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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brown>[현장]송두율교수 가족의 하루</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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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minjok.c… 작성일03-12-02 00:00 조회1,1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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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고난이 디딤돌 된다면…”한국사회의 가장 험악한 모습을 온몸으로 경험 중인 송두율 가족의 하루...

송두율 교수와 함께 ‘유명인사’가 돼버린 사람들, 부인 정정희씨와 둘째아들 송린씨. 아직도 독일에 돌아갈 수 없는 그들의 하루를 따라가보았다.

“어… 저 사람들 어디서 많이 봤는데….”

지난 11월19일 오전,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면회를 기다리던 40대 부부가 목소리를 낮춰 수근대기 시작했다.

“송두율 교수 가족이잖아. 송 교수가 지금 여기 독방에 있대.”

송두율 교수의 부인 정정희(61)씨와 둘째아들 송린(27)씨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길에는 호기심이 가득하다. ‘거물간첩’이라는 여론의 뭇매를 맞고 구속된 송두율 교수에 대해 느끼는 만큼의 ‘적대감’은 아니지만, ‘이방인’을 향한 경계심을 숨기지 못한다.


021014000120031126486_40.jpg사진/ 얼마 전 소아과 레지던트 과정을 마친 둘째아들 린씨는 전문의 과정 전에 실시되는 ‘리서치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한국에 들어왔다. 정씨는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하면서도 고맙다”고 털어놨다.

지하철에서 빤히 쳐다보는 사람들

“지하철을 타면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분들이 많아요. 한번 쳐다보고 고개를 돌려주면 고마울 텐데…. 혹시라도 험한 일 당하면 어쩌나 해서 좀 조심스럽네요.” 정씨는 이어 “얼마 전에는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우리를 흘끔거리면서 무서울 정도로 정부 욕을 하더라”며 “혹시나 ‘우리를 알아봤나’ 하는 생각이 들어 무섭고 불안했다”고 털어놨다.

지난 9월22일 입국한 뒤, 송 교수 가족이 한국에서 느끼는 ‘체감온도’는 바뀐 계절의 기온만큼이나 하루하루 낮아지고 있다. 국정원과 검찰의 조사가 한달 동안 몰아치듯 이어졌고, 송 교수는 끝내 구속됐다. 덩달아 가족들은 송 교수와 함께 ‘유명인사’가 되어버렸다. 정씨는 자신이 근무하는 대학 도서관으로부터 애초 받아온 4주의 휴가를 이런 식으로 보내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고향(충남 서산)도 찾아보고, 그동안 못 만났던 친구도 만날 설렘은 입국 첫날부터 접어뒀다. 송 교수를 따라다니며 발을 동동 구르는 동안 휴가는 훌쩍 지나 2주의 휴가를 더 냈다. 그도 모자라 지금은 한달 동안의 병가를 내고 한국에 머무는 중이다. 주위에서는 휴직을 하고 당분간 한국에 있을 것을 권유하지만, 휴직 뒤 직장에서 받을 불이익을 생각하니 선뜻 결정이 내려지지 않는다. 지난 10월 초 독일로 돌아갔던 린씨도 전문의 과정 전에 실시되는 ‘리서치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3주 만에 다시 날아왔다.

정씨는 입국 첫날의 불안감을 떠올렸다.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도착했는데, 우리 가족만 내리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더군요. 순간 ‘아차’ 싶었어요. 입국절차를 마치자 국정원 직원이 다가와서 오늘 조사를 받든지 내일 자진출두하든지 결정하라고 했습니다. 순간 귀를 의심했지요.” 정씨는 “조건 없는 귀국은 허용 안 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간단한 조사 정도로만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송 교수가 구속된 뒤에는 수감돼 있는 서울구치소를 찾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송 교수가 검찰조사를 받는 화요일과 목요일은 면회가 이뤄지지 않아 일주일에 4번만 면회가 가능하다. 그나마 송 교수 면회를 원하는 이들이 워낙 많아 가족끼리만 면회한 적은 거의 없다.

021014000120031126486_41_1.jpg사진/ 송두율 교수의 부인 정정희씨와 둘째아들 송린씨가 지난 11월19일 서울구치소에서 면회를 마치고 나오고 있다. 이날 면회에는 독일에서 온 게르하르트 쾨벌린 목사와 이삼열 숭실대 교수가 함께했다.

이날은 독일에서 온 게르하르트 쾨벌린 목사와 숭실대 이삼열 교수(철학)가 송 교수를 찾았다. 쾨벌린 목사는 지난 1970~8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면서 송 교수와 친분을 쌓게 됐다고 한다. 쾨벌린 목사는 면회를 마친 뒤 “송 교수가 많이 지쳐 있을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당당해 보여서 마음이 놓였다”며 기뻐했지만, 정씨는 “가족들이 보기에는 분노와 실망이 겹쳐져 자신만만하게 보이려는 것 같았다”며 더욱 안타까워했다.

정씨는 한국에 들어와서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다. 송 교수가 조사를 받을 때는 국정원과 검찰청 근처에서 조사가 끝날 때까지 가슴을 졸이며 기다렸다. 구속된 뒤에는 오전에 면회를 마치고 나서 ‘송두율 교수 석방 대책위’ 회의에 참석하거나 지인들을 만난다. 독일과 미국 등지에서 송 교수 소식을 듣고 날아온 ‘손님’들과의 약속도 이어진다. 변호인에게 진행 상황을 듣는 것도 중요한 일과다.

021014000120031126486_41_2.jpg사진/ 서울 명동의 ‘송두율 교수 석방 대책위’ 사무실을 찾은 송 교수 가족. 송 교수의 가족들은 오전에 면회를 마친 뒤, 오후에는 지인들을 만나거나 대책위를 찾으며 바쁜 하루를 보낸다.

잠 포기하고 치러내는 강행군

최근에는 독일에서도 송 교수 석방을 위한 대책위가 여럿 꾸려져 잠을 설치는 일이 많아졌다. 한국은 독일보다 8시간이 빨라, 독일의 오후는 한국의 밤이다. 독일의 대책위 관계자들에게 그날그날의 상황을 알리고 독일의 움직임을 확인하다보면 어느새 날이 밝아, 부랴부랴 면회를 위해 집을 나서기도 한다.

“준(큰아들)이와는 매일 통화하면서 독일에서 일어나는 일을 듣습니다. 린이 여기에서 독일 대책위쪽에 하룻동안 일어난 일을 정리해서 보내요. 남편 동료들이나 제 직장에서 전화올 때도 있고…. 잠은 거의 포기했어요.”

한국에 온 지 두달이 넘었지만 가본 곳은 손에 꼽을 정도다. 38년 만에 떨리는 마음으로 한국을 찾은 정씨도, 태어나서 처음 부모님의 나라를 찾은 린씨도 막상 한국에 와서는 국정원, 검찰청, 경찰서, 구치소 등 온갖 ‘험한 곳’만 다녀야 했다.

송 교수가 구속되면서, 한국에 있는 친구들의 연락도 뚝 끊겼다. 올봄까지 독일에 놀러왔던 친구도 전화 한통 없다. 나름대로 사정이 있을 거라고 이해하지만, 왠지 섭섭한 마음은 한구석에서 자꾸 고개를 쳐든다.

021014000120031126486_41_3.jpg사진/ 송 교수 가족들이 변호인단 가운데 한명인 송호창 변호사를 찾아 앞으로의 일정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변호인단은 앞으로 국정원과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와 ‘검찰 조사시 포승 · 수갑 등 계구 사용’ 문제 등을 제기할 방침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삶의 터전이 아닌 곳에서 견뎌내야 한다는 점이다. 구속이라는 ‘날벼락’도 견디기 어렵지만, 언어도 지리도 낯선 곳인 탓에 어려움이 더 크다. 10월26일 린씨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까지 혼자 지내야 했던 정씨는 “혹시 옆방에 들릴까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마다 엉엉 울었다”고 했다. “처음보다 많이 말랐다”고 기자가 말을 건네자 “많이 늙었죠 스트레스 받아서 그런지 머리카락도 자꾸 빠져요”하며 웃는다.

독일에서 태어나고 자라 한국어에 서툰 린씨는 답답함을 호소한다. 토론회나 기자회견, 변호인과의 면담 등 모든 자리에 어머니 정씨와 함께 참석하지만, 어떤 얘기들이 오가는지 알 수 없다.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고 싶어도 지금 상황에서는 공부할 시간을 낼 수도 없는 형편이다.

그나마 송 교수 가족이 힘겨운 한국생활을 참아낼 수 있는 것은 주위 사람들의 따뜻한 배려 덕이다. 독일에서부터 알고 지냈던 이들은 서울 지리에 어두운 송 교수 가족의 손과 발이 돼주고 있다. 서울에 일가친척 한명 없는 송 교수 가족을 위해 작은 오피스텔도 얻어주고, 자기들끼리 순번을 정해 ‘운전기사’를 자청한다. 오성숙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한정식집에서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날라준다. 덕분에 냉장고는 항상 그득그득하다.

포승에 묶인 남편에 심장 멎을 뻔

하지만 갇혀 있는 송 교수를 생각하면 항상 목이 멘다. 철창이 달린 호송차를 보기만 해도 ‘가슴이 무너진다’는 정씨는, 얼마 전 남편이 포승에 묶인 채 조사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심장이 멎을 뻔’했다.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독일에서 송 교수는 대장종양 제거수술을 받았고 한국에서 치질수술도 받았지만 제대로 치료나 받고 있는지도 걱정이다. “아픈 데는 없는지, 춥지는 않은지 물어봐도 ‘괜찮다’ ‘따뜻하고 좋다’는 말만 해요. 그래서 얼마 전에는 ‘그럼, 계속 있어도 되겠네’ 하고 농담했더니 그냥 웃기만 하더군요.” 정씨는 “예전에 민주화운동으로 감옥생활을 하셨던 분들 얘기를 들어보니 어떤 분은 6개월 만에 이가 5개 빠졌다고 하고, 어떤 분은 1년 만에 17개가 빠졌다고 했다”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고 말했다.

021014000120031126486_42.jpg사진/ 체류기간이 ‘생각보다’ 길어지면서 여권 갱신을 위해 독일대사관을 찾았다. 정씨는 1년에 쓸 수 있는 휴가 6주를 다 쓴 뒤, 지금은 병가를 내고 한국에 머물고 있다.

얼마 전에는 큰아들 준씨가 독일에서 화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가족이 ‘경사’를 맞았지만, 사정이 사정인 탓에 제대로 축하해주지 못해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다만 아들 친구들이 종이 학사모를 만들어 씌워준 사진을 보내와, 면회실의 두꺼운 유리벽에 사진을 대고 송 교수에게 보여주며 잠시 기쁨을 나눴을 뿐이다.

11월19일 검찰은 국가보안법 상의 △반국가단체 가입 △회합통신 △잠입탈출과 사기미수 혐의 등을 적용해 송 교수를 기소했다. 소식을 전해듣자 가족들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정씨는 “예상은 했지만 역시 충격적이네요” 하며 입을 다물었다. 린씨는 “입증되지도 않은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혐의로 검찰이 기소했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날 오후부터 정씨의 휴대전화가 계속해서 울려대기 시작했다. 기소에 대한 ‘소감’을 묻는 언론사 기자의 전화부터 대책위 관계자, 송 교수 소식을 들은 지인들의 ‘위로’ 전화까지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송 교수 가족을 찾았다. 정씨 역시 작은 수첩을 꺼내들고 여기저기 전화를 걸며 ‘상황’을 알렸다. 정씨의 전화수첩은 이미 표지가 거의 닳아 있었다.


‘고마운 분, 소중한 분’이 있기에…

“송 교수는 한국인으로, 우리는 독일인으로 살아왔다”고 말하는 송 교수의 가족들은 한국의 가장 어두운 모습을 온몸으로 경험하는 중이다.

하지만 “한국에 온 걸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남편 문제가 개인의 문제를 넘어섰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대법원 결정이 내려진 변호인 입회권 문제도 그렇고…. 지금은 남편이 고초를 겪지만 한국사회가 민주사회로 가는 디딤돌의 역할을 하길 바랍니다.”

인터뷰 간간이 눈시울과 코끝이 붉게 변하는 정씨를 보며, 정씨의 전화번호 수첩 앞에 쓰여 있는 ‘고마운 분, 소중한 분’이라는 글귀가 더욱 크게 눈에 들어왔다.


글 최혜정 기자 idun@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출처:한겨레21 200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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