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green>[미주]민족운동 100년사 편찬</font> > 기타

본문 바로가기
영문뉴스 보기
2024년 5월 18일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사이트 내 전체검색
뉴스  
기타

<font color=green>[미주]민족운동 100년사 편찬</font>

페이지 정보

작성자 minjok@minjok.c… 작성일03-09-12 00:00 조회1,199회 댓글0건

본문

미주내 민족민주운동 인사들과 뜻을 같이하는 미주동포들은 2일 로스엔젤레스에 모여 「미주동포민족운동100년사 편찬위원회」결성 총회를 갖고 정관 채택, 선우학원 박사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운영위원 16명과 2명의 감사를 각각 선출했다.

100report-3.jpg이날 오후 2시 시내 실라부폐 식당 별관에서 오후2시부터 시작된 「미주동포민족운동100년사 편찬위원회」행사는 1부에 총회, 2부에 창립기념 학술세미나, 3부에 창립축하 만찬회 등으로 총 6시간 30분 동안 진행됐다.

▲1부순서는 1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정무 준비위 실행위원 사회로 개회선언, 미주민족운동에 몸 받친 인사들(김상돈, 임창영, 차상달, 김성락, 노의선, 백학구, 정만수, 홍동근, 강광석, 전충림, 최도식, 장성남 등의 선열들)에 대한 묵념, 선우학원 위원장의 개회사, 은호기 준비위 총무의 경과보고, 정관 심의.채택, 운영위원과 감사선출, 사업계획 및 예산안 심의.채택에 이어 각계서 보내 온 축사들이 소개되었다.

100report-1.jpg축사들은 한국의 박형규 목사(한국민주와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이창복 민족화해협력법국민협의회 수석의장, 국회의원), 하기환 로스엔젤레스 한인회 회장, 서굉일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회장의 축사들이 소개되었다.

이어서 「미주동포민족운동100년사 편찬위원회」창립선언이 전순영 여사(카나다 뉴코리아 타임스 발행인)에 의해 낭독되었다.

이 선언문은 "미주민족운동사는 한국민족운동사의 한 부문이라는 인식을 뛰어 넘어 우리 미주동포사회의 고유한 역사임을 확인한다. 미주민족운동사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아메리카합중국과의 관계 속에서 특이하게 전개되어 왔음에 주목하여야 하며, 따라서 우리의 민족얼은 ㅍ여등한 국제질서와 세계 평화를 지향하는 열린 민족얼임을 강조한다. 민족얼이 살아있는 역사, 민족얼을 지키는 역사, 민족얼을 키우는 역사창조를 위하여 동지들의 뜻을 모아 미주동포민족운동100년사편찬위원회를 창립한다"고 발표했다.

▲2부순서는 은호기 준비위 총무 사회로 창립기념 학술세미나가 진행되었다.

100report-2.jpg서굉일 박사(한신대 교수,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회장)는 「한국현대사와 미주동포 민족운동」에 대해, 양은식 박사(준비위원, 전 유씨엘에이 교수)는 「미주동포사회와 민족운동」에 대해 주제들을 발표했고 김상일 박사(한신대 교수), 유의영 박사(켈리포녀 주립대학 교수), 이선주 목사(크리스천 헤랄드 주필)이 토론자로 참가했다.

-양은식 박사는 "이민 100년 민족운동 100년"에서 20세기는 한국현대사의 유례없는 격동의 시대라고 지적하며 이러한 시기에 한인들은 만주, 시베리아, 하와이, 멕시코, 일본 등지로 탈출했는데 이러한 와중에 최초의 미주이민이 시작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는 한인들의 미주이민은 처음에는 경제적 사회적 정착을 하는 것으로 시작되지만 조국의 정치적 숙제에 투쟁적 참여의 특징을 보여왔다. 이민 역사 100년이 민족운동역사 100년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03년 미주이민자들이 하와이 상륙과 동시에 독립운동에 뛰어들고 사탕수수 농장에서 품팔이를 하여 한달동안 번돈 16달러 중 10달러를 독립운동 자금으로 쾌척하는 자세를 보였다. 광복후 잠시 중단되었지만 남한에 군사독재 폭력이 휩쓸자 미주의 민족민주운동은 민주화운동(1960~1989)시기로 접어든다. 이후 외세와 국내 수구보수세력의 상호작용으로 나라가 영구분단으로 심화되어 가자 미주운동은 본격적으로 통일운동 시기(1990~현재)로 돌입한다.

yangeunsik-1.jpg양박사는 "미주민족운동의 역사적 성격"과 "민족운동의 이념, 쟁점과 조직운동"의 배경들을 거론하면서 초기에는 국민회, 동지회 등 보수진영이 "신한민보"를 통해 홍보하며 주도하는 한편 진보진영은 정세연구모임, 기관지 "독립"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보수진영은 애국금을 거둬 상해 임시정부에, 진보진영은 중국에서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군을 지원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현상은 광복이후 이승만이 미국에서 남한으로 들어가 집권하자 그와 미주에서 경쟁적 위치에서 대립했던 국민회와 흥사단 회원들은 남한에 돌아가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때문에 분렬과 미움의 상처를 민족역사에 남기고 갔다고 그는 지적한다.

미주동포사회는 60년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시기에 대거 밀려온 남한 유학생들과 60년대 중반 이민법 변경으로 한인이민자들의 숫자가 점증하자 미주이민 사회는 새로운 활력을 갖는 계기를 맞는다. 한일굴욕외교, 삼선개헌, 통혁당 사건 등 고문 탄압사건들이 잦아지자 이에 대한 저항운동들이 국내에서 일자 이에 대한 흐름은 미주에도 이어졌다. 70년대 초 김대중의 납치사건은 미주를 비롯한 해외운동을 활성화 시키는 계기를 만든다. 뉴욕, 위싱톤에서는 김재준, 임창영 중심으로 그리고 로스엔젤레스에서는 김상돈, 차상달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이 싹튼다. 그러나 이 운동은 본격적 조직운동보다 명명가 중심의 운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설명됐다.

이러한 시기에 77년 도꾜에서 민주민족통일 해외한국인연합(한민련)이 결성되어 일본, 미주, 유럽 등지의 해외동포들이 남한정부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운동연대의 계기가 마련된 것은 큰 성과였다고 양박사는 평가한다.

kimsangil-1.jpg[사진은 토론자로 나온 김상일 교수(한신대)가 종합평가 발언을 하고 있는 장면]

그는 "무엇보다 80년대에 들어서자 민주화운동에 질적변화가 일어났다. 미국에 대한 한국민중의 인식에 혁명적 전환이 온 것이다"라고 진단하면서 그 이듬해에 "미주와 유럽의 인사들 30여명이 비엔나에서 북조선의 인사들과 기독자간의 대화라는 대형 회합을 열었다. 이것은 분단 35년만에 처음으로 있은 해외인사들과 북조선 인사들과의 만남이었다"고 회고했다. 이 행사는 1982년에 헬싱키, 그 다음에 다시 비엔나 교류가 진행되면서 미주운동의 초점은 통일로 전환되어 갔고 동시에 일본의 진보적 동포학자들과 해외동포학자들 중심으로 민족통일 심포쥼이 유럽, 미주, 일본에서 개최되면서 통일문제가 쟁점으로 부상하였다. 특히 1984년 "분단을 뛰어넘어"라는 북조선 방문기가 해내외에 널리 퍼져나가 "북한바로알기" 운동이 확산된다.

양은식 박사는 마지막으로 민족운동과 미국의 운동환경에 대해 한반도 문제가 미국과 특별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미주에 사는 동포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특수한 환경에서 이민사 100년을 체험해 왔다고 말하면서 일제독립운동, 남한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에 참여하면서 겪는 사회환경의 특징들을 설명해 준다. 미 당국자들은 분단이후 지속적으로 남한정부의 활동에 간여하면서 때로는 지지하고 또는 반대하여 왔는데 미국내 진보진영, 또는 통일세력들에 대해서는 시종 예민한 반응을 보여 왔다. 최근의 예정웅 사건이 하나의 예이다. 6.25전쟁 당시에는 미국내 민족혁명당 간부들을 "비미국인 활동 미의회 조사위원회"에서 연행조사한 일도 있었다. 요즘에는 여중생 사건이후 일고 있는 촛불시위가 미주동포사회에 번지자 이에 대한 미당국의 반응이 예민한 것도 미 주류언론들의 보도로 나타나고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마지막으로 양박사는 "미주 운동을 항상 국내 정치위기에 대한 저항의 진원지 혹은 교두보였으며 이것은 한국정치사의 중요한 거점이었다"고 평가했다. *발표 원고 전문을 보려면 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기 바랍니다.

-서굉일 교수는 미주민족운동 100년사 편찬의 의의라는 제목으로 발표하면서 (1)"미주동포민족운동 100년사"를 어떻게 볼것인가.(2)이민과 한인 사회의 형성, (3)근 현대 백년과 민주주의 성취, (4)민족해방 운동기(1903~1945), (5)민주화 평화통일 운동기(1945~?)에 대해 설명했다.

suhkwingil-2.jpg"지난 100년의 고난의 역사는 구한말 시기, 일제의 강점기, 분단의 시기로 구분될 수 있는데 이러한 민족사의 시대구분속에서 미주 이민사회는 첫째 미국땅에서 한인사회를 형성하였고, 둘째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에 매진하였으며, 셋째 분단된 민족사의 현실을 평화통일로 바꾸는 일에 힘써왔습니다.

" 미주 민족운동사는 파벌의 문제로도 묘사될 수 있수 있습니다. 박영만의 무장투쟁론, 도산 안창호의 무실역행론, 리승만의 외교론 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운동자체가 가지는 특징들이 있기 때문에 그 특수성들을 서로 존중하는 기초위에서 민족운동사가 서술되기를 바랍니다.

"100년사를 통하여 이민사회가 한층 더 성숙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과거를 검토할 뿐만 아니라 새시대를 향한 이정표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일제에 의해 왜곡되어 서술된 당파성을 극복하여 파벌중심의 이주사괴가 치유되는 그리하여 화해와 일치, 상생의 세상으로 바뀔수 있는 이주사회의 동덕의 실록이 되어지기를 기대합니다"라고 서 교수는 소망했다.

그는 미주 이민자들의 한인사회 형성에 대하여 1903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과정과 시기들을 설명하고 1903년 8월에 탄생한 "신민회"가 단순한 친목단체가 아니라 이주사회에 널리 펴져 있는 정치조직이라고 지적하고 이 신민회는 민족의 단결을 기하고 백성들을 계몽시킴으로써 일제의 침략을 물리치자는 목표를 세웠다고 분석했다. 안창호는 샌후란시스코에서 친목회를 발족시켰고, 1905년 공립협회로 개편하여 정치단체로 출범시켰다고 설명했다. 이 단체는 국내에서 비밀결사 신민회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서교수는 발표자료를 통해 안창호는 미주에서 또 1909년 대한인국민회를 창립하였는데 대한인국민회는 민주와 자유평등 등을 이념으로 하였고 미주, 만주, 시베리아에 까지 조직을 확대하였고 1913년 미주의 국민회는 대한인국민회로써 이주한인들의 대표기구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조직으로 이 조직은 캘리포니아 주정부로부터 사단법인 인가를 취득하여 한인들의 이익을 대변하였다고 설명하였다. 이승만의 동지회 운동 등도 나름대로의 활동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yooeuiyong.jpg[사진은 토론자로 나온 유의영 교수(캘리포녀주립대 교수)가 발제자들의 발표에 대해 종합평가를 하고 있는 장면]


미주땅에는 또 열사들의 의거활동도 전개됐다. 전명운, 장인환 의사들은 일본을 협조해 온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했는데 이 사건은 미주민족운동을 새로운 정기를 맞게했다고 한다. 이러한 계기를 맞은 미주동포사회는 그 이후 조국이 해방되기 까지 각 지역에서 광복운동에 힘을 기울여 왔다.

해방이후 분단시기에 들어와 우리나라 사정은 분단민족주의와 통일민족주의로 나뉘어 졌으며 이러한 와중에서 한측에서는 민족공조를 또 다른 측에서는 한미동맹을 강조하는 충돌들 때문에 동포들 사이에 갈등의 벽들도 존재했다고 설명한 서교수는 "민족공조가 한미동맹보도 우선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반미주의를 하여서는 안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서 교수는 마지막으로 "이주100년사는 분단의식의 역사인식이 아닌 통일민족주의 역사인식으로 남북을 대등하게 통일전선론적인 역사인식으로 기술되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결론 맺었다. *서 굉일교수의 발표논문 전문을 보려면 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leesunjoo.jpg[사진은 이선주 목사가 발제자들의 내용을 종합평가하면서 질의하고 있는 모습]

-토론자들인 유의영 교수, 이선주 목사, 김상일 교수 등 3명은 여러가지 논점들을 제시했다. 민족민주운동의 정의를 비롯하여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어디에 둘것인가, 남북을 바라보는 제3의 세력으로 남과 북을 대등하게 볼수 있는 있는 안목으로 서술할 것인가 아니면 치우쳐 서술 할 것인가, 미국에 살면서 민족에 우선한 정체성을 가질것인가 아니면 미주땅에 사는 이민자로서 미주땅에 뿌리를 내리는 존재의 정체성을 정립하고서 그 기초위에 남북을 바라볼 것인가를 규명해야 한다는 등 무게 있는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토론자들 대부분은 「미주동포민족운동100년사」는 이민사회 안팎의 집필진들이 무엇보다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100년사를 바라볼 수 있는 인물들로 구성되어야 이 사업이 대중적 지지를 획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3부순서는 노길남 민족통신 대표의 사회로 창립축하 만찬회로 이어졌다. 워싱턴 디씨에서 참가한 로광욱 박사가 만찬 기조연설을 통하여 이민100년 민족운동사 편찬은 대단히 중요한 사업이라고 강조했다. 전순영 여사(카나다 뉴코리아 타임스 발행인)는 「미주동포민족운동100년사 편찬위원회」의 발전을 위해 참석자 일동의 염원을 담아 건배하는 순서가 있었다.청년 노래패 "노래지기"회원들의 2중창 축하노래 순서에 이어 참석자들의 소개순서로 이어졌다.

카나다에서 전순영 여사, 뉴욕에서 지창보 박사, 필라델피아에서 이행우 선생, 워싱턴 디씨에서 이효숙 여사, 로광욱 박사, 샌후란시스코에서 최경욱 선생 등 여러분이 참석했고 민족민주운동 원로들인 선우학원 박사와 부인 소니아 선우, 현준기 재미동포서부연합회 회장, 조동설 미주동포전국협회 회장, 최진환 박사, 박천흠 선생, 한무학 선생, 그리고 한인사회의 유지들인 차종환 박사, 정호영 전 가든그로브 부시장, 오인동 박사, 이석렬 원로언론인, 민병용 미주이민100년기념사업회 사무총장 등과 한국에서 참석한 김상일 교수와 부인 이성은 교수, 서굉일 교수와 부인 및 가족들 등 1백여명이 만찬회에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장장 6시간 30분 동안 자리를 지키면서 「미주동포민족운동100년사 편찬위원회」창립을 축하해 줬다. 참석자들은 소감의 말들과 함께 오랜만의 만남들을 서로 반가워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마지막 폐회로 장식하며 3부 행사를 마감했다.

[민족통신 공동취재반 8/2/2003]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로그인

[부고]노길남 박사
노길남 박사 추모관
조선문학예술
조선중앙TV
추천홈페이지
우리민족끼리
자주시보
사람일보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한겨레
경향신문
재도이췰란드동포협력회
재카나다동포연합
오마이뉴스
재중조선인총련합회
재오스트랄리아동포전국연합회
통일부


Copyright (c)1999-2024 MinJok-TongShin / E-mail : minjoktongshin@outl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