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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세곤]군 출신들 미주서 민주화 운동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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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6-01-14 18:27 조회1,6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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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대에 전개한 군출신들의 미주 민주화운동 역사는 오늘의 6.15시대를 조명하는데 참고할 만한 자료가 될 것 같다.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하였던 고세곤 선생(70.육사15기)이 지난 시기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선생은 소령으로 전역한 1969년 이듬해 도미하여 미 카톨릭 대학원 도시공학 석사학위를 받은 후 미국에서 출범한 구국향군 단체에서 사무총장으로 일하면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기여해 오신 인물이다. 선생은 현재 한국서 출범중인 평화향군에도 참여하고 있다.아래에 소개한 순서대로 차례로 소개한다.[민족통신/평화통신 편집실]

군인의 한국 민주화 운동 고찰

1. 군인과 민족의 길 고찰

-머릿말
-재미 구국 향군 창설(1973.7.15)
-한민통 총회 워싱톤(1974)
-김지하 구출 운동(75년 7월 10일)
-유엔광장 데모(1977년 7월29일)
-한국 인권과 군사차관(1976.7.15)
-구국향군 텍사스 출발(1974.6.20)
-최덕신 망명(1976.12.5)
-워싱턴의 민주 장군 회의(1979.7.30)
-구국향군의 국내 동지 이세규 장군(1975.12.20)
-광주의거(1980년 5월 18일)
-김재규 구출 운동(1980년 12월 15일)
-구국향군과 오타와 캐나다(1982년 8월 28일)
-기독학자대회 참석-유럽(1982.11.22)

<##IMAGE##>과거 유신 체제이래 군사독재는 긴급조치란 편법을 이용하여 인간 의 기본권을 제한 하고 억압 과 위협으로 통치했다. 근대의회 정치는 살아지고 대신 강력한 안보란 명분을 내세워 민주세력의 전진을 차단했다.

자유나 민주란 민주주의 핵심은 빠지고 요식만 갖춘 유일 체제의 권력구조는 일인 군사독재의 음모 가 있었다. 권력 분산은 곧 정치혼란으로 보고 민중과의 통로는 굳게 닫았고 민주나 자유는 사치라는 것과 시기상조 라는 허위조작의 술수로 일반 계층을 좌절로 밀어 부치고 특권층에는 무제한 의 기회를 허용했다. 박정권은 민족분열로 가는 지역 분할정책의 활용도 불사했다.

이런 각본 에 의거한 정치는 사회계층간에 알륵 을 깊게 하였고 지역간 에는 적대감정을 유발했다. 군대는 단순성이나 체질로 보아 전투임무를 위한 특수한 상황을 념 두 에 둔 조직이다. 이런 군사의 사고 방식만으로 는 다양한 과학사회의 적성과는 너무도 거리감 이 있어 이를 정치사회 에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요 부적절했다.

군사 혁명정부는 군인들을 이용 신문사를 습격했고 법원 난입으로 법관의 재판권 에 압력을 가한 일은 폭력 에 의존하는 정치는 잔인 했다. 군 과 민중은 대적해 갔다. 유신시대의 횡포는 더 교활했다. 민주원칙이 정면으로 부정되고 모든 정치발언 은 못하게 언론 통제로 인간은 동물화 했다. 암흑시대의 개막 이 었다.

과거 식민시대의 통용되든 독재의 흑백논리는 사회 전반으로 퍼지고 사회전체가 자유를 상실한 채 민중은 도피주의에 빠 다. 개발 도상이란 핑계는 민중을 얼마든지 유혹하고 억제하기 에 충분 했다. 노동의 기본권은 특정 재벌에 나누어 주고 부의 균등 분배는 깨지고 부익부 빈익빈 했다. 어용 노조를 가동 재벌과 신군벌 은 유착되면서 신흥 재벌에는 황금기를 맞게 된다.

망국적 불신풍조는 인간 사회가 대립과 견재로 인간 도덕성 이나 양심 의 후퇴 현상 이 심각해 저 갔다. 군은 재벌을 옹호 했고 민중이나 민주인사는 극도의 탄압이란 굴레 에 허덕여 갔다. 군이 정치로부터 엄정 중립을 지킬 때만 민주주의의 생존이 가능한데 그런 상식적 양심 은 없고 권력의 시녀로 안주했다.

유신 체제는 권력기반을 강화할 목적으로 유신을 반대하는 유능한 장교는 정치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축출하고 정치군인들만의 만능 시대를 열어 주었다. 이런 무원칙적 인사는 군의 사기를 저하시켰고 안보의 불안 을 가져왔다. 무능 한 장교라도 권력과의 친소관계로 승승 장구 하였다. 군대의 내부 까지 상호 불신사상 은 스며들어 단결의 와해란 위기가 왔다.

정치군인들은 재산을 불리는 일이나 권력과의 결탁이나 귀족사회로의 진입을 최종 목표로 했다. 정치군인 들 은 권력의 비호를 받고 있어 무서운 것 이 없었다. 군을 떠난 장교는 국내에 아무런 생존근거를 갖 을 수 없었고 해외로 떠나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미국과는 오랜 한미 관계로 이민정착이 원활하였고 고용의 자유와 기회도 주어졌다 . 미국 독립사상가운데 평등, 자유, 박애 정신은 민주주의의 기조사상이었다. 민주와 인권은 세계도처에서 도전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세계는 자유와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인권을 높이 들고 있어 자유화물결은 쉬지않고 움직이 었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군인들이 본국을 떠나 미주에 새로운 생활 근거를 잡고 인권 의 부활운동 에 참여했다. 미국에 들어온 군인 출신들은 개척자의 자부심을 살려 새로운 생활권 에 도전했다. 자유가 넘치는 미국은 한국의 정치 망명객 이나 민주투사들에는 큰 위안의 은신처였다.

미국 헌법은 속지주의를 원칙으로 하고 있어 모든 인종을 초월하여 미국 내 거주자에는 그 누구라도 인권의 보장을 해주고 있다. 민주 와 자유 쟁취란 늘 인류희생의 대가였다. 이런 인류적인 큰 명제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 이 얼마냐는 것은 그 민족의 장래 와 직결 된 문제이다. 미국의 동맹은 대부분 군사독재정권이어서 미국의 대외 정책 수행엔 지장을 초래했다.

미국의 근접국가인 중남미 는 반미 정부가 주종을 이룬 때도 있었다. 70년대 초 모든 군사독재는 빈곤한 나라였다. 본인은 10여개 약소국의 인권단체와 제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워싱톤이 자유진영의 세계센터라는 것 때문에 얻는 자연적인 산물이 었다.

다른 인권단체와도 쉽게 연대가능하고 민주 활동을 상호 협력으로 효과적으로 할 수 있었다. 민주주의 란 공통이념 은 이민족간의 차이를 쉽게 극복할 수 있었다. 국제연대란 큰 힘 이었다. 약소국들이 하나의 큰 힘으로 뭉처 갔다. 미국의 카토릭과 개신교의 미국 교회 협의회는 미국 조야를 각성케 하고 많은 동조자를 배출하고 성숙된 전략을 세워 나갔다. 그들의 정신적인 지원은 막대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인권 투쟁의 승리라 불리는 미국의 민권법 개정은 소수민족에게는 금보다도 귀한 기회 가 되었고 미국사회의 일원이 되는 신기원을 이루었고 기회 균등의 출발 이었다. 자기 본국의 고유문화도 보장 해주어 다수의 복합문화 시대도 열렸다. 소수민족의 인권을 보장받는 시대의 개막이란 미국에도 많은 혜택이 왔다. 이런 세계추세에 역으로 한국의 공화당은 정권연장을 시도하고 군정의 중반기인 69년 3선 개헌안을 제출하여 민주화의 세계적인 분위기를 부정하는 군사 파쇼체제를 고집했다. 국내외적으로 민주주의 파괴자로 비쳤다. 국내여론은 찬, 반으로 갈려 대결국면은 깊어지고 국민투표란 최후 수단을 악용하는 후진성까지 노출한 것이다. 3선의 길을 연 공화당 은 강권 발동으로 사회 전체를 조작으로 위협해 나갔다. 공개된 부정선거로 통과시켜 구시대 의 망상 이 살아 나고 정치사회는 혼란과 누란의 위기로 이어졌다. 이것은 헌법을 자파에 유리하게 해서 장기집권을 노렸다는 것 때문에, 모든 양심 있는 한국시민의 분노를 촉발했다.

워싱턴은 치과의사인 로광욱 선생이 중심이 되어서 삼선개헌 반대 투쟁 위원회를 결성하고, 개헌을 반대하는 시위를 단행한 것이다 이 데모엔 50명의 교포와 유학생이 주로 나왔고 워싱톤 DC 듀퐁 서클에서 주미 한국 대사관까지 행진하여 워싱톤 포스트는 크게 사진과 더불어 기사화 하였다.

나 자신에도 이것이 첫 데모였다. 해외교포가 본국정치에 항쟁하는 첫 행사였고 워싱톤 교포가 그 선봉이었다. 데모는 민주시민의 솔직한 표현이요 순수한 민주양심의 발로였고 해외의 첫 행사여서 서울의 군사정권은 크게 놀랐으며 그 파급 효과는 본국의 민주동지들을 고무했다. 미국 워싱톤 은 세계여론의 중심지라는 것과 해외에 새로운 민주세력의 출현은 외국이란 통제불가능 지역이라는 것 과 도미노 현상을 우려했다. 이 데모에 나온 동지간엔 동지적인 유대가 생겨 그후 반 독재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유대는 또 이념의 동지로 결속해서 한 민통 창설의 주역이 되어 해외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이 된다.

1972년 10월 유신으로 야당의 지도자나 민주 인사 중에는 강제추방으로 방랑객으로 워싱턴에 왔다 민주투쟁대열 에 생기를 불어주었다. 투쟁의 지도자는 동지를 결속케 했다. 민주단체는 독재정부의 거대한 권력엔 비교 가 안되지만 투쟁심 과 민중 의 성원 은 대단했다.

우리 민주세력은 너무 미약했다. 오도된 권력층은 민중을 체념과 냉소로 속박했다. 한국의 유신정부는 교포를 지원하는 것보다 정치로 희생 시켰고 심지어 교포사회를 친과 반으로 분열시키고 민주인사에는 격려보다는 야유가 많았고 이간과 모략적인 선동은 워싱톤에서 총지휘한 것이다. 그것은 워싱톤에 는 정보부의 핵심이 와있어 교포 분열이란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10월 유신은 미주의 민주대열에도 변화와 도약과 전진의 기회였다. 우리는 지도자를 대망 했다. 당시야당의 대통령후보로 낙선 후 망명해온 김대중 선생이 중심이 되었다. 국내는 언론 통제하에 놓여있어 지뢰밭이나 다를 바 없었다. 유신 달성을 위해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사회는 공포분위기가 조성되고 민주인사는 전원 검거된 상태라 민중 불안과 사회활동은 극도로 위축되어갔다. 유신체제의 그 마각이 들어 나면서 체념하는 국민이 늘어 나고 정치지도자는 목전의 이익에 혈안이 되어있고 국내를 군대 의 병사로 만들어 갔다.

국내의 민주화 운동은 좌절과 고난 속에 빠져 갔다. 미주의 조직은 그대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또 신진 인사가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이민자 속에는 민주나 자유의 투쟁가 들도 끼어 있었다. 이들이 이민 와서 자유를 보고 환성을 발하기도 했다. 미국 언론의 공정한 보도로 우리 민주세력은 여론 면에서 힘을 얻어 갔다. 우리는 투쟁의 다른 방식을 찾아내었다. 소수로 강한 기존권세에 대항하는 데엔 군의 민주화로 방향을 세웠다. 순수 민간 만으로의 조직보다는 군 출신의 색다른 조직은 군 정치를 군이 민주정신으로 정예화 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작과 술수로 연명하는 정권은 군인들의 횡포가 증가했고 권력남용은 권력상층부의 야욕이나 충족하는 정도로 권력도 내막은 무능해저 가고 있었다. 민중경시는 극에 이르고 국가의 운명을 특정 귀족으로부터 국민에 환원하는 것이 급한 일이었다. 국가 위기를 직시한 미주의 민주군인도 궐기 하여 민중구출의 대장정에 뛰어 들었다. 우리 군인들은 전혀 정치경험이 없는 야전출신이라는 것과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싸워 온 것이 큰 힘의 근원이었다.[다음에는 재미 구국 향군 창설(1973.7.15)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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