10년 동안에 저지른 후지모리 정권의 부정부패와 비리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나타났다. 후지모리가 활용한 특공대에 의하여 비밀리에 살해된 사망자도 25명이나 되었다.

드디어 후지모리는2000년 11월에 일본으로 도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꾜의 한 호텔 방에서 팩스로 대통령 사직서를 페루 정부에 전송한 이후에 2005년까지 4년이 넘는 세월을 일본에 머무르며 소일해 왔다.

후지모리가 또 다시 세인을 놀라게 한것은 일본에서 도피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에
그는 일본의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는 특권을 악용하여 일본의 국회의원 선거에 후보자로 등록하여 선거운동을 맹렬히 전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다 행 인지 불행 인지 이 선거에서 낙선하고 말었다.

그리하여 2005년11월6일 후지모리는일본을 떠나야만 할 운명에 처했다. 일본은 국제적 체면때문에 후지모리에게 더 이상 피난처를 제공해 줄 수 없게 되었다. 미국도 지금까지 후리모리를 침묵속에서 옹호해 주던 태도를 돌변하여 이제는 모르는 척 했다. 후지모리는 하는 수 없이 최후의 수단으로 페루의 이웃 나라인 칠레로 망명했다. 페루와 칠레는 1932년에 망명자 보호협약을 맺은바 있기 때문에 후지모리는 그 법을 활용할 속셈이였다.

페루정부가 후지모리의12가지 범죄 조목과 응당 받아야 할 재판과 형벌의 타당성을 칠레 정부에게 명확하게 제시했다. 칠레정부는 페루정부의 이 요구를 솔직하게 인정하여 고등법원의 특명에 의하여 후지모리를 페루정부에게 양도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이제 후지모리는 이 세상 그 어느 곳으로도 도망 갈 곳이 없게 되였다.

금년 나이 69세인 일본계2세 페루의 전 대통령 후지모리는 AP통신이 전세계에 방영하는 화면을 통하여 고통스러운 비통한 얼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공항에서 페루경찰에 체포되여 감옥으로 직행했다.

오는 11월26일 그가 페루 법정에 서게되면 지금 까지 세상에 알려 지지 않은 수 없이 많은 인권유린 범죄의 죄목들 이 적나라하게 폭로 되리라고 여러 단체들은 전망하고 있다.

후지모리의 야누스, 두 얼굴은 그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페루의 토작 원주민들과 민중들의 분노를 일으키고 있다. 후지모리는 페루의 순진한 민중들의 가슴에 비수를 던졌다.


3. 페루의 역사적 배경



페루의 역사는 BC 10세기경 안데스 산악지대를 중심하여 동양의 몽골계 원주민
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BC 1세기경에 토착한 농경문화가 형성되였으며 이 시기에 속하는 토기들과 제단과 신전들의 흔적이 아직까지 페루의 여기 저기에 남아있다. BC 3세기에서 AD 8세기까지 약 1000년의 시기를 역사가들은 지역문화시기라 부르며 그 후 AD12세기 까지를 통일국가시기라 부른다. 그후 15세기까지를 제2 지역문화시기라고 부른다.

15세기에 이르러서 태양의 아들이라고 하는 잉카가 나타나 페루를 중심하여 방대한 지역에 잉카제국을 탄생시켰는데 잉카는 그 당시 원주민12,000명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었다. 그때 잉카제국은 유럽의 문화를 능가하는 거석을 이용하는 건축술과 의술등이 뛰어 났다. 2007년에 스위스의 박물관 인간제단이 새로 지정되여 발표한 <세계7대 불가사의> 중에는 페루의 유물 “마추픽추신전”이 포함되여 있다.

이 신전은 바로 15세기에 잉카제국의 원주민들이 건축한 거석건물인데 해발8,000 피트의 높고 높은 앙드레(Andes) 산 꼭대기에 그와 같은 거대하고 웅장한 신전을 어떻게 건축을 했을가. 페루의 앙드레산 꼭대기에 우뚝 서 있는 이 ‘Machu Picchu Sanctuary’는 과연 오늘 21세기에 존재하는 놀랍고 경이로운 불가사의 한 역사 유물 중 하나이다.

하지만 태양의 아들 잉카가 건설한 위대한 잉카제국은 경이로운 “불가사의”만 옛 날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뿐 잉카제국의 위력은 스페인의 총탄 앞에 무참하게 무너저 없어지고 말았다. 그후 페루는 에스파냐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백인들의 학살과 착취를 당했다. 겨우 살아 남은 잉카의 후손 원주민들은 결국 일생동안 노예로 지배를 받으면서 400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페루 반제투쟁운동의 4대 맥락>



역사적으로 페루의 반제 해방투쟁운동의 주요 단계를 대략 4개의 맥락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잉카제국의 혈통을 이어 받은 토착원주민들이 전개하고 있는 강력한 반제해방투쟁 운동.

둘째, 스페인이나 영국등 유럽의 종주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위하여 투쟁하는 유럽이민 1세들의 반제해방 운동.

셋째, 유럽이민자들의 백인 2세들과 혼혈2세들의 좌경화 된 사회주의적 반제해방운동.

네째, 흑인노예 1세들과 2세들이 인권을 위하여 투쟁하는 반제해방운동.

위의 네가지 형태의 반제 반침략주의 투쟁은 잉카제국이 몰락한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400년동안 줄기차게 계속되고 있다.

잉카의 피를 이어받은 원주민의 후손중에서 페루의 “뚜박 아마루장군”의 무장봉기
는 실로 페루의 원주민들 가슴 속에 조상들의 유산을 되찾은듯 희망을 부여했다.
뚜박 아마루는 페루뿐만 아니라 전 남미에 영향을 끼처 여러 지역에서 부족들이 독립에대한 꿈과 희망을 품도록 한 때 지대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1781년에 아마루 장군의 무장봉기투쟁은 스페인주둔군의 잔인한 소탕작전에 직면하여 전멸되고 말았다. 아마루 장군의 부인과 아이들은 자신이 보는 눈 앞에서 처참하게 처형을 당했다. 스페인의 잔인한 군대는 아마루 장군의 사지를 묶어 네갈래로 절단하여 주요 도시에 보내여 인디언들이 공포심을 품도록 전시하기 까지 했다.

잉카제국의 마지막 보루였던 페루의 뚜박 아마루 장군의 투쟁의 역사는 이렇게
비극적으로 막을 내리고 말었던 것이다.

<페루의독립>



페루가 스페인의 식민통치를 완전히 물리치고 자주독립을 성취한것은 1824년
이였다. 페루의 독립영웅 San Martin은 스페인 정부의 과도한 세금과 극심한
식민지 수탈 정책에 반기를 들고 민중을 위하여 앞장서서 독립군을 창설하고
투쟁하여 독립을 쟁취했다. San Martin은 페루역사에 길이 남을 독립투사이다.

여기서 오늘 우리가 분명히 P혀야 할 것은 San Martin의 독립정신은 토착원주민 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독립정신과는 근본적으로 상이하다는 점이다. San Martin
의 투쟁정신은 백인들이 좀 더 많은 물질과 좀 더 완전한 자유를 누리기위한 것
이였다. 하지만 토착 원주민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투쟁정신은 오직 정의를 실현하고 인간의 생존권 자체를 추구 하는 보다 더 절실한 투쟁 정신 이였다.

스페인이나 영국등 유럽에서 건너 온 백인 침략자들의 현지에서 태여 난 백인 후손2세들을 criollo라고 부른다. 이들 criollo들도 역시 스페인 식민지 통치권 에서 부터 벗어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피를 흘리면서 투쟁하였다.

백인침략자1세, 2세들의 투쟁과 독립정신은 토착원주민들에게 있어서는 “그림의 떡”일 수 박에 없었다. 왜냐하면 침략자들이 독립을 쟁취 한 후에 원주민들에게 강요한 노동의 착취와 인종적 학대와 멸시는 오히려 전 보다 더 교활하고 극심해 졌기 때문이다.

오늘에 있어서 페루 민중들이 반제 반침략투쟁을 벌이고 있는 투쟁의대상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미국이며 미국과 결탁한 자본주의적 지배세력들이다.

하지만 오늘의 투쟁방법은 과거 처럼 무력혁명을 투쟁의 방법으로 삼지 않는다. 그들의 투쟁 방법은 선거를 통한 민중의 힘으로 자신들의 권리와 주권을 투표로 행사하는 투쟁을 방법으로 삼았다.

민주주의라고하는 투쟁의 옷을 갈아 입은 페루의 민중들은 투표의 혁명을 통하여 1990년에 동양계 일본인2세 알베르도 후지모리를 페루의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2001년에는 원주민 혼혈자 똘레도를 대통령으로 선출할 수 있었다.

페루의 민중들이 선거혁명에 의하여 미제국주의 침략을 물리치고 반제반미 투쟁을 성공 시킴으로서 라틴아메리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오늘 페루를 비롯 하여 7개 나라들이 선거혁명을 통하여 반제 반미투쟁을 성공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영향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4. 페루의 오늘과 내일의 전망



호지모리가 체포되여 감옥에 갇혀있는 페루의 정가는 매우 뒤숭숭하다. 페루의 일부 보수세력은 후지모리의 부패를 인정하면서도 그가 공산게릴라를 무력화 시키는데 있어서 큰 공헌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후지모리를 지지하고 있다.

가르시아 대통령의 통치 능력이 미궁에 쌓여 갈팡지팡 하고 있는 실정이다.
가르시아 대통령은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닌 중도파 노선을 내세우면서 2006년7월에 집권했다.

가르시아 대통령은 집권하면서 다음과 같은 정책들을 표명 했다.

“ 나는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등의 이른바 급진 좌파와는 분명히 선을 긋고 중도 노선을
지키겠다”. 가르시아 대통령의 말은 듣기에는 좋은것 같으나 그는 우왕 좌왕하는 난관에 빠져 있다.

가르시아 대통령이 “중도노선”을 주장하는것을 보고 미국은 얼마나 기뻐했을까?

미국은 중도 노선을 주장하는 거르시아 대통령에게 시장지향적 경제정책과 시급한 FTA 비준을 강요했다.

2006년에 실시한 대통령 선거의 과정을 한번 살펴 봄으로서 오늘 페루가 당면
하고 있는 홀란스러운 정가의 모습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대통령 선거를 2006년4월9일에 실시 했는데1차 투표에서는 좌파 민족주의자 우말라가 30%, 중도파 가르시아가 24%를 얻었다. 하지만1차투표에서 아무도 50%를 얻지 못하였음으로 한 달 후에 제2차 투표를 해야만 했다. 6월4일에 제2차투표에서는 역전승으로 이른바 중도파 가르시아가 당선되는 이변이 생겼다.

제1차 투표에서 분명히 선두를 달렸던 좌파 민족주의자 우말라가2차 투표에서 패배했는데 그 이유는 무었일가? 그 원인과 이유는 수십가지 , 수백가지 많이 있겠지만 대표적으로 두가지만 예를 들겠다.

첫째, 민족주이자 우말라 배후에는 막강한 남미의 좌파연대가 지원을 하고 있었다. Venezuela, Argentina, Uruguay, Chile, Bolivia, Ecuador, Nicaraqua,
Brazil등 튼튼한 연대는 우말라 후보에게 당선을 위하여 유리한 고지 역할을
했다. 하지만 미국의 입장에서는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할 수는 없었다.
제1차투표 바로 이틀 전4월 7일에 주페루 미국대사 Dennis jett(1996-1999)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 요약)

“우말라 후보는 아주 믿을 수 없는 괴팍스러운 사람이다. 그는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나,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보다 더 예측할 수 없는위험한 인물이다. 우말라는 과거에 페루에서 쿠테타를 일으키려고 했던 사람이며 다른 사람의 인권을 유린한 경력이 있는 나쁜 사람이다”

미국 대사의 이와 같은 성명은 분명히 내정간섭이며 근거도 명시할 수 없는 추상적인 모략적 발언이다. 표면적으로 이정도라면 숨어서 그 얼마나 무시무시한 공작을 하였을까?

둘째, 페루의 언론은 일제히 우말라후보를 비방하고 모략중상하는 기사를 망발하면서 유권자들을 유혹하고 오도했다. “우마라의 아버지는 범죄를 저질은 한 인디언을 감옥에서 석방하려고 불법을 저질렀다. 우말라의 어머니는 페루의 동성 연애자들의 뿌리를 뽑으려면 총살을 해야 한다 라고 주장한 악녀이다. 우마라의 동생은 군대에서 폭동을 일으키려고 계획을 한적이 있는 전과자이다.” 이와같은 언론의 선전은 분명히 그들 뒤에 미국 정보기관과 국내의 극우 기업체들이 숨어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페루의 우경화 공작은 실로 심각하다.

그러면 가르시아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는 오늘의 페루의 현실은 어떻한가?
현재 페루에는2,700만명의 빈민들이 하루에 $1로 겨우 살아가고 있다.
가르시아 대통령은 최근 미국과 “자유무역 협약”을 맺은 것 때문에 민중들의 저항에 부딪치고 있다. 그를 반대하는 데모가 전국적으로 번저 나가고 있으며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다고 로이터 통신(Reuters)이 보도하고 있다.

5,000명의 광산과 공장노동자들이 데모를 하고, 학교의 70%가 문을 닫았으며 교육 종사자 들도 데모를 하고 있다. 7명의 경찰들이 데모대에 의하여 납치를 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로 인하여 페루 사회는 분열과 불안으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가르시아 대통령의 지지도는 계속 폭락하고 있다. 반면에 선거에
낙선한 좌파 지도자 우말라의 지지도는 날마다 상승하고 있다.

2006년 11월에 실시한 전국25개의 지방 정부 선거에서 우말라를 지지하는 지방은23개이며, 가르시아 대통령을 지지하는 지방정부는 단3개로 나타났다.
이와같은 이번 지방 선거의 결과에 의하다면 페루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것 같다.

하지만 우말라가 넘어야 할 산과 장해물은 앞으로 험산준령 처럼 남아 있다.
우말라가 넘어야 할 산과 장해물은 페루가 아니라 미국이다. 얼마전 미국이 조종 하고 있는 페루의 유능한 TV 방송국의 기자가 아무 예고도 없이 해고를 당했다. 왜 해고를 당했을까?

그 이유는 방송국 기자가 우말라와 대담을 하고 그것을 방영 했기 때문이다.
해고를 당한 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 했다. “페루의 민주주의는 돈있는 권력자와 돈 없는 언론이 합의결혼 하는 것을 뜻 한다”.

하지만 절망은 하지 말아야 한다. 2006년11월19일에 진행된 전국 25개의 지방 정부 선거에서 놀랍게도 우말라를 지지하는 지방은 23개 이며, 가르시아 대통령을 지지하는 지방은 단3개 지방으로 나타 났다.

이와같은 지방 선거의 결과는 지금 페루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것 같다.

미국과 일본이 지원하고 있는 후지모리의 몰락과 도망은 페루 민중의 분노를 일으켰다. 가루시아 대통령과 부쉬의 자유무협협정 합의는 하루 $1로
겨우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는2,700만 가난한 민중들의 끝이 없는 데모로
인하여 그 누구도 페루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다.

민중의 인기와 지지를 한 몸에 지니고 있는 페루의 좌파 지도자 오마루는 도약의 꿈을 꾸고 있다. 우말라의 도약에 대하여 미국의 평론가들은 우말라의 도약의 꿈은 허무의 웅덩이로 떨어 질 위험성이 있다고 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페루의2,700만명의 가난한 민중들과 원한에 사무친 토착 원주민들은 이구 동성으로 외치고 있다.

“그래 좋다. 허무의 웅덩이로 우리 모두 우말라와 함께 떨어지자”

끝을 모르게 질주하는 페루 민중들의 반미반제 행진은 부쉬가 보기에는 이미 도를 넘어 섰다. 몇백년 동안 꿋꿋이 참아 온 페루의 토착 원주민들의 반제반미 투쟁의 앞날에 다가 올 승리의 날이 멀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

*필자 유태영 박사는 615실천 미국위원회 공동위원장이며 재미동포전국연합회 상임고문으로 뉴욕에서 30여년 이상 기독교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며 한국의 민주화 운동, 통일운동에 헌신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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