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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대담]현준기 선생의 파란만장한 80년 세월<br><br>좌우명과 후진들에게 당부말씀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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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7-09-12 23:54 조회3,2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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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한 80년 세월이었다. 부인의 투병을 간호하기 위해 지난 5년 동안도 고통의 시간을 보내온 현준기 선생(재미통일운동 원로)이 오는 23일 8순을 맞지만 가족들이 8순잔치를 치를 수 없는 상황을 알게된 후진들이 선배의 8순기념 모임을 추진하고 있어 흐뭇한 화제가 되고 있다. 재미동포서부지역연합회(김현환 회장)를 비롯하여 범민련 재미본부(배강웅 의장), 남가주한인노동상담소(박영준 소장), 통일맞이나성포럼(김현정 회장), 민주노동당미주후원회(정건이 회장), 전민특위미국위원회(이화영 위원장), 평화를 사랑하는 여성들 서부지역위(김영순 회장), 민족통신(노길남 대표) 등의 회원들이 공동으로 이 자리를 마련한다. 민족통신 편집인은 이와 관련해 현준기 선생 자택을 방문하여 대담을 갖고 그의 80년 발자취를 더듬어 보았다.[민족통신 편집실]



[대담]청암(靑巖),현준기 선생의 파란만장한 80년 세월


좌우명은 무엇이며 후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IMAGE##>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미 서부 지역 통일운동권 후진들이 재미통일운동권 원로이신 현 준기 선생의 8순 기념 모임을 준비하고 있어 흐뭇한 화제가 되고 있다. 로스엔젤레스 진보단체 대표들은 최근 모임을 갖고 오는 23일(일요일) 오후5시 시내 용궁식당 1층 별실에서 운동권 원로선배이신 현 준기 선생님의 8순 기념 모임을 갖기로 결정했다.

파란만장한 80년 세월 속에...


현준기 선생은 지난 5년 동안 부인 유달중 여사(78세)가 암수술이후 경과가 좋지 않아 고생해 왔다. 현 선생은 지난 3년 동안 부인이 재수술을 받았으나 그 결과가 효과를 보지 못하여 식음을 전폐하는 바람에 매일 링게르(TPN) 주사 한 곽(Pack)을 맞아야 하는 부인의 투병생활을 옆에서 간호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 생활해 오면서도 주위의 친지들에게는 자신의 어려움을 나타내지 않았다.(링게르 한곽에 6백불 정도니까 한달에 1만8천불 가량 병원비로 지출되어 온 상황) 그는 또한 자신도 소아기능이 좋지 않아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할 때가 많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사실들을 말하지 않았다.

<##IMAGE##> 양은식 박사는 "우리 후진들이 선배의 처지를 이해하고 8순 기념 모임을 준비해 드립시다."라고 제안하자 주위 동지들이 일제히 찬성하여 추진하고 있다. 양 박사는 오는 23일 8순기념모임 행사장에서 발표하기 위해 지난 주말 현 선생과 반나절을 보내면서 그의 파란 만장한 인생 발자취를 더듬었다.

현준기 선생은 1927년 9월25일 평남 남포출생이다. 이북에서 23년을 보내고 1950년 12월 월남하여 이남에서 15년을 지낸 후 1965년 2월 남미 파라과이로 이민 갔다가 그 이듬 해 아르헨티나로 재 이민, 그리고 1974년에 미국으로 재 이민을 떠나 살게 되었으니 그의 타국생활이 금년으로 42년이 넘은 셈이다.

이북에서의 15년 생활 중에도 남포보통학교를 나오고 1939년 혼자 가출하여 만주에 가서 <통화 제3고등중학교>를 나왔고 그 이후 귀국하여 평양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신천고등중학교에서 생물교사로 생활하다가 전쟁 시기 월남하게 되었다.

현준기 선생은 이남 생활 10년은 잊고 싶은 세월이었다고 회고하며 이렇게 말한다. "부산에서 피난 중 먹고 살아야 한다는 방편으로 20대 초반에 육군종합학교 보병학교를 들어가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 때문에 육군참모총장상도 받았다. 그러나 하사관 교육대 활동을 하다가 습격을 당해 파편이 튀는 바람에 오른쪽 눈과 왼쪽 손가락을 다쳐 얼마 되지 않아 중위로 제대했다. 그 후 1953년부터 1964년까지 한 중학교 생물교사로 그리고 훈육주임으로 일했다. 학교 재단 측과 후임교장 선임문제로 교내 분쟁이 터졌을 때 체험한 부정부패 문제와 비리 문제를 보고서 견딜 수 없어 사직하고 그 이듬해 남미 이민을 결정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민생활 42년을 돌아본다.


이민 생활 42년 세월도 파란만장의 연속이었다. 부인과 초등학교 다니던 세 자녀를 데리고 남미 파라과이로 이민을 떠난 것이 1965년 2월. 그 이듬해 아르헨티나로 가서 양계장, 식품업 등을 운영하면서 생계를 유지했고 푼푼히 저축하여 돈을 모았다. 일요일도 없었다. 그저 일만했다. 장사를 하다가 권총강도를 맞은 것도 10여 차례가 되었다. 남미로 이민올 때 지참해 왔던 돈(약 3만달러)을 부두가에서 몽땅 날려버린 사건도 있었다. 그 때 주머니에는 2천달러 밖에 없었다. 앞이 캄캄했었다. 그러나 그후 고생은 했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 날 구멍이 있다."는 경험을 뼈저리게 맛보았다. 일요일도 없이 하루 25시의 남미 이민생활이었다. 남미 생활 9년을 정리하고 동생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현 준기 선생은 1974년 동생이 살고 있던 미국 미네소타 주 미네아 폴리스로 떠나 미국이민생활을 시작한다. 3년 반 가량 한국식당을 경영하다가 그것도 여의치 않아 로스엔젤레스로 옮겨 1980년부터 23년 2개월 동안 세탁소를 운영하다가 은퇴했다.

현 선생이 통일운동과 인연이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IMAGE##> 그는 "나는 밥 먹고 사는 것 이외에 세상을 보는 눈이 뜨게 된 것은 1978년부터 일본의 진보잡지인 월간 세까이(세계)와 일본에서 재일동포들이 일어로 발행하는 "통일평론" 등을 구독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회고한다. 특히 <세까이>지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시절인 삼엄했던 시대에 "TK생의 리포트"라고 하여 한국문제의 부조리를 심층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인 연재물로 폭로하여 한국인들은 물론 일본민중들의 관심을 사로 잡아왔다. 이 잡지에 연재된 내용은 우리 말로 번역되어 미국에서도 신한민보에 게재되어 왔었다. 이것을 읽은 이들은 저항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재미동포들에게도 이 잡지가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어떻게 이민을 결정하게 되었느냐고 묻자 현 선생은 이렇게 설명한다. "군사독재정권 시기에 그 사회를 좋아했던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했을 것이다.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희망을 가질 수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장사하던 사람들이 살만한 처지에 있었지만 이민을 떠나는 경우들이 많았다."고 지적하며 그 당시의 어두웠던 상황을 떠올린다.

그는 세탁소를 운영하면서 통일운동에 구체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 은 1989년이라고 말한다. "그 때 조국통일북미주협회(일면 통협)에 입회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단체는 재미동포전국연합회의 전신 혹은 뿌리라고도 볼 수 있다.

현 준기 선생은 1993년 통협의 회장이 되었고 이 단체가 1997년 재미동포전국연합회로 창립되었을 때 이 조직의 수석부회장 겸 서부지역연합회의 회장으로 활동하다가 2004년 회장으로 활동한바 있었다. 2006년에는 6.15서부지역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그리고 진보단체들 고문으로 활약하면서 후진들을 지도해 왔다.

현 선생을 잘 아는 주변 인물들은 "그는 사물을 판단하는 능력이 특출하며 운동을 전개 하는데 원리와 원칙을 강조해 온 지도자로서 실재로 재미통일운동권의 리더쉽을 발휘해 온 인물"이라고 입을 모은다. 한 측근은 "실제로 미국의 동부지역을 비롯하여 중남부 지역, 미 서부지역에서 활동하는 후진들이 어려운 일에 부딪치면 현 준기 선생에게 연락하여 상담을 하곤 한다."고 귀띔하면서 실천운동의 자문에 뛰어 난 인물이라고 말한다. 또 한 측근은 "그를 이해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를 사귀어 보면 시간이 갈수록 깊은 면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또 상대를 신뢰할 때 까지는 마음을 주지 않는 것 같다. 때로는 날카롭고 차겁게 보일 때도 있지만 그는 실제로 가슴이 뜨거운 인물이다. 사리가 바르고 인정이 많은 분으로 뒤늦게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통일운동권의 한 젊은 참여자는 현 준기 선생에 대한 소감을 묻자, "선생님은 빈틈이 없으신 지도자이십니다. 행사 때 간단한 인사말을 하여도 꼭 원고를 작성하여 나오시는 것을 보며 감명을 받았다"면서 "연로하시고 어려운 사정이 있어도 약속하면 꼭 지키시는 분이며 어린 사람들에게도 꼭 존대 말을 해 주시는 어른"이라고 말한다.

기자는 12일 오후 현 준기 선생의 자택을 방문하여 기본적인 사항들을 취재하고나서 몇 가지 사항들을 추가로 질문했다.

[질문]선생님께서 사모님이 누워 계시는 바람에 식사는 어떻게 해결하세요?

[답변]물론 애로가 없지 않지요. 그러나 지난 5년 동안 특히 3년 동안은 집사람이 활동하지 못하고 링게루 주사를 꼽고 생활하여야 하는 처지 때문에 내가 식사를 해결해야 했지요. 요리도 꽤 하는 편이지만 주로 라면을 끓이는 데에는 선수가 되었습니다.(미소)

[질문]연로하신 분들은 과거 호가 있었는데 혹시 소개해 주실수 있는지요? 아, 그리고 어릴때 상당기간 가출하신 적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 이유는?

[답변]10대에 가출하여 만주에서 5년을 지난 일이 있었습니다. 17살때인가 그곳의 한 도사께서 나에게 청암(靑巖)이라는 호를 지어 주셨습니다. 푸를 청, 바위 암으로 쓴 것인데 이 뜻은 "푸른 바위위에 앉은 호랑이"라는 의미라고 일러 준 것이 있었는데 이것을 써먹은 것은 평생동안 그리 많지 않아요. 때로 성금을 할 때 익명으로 하고 싶으면 청암이라고 하여 사용한 적이 있고 친구들과 한잔 걸치고 서로 주고 받는 이름대신 청암이라는 호를 쓴 정도에 불과했어요. 가출한 얘기는 1939년께 사건과 연관됩니다. 만주로 건너가 단신으로 여러해 지내다가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두가지 이유였지요. 하나는 가정은 부유했지만 편안치 못했어요. 봉건시대 이야기이지만 아버지는 첩을 얻어 주로 나가 사셨고, 어머니는 할머니(시어머니)한테 구박 받으며 사셨습니다. 시집살이가 심했던 것 같아요. 그 때 저는 공부는 하는편이었는데 중학교 시험에 미끄러져 그만 어머니 한테만 말씀드리고 만주로 떠나 살게 되었습니다. 해방되기 전해인 1944년에 집으로 돌아온 이야기입니다.

[질문]선생님 대담할 때 민족통신 식구들이 취미를 여쭈어 봐달라고 해서....

<##IMAGE##> [답변]동생이 태권도 9단이고 지금은 프로 골퍼가 되어 활동해 왔지만 나는 그런 건 못하고 어렸을 때 검도를 하다가 만주에서 총검술 유단자(2단)로 활동한 것이 취미면 취미였다고 말 할 수 있지요. 그 때에는 목총(나무총)을 가지고 총검술 운동을 했지요. 그런데 요즘에는 총검술 유단자라는 체육항목이 없어진 것 같습니다.


[질문]선생님 생애에 좌우명이 있다면?

[답변]제가 이남서 학교선생 할때 제 삶의 소신을 학교 교훈에 그대로 반영한 적이 있어요. 그것은 한자로 표현하면 "의기 근검"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간단히 말하면 정의로운 자세로 살라, 부지런하게 살라, 검소하게 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나의 좌우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던 배경은 어머니의 영향이 컸습니다. 나도 사람인데 때로는 왜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그럴때 마다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를 지나면서 언제나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충고를 떠올리곤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기회가 있을 때 마다 (1)바르게 살아라,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 (2)책임 못질 일은 하지말아라, (3)언제나 겸손할 줄 알아라, (4)항상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살아라...이것은 어머님의 참사랑이었다고 돌이켜 봅니다.

[질문]선생님 후진들에게 권하고 싶은 도서들이 있다면..

[답변]글쎄요. 요즘에는 인터네트에 무궁무진한 정보들을 열람할 수 있어서 뭐를 특별히 권하면 좋을지 생각중입니다. 고서이긴 하지만 노자에 관한 책들을 권하고 싶습니다. 이 책들은 민심을 묶고 일심단결로 가는 지혜를 설명해 줍니다. 그리고 김일성 주석의 <세기와 더불어>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질문]선생님 통일 운동해 오시면서 아쉽게 생각한 점들이 있었다면...

[답변]내 인생에서 통일운동과 만나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비록 불이익과 고통스러운 점들도 있었고, 때로는 빨갱이 소리를 들으며 수난도 받았지만 조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나 같은 장사꾼은 통일운동을 지원해 주는 재정사업에 힘을 기울여 재정을 만들어 놓았어야 하는데 그걸 하지 못하고 그냥 일선에 나서게 된 것을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런 얘기 있잖아요. "힘 있는사람은 힘으로,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라는 말... 앞으로는 후진들도 이런 문제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할 것입니다.

[질문]선생님, 80평생을 사시면서 어떤 분들을 가장 존경하게 되었습니까? 세분만 꼽아주세요.

[답변]전부 돌아가신 분들인데...우선 이순신 장군을 꼽을 수 있고, 분단시대에 살면서 남녘에서는 백범 김구선생님을 꼽으며, 북녘에서는 김일성 주석님을 꼽고 싶습니다.

[질문]마지막으로 후진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말씀을 들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변]우선 불초 소생을 위해 8순 기념모임을 준비하는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오는 23일 모이신 분들에게 직접 말씀 드리겠지만 민족통신을 통해 먼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후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라면 세 가지 정도 하고 싶습니다. 한 가지는 사물을 올바로 보고 판단하면 좋겠다는 얘기입니다. 예를 들면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단순하게 해석하지 말고 원인분석을 입체적으로 하여 제대로 진단한 기초위에서 행동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 한 가지는 통일운동은 곧 사람과의 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존중하고 겸손하며 자기희생적인 자세를 가져달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마지막 한 가지는 운동권 임원들이 민심을 하나로 묶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심단결의 방도를 터득하는 교양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민족통신]귀중한 시간을 내주어 감사드립니다. 8순기념 모임때 또 뵙겠습니다.

*현준기 선생 8순기념 축하전화는 (818)340-4209 혹은 (213)219-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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