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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통련 결성 30주년 기념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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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minjok.c… 작성일03-12-02 00:00 조회1,6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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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이래 자주 민주 통일운동의 깃발을 높이 내걸고 정력적으로 운동을 전개해온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 의장 곽동의)은 2일 창립 30주년 기념대회와 축하연을 도내에서 성대하게 개최했다.

기념대회에는 한통련, 한청, 민주여성회, 학생협 회원과 활동가들이 다수 참가했다. 또 본국에서 "해외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추진위원회"(추진위)와 "한통련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대책위원회"(국내대책위)의 축하사절단이 참가했다. 곽동의 의장은 기조연설을 통해 30년간의 한통련의 운동 내용과 특징을 연대별로 구분해 언급, 애국애족운동을 해온 데 대해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며 앞으로도 조국통일과 반전평화를 위해 투쟁하겠다고 말했다.

대회에서는 한통련의 창립과 발전에 큰 업적을 남긴 김재화 2대 의장, 배동호 3대 의장 등 이미 타계한 분을 비롯한 조직 공로자에 대한 기념품 증정이 있었다. 또 한통련의 역사를 음악과 노래, 영상으로 표현한 앙상블을 상연, 참가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기념대회는 치요다구 오차노미즈 총평회관에서 열려 각지에서 회원, 활동가들이 다수 참가했다. 또 국내에서 추진위 최병모 상임공동대표("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임종인 집행위원장(변호사), 김건수 사무국장, 국내대책위 홍근수 공동대표(향린교회 목사), 이기욱 집행위원장(변호사), 한홍구 홍보위원장(성공회대 교수), 진관 스님(불교인권위원장) 등 각계대표 15명이 참가, 참석자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기념대회에서는 고 김재화 2대 의장, 배동호 3대 의장, 김용원 전 부의장을 비롯해 한국 민주화투쟁 선상에서 희생된 열사들에 대한 묵념을 올렸다.

양동민 부의장은 대회사를 통해 "한통련은 일본사회의 뿌리깊은 민족차별과 한국의 역대독재정권의 탄압을 받는 외롭고 어려운 조건 속에서 해외라는 입지조건을 살려 자주 민주 통일운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해왔음을 자부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국내 내빈이 소개되었다. 홍근수 공동대표와 최병모 상임공동대표가 인사했다. 홍 공동대표는 "여러분의 투쟁덕분으로 한국의 민주화가 크게 전진했다"고 하면서 "9월의 한가위 고국방문은 우리 민족사를 크게 발전시켰다"고 평가했다. 최 공동대표는 "한통련 결성 30주년에 초대받아 무척 영광스럽다"고 하면서 "일본이라는 특수한 사회에서 오랜 세월 악조건을 견뎌내면서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데 대해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다음에 내외에서 보내온 축전이 소개되었다.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공동사무국, 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 중앙위원회, 한민련 유럽본부(의장 정규명), 한민련 미주본부(의장 배강웅), 범민련 재미본부, 범민련 재일조선인본부, 범민련 유럽지역본부, 범민련 캐나다지역본부, 재중조선인총연합회, 이희세씨(전 재불 조국통일위원회 대표), 한민족유럽연대, 재일본고려태권도연맹(회장 황진) 등이다.

이어 조직공로자에 대해 기념품을 증정했다. 수상자는 타계한 김, 배, 전 의장, 김 전 부의장, 양혜승 전 한민통오사카본부 대표위원 등을 비롯해 김영출 전 한민통통제위원장 등 16명이다. 공로자 유가족을 대표하여 배 전 의장의 딸 배강옥씨(서울거주)가 "한통련의 숭고한 사업에 깊은 경의를 표하며 부친 등 많은 선생님들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신데 대해 감사드린다"며 눈물을 흘리며 사의를 표했다.

기념대회에서는 곽 의장이 기조연설을 했다. 곽 의장은 한국현대사와 함께 한통련이 걸어온 30년의 투쟁을 돌이켜보면서 "한통련의 30년의 역사는 민족자주와 민주 민권, 그리고 평화통일을 위

한 자주 민주 통일운동의 30년이며 민족적 존엄과 이익을 진실 되게 지키기 위한 애국의 30년이었다"고 하면서 "애국을 위해 자랑스러운 투쟁과 승리의 길을 걸어온 데 대해 큰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곽 의장은 앞으로의 과제로서 △미국에 의한 한반도 전쟁위기 제거 △반전평화운동 전개 △6·15공동선언 이행 △해외동포의 민족성 고수 △한통련에 대한 "반국가단체" 규정 해제 등을 제시했다.

곽 의장이 기조연설을 마치자 참석자 전원이 기립하여 열렬한 박수로 기조연설을 지지, 과제에 대해 앞으로 힘차게 전개할 결의를 다졌다.

기조연설 후 학생협 김유리 회장, 한청 이정수 위원장, 민주여성회 김지영 회장, 한통련 손형근 사무총장이 결의를 표명했다.

기념대회에서는 한통련 오사카본부 회원을 중심으로 한통련의 30년간의 발자취를 노래와 시낭송, 음악, 슬라이드 상영 등으로 엮은 앙상블 "비상 -자주 민주 통일의 깃발을 내걸고 30년. 새로운 투쟁을 향한 메시지"를 공연, 참석자의 감동과 눈물을 자아냈으며 유신독재 반대의 깃발을 내걸고 쉬지 않고 투쟁해온 위대한 운동의 성과를 재확인했다.

표찬된 유공자 명단

한통련 결성 30주년기념대회에서 공로상을 수상한 분들은 다음과 같다.

고 김재화씨(2대 의장), 고 배동호씨(3대 의장), 고 김용원씨(전 부의장), 고 양혜승씨(전 오사카 자주위 위원장), 고 조수련씨(전 중앙위원), 고 조규필씨(전 중앙위원), 고 서보기씨(가나가와본부 전 부대표위원), 고 송인호씨(민족시보 전 주필), 고 김수미씨(민주여성회 전 부회장), 고 신달성씨(전 중앙위원), 고 이종목씨(전 중앙위원), 김영출씨(전 통제위원장), 방호환씨(전 중앙위원), 김우식씨(중앙위원), 조양심씨(중앙위원).

[출처:민족시보 200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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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기조연설>


자주 민주 통일의 한길로

여러분!

오늘 우리는 자주민주통일의 기치를 높이 들고 애국과 정의의 한길을 꿋꿋이 걸어온 한통련 결성 30돌을 기념하는 역사적인 모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뜻깊은 자리를 빌어 저는 먼저 한통련의 결성 및 강화 발전에 특출한 기여를 하신 해외 교포운동의 거성이셨던 배동호 선생님과 한통련의 전신인 한민통의 의장 대행, 의장, 최고 고문으로 활약하셨던 김재화 선생님을 비롯하여, 우리 조직의 고문 및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시다가 이미 타계하신 여러 선생님들과 동지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숭고한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아울러 저는 30년의 역사동안 한통련의 활동에 끊임없이 깊은 관심을 보여주신 국내외의 모든 애국민주단체들과 그리고 오늘 이 자리를 빛내기 위하여 바쁜 와중에도 귀중한 시간을 내어 일부러 본국에서 참석하여 주신 "해외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 추진위원회" 최병모 상임공동대표, 임종인 집행위원장, 그리고 "한통련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대책위원회" 홍근수 공동대표, 이기욱 집행위원장, 한홍구 홍보위원장을 비롯한 여러분께 진심으로 되는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지난 30년 동안 이곳 일본에서 인고의 나날을 보내 왔던 저희들을 고국땅을 밟게 해 주시고 민주인사로 높이 추켜세워서 인천공항에서 부터, 서울, 광주, 부산 등 가는 곳 마다 너무나 뜨겁게 맞아주셨던 그 감격은 평생을 두고 잊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한통련의 출범 30돌을 기념하는 이 자리에서 저는 곡절 많은 한국 현대사와 더불어 우리 조직이 걸어온 30년의 노정을 감회깊게 돌이켜 봅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70년대는 폭력적인 박정희 유신독재를 반대하는 나날의 연속이었으며, 이 끊임없이 지속된 반유신 민주화 투쟁의 결과로서 드디어 유신독재를 물리치고 빛나는 승리를 거둔 년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반유신 민주화투쟁의 최선두에 서서 투쟁한 조직이 한통련이라는 생각을 할 때마다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1972년 10월에 단행된 유신쿠데타에 의하여 본국의 국민들이 기초적인 인권마저 유린당했으며 민주와 통일을 지향하는 움직임은 가차없이 총칼의 탄압을 받았습니다. 민주가 교살되고 정의가 매장되는 참담한 본국의 현실은 애국 민중들에게 반유신 민주화 운동에 떨쳐나선 것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국의 동포들은 침묵과 굴종만을 강요 당하는 엄혹한 상황으로 인해 시대의 절박한 요구에 제대로 부응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 본국의 애국민주세력을 대신하여 반독재 민주항쟁의 불길을 세차게 지펴 올리며 자주민주통일운동을 선도해야 한다는 민족사적 사명을 스스로 가슴 깊이 받아 안고, 마침내 1973년 8월 15일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중추조직이자 선봉부대인 한통련의 전신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즉 한민통의 역사적인 출범을 세상에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한민통의 출범은 유신독재의 암운을 걷어 낼 민주화투쟁의 첫 봉화였으며, 민주와 통일을 위한 해외동포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제친 역사적인 장거이었습니다. 한민통이 결성됨으로써 재일한국동포들의 권익이 옹호되고, 민주화투쟁과 통일운동이 조직화되어 새로운 발전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으며 유럽과 미주의 애국적인 동포들과도 연대, 연합해 가면서 반유신투쟁과 통일운동을 세계적인 범위에서 확대 강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본 도쿄에서 지펴 올린 민주화투쟁의 불길은 마침내 그해 10월 서울문리과대학생들의 궐기를 계기로 암흑의 땅을 밝히는 불길로 타 번져 갔습니다. 이에 무한히 고무된 저희들은 한국민중들의 정의로운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대한 국제적인 연대와 지지를 적극적으로 불러일으키는 데 온갖 힘을 쏟아왔습니다.

그중 몇가지만 간략하게 열거하자면, 유신독재의 본질을 폭로하기 위한 성명서와 항의문 발표, 민중대회와 가두시위 등 여러가지 형태와 방법으로 유신독재정권을 규탄하고 본국 민주세력의 투쟁을 지지, 성원하였으며 특히 본국 민중들의 치열한 투쟁에 지원을 요청하는 국제적인 연대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습니다.

1976년 3월 1일,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한 김대중 선생과 윤보선 선생을 비롯한 민주인사들을 체포 구금하는 만행을 감행하였을 때, 한민통은 그러한 구속, 기소, 공판, 선고 등의 각 과정들마다 그 부당성을 폭로 규탄하는 활동은 물론, 전체 양심수들의 무조건적인 석방을 요구하는 백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하여 그 서명부를 유엔인권위원회에 제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해 8월 한민통은 세계 16개국의 저명한 인사들이 참가한 "한국문제 긴급국제회의" 를 주도적으로 개최하여 그들로부터 한국의 민주화와 조국통일을 위한 민중들의 투쟁에 전폭적으로 연대, 지지하겠다는 결의를 얻어내기도 하였습니다.

1977년에 들어서면서, 박 정권이 국내외적으로 고립상태에 빠지고 그의 통치기반이 흔들리게 되자, 본국의 민주세력은 "민주구국헌장"을 발표한데 이어, "민주구국헌장 서명추진 본부"를 결성하고 "민주구국헌장의 길"을 선포하면서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보다 가열차게 진행하였습니다.

본국 민주세력의 이러한 투쟁에 호응하여 한민통은 일본 도쿄에서 "민주구국헌장 서명운동 해외동포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밑에 일본, 미국, 유럽에 각각 추진본부를 설치하는 등 세계적인 범위에서 서명운동을 선도적으로 이끌어 나갔습니다. 이러한 투쟁과정을 통하여 해외동포들 사이의 연대와 단결이 더욱 강화되고, 범해외동포 연합조직을 결성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어 갔던 것입니다.

그 성과에 기반 하여 한민통은 1977년 8월 11일부터 14일까지 4일간 도쿄에서 "해외한국인민주운동대표자회의"를 개최하여 "민주민족통일해외한국인연합", 즉 한민련을 결성하였습니다. 한민련의 출범은 해외동포들의 민주와 통일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열어제치게 된 역사적인 사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민련이 결성됨으로써 해외민주세력은 지금까지의 분산성을 극복하고, 하나의 전선체로 결합하여 단합된 힘으로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힘을 몇 배나 더 강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반독재 민주화투쟁과 통일운동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강력히 전개할 수 있는 전선체 조직을 가지게 되었으며 국제적인 연대운동을 전 세계적인 범위에로 확대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한국 민주노동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고 전태일 열사의 일대기를 다룬 전태일 평전을 일본어로 출간함은 물론, 영화로도 제작하여, 일본 전국과 세계 각지에서 상영운동을 벌이면서 당시 독재정권하의 가혹한 착취와 비참한 노동현실을 전세계에 고발하였습니다.

유신독재정권을 파멸시키기 위한 국내외 민중들의 항쟁은 1979년에 이르러 마침내 절정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유신독재를 심판하는 역사의 날은 마침내 부산과 마산의 민주시민들과 청년학생들이 분연히 일어선 부마항쟁으로 발전하였으며, 이 항쟁의 불길은 활활 타올라 서울과 다른 도시들로 급속하게 퍼져 나갔습니다. 이 억누를 수 없는 항쟁의 민심을 반영하여 결국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한 박정희 살해라는 10·26 사태가 빚어지고, 18년에 걸친 유신독재는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유신독재의 파멸은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위한 민중들의 피어린 투쟁으로 이루어낸 귀중한 첫 승리였습니다. 우리 한민통은 그 유신독재의 몰락에 응분의 기여를 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한민통에 있어서 70년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구출운동에 바쳐진 년대이기도 합니다. 포악무도한 박정희 군사정권은 한민통 결성을 파탄내고, 자신의 최대 정적인 김대중 선생을 해치기 위하여, 한민통 결성을 앞둔 73년 8월 8일 의장으로 추대되기로 예정되어 있던 김대중 선생을 도쿄한복판에서 백주에 납치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 사건이 발생하자 우리 한민통 준비위원회는 그날 바로 납치현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김대중 선생의 납치범은 한국 중앙정보부라는 것을 대담하게 언론에 폭로하고 그 다음날 "김대중 선생 구출대책위원회"(위원장 정재준 민단 도쿄본부 단장)를 조직하여 대대적인 구출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저희들이 그렇게 신속하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선생은 틀림없이 귀신도 모르게 현해탄 바다 속 깊이 수장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들이 투쟁한 성과가 빛나는 결실을 맺어 김대중 선생께서 대통령에 당선되어, 재임 중에 북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통일의 이정표인 역사적인 6·15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불신과 대결의 남북관계를 화해와 협력의 남북시대로 바꾸게 된 것에 진심으로 보람을 느낍니다.

그러나 유신독재가 끝난 1980년대에 들어와서도 본국의 민중들은 파쇼통치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민중의 항거에 의해 박 정권은 파멸되었으나, 권력은 여전히 유신잔당들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으며 더욱이 12·12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세력은 유신독재보다 더 포악한 군사독재를 추구하였습니다.

전두환을 우두머리로 하는 신군부는 80년에 들어서자 말자, "5·17 계엄령 확대조치"라는 폭거를 자행하였고, 그에 항거하여 나선 광주시민들의 궐기를 잔인하게 탄압하고 권력을 찬탈하는 피의 쿠데타를 단행한 것입니다.

전두환 군사독재는 박정희 유신정권을 능가하는 포악한 전횡을 일삼았습니다. 게다가 그러한 전횡에 항거하며 분연히 일어선 수천 수만명의 광주시민들을 총칼로 무참하게 살육하는, 있어서는 안될 귀축 같은 만행을 서슴없이 저질렀습니다.

오죽하면 광주시민들이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 라는 구호를 외쳤겠습니까. 이 만행을 뒤에서 부추기고 승인한 자는 그때까지 해방군의 가면을 쓰고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있었던 미국이었습니다. 한국 민주화투쟁 역사의 큰 줄기인 반미 자주화투쟁의 시대는 바로 이러한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시작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80년대는 바로 70년대서부터 이어온 민주화투쟁이 반미투쟁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질적인 발전을 이룩한, 빛나는 투쟁의 년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민주화투쟁이 참해방을 위한 자주화투쟁으로 승화된 민족민주운동 발전의 요구에 맞추어 한민통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죄상을 내외에 고발하고 단죄하는 활동을 각방으로 전개하였습니다. 광주시민들의 의로운 투쟁을 적극 지지, 성원하였을 뿐 아니라, 신군부의 야수적인 무력탄압으로 광주항쟁이 무력진압된 이후에는 일본 각지에서 광주 학살을 규탄하는 대중집회를 연일 조직하고 희생자 추도집회를 가졌습니다.

또한 광주시민들의 영웅적인 투쟁모습과 계엄군의 야수와 다름없는 살인 만행을 녹화한 자료들을 엮어 무력진압 14일만에 "한국 1980년 - 피의 항쟁의 기록"이라는 영화를 제작하여 그것을 일본뿐 아니라 미주, 유럽의 민주단체에 보내어 상영운동을 세계적 범위에서 펼쳐 광주에서 저지른 전두환 악당의 죄상을 세계인들에게 낱낱이 고발, 폭로하고 반전두환 투쟁의 전선을 넓혀 나갔습니다.

1981년 5월에는 광주민중항쟁 1주년을 기념하여, 도쿄에서 3일간에 걸쳐 27개국과 3개의 국제기구에서 연인원 16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된 "한국민주화 지원 긴급세계대회"에서 전두환 군사정권의 죄상과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허구성을 다시 한번 일본과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100만인 서명운동을 비롯한 김대중 선생을 구출하기 위한 다양한 운동을 벌였습니다. 저희들의 이 운동에 호응하여 일본 및 세계의 양심세력들도 일어섰습니다.

결국 전두환은 노도와 같은 국제 여론의 압력에 못 이겨 마침내 김대중 선생을 사형에서 무기형으로 감형하고 그 이후에는 미국과 공모하여 미국으로 내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80년 중엽에 들어서면서 전두환 군사정권은 국내외의 애국민주세력의 가열찬 저항에 부딪혀 심각한 통치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호헌"이냐 "개헌"이냐 하는 문제를 초점으로 독재권력과 민주세력간에는 첨예한 대결이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발생한 박종철 군 고문 치사사건과 시위도중 전경의 최루탄에 맞아 꽃다운 목숨을 잃은 이한열 군의 처참한 모습은 온 국민의 치솟는 분노를 자아내었으며, 애국학생들을 학살한 전두환 살인정권의 만행을 규탄하고 그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중적인 투쟁은 개헌투쟁과 결합하여 강력하게 조직 전개되었습니다.

국내외에서 폭풍처럼 일어난 개헌투쟁의 압력에 밀린 전두환 정권은 기만적인 권모술수를 쓰다가 "4·13호헌조치"라는 것을 내놓고 기울어져 가는 운명을 건져보려고 발악하였습니다. 그러나 "4·13 조치"에 분격한 본국의 민중은 드디어 6월 민주대항쟁을 폭발시키고 연일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6월항쟁의 나날들, 한민통은 재일 한국인의 애국 역량을 총동원하여 본국의 민중투쟁에 합세하는 대중집회와 시위 등 여러가지 형태의 투쟁을 매일같이 벌였습니다.

국내외 동포들의 거세찬 6월항쟁은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기본으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그 "6·29 선언"은, 드디어 전두환 군사독재의 항복을 의미하였습니다. 전두환 군사정권의 파멸은 한국민중의 반독재 민주화투쟁이 이루어낸 또 하나의 커다란 승리였으며, 군부 독재정권을 실질적으로 종식시키고 진정한 민주화시대를 여는 데 초석이 된 역사적인 승리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세발전에 따라 한민통은 해외민족민주세력의 중추적인 조직으로서 자기의 위상을 뚜렷이 정립하고 자주 민주 통일의 보다 높은 차원에서 전개할 것을 요구하는 운동발전에 보답하여 89년 2월 한통련으로 발전적인 개편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시대와 민족의 부름에 충실하려는 재일 한국인들이 대세의 흐름을 민감하게 포착하고 적시에 내린 역사적인 결단이었습니다.

90년대는 통일운동으로 빛난 년대입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내외 동포들 속에서는 통일 열기가 급격히 높아지고, 통일운동이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남과 북, 해외의 7천만 동포의 통일 염원을 고양시키기 위하여 본국의 운동단체들은 범민족대회 개최를 발기하고 추진하였습니다.

한통련은 해외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에 적극 호응 협조를 바라는 범민족대회 남측 추진본부의 제의를 가슴 뜨겁게 받아 안고, 90년 3월에 일본지역 추진본부를 결성하였으며 4월에는 유럽, 미국의 교포단체들과 힘을 합쳐 해외본부를 발족시켰습니다.

범민족대회를 성사시키기 위한 국내외의 애국 통일 민주세력들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하여 베를린과 서울, 평양에서 3차에 걸친 실무회담이 열렸지만, 그때마다 노태우 정권의 방해 책동으로 인하여 남과 북, 해외 3자가 한자리에 마주 앉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통련을 비롯한 해외 통일 민주 운동세력은 남과 북 사이를 연결시키는 교량적 역할을 수행하여 범민족대회 준비를 적극 추진시켰으며 일본에서 "범민족 대회 지지 해외 한국동포대회"를 성대히 개최하여 해외 동포들의 통일 열기를 더욱 고양시키는 한편, 반통일적인 작태를 일삼는 노태우 정권을 압박해 나갔습니다.

남과 북, 해외의 통일 애국 민주세력의 이러한 피나는 노력에 의하여 마침내 광복 45돌을 맞이하는 90년 8월 15일, 판문점에서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범민족 대회"가 분단이래 처음으로 성대하게 개최되었습니다.

이 때 한통련은 처음으로 북부 조국을 방문하고 판문점 대회에 참가하여 온 겨레의 통일 열망에 부합하는 의로운 활동을 적극 전개함으로써 범민족대회의 성과적 진행에 이바지하였습니다. 판문점과 서울에서 동시에 개최된 범민족대회의 일치된 결의에 따라 그해 11월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남과 북, 해외 대표 3자 회담이 이루어지고, 여기에서 국내외 7천만 겨레의 통일 의지를 결집한 "조국통일 범민족연합" 즉, 범민련의 결성이 선포되었던 것입니다.

범민련의 결성은 국내외 동포들의 줄기찬 통일운동이 가져온 또 하나의 고귀한 결실이며, 우리 민족의 통일운동 역사에서 뜻깊은 사변으로 됩니다. 한통련은 90년 이후 해마다 평양 또는 해외 각 지역별로 진행된 범민족대회에 적극 참가하여 모든 성의와 노력을 다함으로써 조국통일 촉진운동을 줄기차게 밀고 나가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고 자부합니다.

2000년대는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연 6·15남북공동선언이 선포된 역사적인, 자랑스러운 년대입니다.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과 그 결과로 발표된 6·15남북공동선언은 우리 민족의 자주적 평화 통일 위업에 새롭고 밝은 전망을 열어 놓았습니다. 남북공동선언은 온 겨레의 의사와 염원에 완전히 부합되는 가장 합리적이고 정당한 조국통일의 이정표입니다. 6·15공동선언이 열어놓은 길을 따라 남북간에는 장관급 회담을 비롯한 여러 갈래의 회담이 지금도 중단됨 없이 지속적으로 열리고 있으며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적인 접촉과 교류 협력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6·15공동선언에 무한히 고무된 국내외 동포들은 해마다 6·15와 8·15에 즈음하여 금강산과 평양, 그리고 서울에서 번갈아 가며 통일축제를 열고 통일의 열풍을 거세게 일으키고 있습니다. 6·15공동선언에서 커다란 고무와 격려를 받은 우리 한통련에서도 금강산과 평양에서 열리는 통일축제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함으로써 조국통일 위업을 촉진하는 데 있어 성의껏 이바지하였습니다.

한국에서는 통일운동과 더불어 반미 자주화운동도 크게 활성화되고 괄목할만한 진전을 이루어 내었습니다. 최근 미군에 의한 노근리를 비롯한 한국 전지역에서의 양민 학살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고 있고, 매향리 군사연습장 사건, 한강 독극물 방류사건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군이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있다는 것에 분노한 본국의 민중들이 반미운동에 힘차게 떨쳐나서게 된 것입니다.

특히 지난해 본국 민중들의 반미 자주화투쟁은 전례없이 격렬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지난해 연초부터 부시 대통령의 방문을 반대하는 투쟁이 강력히 전개되었으며 6월부터는 두 여중생 참살 사건을 쟁점으로 한 반미투쟁이 줄기차게 전개되어 한국땅 전체가 반미의 촛불로 뒤덮여 졌습니다. 미국의 전쟁위협에 반대하는 반전 평화 운동도 들불처럼 번져 나갔습니다. 한통련은 반미 운동에서도 국내의 민중들과 보조를 맞추면서 재일동포들을 추동하여 촛불시위를 중심으로 하는 대중 집회와 서명운동을 벌여, 부시 대통령에게 직접적인 사과와 소파개정, 군작전권 반환 등, 평등한 한미관계를 수립하라는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민통으로부터 이어지는 한통련의 30년 역사는 민족 자주와 민주 민권, 그리고 평화통일을 위한 정의로운 투쟁의 30년이며 민족적 존엄과 이익을 진심으로 옹호 고수하기 위한 애국의 30년입니다.

우리는 한통련이 지난 30년간 온갖 난관을 헤치며 일편단심 애국을 위한 보람찬 투쟁과 승리의 길을 걸어온 것에 대하여 커다란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

한국 민중의 자주 민주 통일 위업은 크게 진전하였으나, 아직도 갈 길은 멀다고 봅니다. 더욱이 오늘날 한반도에 조성된 엄중한 정세는 누구나 한시도 방심하지 말고 대오각성하여 민족의 안녕과 통일, 번영의 미래를 열어 나가는 데 적극 이바지 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반도에 조성된 정세에서 가장 엄중하고 위험한 것은 바로 미국에 의한 전쟁위험입니다. 세계에서 유일한 강대국으로 자처하는 미국은 국제 무대에서 일방주의적 행동을 거리낌없이 자행하고 있으며, 자기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나라들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제재를 가하고 함부로 총폭탄을 퍼부으며 침략전쟁까지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희생자가 바로 이라크입니다.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한 미국은 대량 살상 무기의 존재가 오늘날까지도 확인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유엔까지 무시한 채 이라크에 대한 침략전쟁을 단행하였습니다.

미국은 북에 대해서도 "악의 축"으로 규정하였을 뿐 아니라 핵선제공격 대상으로까지 삼고 한반도 주변에서 무력을 증강하고 있으며 "작전계획 5027"을 보다 공격적인 "작전계획 5030"으로 바꾸는 등, 한반도 정세를 극도로 긴장시키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은 북핵 문제에 대하여 부당한 논리와 주장을 펴면서, 북이 내놓은 누가 보아도 공정하고 합리적인 제안인 "포괄적 동시행동원칙"을 무시한 채, 북의 핵위험성에 대해서만 계속 떠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미국이 북핵문제를 입으로는 평화적 해결을 말하면서도,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북을 집어삼키려는 야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지게 되면 그 재난은 북쪽에만 들씌워 지는 것이 아니라, 남과 북이 다 공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 평화를 지켜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범민족적인 반전 평화운동을 강력히 전개해야만 합니다.

우리 한통련은 민족의 운명이 걸린 한반도의 평화보장을 위하여 각계의 애국동포들과 함께 반전 평화운동과 반미 자주화운동을 앞으로도 계속 힘차게 벌여나갈 것입니다. 우리 한통련은 미국이 하루빨리 북핵 문제를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한국에서 자기의 무력을 철수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6·15 남북 공동선언을 이행하는 것은 민족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루어 내기 위한, 유일하게 올바른 길입니다. 공동선언을 이행하는 데서 중요한 것은 "우리 민족끼리"의 이념을 정확히 구현하여 정치, 경제, 문화 등의 모든 분야에서 민족 공조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외세는 어디까지나 외세일 뿐, 우리 민족의 영원한 동반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족은 이념과 사상, 제도가 다르더라도 같이 살아가야 하는 영원한 동반자이자 운명 공동체입니다. 민족의 안전과 화합, 평화통일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민족 공조의 길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한통련은 민족공조를 실현하는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그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며, 재일동포들 속에서 통일운동을 더더욱 가열하게 벌여 6·15남북공동선언을 이행하는 데 적극 이바지 할 것입니다.

6·15남북공동선언을 이행하자면 그에 역행하는 행위를 반대하고 그 행위를 일삼는 세력들과 싸워야 합니다. 지금 한나라당을 비롯한 우익수구세력은 외세 의존을 추구하면서 6·15공동선언을 부정하고 그에 역행하는 냉전시대의 구태의연한 반민족적인 행위를 거리낌없이 자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민족의 여망과 이익에 배치되는 이러한 행태에 반대하는 사회적 여론을 크게 조성하며 그를 반대 배격하는 운동을 적극 벌려 나갈 것입니다.

해외동포들에게 있어서 민족성을 고수하는 것은 민족 성원으로 계속 존재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근본문제입니다. 한통련은 재일한국인들의 권익을 옹호해 나갈 것입니다. 각 본부, 지부 및 참가단체들은 각 지역의 실정에 맞게 민족 교육에 힘을 쏟고 민족성을 고수해 나가도록 적극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말 강습소", "문화교실" 같은 것을 각 현 본부와 지부조직 안에 세워, 민족교육에 힘써야 할 것이며, 거기에서는 아름다운 우리말과 글, 장고와 북을 비롯한 민족악기의 선율이 울려 펴지도록 해야 합니다.

한통련은 출범이후 오늘까지 언제나 민족의 존엄과 이익을 위한 애국적인 활동을 해 왔습니다. 단언컨대 그에 배치되는 일을 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과거 독재정권이 자기의 정권 안보를 위해 터무니없는 사실을 날조하여 한통련에 들씌운 부당한 누명이 오늘까지 벗겨지지 않고 있는 것은 옳지 않는 처사입니다. 우리는 한통련에 대한 부당한 누명이 하루빨리 벗겨져야 하며 우리 조직의 명예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번 저희들이 아무 조사없이 자유롭게 고국을 다녀온 그 "열린 문"을 제발 다시 닫지 않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이제는 매국이 애국을 난도질하고 독재가 민주를 교살하고, 반통일이 통일을 억압하는 반역행위가 없어져야 하며, 애국자가 정당한 평가를 받는 시대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민족정기와 정의가 바로서는 아름다운 사회가 구현될 것입니다.

한통련은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본국 민중과 운명을 같이 하면서 자주 민주 통일의 한 길을 따라 열심히 싸워 나갈 것입니다.

가는 세월 막을 수 없어 제가 한통련 의장직을 맡은 지도 어언 15년이 되었습니다. 나이도 70대 중반에 이르렀습니다만,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여러분들과 언제나 함께 있을 것입니다. 우리 한통련의 자랑의 하나는 조직 내에 어떠한 파벌이나 종파가 없다는 것입니다. 단결을 더욱 강화하며 승리의 그날까지 힘차게 전진 또 전진해 나아갑시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하고야 말 것입니다.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만세! 조국통일 만세!

감사합니다.

2003년 11월 2일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의장 곽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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