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green>[중국]대련시 조선족학교 탐방</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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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4-08-20 00:00 조회1,67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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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적인 6. 15북남공동선언발표 4돐에 즈음하여 중국의 대련시에서 사진 및 도서전시회를 진행하는 기회에 우리는 이곳 대련시 조선족학교를 찾았다.
전시회가 열린 대련예술전람관에서 약 3km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있는 이 학교를 우리에게 소개한것은 전시회의 공동주최자인 대련우련선박대리유
한공사 김광일사장(남자, 36살)이다. 5만명의 우리 동포들이 살고있는 대련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조선족학교로서 그 인기가 대단하다는 김사장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 학교에 가보고 싶은 충동을 금할수 없었다.
기사장의 안내로 학교에 도착하니 교장 계영자선생(녀자, 50살)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교장선생은 우리가 찾아온 사연을 듣고나서 신문에 소개될만큼 별로 해놓은 일이 없다면서 먼저 학교의 연혁을 들려주었다. 지금으로부터 58년전인 1946년에 설립된 이 학교는 10년전까지만 하여도 불과 수십명의 학생밖에 없었던 소규모의 학교였지만 1994년부터는 500여명의 학생과 60여명의 교직원을 가진 큰 학교로 되였다고 한다. 현재 이 학교는 유치원 1개반, 소학부 6개반(6년), 초중부 4개반(3년), 고중부 3개반(3년)으로 편성되여있으며 음악실, 미술실, 도서실, 콤퓨터실 등을 그S히 갖추고있다.
우리가 학교의 조선말교육실태에 대하여 알고싶어하자 교장선생은 우리를 수업중에 있는 한 교실로 안내하였다.
《금년 1월 1일은 목요일이였습니다. 6월 1일은 무슨 요일입니까?》
《화요일입니다.》
소학부 6학년 1반의 수학시간인데 교원과 학생들이 조선말로 자연스럽게 의사를 나누고있었다.
《네자랑 내자랑》이라는 표제를 단 복도의 벽보판에는 학생들이 조선말로 쓴 자랑이야기가 나붙어있었고 동심이 비낀 그림도 있었으며 전시대에는 학생들이 직접 빚어 구어낸 도자기들도 있었는데 한결같이 그 솜씨가 보통이 아니였다. 이 하나의 자그마한 사실을 통해서도 우리는 민족성을 고수하고 끊임없이 이어나가려는 동포들의 교육의지를 충분히 읽을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교장선생과의 이야기는 자연히 조국통일문제로 번져갔다. 그는 4년전 6. 15북남공동선언이 발표되던 때를 떠올리며 흥분된 어조로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정말 통일이 다 된것만 같은 느낌이였지요.
그때 김정일장군님의 인기가 우리 동포들속에서 대단했습니다. 장군님께서 그 당시 많은 일화를 남기셨는데 제일 인상적인것은 김대중<대통령>내외가 연회석상에서 서로 떨어져 앉은것을 보시고 왜 <대통령>자신부터 흩어진 가족을 만드느냐고 하시며 연회탁의 좌석배치를 다시 해주시던 모습입니다. 반세기이상 쌓여온 불신을 한순간의 기지있는 유모아로 흩날려 버리는듯한 통쾌한 광경이였습니다.
장군님은 과시 듣던바그대로 온 민족을 한품에 안으실 넓은 도량을 지니신 위대한 정치가이시구나하는것을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6. 15북남공동선언은 북과 남의 동포들만이 아니라 해외에 사는 동포들도 굳게 지키고 철저히 리행해야 할 강령으로서 재중동포들도 여기에 있는 힘과 지혜를 다 바칠것이라고 거듭 강조하였다.
정녕 후대들의 민족교육을 담당한 긍지와 자부심에 넘쳐있는 계영자교장선생을 비롯한 이곳 학교 교육자들의 숨은 노력이 있어 중국에서 사는 동포들이 대를 이어 가며 민족의 얼을 지켜나가고 있다는것을 재삼 느끼며 우리는 학교를 떠났다
엄 국 현
[출처:통일신보 주체93(2004). 7. 17]
전시회가 열린 대련예술전람관에서 약 3km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있는 이 학교를 우리에게 소개한것은 전시회의 공동주최자인 대련우련선박대리유

기사장의 안내로 학교에 도착하니 교장 계영자선생(녀자, 50살)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교장선생은 우리가 찾아온 사연을 듣고나서 신문에 소개될만큼 별로 해놓은 일이 없다면서 먼저 학교의 연혁을 들려주었다. 지금으로부터 58년전인 1946년에 설립된 이 학교는 10년전까지만 하여도 불과 수십명의 학생밖에 없었던 소규모의 학교였지만 1994년부터는 500여명의 학생과 60여명의 교직원을 가진 큰 학교로 되였다고 한다. 현재 이 학교는 유치원 1개반, 소학부 6개반(6년), 초중부 4개반(3년), 고중부 3개반(3년)으로 편성되여있으며 음악실, 미술실, 도서실, 콤퓨터실 등을 그S히 갖추고있다.
우리가 학교의 조선말교육실태에 대하여 알고싶어하자 교장선생은 우리를 수업중에 있는 한 교실로 안내하였다.
《금년 1월 1일은 목요일이였습니다. 6월 1일은 무슨 요일입니까?》
《화요일입니다.》
소학부 6학년 1반의 수학시간인데 교원과 학생들이 조선말로 자연스럽게 의사를 나누고있었다.
《네자랑 내자랑》이라는 표제를 단 복도의 벽보판에는 학생들이 조선말로 쓴 자랑이야기가 나붙어있었고 동심이 비낀 그림도 있었으며 전시대에는 학생들이 직접 빚어 구어낸 도자기들도 있었는데 한결같이 그 솜씨가 보통이 아니였다. 이 하나의 자그마한 사실을 통해서도 우리는 민족성을 고수하고 끊임없이 이어나가려는 동포들의 교육의지를 충분히 읽을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교장선생과의 이야기는 자연히 조국통일문제로 번져갔다. 그는 4년전 6. 15북남공동선언이 발표되던 때를 떠올리며 흥분된 어조로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정말 통일이 다 된것만 같은 느낌이였지요.
그때 김정일장군님의 인기가 우리 동포들속에서 대단했습니다. 장군님께서 그 당시 많은 일화를 남기셨는데 제일 인상적인것은 김대중<대통령>내외가 연회석상에서 서로 떨어져 앉은것을 보시고 왜 <대통령>자신부터 흩어진 가족을 만드느냐고 하시며 연회탁의 좌석배치를 다시 해주시던 모습입니다. 반세기이상 쌓여온 불신을 한순간의 기지있는 유모아로 흩날려 버리는듯한 통쾌한 광경이였습니다.
장군님은 과시 듣던바그대로 온 민족을 한품에 안으실 넓은 도량을 지니신 위대한 정치가이시구나하는것을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6. 15북남공동선언은 북과 남의 동포들만이 아니라 해외에 사는 동포들도 굳게 지키고 철저히 리행해야 할 강령으로서 재중동포들도 여기에 있는 힘과 지혜를 다 바칠것이라고 거듭 강조하였다.
정녕 후대들의 민족교육을 담당한 긍지와 자부심에 넘쳐있는 계영자교장선생을 비롯한 이곳 학교 교육자들의 숨은 노력이 있어 중국에서 사는 동포들이 대를 이어 가며 민족의 얼을 지켜나가고 있다는것을 재삼 느끼며 우리는 학교를 떠났다
엄 국 현
[출처:통일신보 주체93(2004).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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