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ffooff>[대담]양은식 박사 70년 생애</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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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minjok.c… 작성일04-11-08 00:00 조회1,86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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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식 박사(범민련 재미본부 상임의장)가 오는 30일(토) 70회 생신을 맞아 고희 잔치를 마련한다. 양 박사는 이날 동갑내기이며 12살부터 죽마지우로 지낸 강은홍 목사와 함께 자리를 마련한다고 초청장을 보내왔다. 이 자리는 두 분의 자녀들이 서로 의논하여 결정한 행사라고 한다. 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은 고희를 맞는 양은식 박사와 단독 대담을 갖고 그의 70년 생애를 들어보았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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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를 맞는 소감은 어떨까.
양은식 박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제 나이가 드니깐 세상 물정이나 사람 사는 모습을 알만하여 이런 것들을 종합하여 세상을 좀 밝게 하는 지혜를 갖게 되었는데 육체적으로 뒤따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쉽고 안타깝지만 남은 생애를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일을 해서 보람있는 삶을 마감하겠는가를 생각 중에 있다 "고 밝힌다.
양은식 박사, 그는 지난 70년을 어떻게 살아 왔을까. 어떤 계기가 되어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학자로 일하던 그가 통일운동에 뛰어 들었을까. 평소 때 과묵하고 농담도 별로 하지 않고 웃음도 눈물도 별로 없는 진지한 성격이기에 그의 생애에 대해 말하는 주변 사람들이 거의 없다. 왜 그럴까.
"나라는 인간 재미없지요. 농담하고 웃고 하는 것을 할 줄 몰라요. 평생 울어 본적도 손꼽을 정도지요. 아마 기독교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교회 생활을 오래 동안 하다보니 거룩하고 진지하고 그런 게 좋은 줄만 알고 행동하다 보니깐 그렇게 굳어 버린 것 같아요. 사람을 사귀면서도 집안얘기 같은 거는 시시콜콜하다고 생각해서 안 하는 성격이라 내 자신이 나를 보아도 재미가 없는 사람처럼 느껴져요. 얘기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긴장감 주는 적도 많지요."
그는 자신을 객관화시켜 솔직하게 묘사한다. 8살 때 아버지를 잃고 26살 때 청산과부가 된 홀어머니 밑에서 여동생 둘과 자란 배경과 그리고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전쟁기간 중에 단신으로 이남에 넘어와 줄곧 혼자 살면서 파란만장한 생활을 한 것도 그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준 것도 시사한다. "대학 시절에는 친구들과 술 마시고 감정을 나누는 기회도 없었지요. 그 때는 그저 교회 생활하면서 하나님이 외로운 인생의 길잡이이고 나를 보호하는 존재라는 생각만 하고 살아 온 셈이지요."라고 말한다.
왜 단신으로 이남으로 왔을까. 그리고 홀 몸이 된 그의 청년시절은 어떠했으며 무엇 때문에 미국에 오게 되었는지 대화가 이어질수록 궁금하기만 했다.
■양 박사의 70년 발자취
그는 1934년 11월2일생으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8.15를 맞았기 때문에 일제 때 일본선생 밑에서 공부한 경험도 있었다. 어렸을 때 소설들을 읽으면서 영웅적인 존재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변화를 추구했던 성격이 어릴 때부터 있었다. 어머니는 부자 집에서 철없이 자라난 여성이었고 아버지는 평양에 있는 두루섬에서 농사를 짓기도 했고 한 때 동아일보 평양지국에서 사진기자로 활동한바 있었다. 그러나 8살에 아버지가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홀어머니는 장남인 나에게 대해 기대가 컸었다.
그러나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났다. 12살 때부터 사귄 친구, 강은홍의 가족들을 따라 50년 말께 대동강이 방어선이 된다고 소문이 퍼져 황주나 사리원으로 갔다가 며칠 후 집으로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어머니에게 의논하자 "강원도 고모 댁에 있다가 오면 된다. 장남이기에 아버지 대를 이어야 한다"라는 말이 어머니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친구 가족들을 따라 철길로 산길로 피난길을 나온 것이 한달 가까이 되자 서울까지 오게되었다. 여기서 또다시 남쪽으로 가야했다. 대전까지 왔을 때 피난민 수용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 근처 미군부대에서 일자리를 준다며 장정들을 구한다고 하여 10대 소년의 몸으로 지원하여 일자리를 달라고 요구하여 취직했다. 미군부대에서 주는 소고기 깡통을 팔아 그 돈을 친구 아버지에게 드리면서 생활했다. 그 후 미군 재 진격 시에 미군 공병부대에서 노무자를 구한다고 하여 지원해서 들어갔다. 이 부대에는 전부가 흑인병사들이었다. 2년 동안 이곳에서 일하고 대신에 군복무 면제 증서를 받기도 했다. 제대는 했지만 누구 집에가 밥한 끼 얻어먹을 거주처가 없었다. 그래서 교회 장로들이 부산 가야라는 곳에서 고무신 공장을 운영하는 곳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직공으로 일자리를 구해 2년 동안 일하다가 1955년 수도서울이 회복되었다고 하여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일자리를 찾다보니 한 여학교 급사자리를 찾게 되었다. 여학생 변소 청소 등 막일을 하면서 20대 초반을 보내다가 지속적으로 할 일이 못된다고 판단하고 다른 일자리를 찾다가 한 고아원의 사찰 일을 얻게 되어 먹고 거처하는 문제가 해결되게 되었다.
주위의 사람들이 나이가 많지만 고등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고 조언하여 왕심리에 있었던 한영고등학교 야간 반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교감 선생에게 요청하여 1, 2학년을 월반하여 막 바로 3학년에 들어갔다. 그것도 2주 공부한 시기에 여름방학이 되었다. 개학해서 두어 달 공부하고 졸업했다. 그 후 대학을 진학해야 되겠는데 등록금이며 교재비 등을 조달할 능력이 전혀 없어 대학을 포기한 상태였는데 내가 나가던 교회 목사가 장로들에게 요청하여 등록금 지원을 하겠다고 언질을 주면서 숭실대학에 아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 대학에 지원하기를 권유하는 바람에 당시 영락교회 안에 사무실들을 얻어 운영하던 이 대학의 법학과에 들어가게 되었다. 내가 들어가던 해 숭실대학은 바로 1년 전인 1954년에 개교하였기 때문에 2회 입학생이 되었지만 등록금을 지속적으로 지불할 능력이 없어 중퇴하고 금호동에 있던 상이군인요양소에 머물면서 이곳에서 주는 급식을 얻어먹으며 생활하게 되었다. 그 때 얼마나 가난했던지 고무신(일본말로 지까다비)이 찢어져 새끼줄로 꽁꽁 매고 다니는 신세였다.
생활이 너무 어려워 군대복부 면제를 받았었는데도 생활 거처 수단으로 또다시 군대에 뛰어 들어가 1년 반의 군복무 생활을 마쳤다. 제대 후에는 가정교사, 미국 선교사들 우리 말 가르치는 일을 하며 대학에 다니다가 1960년에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다.
졸업 후에는 안동에 있는 한 선교사의 비서 일을 하며 1년 정도 생활비를 벌었고 이후에는 이 선교사가 운영하는 경주문화중고등학교 영어교사로 3년 간 근무한 적이 있었다. 이 때에도 "내가 시골서 선생노릇이나 하다가 죽는단 말인가?"라고 중얼거리며 회의를 갖기 시작하다가 무조건 서울로 올라갔다. 당시 가난한 집안의 한 딸과 결혼을 하게된다. 그리고 고아원에서 편지 번역 일들(고아원 아이들 편지를 영어로 번역하고, 미국 양부모들의 영어편지를 우리 말로 번역)을 돕기 시작하였다. 이것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뭔가 현실을 뛰어 넘고 싶었던 것이 그 때의 심정이었다고 회고한다.
■1966년 미국으로 유학
이 같은 상황에서 양 박사는 또 유학을 꿈꾼다. 그러던 중 지난 1966년 미국으로 떠났다. 1년 후 처와 아이들이 뒤 따라왔다. 캘리포니아 클레어몬트 대학원에서 2년 만에 석사를 마치고 그 후 3년 동안 박사과정을 거친 후 일본 명치유신 때 근대국가로 변화시킨 인물로 일 외무성 장관을 4번하고 총리를 2번 지낸 "가또 고메이"에 대한 연구로 <가또 고메이의 외교정책>이라는 주제의 박사논문을 통과 받아 마지막 학위를 받게 되었다.
그 후 꿈은 한국으로 돌아가 학계에 몸담고 싶은 것이었다. 과거의 비참했던 생활에서 벗어나 안정된 생활을 하고픈 것이 그 당시의 바램이었다. 숭실대를 비롯하여 몇 개 대학에 이력서를 보냈으나 아무데서도 대답이 없었다. 주위에서는 직접 들어가서 부딪치든지 아니면 밀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으나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1973년부터 2년 동안 아리죠나 피닉스에 있는 한 대학에서 비행기 타고 출퇴근하며 두 과목을 강의했다. 거리 관계상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롱비치 캠퍼스에서 아시아 학을 강의하게 되었는데 그러던 중 1975년 경 아리조나 대학의 한 동료교수가 동독의 이북 대사관을 통하여 어머니를 찾아보면 어떻겠느냐고 건의해 주어 주소를 받아서 그곳에 10여장 넘는 편지를 써서 어머니와 헤어지게 된 사연들을 적은 서신을 발송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면 통곡하며 사죄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러던 중 1976년 초 뜻밖의 답신이 날라 들었다. "선생 어머니를 찾았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너무나 커다란 충격이라 가슴은 폭풍에 밀려오는 파도처럼 크게 뛰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어 어머니와 두 여동생이 함께 찍은 사진까지 보내 왔다. 꿈이냐 생시냐 하며 눈물로 쓴 어머니의 편지가 왔다. 어머니를 만나야 한다는 벅찬 기쁨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반공으로 세뇌된 교육 때문에 두려움도 앞섰다. 내처는 이북에 갔다가 돌아올 수 있는가를 걱정하면서도 "어머님을 만나러 가야지요"라고 위로해 주기도 했다. 그 때 나는 대학원 도서관 5층에서 <김일성 전집>을 발견하고 그것을 보려는 순간 주변에 누가 볼까봐 두리번거리며 가슴 조인 채 열람할 정도로 지식인들 마저 반공교육으로 심리적 불안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막상 평양을 간다고 마음을 먹었다가도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 만큼 내 자신이 나약함을 드러내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동독의 이북 대사관에 또 다시 편지를 썼다. "어머니 여비일체와 이북 당국에 감사편지를 쓸 터이니 유럽의 한 중립국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해 주기 바란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두어 달 후 대사관으로부터 답장을 받았다. "이번 여름에 비엔나로 오면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이 편지를 읽고 너무나 기뻐 벅찬 가슴을 가눌 길이 없었다. 가슴은 두군 거리기만 하였다.
드디어 1976년 7월 하순이 다가왔다. 비엔나로 날라 갔다. 대사관의 한 참사를 만나 어머니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가 고령이어서 비엔나에 나오지 못한 사연을 설명한 한 참사는 조국에서 어머니를 만날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하며 원하면 수속을 밟아 주겠다" 말해 미국의 아내에게 전화로 상의했다. 나도 그 때 두려운 생각이 들었고 혹시나 속는 게 아닌가 라고 생각하였는데 내 아내는 대범하게도 이북에 가서 어머니를 만나라고 하는 것이었다.
■북녘 어머니와 26년 만에 극적 상봉
1976년 7월 하순, 내게는 인생에 있어 가장 기쁜 날이었다. 꿈에도 그리던 어머님을 평양 순안 공항에서 만나게 된다는 생각에 잠긴 채 조선민항(지금은 고려민항)으로 평양에 도착했다. 접견실 앞에서 기다리던 중 저 멀리서 소리치며 달려오는 여인이 있었다. "은식이 네가 살아서 돌아왔구나!" 온 몸을 휘감고 소리치는 어머니였다. 평상시 눈물을 흘릴 중 모르던 나였지만 내 눈에는 주먹 같은 눈물이 흘러내려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이것은 꿈이 아니었고 생시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장남인 나를 집안의 기둥으로 삼고 지금까지 수절하고 계신 어머니였다. 옆에는 12살, 14살 때 헤어진 여동생들이 중년부인들(38살, 40살)이 되어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평양에서 2주 동안 체류했던 나는 어릴 때 자주 가던 모란봉, 을밀대 등을 방문하기도 했다. 한 주정도 지나자 판문점에서 포푸라 나무사건(일명 도끼 사건)이 터졌다. 전쟁분위기가 감도는 것 같았다. 여기 저기서 군사 훈련하는 장면들을 볼 수 있었다.
일주일이 하루처럼 흘러갔다. 돌고 돌아서 온 것이 다시 비엔나였다. 미국으로 오는 비행기 일정이 여유가 있어 <비엔나 나이트>라는 관광단에 끼여 외국인들 2백여명과 함께 시내 관광을 하며 포도주 공장에도 방문하며 유럽인들과 이런 저런 대화들을 나누게 되었다. 동서냉전 분위기에서도 유럽사람들은 남북 간에 존재하는 긴장분위기와는 너무 달랐다. 이념이 다른 나라들끼리도 서로 왕래하면서 화해하며 지내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우린 왜 이러고 있느냐?"라고 내 자신에게 묻게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으며 인생의 목표가 잘사는 길만 생각하지 않았는가를 스스로 묻는 계기가 되었다. 내 자신은 또 기독교 문화 속에서 지내 왔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도대체 무엇인가?"도 묻게 되었다.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가며 내 양심과 내 의식의 문을 두들겨 주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통일운동에 발을 딛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학계에서 통일운동으로 전환
1973년부터 아리죠나 피닉스에 있는 한 대학에서 일본외교사, 일본 경제사 등을 강의하다가 거리 관계상 자리를 옮겨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롱비치 캠퍼스에서 아시아 학을 강의했고, 79년부터 80년까지 칼스테이트 로스엔젤레스 캠퍼스에서 한국역사 강의, 81년에 유씨엘에이(UCLA)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미국 내 한인 이민사 강의, 한미관계사 강의 등으로 학계에서 활동하다가 96년에 교육계를 떠나게 되었다. 그 후 지금까지 생계를 위해서 8년 동안 동전세탁소(Coin Laundry Shop)를 운영해 왔다.
따지고 보면 교육계에서 20여 년 종사하였지만 북녘의 어머니를 만나던 순간부터 나의 마음은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가 하루속히 통일된 나라가 되어 북도 남도 평화스럽게 살 수 있을까하는 생각들이 나의 마음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군사독재가 종말을 고했지만 연이어 전두환 군부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수많은 시민들이 피를 흘린 80년 5월 민중항쟁이 터지자 나약한 학자의 한사람이었지만 그냥 일상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뭔가를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그 당시 <백범일지>를 읽으면서 나의 결심은 시간이 갈수록 굳어지고 있었다. 백범이 남북연석회의를 통해 통일의 길을 결심하였듯이 나의 결심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되돌아본다.
그 동안 이민사회에 봉사했던 일들은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합창단 서울 코랄을 후원하는 일을 포함하여 교회 장로로서 봉사하며 주일학교에서 성경을 지도하는 일, 한국학연구회에서 이민사에 관련한 학술활동, 재미동포 축구협회를 지원하는 사업 등으로 봉사하기도 하였지만 80년 5월 민중항쟁 시기이후부터는 나의 관심은 민족문제에 쏠리고 있었다.
교회 생활도 기복적인 신앙세계를 극복하고 사회구원, 민족구원에 관심 두는 교회로 옮기는 등 나의 신앙관도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은 세상을 떠나신 홍동근 목사가 운영하는 교회로 자리를 옮겼다.
■1981년 북과 해외동포 헬싱키 대회
북과 해외 기독자들의 만남이 시작되는 역사적인 1980년 비엔나 대회에 이어 같은 취지의 역사적인 행사가 이듬해인 81년 헬싱키에서 개최되었는데 이 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일본의 최경태 선생이 주동이 되어 열렸던 통일심포쥼에 참가하면서 통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기 시작했다. 그 때가 되어서야 미국을 다시 보게되었고, 기독교를 다시보게 되었고, 그리고 북을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82년 시기도 내게는 통일운동과 관련하여 잊을 수 없는 해였다. 미국의 학자 6명(선우학원 박사, 김동수 박사, 최익환 박사, 김기항 박사, 고 송석중 박사, 그리고 본인-양은식 박사)이 평양을 방문하여 이북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한반도 문제를 토론하면서 당시 "과연 한.미.일 군사동맹은 우리 한반도에서 무슨 의미인가?"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6명의 학자들은 방북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우리들이 돌아가 방북기를 쓰자고 합의하고 그것들을 뉴코리아타임스를 비롯하여 지역언론에 투고하기로 약속했다. 그런 글들을 모아 한권의 책으로 출판한 것이 1984년의 『분단을 뛰어넘어』라는 책이다.
양 박사는 "이 책이 해외동포사회는 물론 남녘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다. 리영희 교수가 이 책이 한국 대학생들에게 지하출판물로 퍼져 나가고 있다고 전하는 가 하면 서승씨(지금은 일본에서 교수생활)는 미국에 왔을 때 자기가 감옥에서 그 책을 구해 읽고서 너무나 감격했다는 말을 전했다."고 말하면서 "바로 이런 것이 북한바로알기 운동이구나"라고 느꼈다는 것이다.
■북미주 이산가족 사업의 태동
카나다 미주지역에 거주하는 이산가족들의 상봉을 알선하는 사업이 시작된 것은 카나다의 뉴코리아타임스를 운영했던 고 전충림 선생이었다. 지금은 부인이 그 사업을 지속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내에 있는 동포들 중 이산가족들에게 상봉을 알선하는 사업은 없었기 때문에 고 홍동근 목사를 포함하여 부인 홍정자 여사, 전순태 선생 등이 이 사업을 시작하게 되어 여기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만들어 진 것이 조국통일협의회(통협)이다. 87년 6월 양은식, 선우학원, 고 홍동근, 전순태, 서정균, 김현환, 김동수등이 중심이 조직되었는데 양 박사는 이 단체의 회장을 맡으면서 뉴욕에서 "해외한민보"를 발행하던 서정균씨가 로스엔젤레스로 이주하여 통협에 가담하면서 기관지 겸 통일전문 잡지로 <조국>이라는 월간지를 발행하게 되었다. 통협은 이산가족찾기를 핵심사업으로 전개하여 이를 통해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북을 방문하게 되고 미주통일운동의 역량을 확보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그 후 90년대 초 미주에서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의 재미본부가 결성되었는데 양은식 박사가 이 단체의 상임의장을 맡아 미주통일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 단체는 남북 해외의 3자연대 기구로서 남녘에서 국가보안법 때문에 할 수 없는 역할들을 일본, 유럽, 미주지역 범민련 관계 단체 성원들이 남녘과 연계하고 북녘과 연계하여 역사적인 3자연대 통일운동의 선봉적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이러한 역사적인 운동의 미주동포 기수로서 양 은식 박사가 크게 한 몫 하여 왔다.
■통일운동 때문에 파탄된 가정
양은식 박사는 70평생에 가장 기뻤던 순간은 26년 만에 어머니를 상봉한 사건이라고 술회한다. 그런가 하면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되는 일은 지난 1984년의 이혼사건이었다. 희로애락을 같이하며 인내해 왔던 아내가 봉제공장을 운영하며 경제적 여유를 가졌으나 남편이 통일운동을 하는 바람에 겪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곁을 떠난 일이었다고 돌이키며 그 이유를 남한 정보부의 공작이 작용하였음을 시사해 준다. "언젠가는 사실이 밝혀지고 말 것입니다"라고만 말한다.
그러나 생애의 이러한 슬픔도 있었지만 이혼이후 5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기쁨도 찾아 왔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UCLA)에서 강의할 때 <한국 이민들 정착과정에서 겪는 정서의 변화>문제에 대해 조예가 깊은 한 전문가를 찾아 한 강의를 부탁할 때의 일이었다. 주변의 한 동료가 심리학을 전공하고 정신장애자들을 돕는 기관에 책임자로 있는 서정숙 박사를 추천하기에 그를 한 특강시간에 할애하기 위해 교섭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 강의를 부탁했는데 그 강의가 아주 훌륭하여 학생들이 대단히 환영하는 기회가 있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만나서 교제를 하다가 인연이 되어 재혼을 하게 된 것이 1989년이었다. 남편이 통일운동에 뛰어 든 것에 대해 거부반응이 없었고 그것을 이해하여 주는 것이 무엇보다 고마웠다고 고백한다.
주변사람들은 양 박사의 재혼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두 분의 관계가 너무나 아기자기 하기 때문이다. 부인 서 박사는 경기여고를 나와 미국에 와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지식인이기도 하지만 외할아버지가 이름난 한글 학자이고, 친할아버지는 한국의 유명한 대학의 총장이며 변호사였고 그의 아버지도 한국 법조계에서 이름난 변호사였기에 고생을 모르고 자라났지만 가난한 배경에서 성장해 왔고 일반 사람들로부터 빨갱이라고 손짓 받는 양 박사를 누구보다 아끼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의 호감을 사고 있다. 양 박사는 또 출가한 2남1녀(양태국, 양지동, 양진영)들이 새 어머니와 잘 지내는 것과 새 어버니 역시 아이들을 사랑해 주는데 대에 무척 고마워 한다고 말한다.
■통일운동 후진들에게 하고 싶은 말
양 박사는 그 동안 통일운동에 몸담아 왔지만 돌이켜 보면 아쉬움만 남는다고 고백하며 후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꺼낸다.
"우리는 지난 시기 운동을 좀 더 폭넓게 하지 못하고 편협한 점들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운동이 성공하려면 사람들을 얻어야 하는데 사람 사업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지금 상근자로 뛰고 있는 젊은이들이 소수에 불과합니다. 2~3명이 20~30명으로 늘어나야 네트워크도 생기고 동포사회 주류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 주류 사회에 영향력을 가지려면 미국서 교육받고 영어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는 전문 인력들이 필요합니다. 이런 인력들을 육성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재미동포들이 자주적 평화통일이 해외동포들에게도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일깨워 주는 작업들이 절실하다고 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외세를 극복하고 자주적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도록 통일운동에 참여하는 성원들이 신념을 생활화하도록 다같이 공동으로 노력하는 풍토를 조성하기를 바랍니다. 특히 청년 애국자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모든 단체 대표들이 이것에 치중하여 주었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양은식 박사의 연락처: (310)375-6244
[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 10/24/2004]
*관련 보도 사진과 7순잔치 광경을 보려면 여기를 짤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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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를 맞는 소감은 어떨까.

양은식 박사, 그는 지난 70년을 어떻게 살아 왔을까. 어떤 계기가 되어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학자로 일하던 그가 통일운동에 뛰어 들었을까. 평소 때 과묵하고 농담도 별로 하지 않고 웃음도 눈물도 별로 없는 진지한 성격이기에 그의 생애에 대해 말하는 주변 사람들이 거의 없다. 왜 그럴까.
"나라는 인간 재미없지요. 농담하고 웃고 하는 것을 할 줄 몰라요. 평생 울어 본적도 손꼽을 정도지요. 아마 기독교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교회 생활을 오래 동안 하다보니 거룩하고 진지하고 그런 게 좋은 줄만 알고 행동하다 보니깐 그렇게 굳어 버린 것 같아요. 사람을 사귀면서도 집안얘기 같은 거는 시시콜콜하다고 생각해서 안 하는 성격이라 내 자신이 나를 보아도 재미가 없는 사람처럼 느껴져요. 얘기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긴장감 주는 적도 많지요."
그는 자신을 객관화시켜 솔직하게 묘사한다. 8살 때 아버지를 잃고 26살 때 청산과부가 된 홀어머니 밑에서 여동생 둘과 자란 배경과 그리고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전쟁기간 중에 단신으로 이남에 넘어와 줄곧 혼자 살면서 파란만장한 생활을 한 것도 그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준 것도 시사한다. "대학 시절에는 친구들과 술 마시고 감정을 나누는 기회도 없었지요. 그 때는 그저 교회 생활하면서 하나님이 외로운 인생의 길잡이이고 나를 보호하는 존재라는 생각만 하고 살아 온 셈이지요."라고 말한다.
왜 단신으로 이남으로 왔을까. 그리고 홀 몸이 된 그의 청년시절은 어떠했으며 무엇 때문에 미국에 오게 되었는지 대화가 이어질수록 궁금하기만 했다.
■양 박사의 70년 발자취
그는 1934년 11월2일생으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8.15를 맞았기 때문에 일제 때 일본선생 밑에서 공부한 경험도 있었다. 어렸을 때 소설들을 읽으면서 영웅적인 존재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변화를 추구했던 성격이 어릴 때부터 있었다. 어머니는 부자 집에서 철없이 자라난 여성이었고 아버지는 평양에 있는 두루섬에서 농사를 짓기도 했고 한 때 동아일보 평양지국에서 사진기자로 활동한바 있었다. 그러나 8살에 아버지가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홀어머니는 장남인 나에게 대해 기대가 컸었다.
그러나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났다. 12살 때부터 사귄 친구, 강은홍의 가족들을 따라 50년 말께 대동강이 방어선이 된다고 소문이 퍼져 황주나 사리원으로 갔다가 며칠 후 집으로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어머니에게 의논하자 "강원도 고모 댁에 있다가 오면 된다. 장남이기에 아버지 대를 이어야 한다"라는 말이 어머니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주위의 사람들이 나이가 많지만 고등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고 조언하여 왕심리에 있었던 한영고등학교 야간 반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교감 선생에게 요청하여 1, 2학년을 월반하여 막 바로 3학년에 들어갔다. 그것도 2주 공부한 시기에 여름방학이 되었다. 개학해서 두어 달 공부하고 졸업했다. 그 후 대학을 진학해야 되겠는데 등록금이며 교재비 등을 조달할 능력이 전혀 없어 대학을 포기한 상태였는데 내가 나가던 교회 목사가 장로들에게 요청하여 등록금 지원을 하겠다고 언질을 주면서 숭실대학에 아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 대학에 지원하기를 권유하는 바람에 당시 영락교회 안에 사무실들을 얻어 운영하던 이 대학의 법학과에 들어가게 되었다. 내가 들어가던 해 숭실대학은 바로 1년 전인 1954년에 개교하였기 때문에 2회 입학생이 되었지만 등록금을 지속적으로 지불할 능력이 없어 중퇴하고 금호동에 있던 상이군인요양소에 머물면서 이곳에서 주는 급식을 얻어먹으며 생활하게 되었다. 그 때 얼마나 가난했던지 고무신(일본말로 지까다비)이 찢어져 새끼줄로 꽁꽁 매고 다니는 신세였다.
생활이 너무 어려워 군대복부 면제를 받았었는데도 생활 거처 수단으로 또다시 군대에 뛰어 들어가 1년 반의 군복무 생활을 마쳤다. 제대 후에는 가정교사, 미국 선교사들 우리 말 가르치는 일을 하며 대학에 다니다가 1960년에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다.
졸업 후에는 안동에 있는 한 선교사의 비서 일을 하며 1년 정도 생활비를 벌었고 이후에는 이 선교사가 운영하는 경주문화중고등학교 영어교사로 3년 간 근무한 적이 있었다. 이 때에도 "내가 시골서 선생노릇이나 하다가 죽는단 말인가?"라고 중얼거리며 회의를 갖기 시작하다가 무조건 서울로 올라갔다. 당시 가난한 집안의 한 딸과 결혼을 하게된다. 그리고 고아원에서 편지 번역 일들(고아원 아이들 편지를 영어로 번역하고, 미국 양부모들의 영어편지를 우리 말로 번역)을 돕기 시작하였다. 이것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뭔가 현실을 뛰어 넘고 싶었던 것이 그 때의 심정이었다고 회고한다.
■1966년 미국으로 유학

그 후 꿈은 한국으로 돌아가 학계에 몸담고 싶은 것이었다. 과거의 비참했던 생활에서 벗어나 안정된 생활을 하고픈 것이 그 당시의 바램이었다. 숭실대를 비롯하여 몇 개 대학에 이력서를 보냈으나 아무데서도 대답이 없었다. 주위에서는 직접 들어가서 부딪치든지 아니면 밀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으나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1973년부터 2년 동안 아리죠나 피닉스에 있는 한 대학에서 비행기 타고 출퇴근하며 두 과목을 강의했다. 거리 관계상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롱비치 캠퍼스에서 아시아 학을 강의하게 되었는데 그러던 중 1975년 경 아리조나 대학의 한 동료교수가 동독의 이북 대사관을 통하여 어머니를 찾아보면 어떻겠느냐고 건의해 주어 주소를 받아서 그곳에 10여장 넘는 편지를 써서 어머니와 헤어지게 된 사연들을 적은 서신을 발송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면 통곡하며 사죄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러던 중 1976년 초 뜻밖의 답신이 날라 들었다. "선생 어머니를 찾았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너무나 커다란 충격이라 가슴은 폭풍에 밀려오는 파도처럼 크게 뛰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어 어머니와 두 여동생이 함께 찍은 사진까지 보내 왔다. 꿈이냐 생시냐 하며 눈물로 쓴 어머니의 편지가 왔다. 어머니를 만나야 한다는 벅찬 기쁨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반공으로 세뇌된 교육 때문에 두려움도 앞섰다. 내처는 이북에 갔다가 돌아올 수 있는가를 걱정하면서도 "어머님을 만나러 가야지요"라고 위로해 주기도 했다. 그 때 나는 대학원 도서관 5층에서 <김일성 전집>을 발견하고 그것을 보려는 순간 주변에 누가 볼까봐 두리번거리며 가슴 조인 채 열람할 정도로 지식인들 마저 반공교육으로 심리적 불안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막상 평양을 간다고 마음을 먹었다가도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 만큼 내 자신이 나약함을 드러내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동독의 이북 대사관에 또 다시 편지를 썼다. "어머니 여비일체와 이북 당국에 감사편지를 쓸 터이니 유럽의 한 중립국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해 주기 바란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두어 달 후 대사관으로부터 답장을 받았다. "이번 여름에 비엔나로 오면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이 편지를 읽고 너무나 기뻐 벅찬 가슴을 가눌 길이 없었다. 가슴은 두군 거리기만 하였다.
드디어 1976년 7월 하순이 다가왔다. 비엔나로 날라 갔다. 대사관의 한 참사를 만나 어머니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가 고령이어서 비엔나에 나오지 못한 사연을 설명한 한 참사는 조국에서 어머니를 만날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하며 원하면 수속을 밟아 주겠다" 말해 미국의 아내에게 전화로 상의했다. 나도 그 때 두려운 생각이 들었고 혹시나 속는 게 아닌가 라고 생각하였는데 내 아내는 대범하게도 이북에 가서 어머니를 만나라고 하는 것이었다.
■북녘 어머니와 26년 만에 극적 상봉

평양에서 2주 동안 체류했던 나는 어릴 때 자주 가던 모란봉, 을밀대 등을 방문하기도 했다. 한 주정도 지나자 판문점에서 포푸라 나무사건(일명 도끼 사건)이 터졌다. 전쟁분위기가 감도는 것 같았다. 여기 저기서 군사 훈련하는 장면들을 볼 수 있었다.
일주일이 하루처럼 흘러갔다. 돌고 돌아서 온 것이 다시 비엔나였다. 미국으로 오는 비행기 일정이 여유가 있어 <비엔나 나이트>라는 관광단에 끼여 외국인들 2백여명과 함께 시내 관광을 하며 포도주 공장에도 방문하며 유럽인들과 이런 저런 대화들을 나누게 되었다. 동서냉전 분위기에서도 유럽사람들은 남북 간에 존재하는 긴장분위기와는 너무 달랐다. 이념이 다른 나라들끼리도 서로 왕래하면서 화해하며 지내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우린 왜 이러고 있느냐?"라고 내 자신에게 묻게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으며 인생의 목표가 잘사는 길만 생각하지 않았는가를 스스로 묻는 계기가 되었다. 내 자신은 또 기독교 문화 속에서 지내 왔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도대체 무엇인가?"도 묻게 되었다.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가며 내 양심과 내 의식의 문을 두들겨 주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통일운동에 발을 딛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학계에서 통일운동으로 전환

따지고 보면 교육계에서 20여 년 종사하였지만 북녘의 어머니를 만나던 순간부터 나의 마음은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가 하루속히 통일된 나라가 되어 북도 남도 평화스럽게 살 수 있을까하는 생각들이 나의 마음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군사독재가 종말을 고했지만 연이어 전두환 군부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수많은 시민들이 피를 흘린 80년 5월 민중항쟁이 터지자 나약한 학자의 한사람이었지만 그냥 일상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뭔가를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그 당시 <백범일지>를 읽으면서 나의 결심은 시간이 갈수록 굳어지고 있었다. 백범이 남북연석회의를 통해 통일의 길을 결심하였듯이 나의 결심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되돌아본다.
그 동안 이민사회에 봉사했던 일들은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합창단 서울 코랄을 후원하는 일을 포함하여 교회 장로로서 봉사하며 주일학교에서 성경을 지도하는 일, 한국학연구회에서 이민사에 관련한 학술활동, 재미동포 축구협회를 지원하는 사업 등으로 봉사하기도 하였지만 80년 5월 민중항쟁 시기이후부터는 나의 관심은 민족문제에 쏠리고 있었다.
교회 생활도 기복적인 신앙세계를 극복하고 사회구원, 민족구원에 관심 두는 교회로 옮기는 등 나의 신앙관도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은 세상을 떠나신 홍동근 목사가 운영하는 교회로 자리를 옮겼다.
■1981년 북과 해외동포 헬싱키 대회
북과 해외 기독자들의 만남이 시작되는 역사적인 1980년 비엔나 대회에 이어 같은 취지의 역사적인 행사가 이듬해인 81년 헬싱키에서 개최되었는데 이 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일본의 최경태 선생이 주동이 되어 열렸던 통일심포쥼에 참가하면서 통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기 시작했다. 그 때가 되어서야 미국을 다시 보게되었고, 기독교를 다시보게 되었고, 그리고 북을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6명의 학자들은 방북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우리들이 돌아가 방북기를 쓰자고 합의하고 그것들을 뉴코리아타임스를 비롯하여 지역언론에 투고하기로 약속했다. 그런 글들을 모아 한권의 책으로 출판한 것이 1984년의 『분단을 뛰어넘어』라는 책이다.
양 박사는 "이 책이 해외동포사회는 물론 남녘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다. 리영희 교수가 이 책이 한국 대학생들에게 지하출판물로 퍼져 나가고 있다고 전하는 가 하면 서승씨(지금은 일본에서 교수생활)는 미국에 왔을 때 자기가 감옥에서 그 책을 구해 읽고서 너무나 감격했다는 말을 전했다."고 말하면서 "바로 이런 것이 북한바로알기 운동이구나"라고 느꼈다는 것이다.
■북미주 이산가족 사업의 태동
카나다 미주지역에 거주하는 이산가족들의 상봉을 알선하는 사업이 시작된 것은 카나다의 뉴코리아타임스를 운영했던 고 전충림 선생이었다. 지금은 부인이 그 사업을 지속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내에 있는 동포들 중 이산가족들에게 상봉을 알선하는 사업은 없었기 때문에 고 홍동근 목사를 포함하여 부인 홍정자 여사, 전순태 선생 등이 이 사업을 시작하게 되어 여기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만들어 진 것이 조국통일협의회(통협)이다. 87년 6월 양은식, 선우학원, 고 홍동근, 전순태, 서정균, 김현환, 김동수등이 중심이 조직되었는데 양 박사는 이 단체의 회장을 맡으면서 뉴욕에서 "해외한민보"를 발행하던 서정균씨가 로스엔젤레스로 이주하여 통협에 가담하면서 기관지 겸 통일전문 잡지로 <조국>이라는 월간지를 발행하게 되었다. 통협은 이산가족찾기를 핵심사업으로 전개하여 이를 통해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북을 방문하게 되고 미주통일운동의 역량을 확보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그 후 90년대 초 미주에서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의 재미본부가 결성되었는데 양은식 박사가 이 단체의 상임의장을 맡아 미주통일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 단체는 남북 해외의 3자연대 기구로서 남녘에서 국가보안법 때문에 할 수 없는 역할들을 일본, 유럽, 미주지역 범민련 관계 단체 성원들이 남녘과 연계하고 북녘과 연계하여 역사적인 3자연대 통일운동의 선봉적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이러한 역사적인 운동의 미주동포 기수로서 양 은식 박사가 크게 한 몫 하여 왔다.
■통일운동 때문에 파탄된 가정

그러나 생애의 이러한 슬픔도 있었지만 이혼이후 5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기쁨도 찾아 왔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UCLA)에서 강의할 때 <한국 이민들 정착과정에서 겪는 정서의 변화>문제에 대해 조예가 깊은 한 전문가를 찾아 한 강의를 부탁할 때의 일이었다. 주변의 한 동료가 심리학을 전공하고 정신장애자들을 돕는 기관에 책임자로 있는 서정숙 박사를 추천하기에 그를 한 특강시간에 할애하기 위해 교섭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 강의를 부탁했는데 그 강의가 아주 훌륭하여 학생들이 대단히 환영하는 기회가 있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만나서 교제를 하다가 인연이 되어 재혼을 하게 된 것이 1989년이었다. 남편이 통일운동에 뛰어 든 것에 대해 거부반응이 없었고 그것을 이해하여 주는 것이 무엇보다 고마웠다고 고백한다.
주변사람들은 양 박사의 재혼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두 분의 관계가 너무나 아기자기 하기 때문이다. 부인 서 박사는 경기여고를 나와 미국에 와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지식인이기도 하지만 외할아버지가 이름난 한글 학자이고, 친할아버지는 한국의 유명한 대학의 총장이며 변호사였고 그의 아버지도 한국 법조계에서 이름난 변호사였기에 고생을 모르고 자라났지만 가난한 배경에서 성장해 왔고 일반 사람들로부터 빨갱이라고 손짓 받는 양 박사를 누구보다 아끼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의 호감을 사고 있다. 양 박사는 또 출가한 2남1녀(양태국, 양지동, 양진영)들이 새 어머니와 잘 지내는 것과 새 어버니 역시 아이들을 사랑해 주는데 대에 무척 고마워 한다고 말한다.
■통일운동 후진들에게 하고 싶은 말

"우리는 지난 시기 운동을 좀 더 폭넓게 하지 못하고 편협한 점들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운동이 성공하려면 사람들을 얻어야 하는데 사람 사업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지금 상근자로 뛰고 있는 젊은이들이 소수에 불과합니다. 2~3명이 20~30명으로 늘어나야 네트워크도 생기고 동포사회 주류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 주류 사회에 영향력을 가지려면 미국서 교육받고 영어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는 전문 인력들이 필요합니다. 이런 인력들을 육성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재미동포들이 자주적 평화통일이 해외동포들에게도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일깨워 주는 작업들이 절실하다고 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외세를 극복하고 자주적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도록 통일운동에 참여하는 성원들이 신념을 생활화하도록 다같이 공동으로 노력하는 풍토를 조성하기를 바랍니다. 특히 청년 애국자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모든 단체 대표들이 이것에 치중하여 주었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양은식 박사의 연락처: (310)375-6244
[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 10/24/2004]
*관련 보도 사진과 7순잔치 광경을 보려면 여기를 짤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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