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청학련 김광수씨 출소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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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4-07-10 00:00 조회1,67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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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청학련 남측본부에서 활동하다가 국가보안법으로 옥살이를 하던 김광수씨가 1일 만기출소하자 서울구치소 앞에 대기하고 있던 가족들과 민족민주운동 단체 대표들이 그의 출소를 뜨겁게 환영해 줬다. 인터넷 자주민보 박현선 기자가 취재한 내용을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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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청학련 남측본부 선전국활동혐의로 지난 2003년 10월31일 연행된 청년애국자 김광수씨가 2004년 7월1일 0시에 해를 넘기는 8개월간의 생의 두 번째 옥살이를 마치고 만기출소했다.
김광수씨의 출소를 환영하기 위해 밤이 퍽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어르신들과 동료들, 그리고 가족들이 서울구치소앞을 가득 메웠다.
김광수씨의 출소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은 라창순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을 비롯해 통일연대 상임대표 한상렬 목사,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대표, 고혈압의 몸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구치소를 찾은 서울시 범민련 고문 박선애 선생, 범민련 남측본부 이규재 부의장, 범민련 서울시연합 김규철 의장, 양은찬 선생을 비롯하여 6.15 청학연대, 만삭의 몸으로 달려온 범청학련 남측본부 황선 대변인과 윤경회 부의장, 범청학련 남측본부 후원회 통일청춘, 실천연대, 경기실천연대, 그림공장, 우리나라, 수원통일사랑 청년회 등 많은 단체와 부인 손지은씨와 딸 세희양과 가족들이 참석했다.
김광수(서울대 계산통계학과 88학번, 범청학련 남측본부 선전국 활동)씨는 97년 한총련 조직위원 활동 혐의로 1차 구속, 2000년 출소와 결혼후에도 범청학련에서 활동하는 등 지속적인 통일운동을 벌여온 청년애국자로 평가받고 있다.
김광수씨의 조속한 석방을 위한 각계 단체의 기자회견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대착오적이고 6.15공동선언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국가보안법에 의해 범청학련 가입 및 이적표현물 제작(범청학련 남측본부 소식지 "청년") 혐의로 8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만기출소했다.
출소환영대회 사전마당에서 청년들은 발언과 함성, 노래로 환영분위기를 돋우었으며, 가족들은 담담한 표정으로 김광수씨의 출소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광수씨의 딸 세희(아래 사진)양은 아버지를 꿈에서라도 먼저 보기 위해 단잠에 빠져 참석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기도 하였다.
0시 정각에 맞추어 출소한 김광수씨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당당하고 묵묵히 서울구치소의 정문을 열고 나왔고, 참석자들은 환영과 축하의 함성을 외쳐댔다. 김광수씨는 나오자 마자 출소를 환영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어르신들과 뜨거운 포옹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어 본격적인 환영대회가 시작되었다.
환영대회는 범민련 남측본부 라창순 의장의 환영사를 시작으로 민가협 양심수 후원회 권오헌 회장의 환영과 시대착오적이고 반인륜적인 국가보안법 철폐의 호소력짙은 발언으로 이어졌고 통일연대 한상렬 상임대표의 동지애가 넘쳐나는 환영인사는 숙연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다. 이어 범청학련 남측본부 황선(아래 사진) 대변인의 환영인사가 이어졌다.
남편의 두번의 옥살이를 지켜보며 투쟁하였던 부인 손지은씨는 "아직 실감이 나질 않는다. 얼굴을 직접 보니 조금씩 실감이 나고 있다"며 기쁜 마음을 내비쳤다. "늦은 시간에 남편의 출소를 환영해주기위해 오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린다"고 수줍게 말한 손지은씨는 남편의 오랜 수배생활과 옥살이에 대한 애환의 여운을 남겼다.
"혁명동지가"를 함께 부르며 앞에 선 김광수씨의 출소발언을 끝으로 환영대회는 마무리 되었다.
김광수씨는 출소의 기쁨보다 아쉬움이 더 큰 듯 "법정투쟁에서 북을 반국가단체라고 규정하는 것에 대한 허구성이 폭로하고 범청학련의 정당한 활동을 주장하기 위한 투쟁을 진행하였으나 더욱더 치열하게 투쟁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감옥에서 들은 탄핵소식과 6.15 4돌맞이 우리민족대회 소식을 접했을 때는 안타까움과 환희의 가슴터짐도 있었다"며 감옥생활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한참 바쁜시기에 연행된것에 대한 동지들에 대한 미안함과 죄송함을 서두로 뗀 김광수씨는 "지금 감옥에서는 경원대 학생들과 노동자들, 철거민들이 이라크파병철회와 양심수전원석방 구호를 들고 7일째 단식투쟁을 전개하고 있는데 자신이 먼저 나와 미안하다"면서 "앞으로도 동지들과 이야기하며 통일운동에 기여할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라는 결의로 발언을 마무리지었다.
환영대회 이후 참석자들은 구치소 앞 식당에서 초촐한 환영만찬을 진행하고 김광수씨와 부인 손지은씨는 4년만에 찾아드는 신혼의 단꿈으로 향했다.
김광수씨에 대한 범청학련 남측본부 황선 대변인이 이전에 쓴 글을 다시 한번 개재한다.
그는 좀처럼 농담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말장난이 좀 과도한 편인 내가 보기에
그는 늘 너무 무거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참으로 해맑게 웃는 순간은
딸아이 사진을 보는 순간이었습니다.
고집스레 한길가는 아버지를 닮아 고집이 보통이 아닌 녀석은
이제 세 살에, 희망의 세기에 낳다고도 하고
세기의 희망이 되라고도 해서
이름이 세희입니다. 김세희.
말도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도 할 나이가 된 세희는
집에 오지 않는 아빠 때문에
또래 친구들에게 너는 아빠없지? 하는 놀림을 받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세희는 놀이터에서 멀어져가는 친구와 친구아빠의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요.
가끔 어린이 옷집을 지날 때나. 어린이 책을 파는 곳을 진라 때면
우리 동지의 귀한 딸아이 ‘세희’생각이 납니다.
그 아이에게 없는 주머니는 털어 무엇하나라도 해 주고파서. 오래오래
물건을 뒤적거립니다.
내 마음이 그런데 아빠 마음은 어떨라구요.
좀처럼 멍해지지 않는 김광수 동지가 하루는 멍히 앉아서
몇 번을 불러도 듣지 못하더니.
큰소리에 깜짝 놀라 그러더군요.
세희 생각이 나서....
딸아이 사진을 늘 몇 장씩이나 들고 다니면서
행사때나 가끔 만나게 되면 마음만큼 안아줄 짬도 없고, 티도 못내는
그런 동지였습니다. 김광수 동지는.
그는 너무 고지식해서. 가끔 생활에 서툰 모습을 보였지만
나는 아직까지 그보다 더 성실한 일꾼을 알지 못합니다.
그보다 더 똑똑한 일꾼을 알지 못합니다.
언제부턴가 나는 그를 참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겐 내게 생긴 모든 고민을 다 털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지난달에도 나는 바쁜 동지를 앉혀놓고
별 시덥잖은 고민을 토로하며
눈물 꽈나 흘렸습니다.
그는 나보다 오래오래 내 고민을 끌어안고 방도를 찾느라 사색합니다.
나는 동지와의 대화로 이미 홀가분해졌는데 말입니다.
그런 동지에게 변덕 많은 나는 얼마나 애물단지였을까요.
동지의 연행소식을 들은 날 저는 농성중이었습니다.
농성장으로 찾아온 김광수 동지의 아내는
그가 늘 대변인 걱정을 많이 했다고
건강이 많이 안 좋으니 신경을 많이 써 줘야 한다고
어처구니없게도, 그의 아내는 태평하게 그런 소리를 하며
내 손을 어루만졌습니다.
이런 사람들, 너무 착해빠진 사람들 때문에 화가 납니다.
이런 사람들 괴롭히는 미제와 그의 똘마니들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꼭 후회하도록,
무릎꿇고 싹싹 빌도록,
그의 역사는 그렇게 승리할 것입니다.
아직도 서울구치소에는 실형 15년을 선고받은 송두율 교수와 민경우씨를 비롯한 많은 양심수가 수감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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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수씨의 출소를 환영하기 위해 밤이 퍽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어르신들과 동료들, 그리고 가족들이 서울구치소앞을 가득 메웠다.
김광수씨의 출소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은 라창순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을 비롯해 통일연대 상임대표 한상렬 목사,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대표, 고혈압의 몸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구치소를 찾은 서울시 범민련 고문 박선애 선생, 범민련 남측본부 이규재 부의장, 범민련 서울시연합 김규철 의장, 양은찬 선생을 비롯하여 6.15 청학연대, 만삭의 몸으로 달려온 범청학련 남측본부 황선 대변인과 윤경회 부의장, 범청학련 남측본부 후원회 통일청춘, 실천연대, 경기실천연대, 그림공장, 우리나라, 수원통일사랑 청년회 등 많은 단체와 부인 손지은씨와 딸 세희양과 가족들이 참석했다.
김광수씨의 조속한 석방을 위한 각계 단체의 기자회견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대착오적이고 6.15공동선언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국가보안법에 의해 범청학련 가입 및 이적표현물 제작(범청학련 남측본부 소식지 "청년") 혐의로 8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만기출소했다.
출소환영대회 사전마당에서 청년들은 발언과 함성, 노래로 환영분위기를 돋우었으며, 가족들은 담담한 표정으로 김광수씨의 출소를 기다리고 있었다.
0시 정각에 맞추어 출소한 김광수씨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당당하고 묵묵히 서울구치소의 정문을 열고 나왔고, 참석자들은 환영과 축하의 함성을 외쳐댔다. 김광수씨는 나오자 마자 출소를 환영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어르신들과 뜨거운 포옹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어 본격적인 환영대회가 시작되었다.
환영대회는 범민련 남측본부 라창순 의장의 환영사를 시작으로 민가협 양심수 후원회 권오헌 회장의 환영과 시대착오적이고 반인륜적인 국가보안법 철폐의 호소력짙은 발언으로 이어졌고 통일연대 한상렬 상임대표의 동지애가 넘쳐나는 환영인사는 숙연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다. 이어 범청학련 남측본부 황선(아래 사진) 대변인의 환영인사가 이어졌다.
"혁명동지가"를 함께 부르며 앞에 선 김광수씨의 출소발언을 끝으로 환영대회는 마무리 되었다.
김광수씨는 출소의 기쁨보다 아쉬움이 더 큰 듯 "법정투쟁에서 북을 반국가단체라고 규정하는 것에 대한 허구성이 폭로하고 범청학련의 정당한 활동을 주장하기 위한 투쟁을 진행하였으나 더욱더 치열하게 투쟁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감옥에서 들은 탄핵소식과 6.15 4돌맞이 우리민족대회 소식을 접했을 때는 안타까움과 환희의 가슴터짐도 있었다"며 감옥생활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한참 바쁜시기에 연행된것에 대한 동지들에 대한 미안함과 죄송함을 서두로 뗀 김광수씨는 "지금 감옥에서는 경원대 학생들과 노동자들, 철거민들이 이라크파병철회와 양심수전원석방 구호를 들고 7일째 단식투쟁을 전개하고 있는데 자신이 먼저 나와 미안하다"면서 "앞으로도 동지들과 이야기하며 통일운동에 기여할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라는 결의로 발언을 마무리지었다.
환영대회 이후 참석자들은 구치소 앞 식당에서 초촐한 환영만찬을 진행하고 김광수씨와 부인 손지은씨는 4년만에 찾아드는 신혼의 단꿈으로 향했다.
그는 좀처럼 농담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말장난이 좀 과도한 편인 내가 보기에
그는 늘 너무 무거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참으로 해맑게 웃는 순간은
딸아이 사진을 보는 순간이었습니다.
고집스레 한길가는 아버지를 닮아 고집이 보통이 아닌 녀석은
이제 세 살에, 희망의 세기에 낳다고도 하고
세기의 희망이 되라고도 해서
이름이 세희입니다. 김세희.
말도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도 할 나이가 된 세희는
집에 오지 않는 아빠 때문에
또래 친구들에게 너는 아빠없지? 하는 놀림을 받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세희는 놀이터에서 멀어져가는 친구와 친구아빠의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요.
가끔 어린이 옷집을 지날 때나. 어린이 책을 파는 곳을 진라 때면
우리 동지의 귀한 딸아이 ‘세희’생각이 납니다.
그 아이에게 없는 주머니는 털어 무엇하나라도 해 주고파서. 오래오래
물건을 뒤적거립니다.
내 마음이 그런데 아빠 마음은 어떨라구요.
좀처럼 멍해지지 않는 김광수 동지가 하루는 멍히 앉아서
몇 번을 불러도 듣지 못하더니.
큰소리에 깜짝 놀라 그러더군요.
세희 생각이 나서....
딸아이 사진을 늘 몇 장씩이나 들고 다니면서
행사때나 가끔 만나게 되면 마음만큼 안아줄 짬도 없고, 티도 못내는
그런 동지였습니다. 김광수 동지는.
그는 너무 고지식해서. 가끔 생활에 서툰 모습을 보였지만
나는 아직까지 그보다 더 성실한 일꾼을 알지 못합니다.
그보다 더 똑똑한 일꾼을 알지 못합니다.
언제부턴가 나는 그를 참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겐 내게 생긴 모든 고민을 다 털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지난달에도 나는 바쁜 동지를 앉혀놓고
별 시덥잖은 고민을 토로하며
눈물 꽈나 흘렸습니다.
그는 나보다 오래오래 내 고민을 끌어안고 방도를 찾느라 사색합니다.
나는 동지와의 대화로 이미 홀가분해졌는데 말입니다.
그런 동지에게 변덕 많은 나는 얼마나 애물단지였을까요.
동지의 연행소식을 들은 날 저는 농성중이었습니다.
농성장으로 찾아온 김광수 동지의 아내는
그가 늘 대변인 걱정을 많이 했다고
건강이 많이 안 좋으니 신경을 많이 써 줘야 한다고
어처구니없게도, 그의 아내는 태평하게 그런 소리를 하며
내 손을 어루만졌습니다.
이런 사람들, 너무 착해빠진 사람들 때문에 화가 납니다.
이런 사람들 괴롭히는 미제와 그의 똘마니들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꼭 후회하도록,
무릎꿇고 싹싹 빌도록,
그의 역사는 그렇게 승리할 것입니다.
아직도 서울구치소에는 실형 15년을 선고받은 송두율 교수와 민경우씨를 비롯한 많은 양심수가 수감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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