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green>홍정자 여사 책, 평양서도 출판</font> > 기타

본문 바로가기
영문뉴스 보기
2025년 10월 7일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사이트 내 전체검색
뉴스  
기타

<font color=green>홍정자 여사 책, 평양서도 출판</font>

페이지 정보

작성자 minjok21@hotmai… 작성일05-01-12 00:00 조회1,567회 댓글0건

본문

홍정자 여사(고 홍동근 목사 부인)가 미국에서 출판한 책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가 이북의 평양출판사에서도 최근에 발행했다. 이 책은 인터넷 <우리민족끼리> 29일자에서 소개하며 20개 항목에 해당하는 차례의 글들을 모두 게재했다. 민족통신은 차례에 나온 글들을 하나씩 소개한다. 이번에는 이북의 교회에 관한 글을 싣는다.[민족통신 편집실]
......................................................................

평양 제2의 교회 《칠골교회》를 가다

hongjj-2.jpg[사진은 저자인 홍정자 여사]

비록 소수일망정 민족의 수난을 끝장내기 위해 이름도 빛도 없이 헌신분투해온 희생양들이 왜 아니 없으랴. 그들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정신과 피어린 투쟁은 민족의 이름으로 길이길이 빛날것이다.

갈라진 민족이 화해하고 통일의 문을 열기 위해 여기에 또한 《화평케 하는 자들》이 있었다. 1981년이래 약 10여년 계속되였던 《북과 해외동포그리스도교인간의 대화》는 거의 해마다 비엔나, 헬싱키, 프랑크프루트 등지의 제3국에서 개최되여왔다. 그리고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실은 《북의 주체사상신봉자들과 해외동포그리스도교인간의 대화》라고 해야 할것이다. 또한 일반적인 개념과는 달리 사회주의나라 북의 성원들이 맑스, 레닌신봉자들이 아니고 주체사상신봉자들임을 단호히 표명하여 대체로 교계지도자 혹은 학자들로 구성된 해외동포그리스도교인들로 하여금 잠시 당혹케 한바 있었다.



《주체사상》… 그것은 1930년 김일성주석께서 항일혁명투쟁시기 당시 사대주의자들과 교조주의자들을 반대하고 조선혁명의 주체적로선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진리로서 창시된 사상(1930년 6월 카륜에서 진행된 공청 및 반제청년동맹지도간부회의에서 선포)이며 그로부터 현재까지 계속 발전풍부화되여왔다. 그리고 북조선인민들에게 있어서 주체사상은 곧 그들의 세계관이고 가치관이며 인생관으로 되고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그들과 더불어 《화평케 하기를》 소원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야 할것이 무엇인가. 상대방에 대한 애정어린 관심과 상대방의 의식구조를 이루고있는 사상에 대한 옳바른 지식, 관대한 리해가 있어야 하는것이 순리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과연 그들이 믿는 주체사상은 우주만물의 리치와 진리를 어떻게 해명하고저 하는가. 주체사상은 먼저 이같이 문제를 제시한다. 인간은 자기의 환경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세계를 떠난 고독한 존재가 아니며 추상적인 존재도 아니다. 또 세계에는 사람만이 존재하는것도 아니다. 우주만물중에서의 인간의 본질적특성과 가치를 알아야 하고 인간의 활동의 대상인 세계를 알아야 하며 그 세계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지위와 역할을 알아야 한다라고. 그리고 이렇게 명료하게 답을 주고있다. 인간이야말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존재로서 세계에서 가장 귀중하고 힘있는 존재이다. 하므로 인간이 세계와 자기 운명의 주인이며 력사와 사회의 주체가 된다는것이다. 하기에 주체사상은 사람이 사회의 주인이며 사람이 모든것을 결정하며 모든것을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생각하고 사람을 위하여 기여하도록 해야 한다는것이다. 그러므로 세계와 사회의 주인인 사람의 자주성을 구속하는 온갖 사회적예속과 자연의 구속, 낡은 사상과 문화에 도전하여 투쟁하며 자연과 사회와 인간을 개조하여 자기 운명을 개척한다는것이다. 하기때문에 주체의 나라 북조선에서는 사상에서 주체, 정치에서 자주, 경제에서 자립, 국방에서 자위를 주장하며 고수하려 한다. 맑스주의가 물질과 경제중심의 유물론적세계관에서 다만 경제적하부구조로서의 인민대중의 근본리익을 대변했다면 주체사상은 세계의 주인인 사람을 중심에 놓고 세계를 대하는 관점과 립장을 새롭게 명시했다고 할것이다.

주체사상은 인간의 혁명가적풍모라 할 높은 도덕과 인격을 요구하고 강조한다. 주체사상에서 인간의 가치와 품격은 돈이나 지위에 있지 않으며 육체적생명을 위한 향락을 추구하는것은 조국과 민족, 사회앞에 아무런 유익이 없고 오직 근로민중의 리익과 혁명의 리익에 봉사하는 고상한 사상의식을 가질 때 인간은 더없이 숭고하고 고귀하다는것이다. 인류의 리상사회는 단지 낡은 생산관계를 페지하고 부르죠아계급을 소멸시킴으로써 오는것이 아니며 그 사회의 인간이 높은 도덕성과 인격을 갖춘 인간으로 개조되고 거듭날 때 비로소 그 새 인간들이 인류의 리상사회, 새 사회를 창조한다는것이다. 또한 개인의 한생은 끝이 있지만 그 사회와 집단은 영원히 존재하며 발전하므로 근로민중과 혁명의 리익을 자기자신의것으로 동일시하고 그 실현을 위한 투쟁에 자기 목숨도 바칠 때 개인의 육체적생명은 끝나도 그가 지닌 사회정치적생명은 사회정치적집단과더불어 영생하게 된다는것이다.

주체사상은 집단주의에 기초한 새로운 세계관이라 하겠다. 인간은 개인적존재인 동시에 집단적존재이며 개인과 집단은 운명공동체이며 개인적생명의 모체는 집단적생명에 있다는것, 하기에 인간은 집단의 사랑과 믿음속에서 집단을 위하여 헌신분투하는 생활속에서만이 고상한 정치적욕망을 충족시킬수 있으며 개인적생명은 집단적생명과 련결되고 결합되고 합치될 때 비로소 사회적존재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다는것이다.

주체사상은 교조가 아니라 창조적학설이며 결코 배타적이거나 페쇄된 리론체계가 아니라 개방된 리론체계라는것을 밝힌다. 그래서 주체사상은 종교를 포함한 각이한 사상조류들과 접촉하고 대화할것을 지향하며 그것을 통하여 인류공동의 진보적리념을 발전시키는데 함께 이바지하고저 한다.

한편 주체사상은 세계적인 관심을 모으고있으며 세계 여러 나라의 학자들이 주체사상을 연구보급하고있다. 그중 특별히 프랑스 빠리종합대학의 에드몽 쥬부, 일본의 이노우에 슈하찌, 인디아의 티. 비. 무케르지교수 등이 저명하다.

력사적인 《북과 해외동포그리스도교인간의 대화》의 장에서는 민족이 하나되고 통일대화의 가교를 잇기 위하여 매번 주체사상과 그리스도교사이의 공동적마당을 찾고 헤여져 반세기동안 있게 된 격차를 좁히며 화합의 물고를 트고저 열띤 토론과 발제가 있었고 때로는 몽매에도 그리던 리산가족이 상봉한듯 동족간의 뜨거운 정과 가슴벅찬 감동의 시간들로 물결쳤다.

북측의 대표가 《먼저 형제와 화목》하기를 원하여 이렇게 겸허하게 그리고 론리정연하게 주제발표를 했다.

《조국통일을 위한 애국사업에서 우리 주체사상신봉자들과 그리스도교인들사이에 타협하지 못할 모순이란 없다. 왜냐하면 우리 주체사상신봉자들과 현대 그리스도교인들사이에 신봉하는 철학사상과 교리에서 능히 화해하고 협력할수 있는 공통점이 있기때문이다.》 현대신학은 《지배에 대한 항거는 신에 대한 항거이므로 천벌을 받는다.》는 보수적인 전통종교의 교리를 배격하고 지배에 대한 항거, 현실참여에 의한 인간해방을 주장하고있다. 이와 같은 교리는 주체사상의 근본원리 즉 인간의 운명의 주인은 인간자신이다라는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하므로 이같은 철학적공통성에 의거하여 우리는 민족통일을 위한 투쟁에서 남과 해외그리스도교인들과 동행자로서 함께 손을 잡고 나갈수 있다고 굳게 믿고있다.

여기서 명시된 《현대신학》이란 모름지기 《해방신학》 또는 《민중신학》을 례하는지 모르겠다.

인구의 절대다수인 민중, 인류력사의 온갖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진보와 변혁의 창조자이며 사회발전의 주동적역할을 해온 동력이며 력사의 주인이라 할 민중이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언제나 착취계급, 착취사회로부터 멸시와 억압을 받고 소외되여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이여야 했다.

1960년대 남아메리카를 중심으로 탄생한 《해방신학》 그리고 1970년대 남《한》에서의 《민중신학》은 종교의 현실도피적개인화와 신비화를 반대하고 보다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력사의 한가운데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구원하고저 했다.

해방신학자 구티에레쯔는 말했다. 《하나님을 아는것은 정의를 행사하는것이며 정의를 떠나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없다.》 하기에 현대신학자들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주님께서는 약자를 위하여, 희생자를 위하여 정의의 검을 들라 하시지 않았던가. 인간이 세계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믿은 주체사상신봉자들에게 인간의 존엄과 주권을 찾기 위한 정의구현과 평등사상은 어렵지 않게 공감을 불러일으킨듯 싶다. 주체사상신봉자들과 그리스도교인간에 공감대를 찾을수 있는 진리의 마당은 그외에도 적지 않았다. 례하여 특별히 계급타파와 평등한 분배의 경우가 그렇다.

주체사상과 그리스도교는 《영생》의 신념에서 또한 만날수 있다. 주체사상은 인간을 육체적생명이상의 사회정치적생명을 가진 고귀한 존재로 본다. 즉 이웃과 집단의 리익을 위하여 헌신투쟁하며 자기 목숨도 바칠 때 영원한 사회적생명체와 함께 영생하게 된다는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그리스도교인들이야말로 주안에 영생하는 삶을 력설한다.

마치도 그리스도교인이 주체사상을 말하는듯 싶고 주체사상신봉자가 그리스도교리를 말하는듯 싶다. 저명한 신학자 칼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는 사회정의의 운동이였다.》, 《진정한 사회주의야말로 우리 시대의 참그리스도교이다.》라고 했으며 맑스주의철학자 가르다브키는 《그리스도교인과 맑스주의자가 인류의 장래를 위한 공동책임을 지는 새시대에 들어섰다.》고 했고 민중신학자 박형규목사는 《민족주의와 인도주의에서 남북민족은 못할 대화가 없다.》라고 했다.

약 10여년세월 해외에서 이같은 만남과 통일화합의 대화는 그리해서 상호리해와 신뢰감을 쌓아가도록 했고 적지 않은 열매를 이루었다고 할수 있다. 그중 특별히 공인되고 표면화된 사건들중 몇가지만 들기로 한다. 먼저 1993년 4월 최고인민회의에서 개정된 헌법에는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이 권리는 종교건물을 짓거나 종교행사를 거행하는것 등으로 보장된다. 누구든지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사회질서를 해치는데 리용할수 없다.》고 되여있다.

대화의 자리가 마련될 때마다 중요한 토론주제로서 종용한 결과 해외리산가족찾기사업이 마침내 문을 열게 되고 카나다의 《뉴코리아타임스》사(대표 전충림)와 아메리카의 《조국통일북미주협회》(리산가족찾기위원회 위원장 홍동근)가 창구가 되여 활발히 진행됨으로 수천의 리산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하고 북조선을 방문하여 극적인 가족상봉이 실현되였다.

WCC(세계교회협의회)대표단을 비롯해 미국, 카나다, 일본의 NCC(국제교회협의회)대표단이 북조선을 방문하도록 길을 열었다. 또한 온 세계가 관심하는 가운데 1992년 3월 31일 미국보수적그리스도교의 대표적지도자이며 세계적전도자인 빌리 그레함목사가 그의 아들 네드 그레함목사를 포함한 일행을 거느리고 북조선을 방문했다.

1950년대 열광적인 반공투사였던 빌리 그레함목사는 1961년대 자기 신학이 미숙했음을 고백한바 있다.

《교회에 대한 내 생각은 좁고 편협한것이였다. 지금 하나님의 가족에겐 여러가지 민족적, 문화적, 계급적, 교단적차이들이 있는것을 알게 되였다. 생각하면 나의 무지한 경건으로 해서 전에 불만을 표했던 집단들속에서 진리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가지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그앞에 나는 서기조차 부끄러울 때가 있다.》 그리고 그는 1970년대후반부터 선교의 새 지평을 사회주의세계에로 지향하면서 전투적반공에서부터 대화와 화해의 선교에로 전환했다. 하기에 그는 마침내 전도자이기에 앞서 《화해와 평화의 사절》로서 사회주의나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했다. 그는 평양 봉수교회 례배에 참석하여 설교하는 가운데 미국이 조선의 분단에 책임이 있는것을 자인하며 어서 조선의 분렬을 극복하고 평화적으로 통일할것을 기도한다고 했고 조선이 장차 다가올 《아시아시대》의 평화의 열쇠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또한 그는 김일성종합대학에서의 강연중 그리스도교인들은 이 세상을 하나님이 자기 목적을 따라 창조하시고 사람들을 이웃을 사랑하고 세상에 평화를 세우기 위한 사명을 받고있다, 그러므로 정의롭고 평화한 세상의 실현을 위해서는 이같은 도덕적힘을 믿는 사람들의 뉴대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김일성주석의 접견을 받고 오찬에 초대되였다. 그리고 그는 김일성주석께 준비한 선물 수정으로 만든 공예품 《날개치는 백학》과 성서 그리고 자신의 저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증정했다. 그는 귀국길에 홍콩에서 기자회견을 가지고 특별히 김일성주석의 인상에 대해서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주석을 매우 활기에 차고 매력적인 지도자로 보았다.》

(I found him to be a vigorous and magnetic Leader)



《나는 걸어서라도 갈테니까 림진강 헤염쳐서라도 갈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할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가는거지…》

이렇게 시를 적고 죽음도 혹은 10년의 옥고도 두려움없이 1989년 4월 전격적으로 북부조국을 방문한 통일의 사도 문익환목사, 또한 통일의 꽃 림수경과 젊은 화해의 종 문규현신부 이들의 순교자적 북조선방문은 북조선 온 나라에 화해와 참그리스도교 복음의 크나큰 충격과 파문을 일으켰다. 즉 이같은 그리스도교인들의 자기 희생적애국행위가 수만의 선교사를 파송한것 이상의 막강한 영향력과 감동을 북조선인민들에게 안겨준것이다. 하기에 이들은 다만 《제국주의침략의 앞잡이》이거나 《인민의 아편》정도로만 인식했던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새로운 관심과 의문을 갖게 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보다 옳바른 리해와 지식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였던것이다.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에 종교학과가 신설되였고 그들이 가장 적임자라고 지명한 홍동근목사(통일신학동지회 회장)를 최초의 유일한 교수로 임명 초빙했다.

김일성종합대학과 《평양신학원》의 교수로 초빙된 홍동근목사는 환상의 부름에 따라 소아시아로 향하려던 진로를 바꾸어 예기치 못했던 유럽대륙의 선교를 떠난 사도 바울이 된듯 진실로 큰 사명을 받게 된데 대하여 감동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미국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그는 1990년 11월부터 시작된 강의려행을 떠날 때마다 《마케도니아 선교려행》을 떠난다고 하며 매번 허리가 휘여지도록 다량의 그리스도교서적을 짊어지고 기쁘게 지구의 반바퀴를 돌아야 하는 장도에 오르군 했다. 주로 교수들을 상대로 하는 강의는 매해 봄, 가을 두 학기로 나누어 했으며 성서, 신학, 사회륜리, 교회사, 그리스도교선교, 그리스도교와 주체사상, 그리스도교와 민족통일 등으로서 그리스도교개론이 강의내용으로 되였다. 그리고 이같은 홍동근목사의 강의는 2001년 11월 11일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현지에서 쓰러져 순직할 때까지 11년간 계속되였다. 한편 홍동근목사의 이같은 애국과 선교의 길은 그리 순탄한것만은 아니였고 춥고 외롭기 그지없는 세월이였을 때 그의 죽마고우들이며 동료목사님들인 조동진목사님을 중심한 《에스라선교회》와 《미국장로교총회》의 재정적뒤받침과 김인식 등 여러 목사님들의 뜨거운 우애를 잊을수 없다.

오후에 모란봉에 올랐다. 꿈에 보던 모란봉에 다시 올랐다. 을밀대우에 서서 평양을 내려다보고 대동강을 바라본다. 눈물이 흘렀다. 님들은 가고 홀로 돌아와 옛터에 오르니 만감이 치밀었다. 다시 교회는 보이지 않고 찬송소리도 그쳤다. 강대상을 치고 땅에 발을 구르던 목사들도 없다. 신학교 언덕이 어디멘가. 숭실대학 강당도 불에 타고 없다.

보통강변의 아침이 밝았다. 수양버들숲사이를 거닐며 옛일을 그렸다. 그때 주일이면 교회마다 새벽종 치고 주일학교 어린이와 점잖게 차려입은 교인들의 무리로 평양성내는 붐비였다. 나도 아침에 서문밖 교회에 나가고 오후엔 동수형님과 상준형님따라 모란봉에 올랐었다. 지금 교회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으며 또 내가 갈 교회도 없다. 십자가도 사라지고 종소리도 그쳤다. 옛 성도의 눈물의 시편을 외인다.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였도다.》

고향나라에서 맞는 첫 주일이 무겁고 우울하다. 처음에 고향나라가 내게 기쁨과 슬픔을 함께 안겨주었다 했다. 고향나라의 새로운 력사에 대한 나의 기쁨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을 아프게 한 큰 슬픔이 있다.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떨어진 문풍지에 우는 가을바람같이 내 령혼이 남몰래 울었다. 일찌기 조국의 개화와 민족의 구원에 한시대의 선구자였던 교회가 지금 흔적조차 없어졌다. 일찌기 희고 붉은 석조건물의 례배당과 성당이 평양, 신의주, 원산의 하늘에 숲처럼 솟아있었다. 에레미아처럼 내가 페허우에 울었다. 고아처럼 외로왔다.

모란봉에 오르고 대동강을 바라보아도 장대재의 교회와 서문밖의 신학교를 기억하며 눈물이 났다. 거기서 내가 열아홉의 봄을 그리스도의 꿈을 꾸었다. 또 거기서 일찌기 그리스도교의 영웅들이 일제의 귀신들과 싸웠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쩌면 이렇게 깨끗이 심판의 매돌로 교회를 갈아치우셨는가? 나는 력사의 심판앞에 두려움과 떨림을 느꼈다.

1981년 가을 내 남편 홍동근목사는 월남 30여년만에 꿈에도 그리던 고향나라 북부조국을 방문하게 되였다. 그는 11일간 감동적인 북조선체류기간중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적군 했다. 그리고 돌아와 그것을 정리해낸것이 그의 북조선방문기 《미완의 귀향일기》(1988, 도서출판 한울)인것이다. 우의 글은 그가 단 하나의 십자가도 교회도 찾아볼수 없었던 고향땅을 밟았을 때 느껴야 했던 가슴 무너지는 슬픔과 허무감 그리고 외로움을 밤마다 눈물을 흘리며 일기장 갈피갈피에 적어내렸던 글발들이다. 그는 고향방문에서 돌아오자 보다 더 열렬히 오직 일념 민족화해와 통일을 부르짖고 대화의 자리가 있을 때마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북측의 일군들에게 북부조국에도 교회를 세울것을 력설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상대방의 반응은 대체로 이렇게 소극적이였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인민의 반감과 불신때문에 아직 공개적인 교회건축이 여의치 못하다.》 혹은 《필요하면 우리가 자주적으로 할것이다.》 그러나 홍동근목사는 인내를 가지고 일구월심 그들을 설득코저 했다.

그런데 참으로 북조선땅에 놀라운 《새 일》이 일어난것이다. 광복후 43년, 전쟁(6.25)후 35년 그리고 《북과 해외그리스도교인간의 대화》후 7년만인 1988년 가을이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인 평양 한복판에 뾰족탑 새 교회당이 기적처럼 우뚝 선것이다. 당시 때마침 9.9절행사(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기념일)에 초청된 우리일행은 고려호텔 별실 오찬에 초대되였다. 일행이라 함은 《북과 해외그리스도교인간의 대화》의 주역을 해온분들가운데 일부라 할 선우학원, 최익환, 양은식박사님들과 차상달옹 그리고 카나다의 《뉴코리아타임스》 전충림사장 내외분 그리고 홍동근목사 내외를 말한다. 식탁을 앞에 놓고 우리를 초청해준 조국의 대표되는분이 환영의 인사말을 하는 가운데 이같이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는것이였다. 《여러분께 특별히 기쁜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조국에 교회와 성당이 건축되였습니다.》 북조선땅에 교회가 섰다는 소식은 그 자리의 모두를 기쁨과 감동으로 흥분케 했다. 그래서 식사를 마치자마자 그 즉시 사실을 확인코저 현장으로 달렸다. 고기준목사의 안내를 받으며 우리는 먼저 《봉수교회》를 찾았다. 과연 새 교회는 평양시 만경대구역 봉수동언덕에 거짓말처럼 우뚝 솟아있었다. 그리고 그 언덕아래로 보통강 하류가 유유히 맴돌아 흐르고있어 주변의 풍치가 참으로 아름다왔다. 약 300명 수용의 교회는 붉은 석조건물이였고 교회옆에는 그리스도교련맹 회관이 아담한 2층 건물로 함께 지어져있었다. 교회 내부엔 아직 갖추어야 할 난방시설, 강단, 의자 등이 미비되였으나 우리는 뜨거운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손에 손을 잡고 이렇게 기도를 올렸다. 《이 집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게 하시며 우리 민족의 분단을 치유하고 그리스도교안에 하나로 화해통일케 하는 민족의 교회가 되게 하소서.》

우리는 그 걸음으로 동평양 선교구역에 세워진 《장충성당》을 찾았다. 약 200명 수용의 성당건물엔 갖가지 빛갈의 스테인드 글래스 창문이 아름다왔고 량쪽 벽에는 《14처》의 성화가 나란히 장식되여있었다. 또한 본당 출입문가까이에 하얀 카텐으로 드리워진 고해성사대가 이채로왔다. 성당 뜰 한편에는 카톨릭교교회협의회 회관이 있었고 모스크바류학을 했다는 한 젊은 화가가 본당 정면에 모시게 될 아름다운 성모상을 그리고있었다.

당시 북조선에는 약 800여명의 카톨릭교의 신자가 있었으나 그들의 목자가 될 신부님이 계시지 않았다. 본시 신교 아닌 카톨릭교가문 태생인 내 남편 홍동근목사는 잠시 옛 추억을 더듬어 깊은 감회에 잠기는듯 싶었다. 일찌기 30대에 신의주와 영유의 본당에서 섬기셨던 두분의 순교자… 그의 삼촌 홍건환신부님과 그의 형 홍도건신부님 그리고 인자하나 근엄하신 조부님께서 제사장이 되시여 여름밤이면 온 가족이 멍석을 깔고 둘러앉아 가슴을 치며 《내탓이요! 내탓이요!》 별빛아래 드리던 만과… 그같은 옛일들이 주마등처럼 흘러 지나가는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 북녘땅에 순교자들의 피우에 장미꽃처럼 피여나게 된 부활의 령앞에 오묘하신 하나님의 섭리앞에 다만 감사와 감동을 금치 못해했다. 그리고 다만 머지 않은 날 여기에 양떼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게 될 목자가 임재하시기를 간곡히 기도를 드렸다. 평양 봉수교회가 감격적인 헌당례배를 드린것은 1988년 11월 6일 주일이며 장충성당의 설립을 공포한것은 1988년 10월 2일이였다.

김일성주석이 자라던 친가 만경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칠골에는 외할아버지 강돈욱장로님이 설립한 그리스도교계 《창덕학교》가 있었고 그 학교에서 약 100m 올라가면 거기에 《하리》라는 곳에 교회당이 있었다. 그것은 1899년 설립된 약 300여명 교인들이 섬기던 《송산교회》였다. 교회에서는 때때로 어른들을 따라오는 아이들에게 사탕이나 공책같은것을 나누어주었는데 아이들은 그것을 받아보는 맛에 주일이면 떼를 지어 송산으로 밀려가군 했다. 그리고 어른들은 망국민으로서 삶에 지치고 갖가지 모양의 인생고에 시달리므로 위안을 찾고저 교회에 나가는것 같았다. 강반석어머님도 일이 정 고달픈 때면 례배당에 가군 했던것 같다. 어머님은 열두식구나 되는 큰 집안의 장손며느리로서 늘 바삐 지냈다. 남편의 뒤바라지에 시부모공대는 말할것 없거니와 집안팎을 거두고 설겆이, 빨래, 길쌈에 농사일까지 허리를 펼 사이가 없었다. 그런데 어쩌다 밥을 해도 어머니에겐 누룽지가 차례졌고 죽을 쑤면 제일 멀건것을 잡수군 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례배당에서 기도를 드리다가도 피곤에 못이겨 졸군 하셨다. 그러다가 목사가 뭐라고 한 후 모두가 《아멘》 하고 일어날 때야 잠에서 깨여났다. 《아멘》소리가 난 뒤에도 잠에 몰려 깨여나지 못하면 주석께서 슬그머니 흔들어서 어머니에게 기도가 끝났다는것을 알려드리군 했다.

그런데 혁명가 김형직아버지가 감옥에 들어가고 감옥에서 나와서는 앓고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이곳저곳 떠돌아다니셔야만 했을 때 그래서 어머님의 슬픔과 고통이 극심하실 땐 흐느껴우시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때이면 주석께서도 곁에서 함께 따라 울군 했다. 1923년 당시 혁명가의 가정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땅 팔도구에서 살고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이제 겨우 12살도 되지 않은 어린 아들을 불러앉히고 이렇게 심중한 표정으로 이제부터는 조선에 나가서 공부하는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지금 당장은 섭섭하고 허전하더라도 성주 (김일성주석의 청소년기의 이름)를 기어이 조선에 내보내야겠다고 거듭 말씀했다. 그리고 네가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따라다니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다, 이제 다시 조선에 나가면 그보다 더 큰 고생을 할수 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너를 조선에 내보내자고 결심했다, 조선에서 태여난 남아라면 마땅히 조선을 잘 알아야 한다, 네가 조선에 나가서 우리 나라가 왜 망했는가 하는것만 똑똑히 알아도 큰 소득이다, 고향에 나가서 우리 인민이 얼마나 비참하게 살고있는가 하는것을 체험해보아라, 그러면 네가 할바를 알게 될것이다라고 하시였다. 주석께서는 아버지뜻대로 조선에 나가 공부하겠다고 대답했다. 어머니는 천리길을 가야 할 아들의 앞길을 근심하면서도 아버지가 계획한 날자에 아들을 떠나보내려고 밤을 새우며 아들의 두루마기와 버선을 지었다. 떠나갈 날이 다 되자 아버지는 팔도구에서 만경대까지 천리길을 단신으로 혼자서 가게 될 아들에게 가는 길의 로정도를 상세히 그려주었다. 그리고 전보는 두번 치되 한번은 강계에서 또 한번은 평양에서 치라고 했다.

주석께서 팔도구를 떠나던 날은 음력 정월 그믐날이였다. 아침부터 눈보라가 일고 바람이 사납게 불었다. 막상 길을 떠나고보니 여러가지 근심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가야 할 천리중 500리이상이 무인지경이나 다름없는 험산준령이였다. 그 험한 산악들을 단신으로 넘는다는것이 헐치않았다. 후창에서부터 강계에 이르는 길 량옆의 수림들에서는 대낮에도 맹수들이 어슬렁거렸다. 소년은 천신만고 끝에 개천에 이르러 비로소 기차를 타고 만경대로 나왔다. 주석께서는 천리길을 걸으면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개천역앞 서선려관에 들었을 때이다. 주석께서는 려관에 들자 15전짜리 밥을 청했다. 려관밥도 등급이 있었는데 15전짜리가 가장 값싼것이였기때문이다. 그런데 주인이 50전짜리 밥을 주었다. 주석께서는 돈이 없어서 50전짜리는 못 먹겠다고 했으나 주인은 돈이 없어도 그냥 먹으라고 했다. 밤이 되자 려관에서는 손님들에게 포단과 모포 두장씩을 내주고 50전정도 받았다. 주석께서 수중로비를 계산해 보니 모포를 두장씩 덮고 호강할 형편이 못되였다. 그래서 주인에게 모포를 한장만 달라고 했다. 그러나 주인은 이번에도 다른 손님들이 다 포단을 깔고 모포를 두장씩 덮고 자는데 너 혼자만 어떻게 그렇게 하겠는가, 돈을 안 내도 되니 마음놓고 받으라고 했다. 주석께서는 천리길을 걸으면서 여러 모양의 인정스러운 사람들을 만나 덕을 보고 도움을 받으면서 비록 조선민족이 나라를 빼앗기고 망국노가 되여 어렵게 살지만 조상전래의 인정과 미풍량속을 고이 간직하고있으며 참으로 선량하고 도덕적인 민족이라는것을 깊이 깨닫게 되였다. 뿐아니라 가는 곳마다 주석께 인정을 베푼 사람들이 실은 반일독립투사 김형직아버지의 지도와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며 아버지에게 그처럼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친지들이 어디에 가나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주석께서는 집을 떠나 꼭 열나흘만인 1923년 3월 29일 해질무렵 마침내 고향집뜨락에 들어섰다. 아래방에서 물레질을 하던 할머니가 버선발로 마당에 뛰여나와 손자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구하고 왔니? 무얼 타고 왔니? 아버지, 어머니는 다 잘 있느냐? 할머니는 손자에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한꺼번에 많은것을 물었다. 방에서 멍석을 틀던 할아버지도 밖으로 나왔다. 할머니는 혼자서 걸어왔다는 손자의 대답이 잘 믿어지지 않아 아니, 네가 정말 혼자서 왔단 말이냐! 너의 아버지가 범보다 더한 사람이구나 하고 혀를 찼다. 그날은 온 집안이 모여앉아 소년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루밤을 새웠다. 주석께서는 만경대에서 며칠 머물러있다가 외할아버지 강돈욱장로님이 교감으로 계시는 창덕학교 5학년에 편입되여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입학을 하자 칠골외가에 있으면서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실은 외가댁엔 시련이 많아 얹혀살 형편이 아니였다. 독립투사이며 건강이 좋지 않은 강진석외삼촌이 옥고를 치르고있어 근심이 많은데다 살림이 어려워 타개죽이나 비지밥으로 그날그날을 연명하는 형편이였다. 그러나 외가에서는 주석에게 조금도 가난티를 내지 않고 학습에 열중할수 있도록 뒤받침을 잘해주었다. 주석을 위해 안채의 웃방을 따로 내주고 거기에 남포등을 달아주고 돗자리까지 깔아주었다. 그리고 동무들이 때없이 찾아들어도 탓하지 않았다. 주석께서는 희망대로 학비를 댈수 없어 숭실중학교를 중퇴한 강량욱선생이 담임한 학급에 편입되였다. 광복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과 공화국 부주석으로 일하게 된 강량욱선생은 주석께서 창덕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민족의식을 부단히 심어주고 애국적인 영향과 감화를 많이 주었다.

김성주소년은 창덕학교시절 2년여기간 비록 어린 나이였으나 애국애족의 투철한 민족의식의 싹을 키웠고 추억의 의미깊은 일화들을 적지 않게 남기고있다. 그리고 그는 이미 소년항일투사였던것이다. 할아버지가 가져다준 교과서중 《국어독본》이라고 쓴 책을 열어보니 그것은 조선말 아닌 일본어독본이였다. 분노를 금치 못한 주석께서는 그 즉시 손칼로 《나라 국》자를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다가 《날 일》자를 써넣었다. 그래서 순식간에 국어독본은 일어독본으로 감쪽같이 변했다. 소년은 만주에서 몇해동안 살았으므로 중국어를 곧잘 류창하게 할수 있었다. 그러나 주석의 중국어를 한번 들어보자는 그 누구의 간청이나 성화에도 좋은 제 나라 말이 있는데 무엇때문에 남의 나라 말을 하는가고 매번 그 요청을 단호히 거절했다. 단 한번 작은 외삼촌이 한턱 낸다기에 따라갔던 중국집에서 호떡 두그릇을 시키며 중국말실력을 보인 덕분에 주석에게 한번 왕서방의 선심으로 호떡과 함께 시키지도 않은 푸짐한 료리상을 무료로 대접받은 일외에는… 칠골이나 만경대에는 가난때문에 학교에 가고싶어도 못 가는 불쌍한 아이들이 많았다. 주석은 그런 아이들을 위하여 방학때 야학을 열고 글을 배워주었다. 처음엔 《조선어독본》을 가르치다가 학과목을 늘여 력사, 지리, 산수, 노래까지 가르쳐주었다. 주석이 창덕학교에 다닐 때 일본에서 간또대지진이 일어났다. 그런데 지진을 계기로 조선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는 당치않은 구실을 조작해가지고 무죄한 조선동포들을 수천명이나 학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것이 주석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다. 그후부터 자전거를 타고다니는 일본순사들에게 보복행위를 했다. 널판자에 못을 여러개 박아 길바닥에 파묻어놓으면 어떤 자전거든지 영낙없이 바퀴가 터지군 했다.

주석이 칠골에서 두해를 보내며 창덕학교 졸업을 몇달 앞둔 어느 날이였다. 외할아버지로부터 아버지가 또다시 일본경찰에 체포되였다는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주석은 분노와 적개심에 치를 떨었다. 온 가족들이 사색이 되여 주석의 얼굴만 지켜보았다. 주석께서는 원쑤를 갚기 위해 사생결단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다지며 떠날 차비를 했다. 모두는 졸업이라도 하고 떠나라고, 혹은 날씨라도 풀리거든 떠나라고 만류했다. 그러나 그분의 마음을 돌려세울수 없었다. 다음날 주석께서는 집안 어른들의 전송을 받으면서 고향을 떠났다. 그날은 할아버지, 할머니도 울고 삼촌도 울고 온 집안이 다 울었다. 주석을 바래다주려고 평양역까지 나왔던 작은외삼촌도 몹시 울었고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강윤범이도 슬피 울었다. 기차가 떠날 시간이 다되였을 때 강윤범이 밥꾸레미와 함께 봉투 한장을 건네주며 차칸에 올라가 뜯어보라고 했다. 그 봉투속에는 이같은 쪽지와 돈 3원이 들어있었다.

《성주, 너와 헤여지자니 눈물이 나서 못 견디겠구나. 이제 헤여지면 언제 다시 만나게 될가? 우리 서로 만리밖에 있어도 잊지 말고 창덕학교시절을 생각하자. 내 고향을 생각하고 내 나라를 생각하자.》

그때 형편에서 어린 나이에 돈 3원을 마련한다는것이 헐한 일이 아니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원쑤를 갚겠다고 막상 떠나기는 했으나 당시 주석에게는 로자가 문제였었다. 친구의 편지와 돈 3원… 그 순결하고 아름다운 우정은 소년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었을뿐아니라 크나큰 구원이기도 했다. 주석은 만경대를 떠나 열사흘째 되는 날 저녁에 포평에 도착했다. 그러나 나루터에 다달은 다음에도 선뜻 압록강을 건느지 못하고 강뚝에서 서성거렸다. 고향을 떠날 때 사립문밖까지 따라나오면서 손자의 손을 쓸어주고 옷깃을 여며주며 눈보라를 걱정해주며 눈물짓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삼삼해 발길을 옮길수가 없었다. 주석은 강뚝우에 나딩구는 조약돌 하나를 집어들고 손바닥에 감싸쥐였다. 조국의 표적이 될수 있고 조국을 추억할수 있게 하는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가지고 가서 소중히 간수하고싶었다. 주석은 설음과 비분을 안고 조국산천을 몇번이고 돌아보았다.

조선아, 조선아 나는 너를 떠난다. 너를 떨어져서는 한시도 살수 없는 몸이지만 너를 찾으려고 압록강을 건넌다. 압록강만 건너면 남의 나라 땅이다. 그러나 남의 나라 땅에 간들 내 너를 잊을소냐. 조선아 나를 기다려다오. 주석께서는 다시한번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그려보며 이렇게 비장한 맹세를 했다.

《조선이 독립하지 않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1989년 5월 어느 날이였다. 김일성주석께서는 불과 단시일내에 대로가 열리고 고층아빠트들이 숲을 이루며 거대하게 일떠선 평양 《광복거리》를 둘러보기 위해 일군들과 함께 현지지도를 나오시였다. 그런데 김일성주석께서는 그날따라 옛일을 회상하시며 만감에 젖으시는듯 했다. 김주석께서는 어린시절 어머니손목을 잡고 례배당에 가던 일이 생각난다고, 칠골 창덕학교뒤에 교회가 있었는데 만일 교인들이 요구하면 그 자리에 교회 하나 세워도 좋겠다라고 말씀하시는것이였다. 그러나 전쟁시기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인해 단 하나의 교회도 남겨지지 않은 상황에서 옛 교회의 터전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였다.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옛 교회가 자리했던 순천군 순천면 하리에 살아온 원주민 할머니들을 찾고 그들을 앞세워 교회의 옛터를 찾기 위한 사업에 나서도록 했다. 한편 그 지역에 교회당을 필요로 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이 얼마나 존재하는가 그 실태를 알아보도록 했다. 그래서 조사해본 결과에 의하면 만경대구역에는 2개의 가정례배처소가 있었는데 당시 거대한 광복거리가 들어서면서 타지역으로부터 적지 않은 교인들이 모여들었다는것이다. 원래 그 지역에는 《칠골가정례배처소》의 교인수만도 560명이였는데 그들이 주일이면 보란듯이 종소리, 찬송소리 울리는 아름다운 성전을 왜 아니 바라고 소원하지 않겠는가. 평양 제2의 교회인 칠골교회의 건설은 지체없이 결의되고 착공되였다. 약 5천m2의 부지를 국가에서 무상으로 제공했고 10만US$가량의 건축비는 그리스도교련맹에서 교인들의 헌금과 해외동포들의 지원과 함께 부담했다. 그리고 칠골교회 초대 담임목사인 류병철목사님을 위시해 온 교인들이 몸소 건설에 참여했다. 그래서 마침내 4년 앞서 창립된 봉수교회의 작은 집같은 교회, 평양시 만경대구역 칠골1동에 또 하나의 교회가 건립되였다. 새로이 건립된 칠골교회가 기쁨의 헌당례배를 올리게 된것은 1992년 11월 22일 오곡백과 무르익은 추수감사절이였다.

나는 북부조국을 방문할 때마다 주일이면 봉수교회와 칠골교회를 번갈아 례배에 참례하면서 때때로 마치도 《마가의 다락방》을 련상케 하는 아담한 교회 칠골제단을 찾군 했다. 칠골교회의 어느 주일 류병철목사님의 《기도》에 대한 소박한 설교를 옮겨본다.

그리스도교인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기도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는 나와 하나님의 대화이다. 모든 신앙생활은 기도에서 시작하고 기도로 끝나는것이다. 기도생활은 습성화되여야 한다. 편한 때나 불행할 때나 한결같이 기도생활에 힘써야 한다. 그런데 어떤이는 기도를 잘 안하는것 같다. 내가 집집이 일일이 찾아다니며 밤에 아침에 남의 집 창문 뚫고 들여다보지는 못하지만… (회중 웃음) 주일날 교회 들어오는 얼굴보면 안다. 그럼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앞에 모든것 아뢰고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모든것 하나님의 은혜와 보살핌에 의한것임을 감사해야 합니다. 사리사욕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리익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기도에 힘써야 하고 어려움을 어떻게 뚫고나가야 할지 아뢰면 응답받습니다. 한두번 기도에 응답없다고 락심해서는 안됩니다. 응답받지 못하면 기도가 잘못되였기때문입니다. 하나님뜻이 아닌 기도를 드렸기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붙잡히기 전에 어떤 기도를 했습니까?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거두어주소서. 그러나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인간적으로 목숨보다 더 귀한것 있겠는가. 생명 조금 연장하고싶다는 생각 왜 아니 없겠는가. 그러나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설교를 경청하며 주변을 둘러보니 칠골교회엔 어쩐지 녀성신도들이 절대다수일뿐아니라 녀성일군들의 활동과 참여가 눈에 뜨일 정도로 활발한것이 인상적이였다. 성가대 대부분이 녀성이며 성가대 지휘자도 녀성이였고 회중기도를 드린것도 녀성장로님이였다. 나는 이같은 칠골교회 녀성일군들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였다. 특별히 그들의 신앙적배경에 대하여 그래서 잠시 그들 녀성일군들과 담화시간을 갖도록 부탁했다. 모두들 자신들이 오늘날 교회의 역군이 되여 행복한 신앙인의 생활을 하게 된 경위와 가정적배경을 스스럼없이 들려주었다.

먼저 신정희녀성장로님(1935년생)의 경우… 그는 평북도 운산군에서 7살까지 사는 동안 상원교회유치원을 다녔고 안주로 이사간 후엔 연호소학교에 다니면서 신앙이 독실한 담임선생을 만났는데 그분께서 어린이성가대의 성원이 되도록 해주었고 또한 예쁜 목사사모님께 반하여 밥을 먹다가도, 공부를 하다가도 종소리만 울리면 무조건 교회로 달려가군 했다. 그리고 당시 어릴 때 배운 찬송가도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한 뒤에도 너무도 생생히 기억에 남아 전쟁시기 교회가 다 파괴되였어도 계속 혼자서 찬송을 부르군 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보니 남편은 신학교를 중퇴했고 시어머님께서 신학교출신이였다. 그 시어머니는 91년도 사망할 때까지 단 한번도 빠짐없이 식기도를 하시고 《믿는 사람이 본이 되여야 한다.》고 언제나 자손들에게 훈계하시군 했다. 교회가 서기 전에는 가정례배처소를 다녔는데 전쟁시기에도 혼자건 둘이건 모여서 신앙생활을 해왔다.

《예수 믿으면 잘산다.》는 말에 신자가 되기로 결심한 어머니 손목에 잡혀 6살때부터 교회에 나갔고 또한 그 교회 교인들에 이끌려 그리스도교 사립학교인 명성소학교를 졸업했는데 또다시 교인들에 이끌려 그리스도교학교 《루시고녀》를 다니다가 17살때 세례를 받고 평생 교인이 되였다는 안인선권사님(1930년생) 그는 광복후 사범대학 야간부를 졸업하고 교원이 되여 전재고아들을 데리고 어느 한 기간 중국을 다녀온바 있다.

칠골교회 성가대 대장이며 지휘를 맡고있는 가극배우 출신의 류정화(1931년생)녀성… 그의 부친은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았으나 외가쪽이 그리스도교가정이였다. 그래서 때때로 외할머니가 집에 오시면 사사건건 례배보고 기도함으로 그리스도교적분위기로 이끌어주셨는데 신의주남녀고 재학시 가장 가까운 친구의 어머니가 또한 교회녀전회 간부로서 적잖은 신앙적감화를 준것 같다. 《예수 믿어야 천당간다.》, 《좋은 일해야 한다.》는 그리스도교리가 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아 교회에 계속 나가고싶었으나 전시에는 폭격으로 인해 교회가 없었다. 그래서 집에서 혼자서 신앙생활을 해오다가 전후복구시기부터 가정교회에 나갔다. 그러면서 한편 가극 《피바다》, 《밀림아 이야기하라》, 《금강산의 노래》, 《온달과 공주》, 《콩쥐와 팥쥐》 등 다수의 가극에 출연하며 가극배우로서 빛나는 경력을 쌓기도 했다. 처음엔 봉수교회에 나가다가 집에서 가까운 칠골교회로 적을 옮겼다.

그중 년령이 낮은 함경북도출신 김장려집사님(1940년생) … 그는 1돐을 맞이할 때 외할머니가 유아세례를 받도록 했고 그 외할머니품에서 성경이야기를 옛말처럼, 찬송가를 자장가처럼 듣고 자랐다. 그러나 성장해가면서 학업과 직장에 그리고 가정생활에 쫓기는 세월엔 더러 신앙생활이 소원했는데 어린 자식들을 다 키워놓고보니 5~6년전에 돌아가신 할머니생각이 나면서 새삼 유아세례받은 교회를 찾아가보고싶어졌다. 그리고 다시 신앙생활에 관심이 돌아오고 열성이 높아져서 주변의 가정례배처소에 나가다가 봉수교회를 거쳐 칠골교회로 왔다.

그런데 그 누구보다도 십자가도 교회도 보이지 않았던 북조선땅의 령도자, 그러나 인민의 열화같은 흠모를 한몸에 받으시던 그분, 김일성주석의 종교에 대한 견해는 과연 어떠한것이였을가? 우리에겐 긴긴세월 다만 의문의 베일로 가려져있었다.

그런데 1981년 6월 어느 날에 있었던 다음과 같은 일화는 세인들에게 파격적인 화제를 던져주었다. 당시 재미동포 원로목사인 김성락목사가 북부조국을 방문했을 당시의 일이다.

김일성주석께서는 김성락목사를 환대하여 오찬에 초대하셨다. 그런데 김주석께서는 식사를 들기 전에 뜻밖에도 … 기도하십시오라고 하시며 상대방 그리스도교인에 대해 례우와 관용을 보여주시였던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김일성주석의 어록에서 나름대로 그분의 종교에 대한 견해를 일부나마 가늠해볼수 있었으면 한다.



《예수를 믿어도 미국의 하나님을 믿지 말고 조선의 하나님을 믿으라.》

《온 세상 사람들이 평화롭고 화목하게 살기를 바라는 기독교정신과 인간의 자주적인 삶을 주장하는 나의 사상은 모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104페지)



2002년현재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보고에 의하면 북부조국에는 전국적으로 1만여명의 그리스도교인들과 500여개의 가정례배처소가 존재한다.

......................................................................

차 례

  • 추천의 말
• 저자의 말

o 평양교예단을 찾아서

o 만해 한룡운의 자손들

o 고아없는 나라 그리고 처녀엄마들

o 북조선의 무용예술 그리고 최승희

o《지리산의 호랑이》리현상의 딸 리상진

o 바둑신동 최은아

o 안과의사 백형기

o 평양외국어대학을 찾아서

o 내가 《참가한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

o 《동지의 딸은 나의 딸》선원 문정섭의 이야기

o 《아오지》를 가다

o 북조선의 프리마돈나 《총련의 딸》 조청미

o 《직업에 귀천없다》신발수리공가족들의 이야기

o 《김일성상》계관시인 김시권

o 《사랑의 교사》들 이야기

o 오씨일가와 영화문학인 오혜영

o 용서하시라 안해여

o 평양 제2의 교회《칠골교회》를 가다

o 《로동자는 왕》정춘실이야기

o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

*책이 담고 있는 내용들 소개한 글 보려면 여기를 짤각하세요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로그인

[부고]노길남 박사
노길남 박사 추모관
조선문학예술
조선중앙TV
추천홈페이지
우리민족끼리
자주시보
사람일보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한겨레
경향신문
재도이췰란드동포협력회
재카나다동포연합
오마이뉴스
재중조선인총련합회
재오스트랄리아동포전국연합회
통일부


Copyright (c)1999-2025 MinJok-TongShin / E-mail : minjoktongshin@outl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