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green>고 김진균 선생 17일 사회민주장</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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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minjok.c… 작성일04-02-22 00:00 조회1,55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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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여 년 간 한국사회에서 김진균 선생은 행동하는 지성의 표본이었습니다. 선생님은 1980년대 초부터 진보적 학술운동의 대부이셨습니다. 선생님은 아카데미 안에서 머무르지 않으셨습니다. 1980년대 말이래 선생님은 항상 민중운동의 한복판에 계셨습니다. 선생님은 진보 사회학도들의 스승이기에 앞서 민주의 벗이었습니다. 특히 노동자운동에 대한 선생님의 헌신적인 지원은 한국 노동운동사에 길이 기억될 것입니다"
-2003년 1월 "김진균 교수 정년기념논총" 헌정사 中-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을 기억하며
민중의 큰 스승 김진균(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선생이 14일. 향년 67세로 지병인 대장암으로 타계하셨다. 고인의 부음 소식이 전해지자 영안실이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는 "민주화운동 기념 사업회"를 비롯한 사회각계인사와 후학들의 조문과 조화가 줄을 이었다.
선생의 닉네임을 알게되면 평소 학생들과 어울리기를 매우 좋아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선생의 호는 "청정"이다. 그러나 선생에게는 "불나비"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다. "술과 노래를 좋아하시던 선생은 학과 내에 영상 동아리를 만들어 학생들과 어울렸고 또한 사회학과 비공식 과가(科歌)가 "불나비"라서 10년 전부터 자연스럽게 글을 쓸 때면 불나비라는 닉네임을 사용해 왔다"며 제자인 정근식(서울대 사회학과)교수가 설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2001년도에 60을 훌쩍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학원 제자들과 락카페에 가서 3시간동안 춤을 추기도 했다고 한다.
평소 등반을 좋아하셨던 선생은 학생들과 지리산를 자주 다녔다고 한다. 서관모(장례 집행위원)교수는 "지리산 등반을 마치고 내려오는 계곡에서 꼭 옷을 벗고 목욕을 하던 기억"을 떠올리며 "당시 목욕 장면을 담은 사진도 가지고 있다"며 고인을 기억했다.
멀리서 보내온 고인의 추모 글
캐나다 토론토에 사는 손자 김동원씨는 고(故)김진균 선생의 홈페이지 너른마당(http://prome.snu.ac.kr/~jkkim/)에 "건강이 안 좋다는 말씀은 들었지만 이내 털고 일어나실 것이라 믿고 있었는데, 문득 인터넷에서 비보를 접하게 되니 당혹스럽기도 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며 "그 동안 지식인으로 앎을 행동으로 보여주시는 할아버지의 용기 있는 모습은 저희 집안의 자랑이었다"라며 명복을 빌었다.
또 닉네임 "한제자"씨는 현재 이국의 신문기자로 있다면서 "비록 격랑의 80년대 학부시절 수업 한번 듣고, 대학원시절 세월이 바뀌어 좀 조용해진 캠퍼스를 오가다 우연히 선생님을 뵈온 정도이지만, 소탈하신 모습과 천연한 미소에 어리숙한 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속으로나마 존경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라고 선생을 기억했다.
그러면서 "부드럽고 잔잔한 말씨와 넉넉한 마음, 강철같은 사회진보에의 결기, 비판적이고 예리한 지성, 하지만 무엇보다 이를 넘어서는 따뜻한 인간에 대한 예의와 애정은 후학들에게 길이 기억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전통과 이론, 실천과 창조
상지대 홍성태 교수는 선생을 "학자로서 한국의 사회문제들을 올바로 분석하고자 하는 열망을 안고 우리의 학문적 전통에 바탕을 두고 외국의 이론들도 열심히 공부하는 분"이라는 평가와 함께 "언제나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사회를 바라보고, 한국 사회의 구조를 바로잡기 위해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실천가"라고 하였다.
같이 학교에서 공부를 했던 대학원생 은수미씨는 선생께서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 이론, 방법론적 접근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운동의 경험적 자료를 모아서 한국적 사회학을 만들어야 보아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서구로부터 직수입된 사회학을 한국상황에 맞게 적용하여 분석할 수 있는 창조적인 이론과 내용을 발굴해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특히, 우리 근현대사에서 민주화와 사회변화에 있어 의식화 부분을 담당했던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비합법적 조직과 단체"에 대한 연구 자료들이 많지 않은 것이 실정이다.
고인의 장례는 2월 17일(화)"민주사회장"으로 치러진다. 오전 10시 대학로에서 영결식을 하고, 오후 1시 30분 마석 모란민중공원에서 하관식이 치러진다.
故김진균 교수 약력과 저작
1937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고 김진균 교수는 1961년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후 1968∼1974년까지 서울대 상대 교수를 거친 뒤 1975년부터 2003년 2월까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1980년∼1984년까지 4년 동안 해직을 겪기도 했다.
1984년 진보적 학자들과 함께 산업사회연구회(현 산업사회학회) 설립을 주도. 변혁운동의 이념적 토대를 쌓았으며 1988년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공동의장을 맡았다. 이어 전노협 고문 및 후원회공동대표(1990년∼1995년), 사회진보연대 대표(1994년∼2002년), 민주노총 지도위원(1995년∼2004년), 민중연대 고문(2002년∼2004년), 전태일 기념사업회 고문(2003년∼2004년)을 맡는 등 진보진영에서 중심 역할을 해왔다.
주요 저서로는 "비판과 변동의 사회학(1983년)", "사회과학과 민족현실 Ⅰ·Ⅱ(1988년·1991년)", "근대국가와 민족주의(1995년)", "한국의 사회과학과 학문의 과제(1997년)" 등이며 "혁명의 사회이론(1984년)", "조직사회학(1987년)" 등을 공동 편역했다.
추모 홈페이지(http://bulnabia.jinbo.net)
[출처:민중의 소리 어지영 기자 2004년02월16일]
-2003년 1월 "김진균 교수 정년기념논총" 헌정사 中-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을 기억하며

선생의 닉네임을 알게되면 평소 학생들과 어울리기를 매우 좋아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선생의 호는 "청정"이다. 그러나 선생에게는 "불나비"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다. "술과 노래를 좋아하시던 선생은 학과 내에 영상 동아리를 만들어 학생들과 어울렸고 또한 사회학과 비공식 과가(科歌)가 "불나비"라서 10년 전부터 자연스럽게 글을 쓸 때면 불나비라는 닉네임을 사용해 왔다"며 제자인 정근식(서울대 사회학과)교수가 설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2001년도에 60을 훌쩍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학원 제자들과 락카페에 가서 3시간동안 춤을 추기도 했다고 한다.
평소 등반을 좋아하셨던 선생은 학생들과 지리산를 자주 다녔다고 한다. 서관모(장례 집행위원)교수는 "지리산 등반을 마치고 내려오는 계곡에서 꼭 옷을 벗고 목욕을 하던 기억"을 떠올리며 "당시 목욕 장면을 담은 사진도 가지고 있다"며 고인을 기억했다.
멀리서 보내온 고인의 추모 글
캐나다 토론토에 사는 손자 김동원씨는 고(故)김진균 선생의 홈페이지 너른마당(http://prome.snu.ac.kr/~jkkim/)에 "건강이 안 좋다는 말씀은 들었지만 이내 털고 일어나실 것이라 믿고 있었는데, 문득 인터넷에서 비보를 접하게 되니 당혹스럽기도 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며 "그 동안 지식인으로 앎을 행동으로 보여주시는 할아버지의 용기 있는 모습은 저희 집안의 자랑이었다"라며 명복을 빌었다.
또 닉네임 "한제자"씨는 현재 이국의 신문기자로 있다면서 "비록 격랑의 80년대 학부시절 수업 한번 듣고, 대학원시절 세월이 바뀌어 좀 조용해진 캠퍼스를 오가다 우연히 선생님을 뵈온 정도이지만, 소탈하신 모습과 천연한 미소에 어리숙한 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속으로나마 존경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라고 선생을 기억했다.
그러면서 "부드럽고 잔잔한 말씨와 넉넉한 마음, 강철같은 사회진보에의 결기, 비판적이고 예리한 지성, 하지만 무엇보다 이를 넘어서는 따뜻한 인간에 대한 예의와 애정은 후학들에게 길이 기억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전통과 이론, 실천과 창조
상지대 홍성태 교수는 선생을 "학자로서 한국의 사회문제들을 올바로 분석하고자 하는 열망을 안고 우리의 학문적 전통에 바탕을 두고 외국의 이론들도 열심히 공부하는 분"이라는 평가와 함께 "언제나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사회를 바라보고, 한국 사회의 구조를 바로잡기 위해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실천가"라고 하였다.
같이 학교에서 공부를 했던 대학원생 은수미씨는 선생께서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 이론, 방법론적 접근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운동의 경험적 자료를 모아서 한국적 사회학을 만들어야 보아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서구로부터 직수입된 사회학을 한국상황에 맞게 적용하여 분석할 수 있는 창조적인 이론과 내용을 발굴해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특히, 우리 근현대사에서 민주화와 사회변화에 있어 의식화 부분을 담당했던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비합법적 조직과 단체"에 대한 연구 자료들이 많지 않은 것이 실정이다.
고인의 장례는 2월 17일(화)"민주사회장"으로 치러진다. 오전 10시 대학로에서 영결식을 하고, 오후 1시 30분 마석 모란민중공원에서 하관식이 치러진다.
故김진균 교수 약력과 저작
1937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고 김진균 교수는 1961년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후 1968∼1974년까지 서울대 상대 교수를 거친 뒤 1975년부터 2003년 2월까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1980년∼1984년까지 4년 동안 해직을 겪기도 했다.
1984년 진보적 학자들과 함께 산업사회연구회(현 산업사회학회) 설립을 주도. 변혁운동의 이념적 토대를 쌓았으며 1988년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공동의장을 맡았다. 이어 전노협 고문 및 후원회공동대표(1990년∼1995년), 사회진보연대 대표(1994년∼2002년), 민주노총 지도위원(1995년∼2004년), 민중연대 고문(2002년∼2004년), 전태일 기념사업회 고문(2003년∼2004년)을 맡는 등 진보진영에서 중심 역할을 해왔다.
주요 저서로는 "비판과 변동의 사회학(1983년)", "사회과학과 민족현실 Ⅰ·Ⅱ(1988년·1991년)", "근대국가와 민족주의(1995년)", "한국의 사회과학과 학문의 과제(1997년)" 등이며 "혁명의 사회이론(1984년)", "조직사회학(1987년)" 등을 공동 편역했다.
추모 홈페이지(http://bulnabia.jinbo.net)
[출처:민중의 소리 어지영 기자 2004년02월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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