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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green>[대담]김원웅 의원 방북성과</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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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3-05-06 00:00 조회1,3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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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원웅, "7월 민족체전에 북에서 1천명 이상 내려올 것"
북측에 북핵 다자해법 제안, 대북 밀사설은 부인

지난 14일, 김원웅 개혁국민당 대표는 남북 민간간에 `통일민족평화체육축전`을 7월 제주도에서 열기로 전격 합의했다고 합의서 전문을 공개했다.

30326_12.jpg국회의원이자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선 개혁국민당 대표의 이런 전격 발표는 세간의 구구한 억측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을 것이라는 대북 밀사설에서부터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을 상의했을 것이라는 그럴 듯한 소문도 나돌았다.

"이 문제로 인터뷰는 처음이다"며 말문을 연 김원웅 대표는 "역대 최대 규모인 1천명 이상의 북측 체육인과 문화예술인이 내려올 것"이라며 전격적인 합의에 도달한 과정을 소상히 밝혔다.

뿐만 아니라 사석에서 이른바 `북핵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법을 제시한 내용까지 주저없이 털어놓았다. 그러나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다했다"고 했지만 끝내 대북 밀사설 대목에 이르러서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일시 : 2003. 4. 17. 오전 11시 30분
장소 : 김원웅 의원실
대담 : 김치관 기자
사진 : 송정미 기자


□ 2월에 첫 방북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 2월에는 남북의 역사학자들이 ‘일제의 조선인 강제연행 범죄성에 대한 남북공동 자료전시회및 공동토론회’를 같이 했다. 그때 아태위(아시아.태평양위원회) 리종혁 부위원장이 영접을 했다. 19~22일까지 있었는데 공식적인 일이 일제 강제연행에 대한 자료 전시회 때 테이프 끊는 것과 학술토론회 축사 정도였다. 시간이 많이 남는데 평양을 처음 구경하는 것이니까 호기심이 있었다.

30326_14.jpg지난 2월, 민족체전 제안에 북측에서 긍정적으로 접근

국회에서 일제 강제연행에 대한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대표 발의해 법안을 추진하고 있어 그런 자격으로 참석했다. 가쁜한 심정으로 갔다. 그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이었고 조각이 임박해, 인사청탁을 피할 겸해서 국회도 휴회고 해서 다녀왔다.

□ `통일민족평화체육축전`은 그때부터 이야기가 됐었나?

■ 그때 자연스럽게 월드컵 이야기, 아시안 게임에서 북측 응원단이 남측에서 인기를 모았다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남쪽에서는 일년에 한번씩 전국체전을 한다. 전국체전을 남북이 함께 합친 민족체전으로 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랬더니 그쪽에서 반응이 왔다. 긍정적인 접근을 하기 시작했다.

남쪽으로 왔는데 대통령 취임식과 조각으로 바빴고, 3.1절 때 북측의 대표들이 왔는데 대표단의 한 사람인 학술토론회 북측 단장인 주진구 조국통일연구원 부원장이 만나자고 해서 만났더니 `김원웅 대표가 제안했던 민족체전에 북쪽에서도 관심이 많은데 한번 해보자`고 했다.

□ 정부측과의 협의는 어떻게 진행됐나?

■ 3월 4일, 이창동 문광부 장관이 취임한지 얼마 안됐는데 체전 관련이니까 상의를 했는데 검토하고 통보가 왔다. 기존의 남북 체육.문화 교류 방향과 부합된다는 얘기가 있었고, 그 이후 관련 부서인 통일부 직원과 문광부 직원 그리고 우리 사무실 보좌진들과 실무적인 얘기를 했다.

4월 초쯤 북쪽에서 초청장이 왔고, 이창동 장관과 정세현 장관을 만나 4월 8일 방북한다는 것을 얘기하고 실무진도 만나 어느 선까지 얘기할 것인지에 대해 원칙을 정하고 우리 나름대로 제안서를 만들었다.

□ `통일민족평화체육축전`이라는 대회 명칭이 상당히 독특하다.

■ 그 사이에 나는 평화라는 것을 말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평화를 위한 민족체전, 민족평화체전을 생각하고 이라크전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라크전 이후엔 전 세계의 이목이 한반도에 집중되고 있으니 한반도 위기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현정세에도 부합하고 전쟁을 겪었던 주권 실체와 실체간의 대규모 모임이기 때문에 화해와 평화라는 개념으로 나와야 하는 게 순리라 생각했다.

□ 제주도 하면 김정일 위원장 답방이 떠오르는 것이 사실이고 김 대표의 밀사설이 제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 그쪽에 설명한 것은 아닌데 제주도라고 생각한 이유는 제주도가 4.3항쟁이라는 분단의 상흔, 상처가 가장 깊은 고장 중에 한 곳이다. 그래서 민족 동족상잔의 상처를 치유하는 그리고 상극의 20세기로부터 상생의 21세기로 넘어가는 상징적인 지역이다.

또 하나는 제주도에서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평화의 섬으로 만들려는 주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이 시작되고 있고, 4.3 위령공원을 평화공원으로 명명할 정도로 제주도민이 민족분단의 상흔을 평화의지로 승화시키려는 높은 문제의식과도 연결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그 당시 북을 방문했을 때 평양도 춥고 대동강, 보통강도 꽁꽁 얼고 해서 남쪽에서 가장 따뜻한 고장에 초청하고 싶다는 생각과 추운 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따뜻한 제주에 대한 낭만적 동경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제안하게 됐다.

□ 행사 시기가 한 여름인 7월인데.

■ 처음엔 5월 정도에 하려고 했는데 준비하는데 시기적으로 촉박하고, 이번에 갔는데 2월과는 완전히 다른 평양의 풍경을 봤다. 평양에 도착해서 호텔로 가는 양쪽 길에 살구꽃 가로수가 만발해 있었다.


▶능라도경기장이 내려다 보이는 주체탑 위에 선 김원웅 대표 [사진 제공 - 김원웅 의원실]

살구꽃은 연분홍으로 물들어 있었다. 배꽃은 밤길에 맞는데 살구꽃은 환한 대낮에 더 어울린다. 그래서 평양을 화려한 도시로 만든다. 대동강변이 살구꽃으로 물들어 평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 때에 갔다. 평양 주민들도 이 계절이 제일 아름답다고 하더라. 살구꽃이 만발하고 대동강변에 수많은 버드나무에는 파릇파릇한 순이 올라오고 이런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다.

□ 이번에 합의서가 나오게된 과정을 소개해 달라.

■ 남북장관급회담도 무산되고 북미관계도 악화되는 등 경색된 국면에서 민간교류 행사마저도 모두 취소를 하는 상황이었다. 어느 방송사가 6.25특집을 만들러 가려고 했는데 취소되기도 했다.

"민족체전 합의는 북측 전략과 배치되는 어려운 결정"

우리 남북관련 부서 실무자들의 의견이 회담 성과에 대해 비관적이었다. 상황이 어려고 몇 번씩 만나야 하는데 단번에 뭐가 성사되겠냐는 것이다. 남쪽 남북관계 전문가들로부터도 `김원웅 대표가 성과가 없을 것이다`는 비관적 이야기를 들었다.

북쪽에 가서 첫 마디가 `어려운 국면에 왔다`고 했다. 나는 어떻게 보면 아마츄어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한반도가 민족적 재앙이 오느냐 아니냐 하는 이 중대한 국면에서 민족적 관점에서 애국심을 갖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싶다. 신의성실에 따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왔다고 말했다.

나는 내가 가진 보따리를 단계적으로 풀지 않았다. 우리가 만든 서류를 한꺼번에 던졌다. 던진 다음에 자기들끼리 치열하게 한 항목 한 항목 회의를 하고 답변을 주고 했는데 떠나기 전날 밤에 서명을 했다. 서명장에서도 분위기가 상당히 긴장됐다.

북쪽에서도 상당히 어려운 결정을 했다. 지금까지의 북한 전략과는 배치되는 결정을 한 것이다. 북쪽에서는 6.15이후 크고 작은 체육문화행사가 있었다. 그것을 하나로 모아 큰 종합행사로 하는 것이다. 고심도 어려움도 진통도 있었는데 끝내 용단을 내렸다.

이때 옆에 있던 보좌관이 "북측은 김원웅 의원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김 의원의 일관된 소신과 민족적 양심을 지키려는 자세에 신뢰를 갖고 있다. 김 의원의 아버님 함자도 알고 있었다. 북측은 이러한 신뢰 때문에 이번에 이런 결단을 내렸다"고 보충해 주었다.

□ 북측 협상 상대는 아태위 전금진 부위원장이었나?

■ 전금진 부위원장이 연세가 72살이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까 지난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72년도 7.4 남북공동성명 때도 대변인으로 왔고, 그 이후에 노태우 정권 시절의 남북기본합의서 때도 책임자로 참여했다.

6.15 공동선언 때도 북측의 주역으로 참여해 김대중 대통령이 오셨을 때, 북한 체류중인 김대중 대통령을 모시는 일을 김정일 위원장께서 자기한테 맡겼다고 했다. 북측으로는 대남 문제에 있어서 최고위급 인사라 볼 수 있다. 민화협이나 아태위 실무자들이 있었지만 주로 그 분과 이야기를 나눴다.

□ 김용순 비서 등 다른 고위층 인사들은 만나지 않았나.

■ 내가 특별히 보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다. 이번에 무슨 의례적이거나 이런 것보다 실무 일을 성사시키는데 집중했으니까.

□ 항간에서는 대통령의 대북 밀사설이 나돌고 있다.

■ 밀사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 우리가 정부의 공식적인 절차를 밟고 갔는데 결과가 불투명하기 때문에 언론에 미리 보도되면 합의를 보는데 장애로 작용할 수도 있고, 남북문제, 민족문제라고 하면 우호적이지 않은 언론과 정치세력이 있는데 공개하고 가면 흠집을 낼까봐 공개 안한 것뿐이다.

□ 일부에서는 `비밀방북`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 비공개가 이상하다고 이야기하면 안된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엊그제 북핵 3자회담을 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비공개로 하지 않았는가. 그 합의내용에 언제 만났다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 부시가 비공개로 했다고 미국언론은 물론 우리 언론도 아무 말 않는다. 그런데 비공개 방북을 왜 우리 언론은 문제삼는가. 이것도 맹목적 흠집내기라고 생각한다.

어느 외교든지 협상이 완료될 때까지는 비공식적으로 추진해야 장애를 안 받으니까 그렇게 하는 것인데 이런 식으로 몰아가는 것은 기준이 맹목적인 흠집내기라는 얘기도 그런 의미이다.

`어느 외교든 비공개는 있어`

토요일 저녁 6시 서울에 도착해서 월요일날 발표를 했는데, 이렇게 신속하게 발표한 적이 언제 있었는가. 발표하면서 합의서 원문까지 그대로 발표했는데 얼마나 신속하고 투명하게 했는가. 언론이 노무현 정부에 와서는 기존과 다르게 투명하고 신속하게 할 줄 안다고 평가해줘야지.

□ 현안 외에 다양한 만남과 논의도 있었을텐데.

■ 매일 공식적인 회의에서는 민족평화체전에 대한 논의만을 했다. 그외 오찬이나 만찬이나, 사석에서 만났을 때, 예를들어 평양의 능라도에 같이 갈 때 차 타고 가면서 이야기도 하고 했다. 이라크전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라크전 문제 이후 한반도의 북핵문제가 세계적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시점에서 남북의 정치인이 모여서 북핵문제에 대해 얘기 안할 수 없지 않은가.

내가 `왜 다자회담을 반대하느냐`고 이유를 묻자, 이번에 미국과의 긴장관계는 94년 제네바합의 파기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이 긴장관계를 그 당사자인 미국과 북한이 해결해야 되는 것이 옳지 않느냐고 북측이 답했다.

또 하나는 미국이 명분에 밀리니까 강대국을 개입시켜 압력을 가할 우려도 있다. 이는 민족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당사자들끼리 해야지 강대국이 끼는 것은 우리의 주체적인 외교노선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 북측 입장이다.

나는 미국과 북한이 이렇게 계속 평행선을 달리다 보면 서로 양보 안할 것 아니냐. 너무 형식에 구애받지 말고 실질적인 양자회담을 하면 되지 않느냐. 실질적인 양자회담으로 가자. 그 방법이 뭐냐 해서. 다자회담의 틀속에서 양자회담을 집중적으로 추진하면 되지 않느냐. 그리고 아무리 다자회담을 하더라도 북한과 미국이 동의하지 않은 다른 나라 의견이 무슨 의미를 갖겠느냐. 이것이 더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말했다.

□ 북측의 반응은 어땠나?

■ 그 얘기에 대해서 아니라고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았고, 귀 기울여 듣는 인상을 받았다. 더 위에 들어가는 것을 염두에 두고 내가 한 말이었다.

북측이 `민족공조를 강화해야 하지 않느냐` 이야기 하길래 나는 한미공조가 노무현 정부에 와서 새로운 자주적인 한미공조, 한미관계가 수평적인 관계에서 한미공조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정권과 같이 미국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미국말을 듣는 그리고 실제로 미국의 의견을 한미관계로 포장하는 이러한 한미공조로부터 우리 의견도 반영시키는 한미공조로 한미관계를 수평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무현 정부가 할 거다.

그리고 노무현 지지하는 지지세력, 유권자가 그걸 바라고 있다. 그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미공조가 남북공조와 반드시 충돌한다고만 보지는 않는다. 한미공조가 민족공조와 상호보완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달라고 했다.

더구나 이 문제는 양면성이 있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민족공조에 대해서 대단히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늘 한미공조의 틀속에서 강조를 하는데 나는 미국도 그걸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국도 민족공조가 반드시 한미문제에 배치되지 않는다, 충돌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하면서 시야를 넓히게 해야 한다. 우리는 북한측에도 이야기하지만 미국측에도 이런 입장을 관철시켜야 한다, 이런 얘기를 했다.

그런 관점에 대해 그쪽에서 반응은 그런 새로운 발상은, 자기들이 전혀 접근하지 않았던, 제가 느끼기에는 귀담아 듣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번에 느낀 점은 신의성실의 원칙과 한번에 탁 터놓고 한 것이 북측에 신뢰를 줬다고 본다.

한미관계가 역사적으로 얽혀있고 해방이후 반세기동안 문화적으로 연결되었고 경제적으로 긴밀한 관계가 있고 해서 북측처럼 미국이랑 적대적으로 대립할 필요를 안 느끼는 쪽이 남쪽이다. 그래서 북한이 남쪽에 대해 미국과 맞서는 식으로 그렇게 기대를 하면 안될 것이라는 얘기도 분명히 했다.

□ 이라크 전쟁중에 방북했는데 당시 북측의 분위기는 어땠나?

■ 일반 시민들의 분위기는 평온했고, 마침 4.15 태양절 축제 준비 때문에 밝은 분위기였다.

□ 방북에서 특별히 감지된 점은 없었나?

■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지 한달 밖에 안돼서 갔는데, 노무현 정부의 역사인식, 노무현 대통령의 역사인식, 민족 자존심을 지키리라는 기대가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북측이 직접적으로 이야기는 안하지만 이번에 합의를 해준 것도 뭔가 노무현 대통령과 10여년 동안 같이해온 김원웅이 코드가 비슷하지 않겠느냐 하는 인식을 하고 그런 기대와 함께 서명한 것 같다.

"대통령 노무현과 국회의원 김원웅은 역할이 다르다"

예를 들어 파병문제에 대해서도 그쪽에서는 납득이 안가는 거다. 노무현 정부가 파병하는데 김원웅 의원이 반대를 했느냐. 파병에 대해 노무현 정부에 대해 불만도 있고. 우리 남쪽에서도 이해 안가는 사람이 있는데 북쪽의 체제나 실정에서 보면 당연하다. 김원웅 의원이 제일 앞장서서 파병을 반대하면서 농성을 시작해 먼저 깃발 들고 12일간 농성하면서 의원모임 끌고 나간 것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

두 가지 이야기를 해줬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아니라 국회의원이라면 파병반대 농성에 합류했을 것이다. 이번 노무현 대통령의 파병방침 결정은 평소의 노무현의 철학과는 배치되는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대통령 노무현과 국회의원 김원웅은 역할이 다르다. 대통령이 더 책임범위가 넓다. 대통령은 자기를 찍지 않은 절반의 국민들도 다함께 포용해서 가야하는 입장이다. 만약에 내가 대통령이 되도 파병반대 농성을 했겠느냐?

이번에 미군 정찰기가 북한 영해 근처를 근접 정찰했다. 그것에 대해 북쪽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이 과잉도발한 것이라고 표현한 것을 기억하고 리마인드 시켜주었다.

이번에 파병 결정에 대해서도 국회에서 파병동의안을 냈는데 통상 파병은 정의로운 것이며 그러니까 동의를 해달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정상이고 이제까지 역대 대통령들이 그렇게 이야길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파병의 명분에는 문제가 있지만 국익을 위해서 파병을 동의해달라는 얘기했는데 그것은 그동안 역대 대통령이 아무도 할 수 없는 얘기를 했다고 생각해달라고 얘길 해줬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미국의 이라크 전쟁 반대는 81%다. 그런데 파병 찬성과 반대는 5대 5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의 파병방침 결정에는 75%가 이해를 한다는 입장이다. 너무 단선적으로 한국정치를 생각하지 말아라. 바로 내가 파병반대, 전쟁반대 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을 이해하는 75% 안에 들어가는 사람이다. 이렇게 얘길했다.

□ 북측에서는 상당한 위기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 그쪽은 강인하더라. 민족 자존을 지키는 끈을 놓치지 않겠다는 것이다. 미국 켈리 차관보에 대해 불신이 심하고 그가 한 얘기를 가지고 대단히 강도있게 비판했다.

켈리가 예의상으로라도 대화를 하러 왔다고 이야기 한 것이 아니고 통지를 하러왔다. 무슨 통지냐? 북한에 우려사항이 있다. 행동으로 우려사항을 제거하는 것을 보여달라. 근거가 뭐냐? 근거는 없다. 민족적 자존심도 있고 그런 고압적 태도에 대해 맞서려고 했다. 미국이 그렇게 고압적 태도로 나온다면 우리는 핵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강력한 무기도 만들 수 있다고 얘기했다는 것이다.

"민족체전 통해 우리 민족의 문화적 우수성을 전 세계에 과시하자"

있다고 얘기한 것은 북한이 주권국가로서의 권리라는 원칙을 표명한 것이지 핵을 가지고 있다고 얘기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데 돌아가서는 북한이 시인했다고 조작하는데,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하고 심지어는 우라늄을 니제르에서 가져왔다고 문서까지 조작해서 미국에서 발표하고... 미국이 날조와 조작의 절차를 밟기 위해 켈리가 왔다갔다며 미국의 의도에 대해 상당한 불신이 있었다.

□ 초청장 명의는?

■ 민화협이다. 전금진 부위원장은 아.태위이지만 민화협 부위원장도 겸하고 있다.

□ 남측에서의 추진준비는 어떻게 되나?

■ 정치정세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올림픽 조직위원회나 월드컵 조직위원회 식으로 민간 기구가 진행하자는 것이다. 북측에서의 얘기는 문화예술 행사까지 남북이 함께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문화적 우수성을 전 세계에 과시할 수 있는 대규모 행사를 하자는 것이다.

□ 방남단 규모는 얼마나 되나?

■ 1천명 이상이 올 것으로 본다. 지금까지 역대 최대 규모다. 체육 경기와 문화예술 축전에 참여할 인원이다.

□ 초미의 관심사는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문제다. 제주도에서 대규모 축전이 열리면 그 기회에 김정일 위원장이 답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 그건 전혀 논의된 바가 아니어서 뭐라 말할 수 없다. 실무적인 레벨에서 그건 전혀 차원이 틀린 것이다. 이것(민족체전)을 성사시킨 것만으로도 앞으로 갈 길이 많다.

□ 민족체전의 종목은?

■ 서로 남북한에 민속적인 것이 많지 않은가. 태권도 시험이라든지 줄다리기 같은 것도 하고...

□ 그럼 실무는 어느 팀이 맡는 건지?

■ 실무팀은 그동안 대한체육협회나 조직위원회도 경험이 많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예술단체들이 참여를 해야 한다. 5월 실무회담에 가기 전에 구성을 할 것이다.

□ 끝으로, 5월 실무회담의 일정은 나와 있는가.

■ 아직 안나왔다. 5월중에 금강산이라는 것만 합의를 봤다.

[출처:통일뉴스 2003-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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