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폐기장 반대 두달 간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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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3-09-05 00:00 조회1,46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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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폐기장 반대 두달 간의 싸움, 귀먹은 정부
경찰 "쳐", 뇌진탕ㆍ골절ㆍ코뼈 함몰 중상 당해
왜곡된 진실, 정말 ‘폭도’는 누구인가
23일 오후 4시 반 전주시청 앞 ‘노송광장’에서는 부안에 건립 예정인 핵폐기장을 반대하는 집회가 1만여 명의 전북 도민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두 달에 가까운 시간동안 핵폐기장 반대를 외쳤어도 들은 척 하지 않던 정부가 이날 도청을 완전 봉쇄하고 서울에서 파견된 전경 부대를 동원해 도민들을 ‘쳤던’ 것. 이날 방패와 곤봉에 맞아 뇌진탕, 골절, 코뼈 함몰 등 중상을 입은 도민은 수십 명에 달했다.
한 손에 방패, 다른 한 손에는 곤봉을 들고 함성을 지르며 시위대로 돌격해오는 전경들.
군사독재 시절에나 볼 수 있었던 이런 광경은 지난 두달 간 부안군에서 심심치않게 벌어졌던 일이고, 매일 저녁 집회에서 그토록 핵폐기장 반대를 외쳐도 핵폐기장 건설은 강행되고 있으며, 이 모든 일들은 정부와 언론의 철저한 외면과 왜곡 속에 이루어지고 있다.
△밤 9시 경 도청 앞 거리 모습 ⓒ부안반핵대책위
거짓말과 속임수로 일관한 정부
4시로 예정되어 있던 집회는 서전주 톨게이트에서 들어온 소식 때문에 30분이 늦춰져 시작되었다.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고창에서 트럭을 타고 들어오던 농민들이 경찰에 불법 검문을 당해 집회 용품인 대나무 장대를 빼앗겼다는 것이다. 그 장대는 집회 구호 등을 적은 만장을 매달기 위한 것이었다.
집회 시작 전부터 전주 시내 곳곳에는 서울에서 내려간 전경 버스가 배치되어 있었고, 특히 집회 후 행진이 예정된 도청 주변은 물샐 틈 없이 봉쇄되어 있었다.
집회는 구속·수배자를 위한 묵념으로 시작되었다. 현재 핵폐기장 반대 집회 건으로 구속된 주민은 6명, 연행된 주민은 수십 명, 수배는 몇 명인지 파악이 안될 정도이다.
부안핵폐기장 백지화 및 핵에너지정책 전환을 위한 범도민대책위(이하 대책위)의 문규현 상임대표가 대회사를 했다.
“안돼 안돼 절대안돼, 핵폐기장 절대안돼!”
문 신부의 구호에 따라 일제히 들어올리는 만 여 개의 주먹은 전주 시내를 뒤흔드는 이들의 함성 못지않게 힘찼고, 이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생히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집회에는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표, 통일연대 한상렬 상임대표, 민중연대 정광훈 상임대표 및 전농 간부 등 각계의 인사가 참석해 지지발언을 하고 격려를 보냈다.
두 달 가까이 핵폐기장 반대 투쟁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부안군 농민회 김진원 회장은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우리는 핵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이제는 모든 군민이 투사가 되었다”고 말했다.
“정부는 처음부터 우리와 대화할 생각이 없었다. 처음부터 거짓말과 속임수로 일관하는 한수원(한국수력원자력)과 산자부의 태도는 우리를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 아닌가. 기가 막힐 뿐이다.”

정부는 핵발전소를 가진 세계 30여 국가 중 핵폐기장이 없는 나라는 한국을 포함해 5개국 밖에 안된다고 홍보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한국수력원자력은 TV 광고 등을 통해 선진국 주민들이 핵폐기장을 적극 환영하고 있으며 유치 지역은 번영을 누리고 있다고 홍보하고 있지만, 실제 프랑스, 일본 등의 핵폐기장 신설 예정 지역은 주민들의 극심한 반대로 엄청난 지역 갈등과 공동체 붕괴를 가져왔으며, 이 과정에서 프랑스 샤톤 시의 시장이 1990년에, 일본 로카쇼무라 촌장이 2002년에 각각 자살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큰 것이 아니다. 핵에너지가 정말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 국민적 토론과 합의를 거친 후 지역을 선정하되 이는 당연히 지역 주민들과 충분한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한 국민적 합의 기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 달 12일 대책위에 방문한 김원웅 개혁당 의원도 사업선정 절차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에 공감을 표시하고 주민투표에 붙일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지금 부안은 전쟁중”
1차 집회 사회를 맡은 성명종 원불교 교무(부안핵폐기장 백지화 및 핵에너지정책 전환을 위한 범도민대책위 상임집행위원장)는 “지금 부안은 두 달 전의 부안하고는 완전히 다른 곳이 되어버렸다”고 말했다. 작고 평화로웠던 시골 동네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핵’이라는 문제 때문에 온통 난리가 난 셈이라는 것이다.
“모든 주민들이 핵폐기장을 반대하고 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주민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손에 손에 촛불을 들고 촛불시위장으로 나온다. 평소에는 2,3천 명이지만 좀 큰 집회가 있을 때는 만 명이 모인다. 부안 인구가 7만 명인데 농촌은 노인 인구가 많은 것을 감안하면 노인과 아이들은 제외하고 ‘걸어다닐 수 있는 사람은 다 나왔다’고 봐야 한다.”
성 교무는 이번 반대운동으로 구속된 주민의 자녀들이 촛불시위에 나와서 발언을 하고 22일에는 청소년들이 스스로 나서서 문화마당을 여는 등 모든 주민들의 참여가 열성적이며, 이들은 자신의 생존권조차 다 팽개치고 나설 정도라고 전했다.
집회 현장에서 만난 김종택(45·상업, 부안읍) 씨는 “지금 부안은 전쟁중”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지금도 매일 밤 두들겨 맞고 다치고 피흘리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데 이 기막힌 상황이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고 있다”고 김씨는 토로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합시다. 유치 결정하기 전에 김종규 부안 군수가 군민들 모아놓고 우리 의사를 한번이라도 물어봤다면 이렇게 분노 안해요. 부안 군민이 또라이 입니까? 우리가 뽑아준 군수 아닙니까? 그런데 군민들이 다 반대하고 군 의회까지도 반대한 일을 자기 혼자 유치하겠다고 나섰고 노무현 대통령의 격려 전화까지 받았습니다. 한달 반 전 군수의 유치 결정 발표가 난 후 우리는 군수 얼굴 한번도 못봤습니다. 군민들한테 해코지라도 당할 까봐 경찰들에 둘러싸여 출·퇴근 합디다. 이 분을 어떻게 참을 수가 있겠소.”
부안의 핵폐기장 반대 운동은 지난 7월 2일 34개 단체가 참여한 ‘핵폐기장 백지화·핵발전소 추방 범부안대책위’가 발족하면서 시작됐다. 대책위는 7월 9일 김종규 부안 군수를 면담하고 군수의 반대 의견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틀 후인 11일, 군수는 군의회의 반대(7:5) 속에도 핵폐기장을 유치하겠다는 기자회견을 했고, 14일 유치신청서를 산자부에 제출했다. 군수의 태도 돌변에는 강현욱 전라북도 도지사의 영향력이 상당히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몇 천, 몇 만의 군민이 참석해 매일같이 핵폐기장 반대를 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핵폐기장은 강행되고 있고 지난 달 노무현 대통령조차 불법시위에 엄정 대처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무엇을 취재하는 거요” 왜곡보도에 분노한 주민들
부안의 핵폐기장은 정부의 강행과 주민 전체의 격렬한 반대라는 이중구도 속에 진행되고 있다. 이에 덧붙여 두 달 동안 매일같이 시위를 벌여도 정부는 귀를 완전히 막고 들은 척 하지 않고 있으며, TV 광고를 통해 일본 핵폐기장 지역 주민들의 ‘행복한’ 모습을 방영하고, ‘부안군민 여러분의 협조에 감사합니다’라는 엉뚱한 대국민 홍보를 벌이며 시위를 하는 부안 주민들을 도리어 폭도로 몰고 있다.
군민들이 정부의 철저한 외면과 언론의 왜곡 보도로 얼마나 상처받고 지쳐있었는지는 현장에서 생생히 확인할 수 있었다. 취재중인 기자에게 다가와 “무엇을 적고 있느냐, 우리를 위한 취재인가 저쪽을 위한 취재인가”하고 물으며 시비를 걸고 심지어 화까지 내는 주민을 적어도 열 명은 만났다. 주민들의 목소리를 전혀 전달하지 않고 오히려 이들을 폭도로 모는 보수 언론들의 왜곡보도에 대한 분노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시위 당일인 23일 저녁 9시에도 모 방송에서는 시위의 폭력성을 강조하며 주민들을 매도하는 내용의 뉴스를 내보냈다. 주민들의 진심이 전달될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주민들의 분노로 타오른 불길, 곤봉과 군화발로 화답한 경찰
1차 집회를 마친 주민들은 6시부터 도청을 향해 전주 시내 중심가를 행진했다. 전주시 한복판인 관통로 사거리에서 1시간 동안 규탄 집회를 가진 도민들은 7시 경 다시 도청으로 향했다.
7시 15분 경 도청 앞에 도착했으나 10여 대의 경찰 버스가 이미 철통 봉쇄를 해놓은 후였다. 버스가 미처 가리지 못한 구석은 방패를 든 전경들이 물샐 틈 없이 막고 있었다.
강현욱 도지사를 만나러 왔지만 공권력에 의해 철저히 차단당한 데 분노한 집회 참가자들은 들고가던 만장과 폐타이어 수십 개를 버스 앞에서 태웠고, 일부 참가자들은 경찰 저지선을 뚫기 위해 새우젓으로 만든 ‘젓갈탄’을 던지기도 했다.
그동안의 분이 폭발한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집회 참가자들이 잠시 숨을 돌리는 틈을 타 방패와 곤봉을 든 전경들이 함성과 함께 도민들 쪽으로 돌진했고, 집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경찰은 10여 분 동안 문규현 신부를 비롯한 부안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연행했으며 나중에 파악된 연행자 수는 53명에 달했다. 주민들은 50여 미터 떨어진 도로로 밀려났고, 경찰 기동대가 쓸고 간 자리에는 군데군데 흥건한 피가 고여 있었다.
이날 대책위 상황실에 의해 확인된 부상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조일남 : 부안군 동진면 (머리가 찢어지고 코뼈가 함몰됨. 눈에 이상)
정송기 : 부안군 진서면 (코뼈 함몰, 후두부 찢어짐)
이병선 : 부안군 부안읍 (팔에 타박상 입음)
박종건 : 부안군 동진면 (머리 7바늘 꿰멤)
이경미 : 부안군 진서면 (뒤에서 방패로 찍어 넘어짐. 뇌진탕. 치아 3개 부러짐)
배형식 : 부안군 보안면 (왼쪽 팔꿈치 타박상)
박종욱 : 부안군 격포면 (팔꿈치 타박상)
최동현 : 부안군 하서면 (눈밑 찢어짐)
김영섭 : 부안군 동진면 (두피 벗겨짐)
김종남 : 전주시 (오른팔 골절)
박형순 : 주소 미상 (등과 귀가 군화발에 밟혀 타박상)
이 외에도 확인되지 않은 부상자가 더 있을 것으로 상황실은 예측했다.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
수백 개의 곤봉과 방패가 한바탕 춤을 추고 간 자리. 아수라장 속에 119 구급대가 도착해 피투성이가 된 부상자들을 싣고 갔고, 구석진 자리에 앉은 아낙네들은 눈물과 하소연으로 원통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저것들은 사람도 아녀. 이게 벌써 몇 번째여. 세상에 이렇게 억울할 수가 없어. 우리를 무시하니까 이러지. 촌 무지랭이라고 무시하니까.”
피투성이가 된 부상자들, 바닥에 흥건한 피. 믿을 수 없을만큼 폭력적인 경찰들의 태도. 이런 사태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정부의 외면과 언론의 왜곡 보도 때문에 이러한 상황은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어이없고 화가 난 주민들은 더욱 강경하게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주민들은 말했다. 이것이 또 언론이 주민들을 ‘폭도’로 몰아붙이는 빌미가 되었던 셈이다.
9시 경 주민들은 관통로 사거리에서 촛불을 들었다. 지난 달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진행된 촛불시위는 이날로 27일 째를 맞고 있었다.
부산에서 왔다는 한 대학생은 “오늘 말로만 듣던 부안의 상황을 직접 보려고 왔다”며 “보수 언론들이 지껄이는 ‘폭도’는 여러분이 아니라 우리 뒤에 있는 저 경찰 공권력이라는 것을 오늘 똑똑히 보았다”고 말하며, 학교로 돌아가 많은 학우들에게 부안의 진실을 전하겠다고 말했다.
사회당 전주지구당 당원이라는 한모 씨는 “우리가 더운 것 조금만 참고 불 하나 덜 켜면서 쓸데없는 전기 낭비 안하면 핵발전소 없이도 살 수 있는데 개발 지상주의에 사로잡혀 도민을 상대로 사기를 치고 있는 정부의 태도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한 씨는 또 전북 지역에 이토록 절박한 현안이 생겼는데도 이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지역 언론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지나가던 전주 시민들도 발길을 멈추고 관심을 보였다.
J여고 3학년이라는 이숙영 양은 친구 두명과 함께 아예 자리를 깔고 앉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너무 억울하잖아요. 주민들 대다수가 반대하는데 군수가 일방적으로 유치결정을 한 거라면서요.” 한 양은 그러면서 주민들과 함께 “연행자를 석방하라”하고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한 전주 시민은 ‘조금 전 9시 뉴스에 여러분이 폭도로 매도되어 보도되었다’는 사실을 전해주었고, 이에 주민들은 다 함께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하고 외치기도 했다.
이날 경찰들을 지휘한 현장 책임자인 전주시 중부서 정보과장은 집회 지도부와 협의를 하는 자리에서 ‘평화집회 보장 못한다’는 것과 ‘여성을 제외한 나머지 연행자들은 풀어줄 수 없다’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정보과장은 또 이 자리에 끼어들어 연행과 폭력에 대한 항의를 하려는 한 여성에게 “아주머니 술 드셨어요?”하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 아주머니는 화나고 흥분해 땀이 흐르고 있을 뿐이었고, 주변 사람들은 ‘경찰이 주민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며 분노하기도 했다.
집회 현장을 처음부터 계속 카메라에 담은 문정현 신부는 “발로 밟고 방패로 찍는 것은 바로 군사 독재시대 때 공권력이 자행하던 짓”이라며, “두 달동안 목이 터져라 외쳤는데도 아예 귀를 꽉 막고 있는 것이 무슨 정부냐. 인내도 한계가 있다. 이젠 힘의 대결일 수밖에 없다”고 분노를 터뜨렸다.
문 신부는 “오죽하면 버스를 불태웠겠느냐”며 “우리가 죽나 저들이 죽나 한번 끝까지 해보자”고 결연한 모습을 보였다.
50여 미터의 거리를 두고 전경 부대와 마주앉은 주민들은 연행자 전원 석방을 요구하며 페트 병 등으로 바닥을 두드리는 무언의 시위를 벌였다. 대치는 새벽까지 계속되었으나 25일 오전 세시 반 경 경찰이 연행자를 전원 석방하면서 시위가 마무리되고 주민들도 모두 귀가했다.
임은경 기자
[출처; 민중의 소리 8-2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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