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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green>[대담]선우학원 박사-미주운동사</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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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minjok.c… 작성일04-01-10 00:00 조회1,4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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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학원 박사의 일대기는 해외운동의 역사이며 동시에 우리 민족 분단사의 한 장을 이룬다. 지난 해 9월 30년만에 남부조국을 방문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을 두루 만날 기회를 가졌다. 이 기간에 월간 <민족21>의 강은지 기자가 선우학원 박사와 이틀에 걸쳐 대담해 두차례(2003년 11월호와 12월호) 보도했다. 이 내용들을 전재해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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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2-1370.jpg30년 만에 고국을 찾은 선우학원 박사를 9월 24일, 27일 이틀에 걸쳐서 만났다. 1938년 미국으로 떠나 대학 교수로 일하다가 1960년대 국내에서 《대한공론사》 주필까지 지낸 선우학원 박사는 어떻게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을까. 그리고 무엇을 얼마나 잘못 했길래 반체제인사, 친북인사로 낙인찍혀 30년 동안 입국이 불허됐던 걸까.

선우학원 박사에게 듣는 미주 동포운동사를 2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번 호에서는 선우학원 박사의 궤적을 따라 1970∼80년대 이후 통일운동과 남북 관계, 북미 관계 개선을 위한 재미동포들의 노력을 중심으로 싣는다.

1981년부터 북과 해외동포 대화 시작

-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박사님이 어떻게 통일운동에 첫발을 들여 놓으셨는지입니다.

294-2-1369.jpg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주최한 환영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선우학원 박사.[유수 기자]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보니 자연스럽게 통일을 생각하게 된 거지요. 1979년부터 일본 도쿄에서 민족통일심포지엄을 처음 조직해서 15년 동안 매년 사나흘씩 미국과 일본에서 심포지엄을 열었습니다. 미국과 한국에서 학자들을 초청해 강연, 토론을 하고 참가한 사람들에게 민족과 통일에 대해 교육하는 자리였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북과 해외동포들의 대화가 시작되었다는 거죠.

1981년에 비엔나에서 처음 만났는데 해외의 조직은 내가 맡고 북의 조직은 전금진 현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이 맡아서 해외동포와의 교류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을 했지요. 그 대화가 10년 동안 해마다 계속되었는데 여기에서 우리가 얻은 것이 정말 많아요.”

- 북측과의 교류 과정을 좀 더 상세하게 말씀해주시지요?

“밖에서는 ‘북이 변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지금까지 북은 아주 많이 변해왔어요. 나는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북과 대화를 시작했거든요. 처음에는 하면서도 기독교인과 공산주의자 사이에 ‘이게 될 수 있겠나?’ 싶었는데 되더라구요. 우리가 같은 피, 같은 역사, 같은 문화를 가지고 있는 같은 민족인 데다가 서로가 인간관계로 만나니 되더라구요.

한 예로 우리는 만날 때마다 공동 성명서를 채택하는데 북측과 우리의 입장이 서로 다르면 절충을 해야 하잖아요. 그때마다 우리는 북을 이해하려고 하고 북은 우리를 배려하니까 한번도 절충 과정에서 문제가 벌어진 적이 없었어요. 한번은 북에서 성명서를 10장짜리로 준비해왔길래 너무 길다, 좀 줄이자 했더니 ‘선생님이 적당히 좀 줄여주십시요’ 하더군요. 그래 두 장 정도로 줄여서 검토해보라고 다시 주니까 ‘일 없습니다. 선생님 하신 내용대로 우리 그냥 합니다’라고 답하는 거예요.”

- 그러면 처음 방북한 것은 언제였습니까?

“1975년이에요. 그때는 그냥 평양에 가보고 싶어서 카터 행정부에서 방북 규제를 풀어주자마자 무작정 들어갔지요. 1981년 대화가 시작된 이래로 매년 가다가 1995년을 마지막으로 부인과 내 건강 문제로 방북하지 못했지요.”

“남북 분단에 책임 있는 미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 이번 방문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나셨는데 어떠셨습니까.

“우선 30년 만에 만나니까 반갑다고 인사를 했지요. 1973년에 김대중 납치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 김대중 선생이 미국으로 저를 찾아왔었어요. 그래 내가 그때 가르치던 대학에서 강의도 하게 해주고 교수들을 초청해 우리집에서 리셉션도 열어줬거든요.

그렇지만 옛날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고 대신 내가 하나 물어봤지요. ‘선생이 민주화운동 많이 고민해오고 또 2000년에는 6·15공동선언을 발표해 민족통일의 기초를 만드셨는데 지금 불행히도 일이 잘 발전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노무현 정권이 들어섰는데 노무현 정권에서 김대중 선생의 대북 정책을 계속 계승하기로 되어 있느냐. 혹 그런 충고를 했느냐?’고 내가 물었지요.

그러니까 자기가 알기로는 노무현 정권에서 자기의 대북 정책을 계속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고 계속할 줄로 믿고 있다고 말하면서 ‘어디까지나 우리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믿는다’라고 강조하더군요. 어쨌든 평화, 평화를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아주 강하게 이야기했어요. 미국을 설득해 북에 쳐들어가는 그런 일만큼은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정책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지요.”

- 한반도 전쟁 위기는 지난 1994년에도 한번 있었지요. 그때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중재가 없었더라면 말 그대로 한반도가 불바다가 될 뻔했는데요.

“그래요. 그때 카터의 방북이 그 위기를 넘기는데 많은 역할을 했어요. 그런데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카터가 방북을 결정하게 된 뒤에는 우리 재미동포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어요.

카터 전 대통령과 우리는 그 전부터 관계를 가지고 있었어요. 1989년에 우리가 북측 인사들을 미국에 초청한 적이 있어요. 보통의 경우 북측 인사들은 미국에 오더라도 정해진 기간, 정해진 장소에서만 움직일 수 있게 되어 있는데 그때는 미국 연합 장로교의 초청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자유롭게 오랜 기간 머물 수 있었지요. 그래서 우리가 한시해 전 북측 유엔 대사를 단장으로 한 북측 인사 세 명과 카터와의 만남을 주선했어요.

그 자리에서 카터가 ‘나는 북의 위대한 김일성 주석에 대해 좋게 생각한다. 남북 분열의 책임은 우리 미국에 있다. 그렇기에 나는 남북 통일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미국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라고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러니까 북측 사람들이 상당히 감복해서 그러면 ‘우리나라에 한번 오십시오’라고 초대를 했어요.”

1994년 한반도 전쟁 위기 막아낸 카터의 방북

- 카터 전 대통령이 그때 초대에 응했나요?

“초대에 응하긴 했는데 조건이 있다고 했습니다. ‘중국이나 러시아 등 제3국을 통해서는 안 가겠다. 서울로 가서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가겠다’라고 했어요. 지금이라면 몰라도 당시에는 불가능한 조건이었지요.”

- 1994년 카터 방북 뒷이야기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이전부터 지미 카터가 평화를 주장하는 사람이고 한반도 통일을 지지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카터가 당시 한반도 전쟁위기를 중재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솔직히 우리에게 그 정도 영향력은 없었어요. 이건 미국 사람이 해주어야 하는 역할이었지요.

그래서 잔 수암리 박사라고 감리교 목사로 신학자이고 평화주의자이며 우리와 함께 ‘미국 한반도 위원회(American Committee on Korea)’를 만들었던 사람을 끌어들였죠. 지금도 나이가 여든여덟이나 되는데 여전히 한반도 통일을 위해 우리보다 더 열심히 뛰고 있는 분입니다.”

- ‘미국 한반도 위원회’는 어떤 활동을 하는 단체입니까?

“앞에서 얘기한 민족통일심포지엄을 미국에서 진행하면서 우리는 많은 미국 지식인들, 종교인들을 알게 됐지요. 이들 중 남북 통일을 위해 미국인들이 뭔가 이바지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합의가 모아졌고 수암리 박사가 단체를 하나 만들자고 제안한 겁니다.

미국 감리교 감독 3명, 성공회 감독 1명, 유대교 랍비, 그리고 브루스 커밍스 교수, 글렌 페이지 교수, 램지 클라크 전 미 법무장관 등 30여 명의 미국인이 모여 미국 한반도 위원회를 결성하게 됐습니다. 수암리 박사는 현재 사무총장을 맡고 있어요.”

- 결국 잔 수암리 박사와 미국 한반도 위원회 차원에서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을 추진하게 된 것이군요?

“그렇지요. 1994년 4월 우리가 잔 수암리 박사를 통해서 카터 센터에 연락했더니 카터가 바로 ‘가겠다’라고 승낙했어요. 그리고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을 찾아가 평양에 가겠다고 이야기한 거지요. 그런데 클린턴은 처음에 ‘갈 필요가 없다. 가지 말라’고 했단 말입니다. 클린턴은 이미 대북 전쟁 준비를 하고 있던 참이었으니까요. 그래 카터가 클린턴에게 그럼 ‘정부 대표가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가겠다’라고 선언하고 평양에 들어갔습니다.”

- 그런데 그때만 해도 국내에서는 한반도 전쟁 위기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지 않았나요?

“아니, 국내에서도 다 알고 있었지요. 미국에서 북을 치느냐 마느냐 하는 토론을 공개적으로 하고 있었으니까요. 물론 언제 어디를 치느냐 하는 작전은 비밀이었지요. 그런데 카터를 만난 김일성 주석은 ‘우리는 미국과 친선을 원한다.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이랬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카터가 설득이 되어서 밤새 잠도 안자고 클린턴에게 전화하고 팩스 보내고 비상을 걸었던 거지요.

그런데 사실 평화를 원하는 북의 입장이 언론을 통해 대중들에게 보도되지 않았다면 클린턴은 카터의 평화 중재를 받아들이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평양에 들어갈 때부터 카터는 CNN 방송을 대동했고 미국에 돌아오자마자 CNN에 출연해서 ‘북이 전쟁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미국은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밝혔어요.

그제사 미국의 여론이 ‘전쟁은 안된다.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어졌고 클린턴도 점차 북과의 교섭으로 나아가게 된 겁니다. 이것이 94년 10월 제네바 합의로 이어진 것이지요.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다 알다시피 미국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단 거죠.”

대북 정책, 한국 정부가 앞장서서 주도해야

- 김일성 주석을 직접 만난 적도 있습니까?

“1989년과 1990년 그리고 1992년 이렇게 3번 만났습니다. 나는 김일성 주석이 훌륭한 지도자라고 봐요. 애국자이고 사람을 대할 때 늘 인자하고 친절하고 웃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지요. 대화도 많이 나누었는데 그 중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김 주석이 ‘선생들이 미국에서 통일운동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과 우리나라의 친선관계를 도모하는 겁니다. 그것이 통일운동의 큰 공헌이 됩니다’라고 강조했던 점이었어요.

그래 처음에는 미국을 원수로 생각하는 지도자가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고 놀랬어요. 믿을 수가 없었죠. 그런데 김 주석은 진심이었어요. 전쟁을 하게 되면 우리 모두가 파괴될 텐데 그런 전쟁을 왜 원하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런 진심이 있었기 때문에 카터 같은 미국 사람도 설득할 수 있었던 거죠.”

- 북에서 조국통일상도 받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네. 해외에서 통일운동한 공로로 1990년 평양에서 받았어요. 해외 인사들 중 조국통일상을 받은 사람이 김성락 목사, 차성달 선생 등 몇몇이 더 있는데 이분들은 지금은 다 세상을 떠나고 저만 남았네요.”

- 그런 경력들 때문에 지금까지 입국이 불허되셨던 거군요.

“그런 셈이죠. 한국 정부로서는 김대중 선생 구출운동도 못 마땅했는데 거기다 통일운동하면서 북과 대화하고 북과 가까이 하자고 하니 더 좋지 않게 생각했지요. ‘통일’이라는 말만 꺼내도 이건 친북인사고 빨갱이라고 몰던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지금 저와 같은 사람이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 봐도 한국의 민주화가 상당히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물론 이번에 들어올 때 혹 인천공항에서 입국을 거부당할까봐 주미 한국 총영사관에서 비자를 받아 가지고 들어오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저는 미국 시민권자로 원래 미국 시민권자는 비자 없이 자유로이 2주간 방한할 수 있거든요.”

- 지금 남쪽에서는 국군 이라크 파병 문제를 놓고 논란이 되고 있는데요. 한국 정부가 어떤 입장을 취하리라고 보십니까?

“이미 파병했잖아요. 그 정도면 충분해요. 전투병 파병은 안 될 말이에요. 그건 부시 정권의 공모자가 된다는 것을 전 세계에 공포하는 거거든요. 그건 안되지요. 노무현 정부에서는 이라크 파병을 통해 북핵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잘못된 판단이에요. 부시 행정부가 그런 말을 듣는 상대가 아니거든요. 미국 정책이 한국의 이라크 파병 여부에 달려있지를 않단 말이에요.”

- 북핵문제를 둘러싸고 북미관계가 상당히 긴장되어 있는데 앞으로의 전망을 어떻게 보십니까.

“저는 잘 풀린다고 봐요. 통일운동을 하려면 낙관적이어야 해요. 희망을 가지고 미래를 보며 하는 일이니까요. 또 지금 부시 정권이 겉으로는 아무리 강경하게 나오더라도 북에 쳐들어가지는 못해요. 그러기에는 북이 강하기 때문에 자기네가 당할 피해가 너무 크다는 것을 알고 있거든요.

지난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윌리엄 페리 전 대북정책조정관이 바로 본 거예요. 페리의 방침을 따라야 하고 또 그렇게 움직일 거라고 봅니다.

그리고 남쪽 정부에 부탁하고 싶은 것은, 지금까지 우리는 늘 미국의 방침을 따라왔는데 이제는 한국 정부가 앞장서서 미국이 한국을 따라오도록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통일이 빨리 올 수 있어요. 미국의 말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주적으로 독립적으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을 새삼 강조하고 싶습니다.”[2003년 11월호 강은지 기자 happy@minjog21.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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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모아 독립운동 자금 보내는 것이 가장 큰 낙이었다”

선우학원 박사에게 듣는 미주 동포운동사2

332-2-1646.jpg 재미동포운동의 산 증인이라 할 만한 선우학원(85, 캘리포니아 거주) 박사의 증언을 지난호에 이어 소개한다. 그는 지난 9월말 해외민주인사 자격으로 초청 받아 꿈에도 그리던 조국 땅을 처음 밟았다. 선생의 증언은 미주 동포운동사의 귀중한 자료로 남을 것이다.

- 일제시기,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60여 명, 대부분 사회주의계열
- 이승만 한 일 없었다, 동포사회 분열만 촉진
- 박헌영 사건에 연루된 리사민 목사,
미 스파이 할 인물 못돼
- 유학생 통해 박헌영에게 보낸 편지, 미 정보국에 흘러가
- 대한공론사 주필 시절, 박정희가 공보장관 제의
- 이휘호 여사 찾아와, “내 남편 친구 되어 주세요”
- 고국 정주 맘 먹었을 때, 김대중 구출활동,
이후 못 들어와

미주 이민 초기, 우리 동포들이 겪어야 했던 차별과 설움, 어려움은 너무도 컸다. 그 힘들었던 시절, 그들은 나라가 없어 겪는 설움을 어떻게든 빨리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고 참아내며 독립운동에 힘을 보탰다.

나라가 독립된 다음에는 그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와 자유가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그리고 분단된 땅을 다시 하나로 만들기 위해 또 오랜 동안을 함께 싸워왔다. 진정 우리 민족의 독립과 민주화와 통일은 남과 북, 이 한반도에 있는 이들만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해외에서 자신의 안위보다 이 땅, 이 민족의 안녕을 위해 평생을 바쳐온 동포들의 역할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일본 경찰 감시 피해 미국행 결심

1938년,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선우학원 박사는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미국 땅을 밟았다. 그때 그의 나이 20살. 이후 그는 낯선 땅 미국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함께 걸어왔다.

선우학원 박사는 그렇다고 자신이 일본에서 무슨 큰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일본에 유학 와 있는 소수 조선인 학생으로서 활동의 제약도 많고 능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그저 같이 모여서 어떻게 하면 독립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은 학생들에게 독립운동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들이 친일파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토론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정도의 활동도 그 당시에는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조선유학생에 대한 감시가 워낙 심했던 데다 동포들 가운데도 친일파가 있어서 일본 경찰에 고발을 했거든요. 그래 우리 집에 늘 학생들이 모이고 하다보니 감시가 따랐고 한때는 경찰이 매일 집에 와 있기까지 했어요.”

선우학원 박사가 처음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일본 유학 시절이었다.

“일본에서 동경 아오야마학원 신학부에 다녔는데 일본인 가운데 카가와라는 유명한 기독교 사회주의자가 있었어요. 늘 그 사람 집에 찾아다니면서 많이 배웠지요. 그는 전쟁과 군수주의에 반대했었는데 하루는 제가 ‘선생님, 우리 조선에 가서 전도 좀 해주시지요’ 했더니 ‘일본이 조선 사람을 학대하고 식민지 정책을 펴고 있는데 일본 사람인 내가 조선 사람 앞에서 무슨 면목으로 전도를 할 수 있느냐’라고 답하셨어요.
그 말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또 그분은 기독교 목사이면서도 노동운동, 빈민운동을 많이 하신 분이었지요. 그 사람에게 기독교 사회주의에 대해 많이 배웠기 때문에 미국 가기 전에 이미 그런 사회주의 생각을 지니고 있었지요. 하지만 미국에 가서 다녔던 대학은 보수 기독교 대학으로 그런 것을 공부할 시간이 없었어요. 그래서 대학원에서 다시 사회주의에 대해 연구하고 미국 노동운동에도 참가하고 했던 겁니다.”

이렇게 ‘정치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던 선우학원 박사는 결국 초기 이민자 중의 한 사람으로 미국에 가 있던 조부의 곁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1938년, 미국에 도착한 20살 청년 선우학원은 미국에서 학업을 계속해 1942년에는 동양계 사람으로는 최초로 미국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1943년에는 워싱턴 주립대학 대학원에 한국과를 설립하고 가르치기도 했다. 이렇게 일제 식민지 시절 미국 내에서 학문적으로 동양과 조선을 알리고 전하는 역할 외에도 그는 직접적으로 독립운동 지원에 나섰다.


“행동하는 독립운동을 하자”

332-2-1647.jpg 6·25 전쟁 시기 한 미군이 시골 사람들과 대화하고 있다. 미국은 과연 우리의 우방인가.[민족21 자료사진]

“미국에서 진보운동을 시작하면서 보니까 미국 내에 있는 동포 단체가 너무 보수적인 거예요. 그때 우리는 ‘행동하는 독립운동을 해야겠다, 그렇다면 행동이란 무엇인가, 바로 군사운동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미국에서 군사운동을 하기는 어려운 일이라서 중국에서 군사운동 하는 사람을 찾았던 거지요. 그것이 조선의용대와 김약산 장군이었어요. 그래서 미국에서 조선의용대 미주 후원회를 조직해 재정 지원 역할을 했지요.”

선우학원 박사는 당시 재무 역할을 맡았다. 대학교수였던 그는 수입이 넉넉한 편이어서 상당히 많은 돈을 보낼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우리는 그때 돈 벌어서 독립운동하는데 보태는 거 그거밖에 생각이 없었거든요. 벌어서 이 다음에 잘 살겠다 그런 생각은 없고 빨리 돈 벌어서 독립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했던 거예요. 그래서 중국에 돈을 많이 보냈지요. 당시 중국에는 의용대에 500여 명이 투쟁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우리가 미국에서 못하는 일을 그들이 대신 해주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후에 이 사람들이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했고 김규식 박사가 당수, 김약산 씨가 부당수를 맡았지요.”

조선의용대 미주 후원회 활동을 할 때 그들은 중국 영사관을 통해 외교 행랑으로 김규식 박사, 김약산 대장과 편지로 연락을 취했다고 한다.

“이렇게 외교 경로를 이용했지요. 외교 행랑은 누가 뜯어보지 못하는 거니까요. 그때 LA의 중국 영사관의 부영사 한 명과 우리가 아주 친했어요. 또 그 사람은 우리의 활동을 지원했고요. 조선의용대에 돈을 보내는 것도 다 그 사람이 해주었어요.”

조선의용대 지원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은 중단되었다. 선우학원 박사의 임시정부에 대한 평가는 냉정하다.

“임시정부 사람들은 다 보수주의자들이었어요. 김구 선생도 마찬가지였죠. 솔직히 그 사람이 북을 방문하고 통일에 공헌했기 때문에 역사에 남은 거지 그마저 없었다면 보수, 테러리스트지 우리 민족에게 공헌한 게 뭐가 있어요.”

조선의용대 미주 후원회가 걸었던 길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하고도 다른 노선이었다. 당시 미국 내에는 이승만을 지원하는 동지회와 안창호 선생이 조직한 국민회가 나뉘어져 있었다.

“국민회와 동지회가 늘 싸웠지요. 대부분의 우리 동포는 다 국민회였어요. 이승만 씨는 자신은 외교를 통해 독립운동을 한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어요. 게다가 서로 연합하려고 하는 동포사회를 자꾸 분열시켰거든요. 그 사람은 일생 동안 그랬어요. 우리 남북 분단에도 막대한 역할을 한 사람이에요.”

그러나 국민회 역시 선우학원 박사를 비롯한 젊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보수적이었다. 그래서 국민회에서 나와서 따로 조직을 만든 것이 앞서 이야기한 조선의용대 미주 후원회였던 것이다.

“상당히 진보적인, 사회주의 계통의 사람들이었지요. 당시 미주 동포가 한 2000명 정도 됐는데 그 중 우리 회원이 60명 정도였으니까 상당한 수였지요. 처음 조직할 때 우리는 좌익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원로들을 앞장세웠었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리사민(리경선) 목사, 김강, 변준호, 신두식 씨와 같은 공산주의자들과 제가 지도했지요.”

그는 변준호 선생은 미국 공산당원이었지만 리사민 목사 등은 개인적으로 활동했던 독자적 기독교 사회주의자로 미국 공산당과의 연계는 없었다고 한다.

“리사민 목사가 처음부터 사회주의자였던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독립운동, 정치운동을 하면서 조금씩 기독교 사회주의자 쪽으로 기울었던 거지요. 마지막에는 ‘나는 공산주의자’라 선언하기에 이르렀고 자연히 북을 동경하게 되면서 북에 가야겠다고 했어요. 체코를 통해 북으로 들어가셨는데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박헌영 사건에 말려들어가지 않았느냐 하는 이야기도 있어요. 미국에서 온 사람이고 하니까 전시에 그런 의심을 받고 희생당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만약 그렇다면 그건 북에서 잘못 판단한 거예요. 저는 리사민 목사가 애국자라는 것을 믿어요. 그 사람은 미국 스파이나 그런 거 할 사람이 못된다고요.”

선우학원 박사가 말하는 박헌영 사건이란 6·25전쟁 시기 이승엽 등을 비롯한 남로당계 인물들이 ‘미제 고용간첩 및 정부 전복 음모 혐의’로 처형, 숙청된 사건을 말한다. 당시 북의 발표에 따르면 박헌영은 자신이 간첩 노릇을 했다는 것을 시인, 자백하고 뉘우쳤으며 결국 사형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이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남로당계 사상검열 작업이 시작되었으며 미국에 대한 경각심이 사회적으로 고취되었다고 한다. 선우학원 박사는 바로 이 사건에 리사민 목사가 연루되어 희생된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박헌영에게 보낸 편지 미 정보국에서 내놔

하지만 그는 박헌영은 미국의 간첩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박헌영이 간첩이었을 것이라는 정황으로 그는 두 가지를 든다. 하나는 6·25전쟁 시기 극소수 간부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는데 그 회의 장소에 미국 폭격이 있었다는 것이다. 외부에서 알 수 없는 정보가 누출된 것은 그 소수 간부들 중에 누군가가 내통한 것이라는 의혹이다.

두 번째는 리사민 목사와 선우학원 박사가 1948년에 김일성 주석과 박헌영에게 보냈던 편지가 미국 정보부의 손에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1948년, 리사민 목사와 선우학원 박사는 미국 내 정치 동향에 대한 분석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하며 귀국하고 싶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남궁요설이라는 사람을 통해 박헌영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남궁요설이라고 당시 시애틀에서 공부하던 유학생이 있었는데 그가 북에 편지를 전달할 수 있다고 해서 제가 그 편지를 주어서 서울로 보냈어요. 그래서 그가 서울로 가지고 와서 시인 임화에게 주었고 임화가 평양에 전달을 했거든요.
그런데 내가 체코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미국에 돌아와 있을 때 6·25전쟁이 나자마자 제가 미국 정보부에 체포되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고문을 받았는데 제가 모든 것을 다 부인했거든요. 그랬더니 그들이 ‘네가 북의 스파이라는 증거가 있다’라면서 그 편지를 보여주는 거예요.”

남궁요설에게서 임화를 거쳐 박헌영에게 편지가 전달된 것이라면 남궁요설이나 임화를 의심할 수도 있는 상황 아닐까. 선우학원 박사는 그러나 남궁요설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남궁요설은 제가 의심하지 않아요. 그는 미국에 순수하게 유학생으로 왔다가 우리하고 가까이 지내면서 좀 진보적인 경향을 가지게 된 정도의 사람이었어요. 또 제가 그의 아버지를 잘 알거든요. 남궁현 박사라고 평양신학교의 교수로 있던 분이에요. 남궁요설은 음악을 전공했는데 바리톤 음성이 참 좋았던 걸로 기억해요.

임화는, 임화에게 의심을 둘 수도 있지요. 임화가 그 편지를 미국 정부에 전달했는지 박헌영에게 전달했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남궁요설의 말에 의하면 ‘임화가 박헌영에게 전달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박헌영에게 전달되었다고 믿고 있었던 거예요.”

물론 박헌영의 경우에 있어서도 박헌영이 직접 미국에 편지를 전달했는지 혹은 미국이 평양을 점령했을 때 서류에서 이 편지가 발견되었는지 확인해야 할 부분이 있기는 하다. 어쨌든 이 편지 때문에 그는 엄청난 고초를 당해야 했다.

“저는 그래 편지 보낸 것은 긍정했지요. ‘분명 내 이름으로 서명해서 보냈다. 하지만 회답을 받지는 못했다. 지령을 받거나 북을 위해 우리가 뭔가 해준 것은 없다’ 라고 주장했어요. 지령 받은 것도 없고 회신도 못 받았고 다른 증거가 아무 것도 없으니까 무사히 나올 수 있었지요.”


미국은 자기네 이권 위해 움직일 뿐

1965년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시의 박정희와 닉슨.[민족21 자료사진]

하지만 ‘무사히 나왔다’는 것 때문에 그는 혹 그 자신이 미국 정보부를 위해 일한 사람이 아닌가 의심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같이 조사를 받은 김강 씨 등은 추방 조치를 당했지만 그만은 아무 문제없이 풀려났기 때문이다. 그런 의심을 많이 받았던 것일까. 선우학원 박사는 기자의 질문에 별로 불쾌해 하는 기색 없이 차근차근 설명했다.

“저는 미국 군대에서 복무를 한 적도 있고 미국 시민권을 얻은 사람이었으니까요. 다른 외국인하고는 취급이 달랐지요. 외국인은 영주권이 있더라도 미국이 원치 않으면 추방시킬 수 있지만 시민은 다르거든요. 김강의 경우 시민권이 없었어요. 하지만 저는 미국 시민으로 미국 헌법의 보호를 받기 때문에 미국 정부가 아무리 저를 내켜하지 않아도 쉽게 다루지를 못한 거지요.”

사실 그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이 미국 진주만을 습격한 이후 미국 정부와 FBI에서 일본어 번역 등의 일을 하기도 했다. 또 미 CIA의 전신인 미 육군 정보부(OSS)에 응모해 훈련도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선우학원 박사는 미국이 조선 독립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군대에서 복무하기도 하고 미국과 함께 군사행동을 구상하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미국에 대한 생각은 차츰 변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이승만 대통령을 전적으로 지원했다는 사실에서부터 미국을 다시 보기 시작했지요. 또 남북 좌우 협상을 방해한 일들, 고의적으로 분단을 꾀한 일들, 이런 일들을 지켜보면서 아, 미국이 우리 독립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자기네 이권을 위해서 움직이고 있을 뿐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거지요. 그러면서 미국이 결코 우리의 우방국가가 아니라 우리의 독립을 방해하는 분단의 주모자라는 판단을 내렸는데 50여 년이 지난 지금 보면 내 판단이 옳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1960년 4·19항쟁이 벌어지면서 그는 한국에 돌아가서 운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당시 하고 있던 식료품점을 손해를 봐가면서 급히 처분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서울 연세대학교에서 강의를 했고 대한공론사 주필로 취직했다. 그리고 그 무렵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군사 쿠데타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선우학원 박사는 박 정권을 옹호했다고 한다.

“당시 저는 박정희라는 사람이 상당히 진보적이고 사회주의자였다는 소문을 들었었어요. 여순 사건 때만 해도 그 사람이 공산주의자로 알려져 있었거든요. 물론 나중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명단을 다 정부에 팔아서 명단에 들어있던 사람들은 사형 당하고 자기만 빠져나왔다는 사실은 몰랐지요. 그러니 사회주의자가 혁명을 했으면 이거 진보적인 사회가 되지 않겠느냐 기대를 걸었었지요. 그래서 처음에는 상당히 도와주는 역할을 했어요.”

당시 대한공론사에서 선우학원 박사가 쓰던 사설은 외교관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한번은 당시 영국 대사가 대한공론사의 사설이 너무 과격하다면서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고 한다. 문제가 된 사설의 내용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내놓은 농민 정책이 빈민, 농민을 살리는데 대단히 좋은 정책이라며 박 정권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영국 대사는 이 사설을 보고 ‘필자가 혹 빨갱이 아니냐’며 의심했다는 것. 박정희 정권 옹호와 빨갱이? 지금 생각으로는 도저히 맥락이 연결되지 않는 대목이다.

“당시만 해도 박정희를 옹호한다는 것은 의심스러운 일이었어요. 미국에서 박정희를 아직 다 파악하지 못하고 조사 중인 상태였고 사회주의자였다는 소문이 있어 상당히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고 있었거든요. 어쨌든 그래서 영국 대사가 미국 대사에게 연락을 해 사설이 좀 의심스럽다, 글 쓰고 있는 사람을 조사해 달라고 했던 거지요.
하지만 FBI 조회를 해봐도 아무 문제가 없고 반대할 이유가 없으니까 이런 일이 있었음에도 계속 주필 자리에 남아있을 수 있었죠. 그러다가 이후락이 대한공론사 사장으로 왔어요. 그런데 이후락은 해군 군속으로 대사관에서 일했기 때문에 이승만을 반대했다던가 하는 미국에서의 저의 행적을 잘 아는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이후락 밑에서는 일 못하겠다 해서 사임했지요.”

대한공론사 주필로 있을 때 선우학원 박사는 박 정권에서 공보부 장관 자리를 제안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보호막인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장관이 되려면 미국 시민권을 포기해야 하거든요. 하지만 제가 거기 들어갔다가 쫓겨나오든지 하면 갈 데가 없지 않습니까. 또 제가 원했던 것은 그저 학생들 가르치는 일이었거든요. 대한공론사 주필도 임시직으로 생각했으니까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김대중 구출 운동 나서

그래서 1961년,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고 이후 박정희 대통령 2선 때까지만 해도 종종 한국을 드나들었다. 박 정권에 대해서도 별다른 반감은 없었다.

그러던 그의 생각이 바뀌게 된 것은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이 벌어졌을 때였다. 김대중 씨와 선우학원 박사는 그 이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

“예전에 이휘호 여사가 나를 찾아와서 ‘제 남편의 친구가 되어 주십시오. 제 남편은 학벌도 없고 지성인 친구가 없어 지성인 친구가 필요합니다. 케네디도 하버드 대학의 지성인 친구가 많아서 성공한 대통령이 되었지 않습니까’ 하고 부탁하길래 좋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다음날 새벽 7시에 김대중 씨가 찾아와서 같이 식사하고 하면서 친구가 되었어요. 그래 미국에 살 때도 나를 찾아와서 내가 강의도 하게 해주고 공부하라고 충고도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정치가니까 정치 조직을 해야 할 거 아닙니까. 그러다가 납치를 당했지요.”

김대중 씨가 납치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선우학원 박사는 굉장히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332-2-1649.jpg 1973년 납치 사건 직후의 김대중.[민족21 자료사진]

“김대중 구출 운동이 처음에는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시작했는데 하다보니 박 정권을 반대하는 정치운동이 되었거든요. 그런데 그때는 내가 해마다 한국에 나갔고 한국에 정주해서 살려고 하던 때였어요. 또 한국에서 아시아종합대학이라는 것을 창립하기 위한 조직이 결성되고 제가 총장으로 임명을 받았던 때였고 27억 원의 기금을 가진 한국문화협회 재단 이사장 자리를 맡기도 했고요.

그런데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게 되면 이 모든 것을 다 빼앗기게 되는 상황이었지요. 그래서 제가 상당히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이걸 어떻게 하나, 아주 어려운 결정이었지요. 그러나 사람을 살려야겠다 해서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구출운동에 적극 나선 것이지요. 그때 이후로 국내에 못 들어왔어요.”

선우학원 박사는 임창영 박사, 이승만 목사, 김성만 교수 등과 함께 김대중 구출운동에 나섰다. 그들은 먼저 국제사면위원회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사연을 이야기했더니 미 국무부에 빨리 연락하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우리가 미 국무부에 선이 닿아야 말이지요. 그때 이승만 목사가 미국 NCC(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인권옹호위원회에 관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선 NCC를 찾아갔어요. NCC는 미 국무부에 선이 있거든요. 그렇게 해서 국무부에 연락하고 다시 국무부에서 CIA에 연락해서 김대중 씨를 막 바다에 던지려고 하는 거를 CIA가 저지했던 거지요.”

1938년 처음 미국에 도착한 이래 일제 식민지 시절 독립 운동에서부터 민주화운동, 그리고 1980년대부터 이어지는 통일운동(본지 11월호 참조)에 바쳐온 한평생.

먼 이국 땅에서 오로지 민족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살아온 그가 말하는 진정한 민족주의와 그의 지나온 삶은 기자에게 많은 여운을 남겼다.

“제가 주장하는 민족주의는 서양식 민족주의와는 다른 ‘아시아 민족주의’예요. 민족 해방, 민족 중심, 민주주의를 근본으로하는 민족주의인 거죠. 그러니 남의 나라에 쳐들어가고 남의 나라를 먹겠다는 일본식 민족주의나 제국주의 민족주의와는 전혀 다르지요. 그와는 정반대로 평화적으로 공평하게 같이 살자는 거지요. 진정한 민족주의는 내 나라도 잘 살고 너희 나라도 잘 사는 그런 민족 중심의 사고여야 해요.
우리나라는 그런 면에서 다른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민족주의의 진짜 역사를 가진 나라예요. 오천년 역사 동안 단 한번도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잖아요. 또 수십 번, 수백 번 침략을 당할 때마다 외부 세력에 반항해서 이긴 힘은 바로 우리 민중의 힘이었어요. 그만큼 우리나라는 민중의 역할이 큰 나라였습니다.” [2003년 12월호]



선우학원 박사 약력
1918년 평안남도 대동군 부산면 수산리 출생
1937년 평양숭인상업학교 졸업
1937년 동경 아오야마학원 신학부 입학
1938년 미국 캘리포니아 파사데나대학 입학
1942년 동교 졸업 캘리포니아 대학원 입학
1943∼1949년 워싱턴 대학원 석사학위 취득. 동교 철학박사 학위 수업
1943년 캘리포니아대학에서 동양언어학 강의
1949년 워싱턴 주립대학 원동부 한국과 단임강사
1950년 체코슬로바키아 국립대학 철학박사 학위 취득
1951년 미국 캘리포이나 주 스탠포드대학원 연구생
1954년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일간지 편집부 재정기자
1960년 서울 연세대학교 철학부 강사 및 대한공론사 주필
1963∼1990년 센트럴 메소디스트대학 사회과학부 부장교수
1975년 뉴욕시립대학 객원교수

[민족21:2003년 12월 01일 (33호)강은지 기자 happy@minjog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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