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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현옥(이인모 선생의 딸)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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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3-08-31 00:00 조회1,946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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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만난 사람-리현옥(이인모 선생의 딸) 선생

“죽어가던 산송장 장군님이 살리셨다”


주치의만 24명 동원, 온갖 약 들여 치료
현재 거동은 불편하지만 건강에는 문제 없어


8월15일과 16일 평양에서 열린 ‘평화와 통일을 위한 8.15민족대회’에서 1993년 북으로 송환된 이인모(86) 선생의 딸 리현옥(54)씨를 만날 수 있었다. 리현옥씨를 통해 최근 이인모 선생의 근황과 치료과정, 그간의 생활 등에 대해 들어보았다. 단, 최대한 리현옥씨의 표현을 그대로 옮겼으며 극존칭은 생략했다.


2003082205.jpg-이인모 선생께서 북으로 송환되신 지 10년이 됐습니다. 먼저 선생의 건강은 어떻습니까

=아버지가 올해 여든여섯살이 되셨는데 연세가 많으셔서 2년 전부터는 자주 병원에 계시지만 건강은 그만 하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거동을 잘 못 하시고 움직이고 말씀하시는 게 자유롭지 못하니까 이런 대회에 참가하지 못 하시지 다른 건 괜찮습니다. 정신도 일 없습니다.


-93년 송환 당시에는 거의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93년 3월19일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상태를 제가 직접 목격했는데 그때 체온이 35도, 체중이 34㎏ 정도 됐습니다. 우리측 의사들이 말하기를 임종에 가까운 그런 상태였습니다.


송환 당시 판문점에 헬기까지 준비


-당시 북측에서 특별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김일성)수령님과 (김정일)장군님께서 모든 정성을 다 해서 아버지를 살려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어찌 말로 다 표현하겠나요. 아무래도 전쟁이 일어나면 적측에 넘어가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 수령님과 우리 장군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품성 중에서 제일 좋은 품성은 혁명을 위해 싸우다가 적측에 넘어간 사람이건 조국에 있는 사람이건 전쟁에 참가하고 혁명을 위해서 애쓴 사람을 한 사람도 놓치지 않고 자신의 품에 끝까지 안아주시는 동지애의 품성이십니다.


-구체적인 얘기를 좀 들어봤으면 합니다

=그때 우리 수령님과 우리 장군님께서 아버지를 개성에서부터 북쪽(평양)으로 데려주는 길을 직접 총지휘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계속 전화로 알아보시고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방향을 대주셨습니다. 개성에서부터 북으로 오는 방안을 세 방안으로 짜주셨습니다. 일단, 의사들이 나가서 상태를 보고 아주 급하면 개성시 병원에 입원시켜서 치료하라고 하셨습니다. 3월18일에 실무회담이 끝나고 바로 19일에 들어왔으니까 사실 준비할 시간이 아주 급했다 말입니다. 그 하룻밤 사이에 중앙에서 구급소생실 설비를 몽땅 갖고 나가서 개성시 병원에다 꾸렸습니다. 그 다음에 조금 괜찮으면 비행기로 실어오고, 좀 더 나으면 위생차에 실어 육로로 평양까지 오게 하라고 하시며 세 가지 방안을 짜주셨습니다.

아버지가 육로를 따라 소생차를 타고 왔는데 하늘에서는 헬기가 같이 날았습니다. 임의의 시각에 의사가 비행기에 싣겠다고 하면 싣고 올 수 있게 대기상태로 왔단 말입니다. 수령님과 장군님께서 이렇게 까지 다심한 은정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북 최고지도부에서 직접 지도한 겁니까

=수령님께서 직접 의사들에게 방침도 내려주시고 수시로 전화를 주셨습니다. 판문점에 나가 있는 의사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냐면 “이 모든 행사를 행사일꾼이 주관하지 말고 환자의 상태에 맞게 의사가 주관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여러 가지 행사들이 많았지만 의사가 직접 지휘한 행사는 이 행사밖에 없답니다. 아버지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두고 행사를 짜신 거지요. 또 어머니랑 같이 판문점 회의실에 아버지 마중하러 나가는데 수령님께서 또 전화를 주셔서 “나가서 절대 자꾸 울지 말라. 자꾸 울면 선생의 심장에 부담이 와서 잘못 되면 어떻게 하겠나”며 다심하게 아버지의 건강을 돌봐주셨습니다. 그 다음에 “조선의 모든 공산주의자들이 이인모 선생한테 인사를 해야 한다”시며 당중앙위원회 높은 간부들이 판문점에 나와 직접 아버지 손목을 다 잡아주셨습니다. 정말 최상으로 다 해주셨습니다.



김일성 주석이 이인모 선생과 부인, 딸 리현옥씨에게 준 금시계. 시계 가운데에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씌어 있다



김 위원장, 병치료 직접 챙겨


-평양에서의 치료 과정은 어떠했습니까

=아버지 한 분에 주치의사가 무려 24명이나 되었습니다. 신체 장기별로 주치의가 붙은 거란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 건강을 살려냈습니다. 실례를 더 들면 내가 하루는 병원에 가니까 손가락만한 병 6개가 침대 위에 있었습니다. ‘이거 뭐냐’고 하니까 의사가 ‘이 병 하나에 닭이 한 마리씩 들어가 있다’고 합디다. 그때 아버지가 음식을 삼키지 못하는 상태여서 닭곰을 해서 물을 만들어서 병에다 넣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수령님께서 아버지를 위해 침상 옆에 살아있는 산천어를 보내주셨습니다. 아버지가 ‘이거 집에 보내 가족들이 보면 좋겠다’고 하니까 수령님께서 집에다가도 산천어를 보내주셨습니다. 그 사랑이라는 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우문입니다만, 치료비가 대단했을 것 같은데요

=내가 의사선생님들한테 물어봤습니다. “선생님 이거 도대체 이거 약값이 얼마나 들었습니까?” 하니까 선생님들이 “좌우간 세상에 좋다는 건 다 썼다. 우리도 우리가 사오는 게 아니라 국가가 보상(지급)해주는 거라서 돈은 얼마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돈으로 치면 우리나라 돈을 다 쓸 정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6개월만에 나았습니다.


-팔에 차고 있는 금시계에 대해 좀 설명해주십시오

=1993년 4월15일 수령님께서 자신께서 몸소 쉬셔야 할 생신날 병실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날 수령님께서 자신의 존함이 새겨져 있는 금시계를 아버지와 어머니, 저의 손목에 직접 채워주셨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34년간 쇠고랑만 차고 있는 이 손목에 사랑의 금시계가 채워질 줄 꿈엔들 생각했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수령님께서 직접 수표(서명)하신 당증을 아버지께 드렸습니다. 그러시며 어머니를 앞으로 부르시고는 “이인모도 용치만 부인도 용해. 40년을 기다리는 게 간단하나”며 부모님께 모든 공을 돌려주셨습니다.


아버지 없이 산 40년
“수령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 없이 평생을 사셨는데 힘들지 않으셨습니까

=아버지가 이런 얘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남쪽 감옥에서 나와 양로원에 있을 때 남조선 기자들이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이 걱정되지 않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아버지는 서슴없이 “난 걱정 안 한다”고 하셨답니다. 기자들이 그 말이 너무도 이상해서 어떻게 40년간 엇갈렸는데 걱정을 안 할 수가 있냐고 하니까 아버지가 “너희들은 수령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다. 수령님이 어떤 분인지 알면 내 말을 의심하지 않을 거다”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그 말을 들으면서 그 말이 진짜라고 느꼈습니다. 내가 어릴 때 우리나라에는 부모를 잃어버린 전쟁고아들이 많았는데 수령님께서 그들을 모두 데려다가 학원에서 키우셨고 그런 사람들이 간부로 많이 됐습니다. 저도 어려서 학원에서 컸습니다. 수령님께서 야영도 보내주시고 대학 갈 때면 교복도 무상으로 주시고…. 그렇게 키우셨다 말입니다. 수령님의 사랑이 바로 아버지 사랑 아닙니까? 아버지가 수령님께 나를 맡겼기 때문에 40년 동안 헤어져 있으면서도 걱정 안 했다는 말이 맞는 말입니다.


-(김일성 주석이) 돌아가셨을 때 이인모 선생의 충격이 아주 컸을 것 같습니다

=평양에 돌아오신 그 다음해 7월8일에 수령님께서 돌아가셨는데 그때 아버지는 너무 슬퍼하시고 정말… (위험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장군님께서 아버지의 건강을 생각해 위로의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사실 장군님께서는 자신의 아버님이 돌아가셨으니까 얼마나 슬프셨겠습니까. 그럼에도 일꾼들에게 ‘이인모 동지의 건강을 돌봐줘야 한다’고 이르신 겁니다. 그래서 장군님 덕에 지금 살았습니다.


-다른 장기수분들은 잘 계십니까

=정말 잘 삽니다. 이제 다 부인들을 얻어서 자식을 본 분들이 두 분이나 되고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내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장군님만 계시면 우리 아버지같은 비전향장기수들이 다 조국의 품에 안길 수 있고 그 다음에 조국도 통일되고 전쟁도 무조건 끝난다는 겁니다. 내가 남조선 사람들을 만나보니까 아직 선군정치가 뭔지 장군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수령님과 장군님만 믿으면 이 세상 일이 잘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1993년 3월19일 북으로 송환된 이인모 선생은 분단과 전쟁, 냉전으로 몸부림쳤던 우리 역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대표적인 비전향장기수로써 송환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아 있다.

이인모 선생은 1917년 양강도 풍산군(지금의 김형권군)에서 태어나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월 지리산에서 빨치산 투쟁을 하던 중 체포되어 7년형을 언도받았다. 1959년 출소했으나 2년 뒤인 1961년 다시 구속돼 1976년까지 수감생활을 했으며, 전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주보안감호소로 이감돼 1988년 청주보안감호소가 문을 닫을 때까지 독방 생활을 하였다.

현재 북에는 선생의 이름을 딴 ‘이인모 인민학교’가 선생의 고향인 김형권군에 세워져 있으며, 선생의 무남독녀인 이현옥씨는 평양 개선고등중학교 부교장을 지낸 바 있다.

김영준기자

[출처; 월간 우리 8-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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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이인모선생님에 대한 노래 사랑에 대한 생각 들어보니까 정말 가슴이 아픈 내용들이 많아 울고싶어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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