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해방인가 미완의 광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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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25-08-13 14:37 조회63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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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해방인가 미완의 광복인가
미군, 인천 상륙과 ‘점령군’의 실체
[로스앤젤레스=민족통신 김범 기자]
해방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목소리가 라디오 전파를 탔다. 그는 ‘대동아전쟁종결조서’를 읽으며 태평양전쟁의 종전을 선언했으나, ‘항복’이라는 단어는 끝내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일본은 패배를 ‘세계평화를 위한 결단’으로 포장했고, 전쟁범죄에 대한 사죄는 한 줄도 없었다.
당시 코리아반도의 민중은 이 소식을 곧바로 듣지 못했다. 라디오 보급률은 낮았고, 일본어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치 않았다. 하루 뒤 8월 16일부터 거리마다 일장기에 덧그려 만든 태극기를 흔들며 해방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남쪽에는 또 다른 외세의 군함과 군용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해방의 함성 뒤를 이은 것은, 또 다른 군화발의 그림자였다.
‘해방군’의 외피를 쓴 점령군
일제가 항복했을 때 이미 미·소 양측은 얄타회담과 포츠담선언을 거쳐 38도선을 기준으로 코리아반도를 분할 점령하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미국은 ‘해방군’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들어왔지만, 실제 임무는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고 그 지배권을 이어받는 것이었다.
미군의 공식 통치 기구 명칭은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USAMGIK, 주한미군정)”였고, 이는 본질적으로 ‘점령행정’이었다.
1945년 9월 8일, 존 하지(John R. Hodge) 중장이 이끄는 제24군단 7만여 명의 미군 예하 병력이 인천항에 상륙했다. 상륙 직후 미군은 “38도선 이남의 일본군 항복을 접수하고 군정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하지 중장은 첫 연설에서 이렇게 못 박았다.
“우리는 해방군이 아니다, 점령군이다.”
이 한마디가 미국의 참된 의도를 드러냈다.
To the People of Korea:
As Commander-in-chief, United States Army Forces, Pacific, I do hereby proclaim as follows:
By the terms of the Instrument of Surrender,56 signed by command and in behalf of the Emperor of Japan and the Japanese Government and by command and in behalf of the Japanese Imperial General Headquarters, the victorious military forces of my command will today occupy the territory of Korea south of 38 degrees north latitude.
(출처: 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45v06/d776)

포고문 원문

미군이 1945년 9월 9일 오후 조선총독부가 자리 잡고 있던 중앙청에서 일장기를 내리고(왼쪽), 성조기를 게양(오른쪽)
식민지 통치 구조의 연장
미군정은 조선총독부를 대신해 행정 권력을 장악했지만, 그 하부 조직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일제의 관료·경찰 체계가 그대로 유지됐고, 친일 관리와 경찰들이 대거 재등용되었다.
1945년 9월 14일, 미군정장관 아놀드 소장은 “기존 일본 경찰기구를 활용하라”고 지시했다. 이로써 해방 후 첫 공권력은 민족자주 세력이 아니라, 일제 부역자들의 손에 쥐어졌다. 독립운동 세력과 건국준비위원회, 각지의 인민위원회는 ‘치안 유지’ 명목 아래 무력 해산됐다.
토지개혁과 친일청산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미군정은 영어 사용을 우선하고, 정치·경제·군사 체제를 미국식으로 재편했다.
북과 남, 갈라진 길
해방 직후, 남쪽에는 미군이 점령군으로 들어와 군정을 실시했다. 북쪽에는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독립군 부대가 소련군과 함께 귀환하여 일본군 잔여 세력을 무장 해제하고, 토지개혁과 주요 산업 국유화를 단행했다.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이 선포되며 완전한 자주독립 국가로 나아갔다.
남쪽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군사·외교 주권은 미국에 예속되었다. 전쟁후 전시작전통제권은 미군이 쥐었고, 주한미군 주둔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범 처벌의 차이 — 독일과 일본
독일은 나치 전범을 철저히 처벌하고 피해국에 사죄했다.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에도 9만 명을 기소해 6천 명을 유죄 판결했다.
반면 일본은 미군의 비호 아래 천황제를 유지했고, A급 전범 28명 중 7명만 사형에 처했다. 도조 히데키조차 “천황의 허락 없이는 전쟁을 시작할 수 없다”고 증언했지만, 맥아더 사령관은 히로히토를 기소하지 않았다. 일본은 미국의 반공 전략에 필요한 ‘방패’였기 때문이다.
8·15를 다시 묻는다
조선은 8월 15일을 ‘조국해방기념일’로 기념하며 자주권을 행사해왔다. 그러나 한국의 8·15는 ‘광복절’이라는 이름과 달리, 빼앗긴 주권을 완전히 되찾은 날이 아니었다. 해방의 날이 곧 외세 점령의 날이 되었고, 민중의 자주적 권력은 미군정과 친일세력의 손에 짓밟혔다. 8·15의 참된 의미는 아직 우리 앞에 있다. 진정한 해방은 외세의 지배가 완전히 끝나고, 코리아반도에서 조선과 한국이 자주국가로서 독립하고, 다시 우리민족이 하나의 국가로 서는 날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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