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43주기 추모식-박정희 정권때 사형당해 > 기타

본문 바로가기
영문뉴스 보기
2024년 5월 22일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사이트 내 전체검색
뉴스  
기타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43주기 추모식-박정희 정권때 사형당해

페이지 정보

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4-12-19 23:04 조회1,267회 댓글0건

본문

[현장]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을 추모하는 노 투사들의 결의

"죄 없는 민족일보를 용공신문으로 날조한 무도한 그들로부터 무참히 법살 당한 조용수 열사님! 그 나이 서른 한 살, 아까운 나이가 더욱 애통합니다. 겨레 위한 고귀한 웅지가 채 피기도 전에 꺾이고 말았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어언 43주년, 해를 거듭할수록 쌓인 조국통일의 기운이 이제 보안법 폐지를 내 걸고 싸우고 있습니다."

b_jys01IMG_0634.JPG19일 오후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43주기 추도식"이 열린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에 있는 조용수 묘소 앞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 투사들은 43년 전 박정희 쿠데타 세력에 의해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이 사형 당했던 그날의 분노와 슬픔을 되새기며, 고인의 뜻을 기렸다.

추도식 참가자들은 고인의 삶을 이어받아 국가보안법 폐지에 힘쓰고, 민족일보 사건 진상규명에 더욱 박차를 가하자고 결의했다.


일본에서 추도식 참가를 위해 온 "민족일보연대포럼"의 윤정순 씨와 박노선씨 등 재일교포와 일본인 야마모또 주오쇼씨도 진상규명을 촉구하였다.

참석자들은 대표해 추도사를 맡은 김병태 전 중앙대 교수는 "지금 국회 앞에선 600여명의 민중대표가 무기한 단식농성으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내걸고 쿠데타 세력과 맞서고 있다"며 고인의 넋을 위로했다.

"일찍이 열사 님의 뿌려놓으신 통일운동의 씨알들이 자라 새 역사를 창조해 가는 과정일 것이니 지켜보시고 거두어 주소서. 지금 우리들은 2005년을 조국통일의 원년으로 열어갈 것을 맹세하고 온 힘을 모아가고 있습니다. 동지들의 활동을 계속 지켜보시면서 부디 편안히 잠드소서."

b_jys03IMG_0629.JPG 전무배 씨(전 민족일보 기자)는 지난 11월 25일 증보 발행한 "조용수 평전"인 <조용수와 민족일보>를 묘소에 헌정하며 반드시 진상규명을 이뤄내 고인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도록 열과 성을 다하자고 다짐했다.

이어 김자동 위원장(전 민족일보 기자)은 "반민족 반민주 군사정권에 의해 조용수 사장이 처형당한 지 어느덧 43년이 흘렀고, 젊었던 우리가 이제 다 백발이 되었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나라의 자주통일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노동자와 농민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언론을 창설해 이끌던 분이 서른 한 살의 꽃다운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그 뜻이 살아 민주주의가 승리할 날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쿠데타 세력이 아무리 발악해도 국가보안법 폐지를 막지 못할 것이고, 통일도 막지 못할 것입니다."

한편 이날 상주인 조용준 씨(조용수 사장의 친동생)는 "바쁘신 가운데도 많은 분들이 참석해 주셔서 감사드린다"며 "현재 과거사 진상규명법이 국회에 상정돼 있는데, 앞으로 진상규명을 위해 더욱 힘을 쏟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민족일보사건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김자동)가 마련한 이날 추도식엔 김정태 씨(전 민족일보 논설위원)와 전창일 통일연대 고문(1961년 당시 민자통 활동)을 비롯해 1960년대 혁신계 인사 등 60여명이 참여했다.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b_jyssj.jpg 조용수는 1930년 경남 밀양의 명망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연희전문을 다니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그 이듬해인 1951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에 편입해 공부하였으며, 민단 기관지인 민주신문사와 국제타임스 등에서 일하기도 했다.

1956년에 진보당 사건으로 조봉암이 사형선고를 받자, 민단 내 일부 인사들이 조직한 "조봉암 구명위원회"에서 조직부 차장으로 활동했으며, 조국의 정치현실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50년 조국땅에서 4·19민중항쟁이 일어나자 곧 귀국해 집안 어른들이 많이 살던 경북 청송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선거과정에서 가장 기본적인 민주주의 요구마저 "공산당"으로 모는 현실에서 "올바른 혁신의 의미"를 국민에게 알리고자, 신문 창간을 결심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1961년 2월 13일 창간된 <민족일보>였다.

창간 직후부터 선풍적인 지지를 받은 <민족일보>는 장면 정권에 비판적인 글을 실어 탄압을 받았다.

5·16쿠데타로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의 열망을 짓밟은 박정희 세력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고 1961년 12월 21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31세로 생을 마감했다.

사형 집행 전 그가 남긴 유언은 이렇다.

"민족을 위해서 할 일을 못하고 가는 게 억울하다. 정규근(친구이며 민족일보 상무) 동지에게 돈을 꾸어다 신문 만드는 데 썼는데, 갚아주지 못하고 가게 돼 미안하다."

어언 43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조용수와 함께 형을 선고받았던 인사들은 대부분 사면돼 정부 요직에 기용되거나 훈장을 받기까지 했다. 하지만 조용수와 <민족일보>에 대해선 아직까지 복권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민우 기자

[출처:참말로 www.chammalo.com 2004.12.2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로그인

[부고]노길남 박사
노길남 박사 추모관
조선문학예술
조선중앙TV
추천홈페이지
우리민족끼리
자주시보
사람일보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한겨레
경향신문
재도이췰란드동포협력회
재카나다동포연합
오마이뉴스
재중조선인총련합회
재오스트랄리아동포전국연합회
통일부


Copyright (c)1999-2024 MinJok-TongShin / E-mail : minjoktongshin@outl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