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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현장에 섰던 고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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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3-06-25 00:00 조회1,5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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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대동강가에서
잠 못 이루고 조국을 생각했다"

[인터뷰]특별수행원으로 남북정상회담 현장에 섰던 고은시인


4730061299900.jpg6.15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된 지 3주년을 맞고 있다.
50여 년의 분단역사를 통일역사로 변화시킨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은 아직도 감동으로 우리의 가슴속에 살아있다.

6.15공동선언 이후 남과 북은 자주 왕래하고 만나며 신뢰를 쌓아왔지만 부시미행정부가 출범하면서 미국의 방해와 간섭으로 6.15공동선언이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운의 검은 그림자까지 드리우고 있다.

6.15공동선언 3주년을 맞이하여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 특별수행원으로 참여했던 고은 시인을 만나 보았다.

세차게 쏟아지던 초여름 빗줄기가 멈추고 시원스런 바람이 초록빛의 생명력을 뿜어내는 은행나무를 가볍게 흔드는 오후, 청담동 찻집에서 고은 선생과 마주 앉았다.

고은 선생은 "우리는 큰길에 이르렀다"는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상이 만든 말 가운데서 가장 고귀한 낱말인 우리여
우리여 어쩔 수 없는 미래와 현재
이제 우리가 세울 큰 세상으로 가야한다"

- 2000년 남북정상들이 만나는 자리에 함께 했는데 그때의 심정은 어땠나.

"좋은 영화, 좋은 책, 좋은 공연을 보았을 때의 감동과는 다른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은 역사발전의 현장이었다. 이를테면 일제식민지를 끝내고 해방을 맞이했을 때의 감격, 4.19때, 광주항쟁, 6월항쟁 같은 역사적인 현장을 체험했을 때의 감격을 종합한 감격이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은 우리 현대사중 가장 축복 받은 역사의 절정이었고, 지금도 그때 느꼈던 감격은 마음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3년이 지난 오늘 정상회담의 의미를 축소, 매장하고 오물을 퍼부으려는 현상(대북송금특검법 에 대해)들이 많이 보여지는데 이는 기필코 극복해야 한다. 나는 정상회담 이후 전개된 오늘의 현실은 남북관계를 발전시킬 주체들에게 주는 시련이라 생각한다. 이 시련을 극복해야만 우리 민족의 역사를 올바르게 세워나갈 수 있다."

- 당시 북은 몇 번째 방문이었으며, 일정 중 가장 인상에 남은 일은.

"98년에 15일간 북에 다녀온 일이 있었다. 그때는 북의 자연과 문화를 만나는 자리였다. 조국의 절반만 살아온 분단의 아픔으로 북을 방문하였다. 그때 삼지연에서 4일을 머물렀는데, 평생을 산 느낌이었다.

그리고 2000년 정상회담 특별수행원자격으로 간 것이 두 번째 북을 방문한 것이었다. 첫 번째는 조국의 강산을 체험한 것이었다면 2000년에는 민족사가 발전하는 현장이었고 참가 자체가 영광이었다. 평양의 한 초대소에서 묵었는데 감격 때문에 잠도 자지 않고 술을 마시며 시를 썼다. 그런데 새벽 4시쯤 강만길(상지대 총장)교수가 전화를 걸어 본인도 잠이 오지 않는다며 대동강가를 거닐자고 하였다. 나는 시인이라 그렇다지만 냉철한 역사학자에게도 조국에 대한 뜨거운 감정이 북받쳐 잠 못 이루게 한 것이다. 강 교수와 대동강 기슭을 거닐며 말도 못하고 숙소에서 쓴 시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 날밤 김대중 대통령이 주최한 만찬에서 강 만길 교수의 제안으로 순서에도 없는 시 낭송을 하게 되었다. 얼마나 격정적으로 낭송을 했는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북녘 동포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일이 가장 기억에 남아 있다."

- 김정일국방위원장과 대화는 해봤나. 인상은 어땠는가.

"우리는 분단현실에서 김 위원장을 비판하고 부정의 대상으로만 삼아 왔다. 북에서 그를 절대적으로 숭배하는 만큼에 비례해서 남에서는 증오해 온 것이 현실이었다. 그래서 나도 김 위원장에 대한 정확한 인상을 가질 기회가 없었는데 만나보니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고, 말을 잘하고, 속에 담아 두지 않고 즉각적으로 표현하는 솔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풍모는 아버지보다 못하다고 느꼈다. 아버지는 위엄이 있는 반면 김 위원장은 예술가적 스타일이었다.

또 김 위원장을 보면서 북의 전폭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김 위원장으로부터 시작해서 김 위원장에게로 돌아가는 권력이었다. 그것 때문에 일의 능률이 저하되지 않을까 에 대해 생각해 봤다. 그와 포도주를 많이 마셨다."

- 6.15공동선언의 의미에 대해

"통일방안은 남북이 차이가 있다. 하지만 서로 부딪쳐서 조정하는 과정이 있어야 올바른 통일방안을 만들 수 있다. 7.4남북공동성명도 얼마나 의미가 좋은가. 또 남북기본합의서도 발전된 민족문서이다.

하지만 6.15공동선언은 그것들보다 더 발전된 민족 간의 합의로서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 없다. 분단논리 속에서 가장 마지막단계에서 만들어낸 문서이다. 이 세 가지 문서만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면 통일이 된다. 6.15공동선언은 과정으로서의 통일을 의미한다."

- 6.15공동선언 이후 변화된 우리 사회의 모습이 있다면.

" 우리 사회에서 반북인식이 많이 완화되었다. 특히 새로운 세대들, 네티즌들은 냉전논리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인식했고, 김위원장에 대한 인식변화도 있었고, 지난해에는 태극기가 패션 화하는 현상들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증오의 이미지들이 표출되는 과정이었다. 남북 쌍방의 의식변화가 있었다."

- 현정부가 6.15공동선언 이행의지가 있다고 보는지.

"야당과 수구세력의 압력에 의해서 정상회담을 사법처리 하겠다고 하는데 나중에 후회하게 될 것이다."

- 6.15공동선언이 나온 이후 "우리민족끼리"라는 개념이 시대의 언어로 생겼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우리민족끼리"라는 말은 참 아름다운 말이다. "우리민족끼리"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그동안 "우리끼리"와는 반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반대쪽의 체험들을 정화시켜내고 변화의 방향을 어떻게 새롭게 설정할 것인가의 과제를 안고 있다.

우리끼리 아리랑도 부르고 통일노래도 부르는 광경이 있지만 국제적인 냉전체제가 깨져야만 온전한 우리끼리가 실현될 것이다. 우리와 관련된 국제관계의 합의가 도출되어야 하고 우리의 분단문제는 민족사인 동시에 세계사이기 때문이다."

- 6.15공동선언과 촛불시위는 관련이 있는가. 또 촛불시위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 당연히 내적 연관을 가지고 있다. "우리끼리"가 자주라는 말 아닌가. 촛불시위는 70년대,80년대 겪었던 민주화운동, 통일운동과는 달리 매우 영혼 적이다. 전투적, 공격적이지 않고 정화된 영혼적 상태로서 그 이전 시위보다 정신적으로 공감을 확대하고 있다."

- 시대와 함께 호흡해 온 시인으로서 한반도의 미래는 어떠할 것이라 생각하나.

"나는 다연방 통일을 주장한다. 스위스나 말레이시아처럼.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민족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분열들을 치유할 수 있는 국가구조라고 생각한다."

- 북핵문제에 대해 미국의 강경정책으로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미국은 직무유기를 했다. 원자로를 건설해 주기로 하고 지키지도 않았으며, 제네바합의를 무효화시킨 미국은 기만적이다. 또 북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여 전쟁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데, 미제국주의는 전쟁을 시장 화하고 있다. 신무기를 소비하여 경제를 활성화해야 하는 미국은 이라크 다음으로 북한을 공격하려 하고 있다. 지금은 평화적, 외교적으로 해결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갈지 모른다. 정말 전쟁이 일어날지도.

- 마지막으로 오는 14일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 연결식이 있다고 하는데 그 의미는.

"남과 북의 공조, 민족공조만이 전쟁을 막는다. 남북이 함께 사업도 하고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교류도 자꾸 해야 한다. 안 그러면 진짜 한반도에 폭탄이 떨어진다. 남과 북은 따로가 아니라 한 몸이다. 철도연결은 끊어진 혈맥을 잇는 일이다. 상징적으로 피가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이제 흐르는 것이다. 이렇게 피가 흐르면 우리민족은 생기를 되찾게 될 것이다."

바쁜 중에도 기자의 질문에 성의껏 답변해 주신 고은 선생님께 지면으로 감사를 전하며 2000년 6월14일 평양의 목란관 만찬장에서 열정적으로 낭송한 선생의 시를 함께 싣는다.

「대동강 앞에서」

무엇 하러 여기 왔는가
잠 못 이룬 밤 지새우고
아침 대동강 강물은
어제였고
오늘이고
또 내일의 푸른 물결이리라
때가 이렇게 오고 있다.
변화의 때가 그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는 길로 오고 있다
변화야말로 진리이다

무엇 하러 여기 강물 앞에 와 있는가
울음같이 떨리는 몸 하나로 서서
저 건너 동평양 문수릿벌을 바라본다
그래야 한다
갈라진 두 민족이
뼛속까지 하나의 삶이 되면
나는 더 이상 민족을 노래하지 않으리라
더 이상 민족을 이야기하지 않으리라

그런 것 깡그리 잊어버리고 아득히 구천을 떠돌리라
그때까지는
그때까지는
나 흉흉한 거지가 되어도 뭣이 되어서도
어쩔 수 없이 민족의 기호이다
그때까지는
시퍼렇게 살아날 민족의 엄연한 씨앗이리라

오늘 아침 평양 대동강 가에 있다
옛 시인 강물을 이별의 눈물로 노래했건만
오늘 나는 강 건너 바라보며
두고 온 한강의 날들을 오롯이 생각한다
서해 난바다 거기
전혀 다른 하나의 바닷물이 되는
두 강물의 힘찬 만남을 생각한다

해가 솟아오른다
찢어진 두 동강 땅의 밤 헤치고
신 새벽 어둠 뚫고
동트는 아픔이었다
이윽고 저 건너 불근 솟아오른
가멸 찬 부챗살 햇살 찬란하게 퍼져간다

무엇 하러 여기 와 있는가
지난 세월 우리는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아왔다
다른 이념과 다른 신념이었고
서로 다른 노래 부르며
나뉘어졌고 싸웠다
그 시절 증오 속에서 5백만의 사람들이 죽어야 했다.
그 시절 강산의 모든 곳 초토였고
여기저기 도시들은 폐허가 되어
한밤중 귀뚜라미 소리가 천지하고 있었다
싸우던 전선이 그대로 피범벅 휴전선이었다
총구멍 맞댄 철책은 서로 적과 적으로 담이 되고
물이 되어
그 울안의 하루하루 길들여져 갔다
그리하여 둘이 둘 인줄도 몰랐다
절반인줄도 몰랐다
둘은 셋으로 넷으로 더 나뉘어지는 줄도 몰라야 했다
아 장벽의 세월 술은 달디달리라

그러나 이대로 시멘트로 굳어버릴 수 없다
이대로 멈춰
시대의 뒷전을 헤맬 수 없다
우리는 오랫동안 하나였다
천년 조국
하나의 말로 말하면서
사랑을 말하고 슬픔을 말하였다
하나의 심장이었고
어리석음까지도 하나의 지혜였다
지난 세월 분단 반세기는 골짜기인 것
그 골짜기 메워
하나의 조국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다
무엇 하러 여기 와 있는가
아침 대동강 강물에는
어제가 흘러갔고
오늘이 흘러가고
내일이 흘러가리라
그동안 서로 다른 것 분명할진대
먼저 같은 것 찾아내는 만남이어야 한다
큰 역사 마당 한가운데
작은 다른 것들은 달래는 만남의 정성이어야 한다
얼마나 끊어진 목숨의 허방이었더냐
흩어진 원혼들의 흔적이더냐

무엇 하러 여기 와 있는가
우리가 이루어야 할
하나의 민족이란
지난날의 향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난날의 온갖 오류
온갖 야만
온갖 치욕을 다 파묻고
전혀 새로 민족의 세상을 우러러보며 세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통일은 재통일이 아닌 것
새로운 통일인 것
통일은 이전이 아니라
이후의 눈 시린 창조이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 하러 여기에 와 있는가
무엇 하러 여기 왔다 돌아가는가
민족에게는 기필코 내일이 있다
아침 대동강 앞에 서서
나와 내 자손 대대의 내일을 바라본다
아 이 만남이야말로
이 만남을 위해 여기까지 온
우리 현대사 백년 최고의 얼굴 아니냐
이제 돌아간다
한 송이 꽃 들고 돌아간다.

우문숙기자

[출처; 민중의 소리 6-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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