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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박문재 장기수 글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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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1-04-12 00:00 조회1,3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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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안에서도 마음속의 진달래를 줄곧 피우면서/비전향장기수 글

 (평양 4월 6일발 조선중앙통신)비전향장기수 박문재는 <감방안에서도 마음속의 진달래를 줄곧 피우면서>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였다.
 그는 글에서 남조선에서의 그 오랜 감옥살이를 이겨 낼수 있은것은 정치적생명을 안겨 주신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은덕을 잊을수 없었기때문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남조선에서 이웃집 드나들듯이 네번씩이나 감옥살이를 했던 사람이다.
 통일애국사업에 투신했다가 1949년에 서울서대문형무소에 잡혀 들어 갔던것이 그 첫번째였고 조국해방전쟁의 와중에 충청남도일대에서 유격투쟁에 참가했다가 1953년에 체포되였던것이 두번째였으며 악명 높은 <반공법>상의 <고무찬양죄>목에 걸려 1973년에 구속되였던것이 세번째였고 이어 1977년에 <유신정권>이 조작한 한 모략<사건>에 련루되여 <중앙정보부>의 검은 마수에 걸려 들었던것이 네번째였다.
 이러는 사이에 나는 근 30년이라는 감옥생활경력을 쌓게 되였고 1993년에 마지막으로 석방되여 나왔을 때 내 나이는 이미 70고개를 넘게 되였다.
 세상과 철저히 격페된 감옥살이에서 겪은 시련을 이 짧은 수기에 어떻게 다 담을수 있으랴.
 나는 다만 네차례의 감옥생활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큰 시련으로 되였던 네번째 감옥살이의 한 단면을 여기에 적어 볼가 한다.
 이 마지막번째의 감옥살이가 나에게 있어서 가장 큰 시련으로 되였던것은 결코 16년이라는 가장 길었던 그 지속기간 때문이 아니였다.
 그것은 이 박문재라는 수인이 시인 박팔양의 아들이라는것이 알려 지게 된 사실과 관련된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시인 박팔양이라고 하면 <카프>시기에 창작된 시 <진달래>를 생각하게 된다.
 진달래를 봄의 선구자로 노래한 그 시의 작자가 바로 나의 아버지인것이다.
 나의 이러한 래력을 알게 된 다음부터 원쑤들은 더욱 기승을 부리면서 나를 상대로 한 전향공작에 거마리처럼 달라 붙었다.
 그것은 그네들이 <카프>출신의 이름 있는 시인의 아들을 전향시키면 그 효과가 더없이 클것이라고 어리석게 타산하였기때문이다.
 나를 전향시키기 위하여 그네들이 들고 나왔던 수법이란 공산정권이 나의 아버지를 기껏 써 먹고는 숙청하였다는 허무맹랑한 허위선전이였다.
 물론 이것은 새로운것이 아닌 케케묵은 수법이였다.
 독자들도 조선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에서 보았듯이 나의 아버지에 대한 이러한 반공선전은 이미 8.15직후부터 있었고 미제가 이 땅에 침략전쟁의 불을 질렀을 때 아버지가 당과 수령의 신임을 받고 인민군 군관견장을 달고 종군작가로 참전하고 있었는데도 리광수같은 사람은 여전히 그런 악선전을 믿고 있었다.
 잊을수 없는 나의 아버지.시 <진달래>에서 볼수 있는 바와 같이 그는 자유와 정의를 갈망하여 몸부림쳤던 사람이며 수난에 찬 조국의 운명을 두고 번민도 컸던 사람이였다.그러면서도 사상상의 미숙성으로 하여 투쟁의 일선에 나서지 못하고 일제의 탄압으로 <카프>가 해산 당한 후에는 호구지책을 위해 발을 들여 놓지 말아야 할 곳에 발을 잘못 들여 놓은 일도 있는 곡절 많은 운명의 주인공이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님께서는 그가 지니고 있는 한가닥의 민족적량심과 애국심을 귀중히 여기시고 넓으신 한품에 안아 주시였으며 광복직후에 벌써 그를 당보 <로동신문>의 전신인 정로사의 편집국장으로 내세워 활동하게 해 주시였다.
 정치적생명을 안겨 주신 어버이수령님의 은총이 너무나도 고마와 내 그때 얼마나 감격의 눈물을 흘렸던가.
 그 감격이 나로 하여금 평생 수령님을 받들어 살것을 결의 다지게 하였고 종당에는 갓 스물을 넘긴 나를 통일애국사업에 몸을 던지게 하였다.
 폭압자들은 그러한 나를 감방속에 앉혀 놓고 아버지가 숙청 당했으니 당신은 의지가지할데 없는 사람이 되였다,그러니 더는 고집하지 말고 전향서에 도장을 찍고 딴 길을 택하라는것이였다.
 물론 나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대 거짓말이라는것을 뻔히 알면서도 열번,백번 거듭 들으면 거짓말도 정말인것처럼 느껴 지게 되는 경우도 있다는것이다.
 원쑤들의 악선전이 얼마나 집요했던지 나는 정신이 혼미해 져 그만 부지불식간에 정말 아버지의 신상에 그 어떤 일이 있은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겨 났다.
 그렇지만 그 의문이 나에게 가져다 준것은 동요가 아니라 혁명적경각성이였다.어떤 일이 있었든 그것이 나를 허물어 뜨리는 지레대로 리용되게 해서는 안된다,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자리를 차고 일어 나 전향공작반의 모략가들에게 이렇게 단호하게 말하였다.
 당신들의 말대로 나의 부친이 어떻게 되였다고 하자,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결코 그 어떤 변화도 일으킬수 없다,부친에게 설사 어떤 일이 있었다 해도 그것으로 해서 나는 나의 정치적생명을 버릴수 없다,이 감옥안에서 죽어 나가든 살아 나가든 나는 여전히 김일성수령님의 전사로,조선로동당원으로 남아 있을것이다,그 이상의것을 내게서 바라지 말라...
 내가 신념을 이렇게 굳힐수 있었던것은 결코 우연에서 온 일이 아니였다.
 나는 네번째 감옥생활을 하기 얼마전에 평양방송을 통해 1939년 5월 조국진군길에서 있은 감격에 넘친 일과 관련한 조선인민혁명군의 한 녀대원의 회상실기를 청취한적이 있었다.
 나는 압록강과 소백수물이 합쳐 지는 물목의 언덕진 기슭에 핀 진달래를 보시며 어버이수령님께서 조선의 진달래는 볼수록 아름답소라고 하신 말씀과 항일의 녀장군 김정숙동지께서 조국의 진달래...
 비바람도 이겨 내고 눈보라도 이겨 내고 끝끝내 피여 났군요라고 하신 말씀을 회고한 회상실기내용에 접하고 감동을 금치 못하였다.
 그때이래 진달래꽃에 대한 나의 표상은 아버지의 시 <진달래>에서 나온 봄의 선구자이면서도 가냘픈 꽃으로가 아니라 혁명의 화염을 활활 내뿜는 꽃,혁명의 도래를 알리는 열정에 넘친 꽃으로 승화되였다.
 나는 또한 그 어려운 시기에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의 불후의 고전적명저 <영화예술론>에 접할수 있는 행운을 맞아 흥분이 절정에 달하였다.
 나는 이 로작을 탐독하면서 젊으신 장군님이시야말로 정치대가,철학대가,실력대가이시라는 확신이 들면서 마음이 더없이 든든해 졌다.
 그 든든한 마음속에서 혁명의 화염을 내뿜는 진달래꽃을 감방안에서도 줄곧 피웠기에 나는 지조를 지키고 압제자들의 전향공작을 마지막까지 짓부셔 버릴수 있었던것이다.
 조국에 돌아 온 나는 어버이수령님께서 생전에 일군들에게 남조선의 감옥에 박팔양선생의 아들이 갇혀 있는데 꼭 찾아 와야 한다고 간곡히 말씀하셨다는것을 전해 듣고 혈육들을 붙안고 울었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어버이수령님의 유훈을 높이 받드시고 나를 포함한 수 많은 비전향장기수동지들을 기어이 찾아 주셨으니 <결초보은>하고 머리카락을 베여 신을 삼아 올린들 내 어찌 이 은덕에 다 보답할수 있겠는가.
 그저 인간의 존엄이 지켜 지는 자유로운 땅에서 육체적로쇠를 극복하고 통일성업을 위해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위대한 장군님을 높이 받들어 나가겠다는것이 나의 유일한 결의라는것을 강조하면서 이 미숙한 글을 끝내는바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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