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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병상에 누은 김영진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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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1-04-25 00:00 조회1,2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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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에서 6일간의 전투

박종진 기자 chamdol@unews.co.kr

©유뉴스 신동헌 기자
140511_829801.jpg이대 목동병원 7204호실.
그곳에는 우리시대의 `돌쇠`가 있다. 주인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돌쇠`. 자신이 판단하여 옳다고 생각되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 그런 `돌쇠`가 지친 몸을 쉬고 있다. `돌쇠`는 생김새도 역시 `돌쇠`답다. 햇볕에 그을린 까무잡잡한 얼굴색, 높지 않은 코, 귀공자와는 거리가 먼 토속적인 용모가 그렇다.

그는 93년도에는 제네바 GATT 협정(제네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협정)에 반대해 삭발·단식을 15일 동안 진행했으며, 95년 7월 검찰의 5.18가해자불기소 처분에 항의하여 15일간의 단식투쟁을 결행함으로써 김영삼 정권의 `역사 바로세우기` 라는 대국민항복선언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는 `돌쇠답게` 전남 강진 농군의 아들이다.
강진농고를 졸업하고 농협에 일하다 강제해직당한뒤 강진신협운동에 참여하면서 민주화를 위한 농민운동과 기독교청년운동에 전념하게된다.
그 뒤 5.18 관련 시위 주도혐의로 구속되는 등 2차례의 투옥도 경험한다.
그에게 주인은 농민이다. "500만 농민의 의사를 대변한다." 이것이 그가 추구하는 초심(初心)이다.

그런 그가 세 번째 단식을 결행했다. 그것도 한반도가 아닌 적지(?) 일본에서.
그는 바로 4선의 중진의원이며 한번도 국회 농림해양수산위를 벗어난 본 적 없는 김영진의원이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 일답이다.

처음부터 중의원 의사당(우리의 국회의사당) 앞에서 단식농성을 계획하고 일본을 방문했는가?

아니다. 내가 회장을 맡고 있는 `국회 조찬기도회` 소속 국회의원들이 연서(連書)한 항의문을 전달하기 위해 자민련 원철희, 한나라당 이강두, 박재욱의원과 함께 일본을 방문한 것이 4월 9일이었다. 4월 10일 일본 외무부 부대신 에또 세이시로(衛藤征士郞)를 만나 항의문을 전달하고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렇다면 순간적 결정으로 중의원 의사당 앞 단식농성을 시작한 것인가?

에또 세이시로를 만나 항의문을 전달하고 대화를 나누었는데 "민간차원에서 진행하는 역사편찬에 대해 정부가 법적, 정치적 책임을 질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양국 정상이 만나 새로운 파트너십을 통한 협력과 발전을 약속한 것이 불과 얼마전이고, 분명히 그 합의 내용중에는 `역사인식을 후대에 바르게 한다`는 부분이 천명되어 있다.
그런데도 일본정부측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성의한 답변만 하는 것에 분노가 치밀었다.
그래서 내가 "일본측이 역사왜곡에 대해 그렇게 방임한다면 우리는 중국 등과 협력하여 일본이 3세계를 돌며 진행하고 있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선임을 총력을 다해 막을 것이다"고 큰소리치며 나왔다.
그날 저녁 잠을 자는데 잠을 잘 수 없었다. 내 가슴팍(!)에 청진기를 대고 진단을 하는 심정으로 고민, 고민을 했다. 그러면서 결론은 "일본은 파렴치한 죄과에 대한 반성이 없다"라고 나왔고, 결국 내가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4시30분 살포시 잠이 들었다가 6시쯤 깨었는데 그 때 바로 `중의원 의사당앞에서 단식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 부랴부랴 피켓하나 만들고 어깨 띠 하나 두른 뒤에 10시 30분부터 중의원 의사당 앞 단식농성을 시작한 것이다.

일본 경시청의 제지는 없었는가?

농성을 시작한지 5분이 될까 말까한 시간이 지나자 일본 경시청에서 왔다.
"여기는 성소(聖所)이니 농성을 할 수 없다"며 철수를 종용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의사당 옆에는 천황의 숙소, 그 옆에는 수상관저가 있는 곳이라 한번도 이 곳에서는 점거농성이 없었다고 하더라.
그래도 묵묵부답으로 한 4시간 정도 있으니까 우리나라 경찰이 방송하는 것처럼 방송을 했다. 대충 "당신은 지금 불법으로 도로를 점거하여 도로교통법을 위반하고 있다. 당장 철수하지 않으면 체포하겠다"이런 말이었다.
그래 내가 "천하의 만행을 저지르고도 반성은커녕 왜곡을 일삼는 너희가 가소롭게 도로교통법 위반했다고 나를 협박하느냐"고 농성 후 처음으로 큰소리 쳤다.

일본내에서의 반응이 무척 뜨거웠던 것으로 언론에 알려졌는데...

단식 첫 날 저녁부터 NHK등이 와서 인터뷰 요청을 했다.
하지만 `정치적 쇼`라는 비난을 듣기 싫어 일절 응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보도가 되었고, 그날 저녁부터 YMCA, YWCA 소속 회원들이 찾아주었고, 밤 11시에는 일본역사를 바로잡는 모임 회원 11명이 동참하여 두끼씩 교대로 동조단식을 해주었다.
이튿날부터는 많은 일본의 양심세력들이 찾아주었다. 하루 100여명 정도씩 찾아주었는데 그 중의 80명은 일본인, 나머지 20명은 재일동포들이었다.
특히 몇몇 일본인들은 무릎을 꿇고 "우리의 죄로 고통받지 말라", "일본을 용서해 달라"고 진심으로 사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어떤 젊은 여인은 꽃을 바치며 사죄하기도 했다.

6일동안 물과 소금만으로 지내는게 쉽지 않았을 텐데

배고픔은 크게 고통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시멘트바닥에서 노숙을 하며 지내는 게 쉽지 않았다. 특히 그곳은 일교차가 커서 고생스러웠다. 낮에는 내리쬐는 햇볕도 뜨겁지만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너무 뜨겁고, 밤은 침낭을 껴안고 있어도 추웠다. 그리고 더 악조건은 매연이었다. 그곳이 교통요충지이기 때문에 차량이 무척이나 많았다.
그리고 단식 이튿날부터 보수우익 세력이 물러가라고 연일 집회를 했다. 한 500여명이 모였는데 그들의 기세를 보니 정말 `장난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테러 위협이 계속됐으며, 이를 우려해 경시청에서 버스 4대의 병력을 보내 내 주위를 지켰다.
육체적으로는 단식 4일째가 혈압이 너무 높게 올라가고, 38도의 고열이 찾아와 가장 힘겨웠다.

이번 일본 단식농성에 대한 평가를 한다면...

내가 농성을 시작하고 중의원, 참의원 53명이 방문했다. 내 개인적으로 어찌 그 많은 의원들을 만나 `일본 역사왜곡`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항의할 수 있었겠는가?
역사왜곡의 문제에 대한 일본내 양심세력들이 움직이는 계기가 된 것이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역사교과서 왜곡 시정 연대기구`를 결성키로 했으며, 도쿄, 나고야, 오사카, 오끼나와 등 4곳에서는 `역사교과서 왜곡 중단을 요구하는 항의 단식농성`이 내가 떠나온 뒤부터 5일째 계속되고 있다.

단식농성을 하면서 느낀 점이 많았을 텐데.

자신에게 가혹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일본은 정말 오만하기 짝이 없다. 글로벌 시대를 맞아 경제대국이 되었다는 오만함으로부터 시작돼 천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군사대국화,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
자민당 총재후보자 5인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전범자들의 위패가 있는 야스구니 신사에 가서 `충성을 다짐`하며 참배하고 있는 사실은 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예전에는 야스구니 신사참배를 가더라도 애써 의미축소를 시켜왔고, 공식화 하지 않으려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일본의 이러한 군국주의 부활에 대한 대안이 있는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의 의원들이 역사의식을 정립하고 공동으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과 역사왜곡 저지 아시아 연대모임`을 준비하고 있다.
이미 천정배(민주당), 박명환, 박세환(이하 한나라당), 원철희, 정우택(이하 자민련) 의원등과 공동명의로 제안서를 만들어 각 국에 발송했다.
7-8월중에 연대모임을 구성해서 활동할 계획이다.
나는 일본에 대해 적개심을 갖지는 않는다.
다만, 일본이 천황제 군사대국화,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고, 역사왜곡을 계속한다면 국제적 호소, 항의단 방문, 일본양심세력과의 연대등을 통해 끝까지 싸울 것이다.
일본의 이러한 움직임은 인류평화에 대한 심대한 도전으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휴식을 방해한 것 같아 죄송하다. 마지막으로 청년 대학생들에게 한마디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다. 악은 한때 전부일수 있지만 결코 승리하지 못한다. 아닌 것은 아닌 것으로 예는 예를 말할 수 있는 청년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청년은 무엇보다도 역사의식을 분명히 가져야 한다.
민족의 통일을 위해 헌신해야할 역사적 시점에서 결코 물러섬이 있어서는 안된다. 민주와 인권, 통일을 위해 싸워온 많은 민주투사들, 선배들의 삶의 정신을 숭고히 받들고 민족의 소원인 통일과 아직도 온전히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큰 일꾼으로 되었으면 한다.

김의원은 의사의 다음주 퇴원권고를 무시하고 오늘 오후 3시경 퇴원을 강행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더는 병원에 누워 있을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그런 김의원에게 잘못된 주인을 만난 미련한 돌쇠이기보다는 정말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그런 `돌쇠`가 되기를 희망하며 병원문을 나선다

출처:유뉴스 4/23.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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