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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학원]통일과 기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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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5-04-01 17:37 조회4,4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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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학원 박사(해외민족민주운동 원로이며 은퇴학자)

한국 기독교인들의 통일에 대한 견해를 논하기 위해서 우선 한국 기독교인들의 현 동태에 대한 총체적 움직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동태가 어떠하며 그 동태가 한국문화적 배경에서 어떻게 시작된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문화와 역사적 지위가 개인의 행동뿐만 아니고 개인의 가치와 신앙제도까지 영향을 주며 그 제도는 교회와 분리할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IMAGE##>이 글의 자료는 대부분 (1)"기독교 사상" 잡지에 발표된 한국 신학자들의 논문, (2)필자가 과거 월북한 교역자 30명과의 대담자료, (3)필자의 반세기 이상의 교회생활의 경험을 종합한 것임을 밝혀둔다. 그 이 주제를 접근한 방법은 ㅅ미리 역사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종합적 자료를 검토한 결과 다음과 같은 몇 개의 가설들(Hypothesis)을 세워보았다.

-가설 1: 한국에 있는 기錢 교회지도자들은 대부분이 보수적이고 교파적이고 의식적이고 형식적이다. 신교의 대부분은 과거 백년간 그들의 신앙과 태도와 신학에 변함이 없다.

-가설 2: 교회가 자아 인식과 민족의식에 일정한 공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세계 교회의 흐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가설 3: 한국기독교 보수주의를 좌우하고 있는 세 가지 특수요소는 첫째로 일제시대에 가졌던 퇴보적 감정이 민족해방후에도 교회의 "무드"로 계속되고 있고. 둘째로 외세 때문에 토착화된 신학의 발전이 적고 변천하는 세계에서 교회를 인도 할만한 이념이 결여되어 있고, 셋째로 말세에 집중하는 보수주의 즉 근본주의는 교회의 사회참여를 환영하지 않는다.

-가설 4: 결과적으로 한국 기독교교회는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있고 현 단계에서 효과적으로 남북통일에 공헌할 수 없다.

1.

기독교는 정치적 부패, 견제적 무능, 사회적 불의로 망해 가는 이조 말엽에 새 희망과 호기심을 우리 민족에게 가져 왔다. 전통적 유교는 지성인들, 특히 실학파에게 도전을 받고 있었고 실학파는 "쩌스틴(Justin)의 말대로 쏘크라테스가 기독교를 위해서 준비했듯이 천주교를 위해서 준비했었다고 국민들은 불교, 도교, 유교에 모두 진저리를 느꼈다. 그들은 새복음과 새 아이디어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백성들은 기독교가 새 희망을 가져온 새 종교로 기개가 컸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백성들의 기대하는 희망을 충만케 하지 못했다. 기독교 역시 다른 종교들 모양으로 보수적 조직체제에서 탈피하지 못했었다. 기독교가 보수적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당시 한국사회는 적극적인 기독교를 맞아 드릴만한 준비가 없었다. 봉건적 이조사회는 유교적 사회였다. 유교사상 즉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조화 이념은 지배계급을 위해서 매우 편리했었다. 유교의 영향으로 한국사회는 지평선적 대화가 없었고 수직선적인 사회형성으로 남았었다. 기독교가 한국 땅에 왔을 때는 이와 같은 환경이었다.

둘째로 일본제국주의는 한국교회의 보수주의에 도움이 되었다. 한국 봉건사회는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으로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다. 오히려 현상유지에 도움이 되었을 뿐이다. 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도착했을 때는 일제가 한국을 침략하기 시작한 때였다. 선교사들은 그들의 선교목적을 위해서 일제정책에 순응했었다. 그들의 유일한 선교목적은 개인의 영혼구원이었고 한국사회를 구원하려는 의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셋째로 외국선교사들의 신념과 태도이다. 천주교 선교사로 시작하여 신교선교사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한국문화와 전통을 근본적으로 멸시했다. 그들은 교만했고 불법적이었다. 천주교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조상숭배를 반대했다. 한국교인들을 자기들의 외교에 이용물로 사용했다. 그들은 대원군의 정책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대원군의 부친 묘소를 파괴하는 비상식적인 행동까지 일삼았다. 천주교 선교사들의 교만하고 인종차별적 태도는 신교 선교사들 중에서도 있었다. 선교사들은 한국교인을 무시하는 한편 그들의 고등교육을 등한시했고 특히 교역자 양성에 있어서 신학교육을 무시했다. 선교사들은 19세기로부터 1920년대까지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근본주의 신학을 그대로 고수했고 자유사상을 죄악시했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보수주의 지배 밑에서 시작했고 성장했다.

II.

기독교가 한국인에게 새 복음을 가져왔으나 현대 한국인의 고민은 해결하지 못했다 . 감정적 안전제도는 행동의 세속화에서 오는 것이 현대인의 태도이다. 다만 이성적으로 조직된 사회라야 그런 안전제도를 가질 수 있다. 이성적 태도야말로 자아인식에서 시작될 수 있다. 이런 자아인식을 우리는 초대 한국교인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역사적으로 봐서 민족의식의 발전을 다음 몇 사건을 통해서 볼 수 있다. 105인 사건, 3.1애국운동, 신사참배반대운동 등에서 기독인의 자아인식과 민족의식을 찾아 보게된다. 105인 사건은 기독교 단체를 의심한 조선총독부의 음모 사건이었다 .3.1애국운동은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한 우리 역사 최초의 민족주의 운동이었다. 이런 자아인식과 민족의식이 명확히 발휘된 데 비해서 외국선교사들은 한국교인의 행동을 멸시했고 일본정부에게 아첨했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민족운동 참여를 비난했다. 신사참배반대운동이 평양기독교중학교 학생의 주동(이니셔티브)으로 시작되었다.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 운동의 후일 결과는 고사하고 그 운동 자체는 종교적인 동시에 민족이었다. 이 필자도 여기 시작부터 참여한 바 있다. 이런 역사적 자아인식과 민족의식의 운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는 보수적 종교로 남았다. 물론 소수의 자유사상가들의 역사적 행동은 있었다. 이상재, 최남선, 전영택, 송창근, 김재준 등의 선구자 역할은 기억해야 한다 또 신흥우를 중심한 적극 신앙단 등의 자유운동은 있었다.

III.

보수적 교회의 퇴보적 감정.
중국을 침략하려고 준비중에 있던 일제는 한국내의 질서와 통치를 위하여 신사참배를 이용해서 교회를 강제 통치하고자 했다. 일제의 야수적 식민지 정책은 한국인에게 불안전감과 열등감을 주었다. 특히 하류계층의 국민들에게 더 심했다. 그들은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사회적 압제의 이중 삼중의 착취를 당하고 있었다. 그럼으로 이런 압제를 면키 위해서 천국을 찾게 된 것은 당연한 태도였다. 현세를 잊어버리고 천국을 갈망하는 태도는 퇴보적 현상으로 나타났다. 그럼으로 교회생활이 부흥주의 중심으로 된 것도 자연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부흥주의는 이용호, 길선주 목사들을 중심으로 교회의 퇴보화의 상징으로 되어 벌였다. 이런 현상은 1030년대부터 해방후까지 계속됐다. 이와같은 부흥주의는 그 시대의 한국사회, 특히 교회에 속했던 개인의 동일성을 유지하게 했고, 그들 자신의 정신을 지키게 했다. 혁명운동이 사회 물란, 자연적 여러 재난 등으로 수난기에 발생되고 발전된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고난과 분쟁상태에서 집전적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행동이 일반적으로 퇴보 적 행동의 상징으로 나타나고 특히 퇴보적 감정으로 나타나게 된다.

한국교인은 일제 착취제도, 사회의 부정의, 국가제도 모순 등에 눈을 감고 개인의 영혼구원에만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들에게 사회적 연대책임이 없었다. 오늘의 고민을 구원키 위해서는 미래에 대한 소망뿐이었다. 이런 퇴보적 태도는 이기적 욕심으로 나타났다. 그 때문에 교회는 이런 이기적 목적을 달성키 위한 하나의 이용물로 된 것이다. 교회는 하나의 문화보세가공의 위치에서 떠나지를 못했다.

이런 태도는 보수주의의 중심이었던 평양에서 해방 후 반김일성 태도로 변하게 됐다. 즉 기독교 교회지도자들은 일제에 대했던 태도를 반공태도로 바꾸게 된 것이다.

1946년 11월3일(일요일)을 김일성 위원장은 선거일로 작정 선포했었다. 여기 반항한 교회지도자들은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발표했다.

1.성스러운 주일을 생명으로 하는 교회는 주일에는 예배이외에는 어떤 행사에도 참가하지 않는다.
2.정치와 종교는 이를 엄격히 구분한다.
3.교회당의 신성을 확보하는 것은 교회의 당연한 의무요 권리이다. 예배당은 예배 외에는 여하한 경우에도 이를 사용함을 금한다.

이와같은 절대적이고 비융통적인 교회의 태도는 당시 교회 지도자가 가졌던 신학이나 신앙을 봐서 짐작되는 것이 있다. 즉 기독교인들은 절대로 옳고 공산주의는 시종 여일 악이란 태도였다. 이북에서 교회와 국가 정부가 분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북의 기독교인들이 월남하여 반공을 그들의 신학으로 믿고 지금까지 반공일선에 선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것이다. 이런 기독교 신자의 태도는 감리교 교인인 이승만 대통령을 지지했고 이승만 대통령의 실각으로 기독교에 대한 신임문제가 커진 것이다. 이때 교회는 또 다시 산으로 들어가는 버릇과 새벽기도원이 환영받게 된 것이다.

IV.

외세 밑에서 자라난 교회는 토착화 신학을 발전시키지 못했고 변천되는 세계에 있어서 교회는 뚜렷한 이념을 가지지 못했다. 외국선교사의 신학을 그대로 전승하면서 토착적 신학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곳으로 한국은 아마도 특수선교 지역이라고 보아야 했다. 해방 전에 감리교 신학교의 정경옥 교수는 한국 신학계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조선신학의 보수진을 지키고 있는 분은 장로교신학교의 박형롱 박사와 감리교 신학교의 변홍규 박사일 것이다. 이 두분은 모두 신앙은 보수이요, 신학은 신진이라고 할만한 신학자료는 경남의 윤인구, 연전의 갈홍기, 이전의 김영의, 부산의 송창근, 간도의 김재준 등이 있다."고 했다.

해방후 신학계는 어떠했는가. 그야말로 황무지였다. 일제 밑에서 완전히 파괴당한 교회는 남북분열과 정치적 혼란으로 교회자체도 사회모양으로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그러던 차에 평양에서 월남한 보수파의 거두인 박형롱 박사는 1947년에 오래전부터 원수시하던 송창근, 김재준 두분의 조선신학교를 자유주의 사상 중심의 소굴로 낙착하여 장로회총회에서 무사히 통과케 했다. 결국 김재준 목사는 그의 자유사상의 죄로 장로교에서 제명처분까지 당했다. 그 뿐만 아니라 조선신학교 졸업생은 장로교 교역자의 자격을 손실케 되었다. 이때 김재준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제 장로교회 총회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한 셈이다. 조선신학대학은 죽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신다. 조선신학대학은 다시 살 것이다. 복음의 자유, 학문과 양심의 자유를 위해서 한국교회으 역사를 창조하기 위하여...한국(조선)신학대학은 무덤에 머룰 수은 없을 것이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한국신학대학은 부활했고 기독교장로회가 1953년에 탄생했다. 그러나 박형롱 박사의 보수적 신학은 1920년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추방당하여 미국 근본주의의 지반을 보수화 하는데 성공한 매첸(machen)교수의 신학을 그대로 계승했다. 그리고 박형룡 박사는 한국교계 뿐만 아니라 미국 장로교를 비판하는데 있어서도 권위적 발언으로 일관했다. 1967년에 미국연합장로교 총회가 새 신앙 고백을 작성 발표한 사실이 있었다. 이 신앙고백에 대해 박 박사가 평하기를 (1)기독교를 인조적 종교로 보았다. (2)기독교를 범 종교적 운동에 결합시키고 있다. (3)성경의 영감을 부인한다 등이었다.

박 박사는 물론 세계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적극 반대했다. 그의 말이 "...교회의 전통신앙을 존중하여 보수하려는 교회의 신도로서는 이 운동에 방심하고 따라 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럼으로 보수주의 신학자의 사명을 "전통신학을 그대로 받아서 전달하는데 있고 감히 무엇을 창작하려는 것이 아니다. 80년 전에 이 땅에 선교사들이 와서 전하여 준 그대로의 바른신학을 새 세대에게 전달하는 것이 나의 염원이다"고 했다. 이러한 신학자를 가진 보수 측에서는 한국적인 신학을 발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수주의에 대한 반항은 한국 땅에서 벌써부터 시작되었다. 1923년 월간지 <신 생명>의 탄생과 일본 도꾜 아오야마 신학대 출신인 전영택, 송창근, 김재준 등은 자유주의 운동에서 선구자의 역할을 했다. 그들의 도전이야말로 외국선교사들의 지위를 위협했던 것이다. 그 후 선교사들은 보수적 신학자들을 전적으로 지원했다. 또 1927년 YMCA 총무로 있던 신흥우 박사 중심으로 반선교사 운동이 시작됐다. 이 구룹에는 김활란, 유각경, 발희도, 박동환, 홍종숙, 홍병덕 등이 가담했다. 이들은 기독교의 한국적인 필요성을 강조했다. 1928년에 예루살렘에서 개최된 세계기독교대회에 참가하고 돌아온 후 신흥우 박사는 <적극적 신앙단>을 조직했다. 이들의 선언서에는 "우리는 자연과 역사와 예수와 경험 속에 계시되는 하나님을 G는다."라고 했다.

이런 운동이 시작되자 장로교총회와 감리교에서는 벌써 이단시했다. 결국은 이단죄로 그들은 교회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아직도 한국교회는 어느 교파를 막론하고 기독교 신앙을 토착화의 문화적 관점에서 표현하고자 할 때 비기독교적이라고 비난받게 된다. 그러나 세계적 교회사 학자인 케네트 스카트 로터레트(K. S. Lataurette)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세상에 사실상 순수한 복음이란 것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복음은 언제나 문화 가운데 그 자체를 화체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가 어디가나 다 토착화된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토착화 안될 리 없지 않은가. 기독교의 토착화, 세속화는 인간의 문화를 치하하는 것이라 하겠다.

사람이 신의 형상인 이상 사람이 하는 일, 사람의 창조물, 문화가 어찌 악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이 어찌 비 성서적이 될 것인가. 우리는 티 에스 엘리오트의 <빈 사람(The Hollow Man)>이나 까뮤의 <이상한 사람들>을 청산하고 싸울 벨로우의 <헐족>을 찾을 때가 왔지 않았는가 싶다.

한 젊은 신학자는 한국적 신학에 대해서 말하기를 "한국의 신학계라 할 때 신학에 관계하고 있는 한국신학자들이 한국이란 땅의 역사적 상황 하에서 자기가 고백하고 있는 그리스도 신앙을 어떻게 정당하게 표명하느냐함을 문제삼아야 한다. 한국 신학자들의 모든 움직임의 사실을 한국신학계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라고 했다.

한국의 새 현실과 새 역사과정의 형성과 더불어 한국적인 신학의 출현이 몹시 기대되고 있다.

V,

말세에 관심을 가진 보수주의는 교회의 뜻 있는 사회참여를 장려치 않고 있다. 이미 명백해 진 바와 같이 자아발견은 반드시 외적 세계를 발견케 된다. 인간의 내적 세계의 구조는 테제와 변증법적 관계를 가지게 된다. 그럼으로 자아인식의 성장은 제3자의 감정과 동시에 생겨진다고 할 수 있다.

개성의 개념은 보편성을 가지고 있고 그 개성의 현 축은 두 개의 기본조건이 요구된다. 첫째로 자신의 개별적 행동을 인정케 되고, 둘째로 개인의 능력을 사회의 한 회원으로 문화구조와 관련시킬 수 있다.

이러한 심리 사학적 과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기독교 지도자들은 현실을 무시하고 있다. 그들은 신약의 복음, 즉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무시하고 있다. 신학자 폴 틸리히에 의하면 신의 정신을 이해하고자 하면 사람의 정신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왜 그런가 하면 사람의 정신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어떤 한국교회 사학가는 한국교회 신학자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들은 한국의 종교문화 및 역사에 대한 지식 즉 한국학을 잘 모르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교회는 한국민족과 사회, 역사의 현실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한국교회의 운명은 한국민족과 같이 해야 한다. 또 한국신학은 한국 문화와 밀접한 유대를 가져햐 한다. 그렇다고 하면 기독교가 한국 내에 있는 비기독교 종교에 대해서 도전의 태도를 가질 수 없다. 기독교를 선교하기 위해서 과거에는 모든 것을 반대해야 하는데 집중해 왔다. 무엇이나 한국 것이면 나쁘고 수입품이면 좋다는 심리상태였다. 불교나 유교도, 그리고 공산주의도 모두가 다 비 기독교적이니 나쁘다는 식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이미 낡은 것으로 되어 버렸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기독교는 타종교와 싸우지 말고 그들과 만나서 대화하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대화를 통해 공통점을 발견해야 한다. 이 공통점이야말로 통일의 길이다.

과거 한국교회는 이 길을 찾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는가?
"일찍이 한국의 근대화와 항일반공 전선에 앞장서서 존경을 받었던 기독교는 이제 그 자신도, 세상도 특별한 기대를 가지지 않은 채 민심에서 점점 소외되어 가는 감이 있다"고 한 교역자는 고백했다. 왜 크리스천이 공산주의자와 대화를 걸지 못하는가? 왜 크리스천의 대부분이 남북통일에 대해서 소극적이고 비관적인가? 그 까닭은 이미 분명해 진 줄로 믿는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의 신학은 이기적이었고 자아중심이었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는 변질된 기독교로 나타났다. 반공이 기독교신학의 중심사상으로 되어 버렸다.

"장로교가 사분 오열로 분열된 것은 정말로 교회가 달라서 갈린 것이 아니라고 본다. 십중 팔구는 감정적이요, 이기적이다."라고 채필근 목사가 말한바 있다.

한국교회는 1백여 년의 이국적인 "메뉴"에만 입맛을 돋우어 오는데서 연유된 일종의 전신적 권태증을 면하지 못한 듯 싶다. 이런 태도는 현실과 호흡을 함께 할 수 없게 된다.

얼마 전에 영락교회 대학생회는 선언하기를 "사회정의구현의 도구로서의 교회를 살펴보라. 우리는 그 부패된 조직 속의 하나로서 서 있고 싶지 않다. 그럼으로 자진해산 한다."고 하기도 했다. 한경직 목사의 인도로 설립된 이 교회는 한국보수주의의 대표적인 존재이다. 젊은이들의 항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대표되는 엘리트들은 아직도 잠꼬대하고 있는 듯 싶다.

장로교신학교의 한철하 교수는 "우리 나라 통일에는 사실상 자유통일이냐 노예통일이냐의 두 길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자유통일이 가능한가? 국토통일에 앞서서 자유한국이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자유한국에 관심이 없는 자들은 한국 땅에서 어디로 물러가라고 외쳤다. 이런 통일안을 내세운 신학자는 보수 측만 아니라 자유사상을 옹호하는 김재준 목사도 비슷한 말을 했다.

"...우리의 긴장이 풀리는 대로 침략은 다시 시작 될 것이 확실하다. 그런 취지에서 반공이 강화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다가 뒤 늦게 김 목사는 태도를 변경하여 통일을 위해서는 공산주의자와 대화하여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1970년 12월에 서울에서 한국교회 대표와 미국교회 대표가 합석회의를 했다. 그곳에 참석한 한 분이 다음과 같이 보고한 것이 기억난다.

"그 당시 그 회의에서 미국 측 참가자들은 대개 이북의 무력남침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의견이었으나 한국 측 참석자들은 이런 낙관 논에 동의하지 않았다."라고.

이후 미국 연합장로교 총회에서 남북통일 지원을 토론하여 가결했을 때 그것을 반대하기 위해서 예장에서 20여명의 목사들이 참석하여 대성통곡하는 비극이 연출된바 있었다. 이처럼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민족통일을 방해하는 선두에 서 있었던 것이다.

한국신학자들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적어도 신자들이 자기 사는 사회주변에서 거짓없는 역사를 창조하고자 하는 것을 의심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회참여 없는 십자가의 경험은 있을 수 없다.

VI.

결과적으로 한국 기독교 교회는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있고 현재 남북통일에 큰 공헌을 할 수 없고, 설상 있다해도 효과를 거두기 힘들 것이다. 현재 한국민족이 당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남북통일 문제이다. ㄱ러나 기독ㄱ는 이 문제의 중요성을 무시하거나 부정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신학자는 말하기를, "교회의 통일이 우리의 최고 희망이 아닌 것처럼 남북통일의 이념이 가장 중요한 개념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이미 지적한 데로 한국 기독교인들의 대부분이 갖는 보편성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다행히도 소수의 지도자중에 통일문제에 대해서 신중히 고려하는 분들이 있다. 기독교의 희망은 이분들을 통하여서만 나타날 모양이다.

"한국 기독교는 조국통일을 위하여 기도만 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 교인들이 통일문제에 어떤 구체적인 행동이나 참여를 해야 하는 것인가?"라고 반문하면서 "중대한 민족의 과제 앞에서 오늘 한국교회는 어떻게 할 것인가? 같이 안고 딩굴 것인가? 끈내 외면하고 말것인가? 지금은 우리 신학자들이 신론, 기독론, 계시론, 성서론 등도 접어두자, 그것들은 남북통일 된 다음에 우리끼리 차분히 뜸을 들여가면서 이야기해도 될 것이다."라고 지적한 분이 있다. 이분이 바로 고 문익환 목사가 한 말을 한국신학대학 학장인 김정준 박사가 인용한바 있다.

한국신학계의 3거두라면 문익환, 김정준, 박형규 세분을 떠올릴 수 있다. 이들은 공개적으로 민족통일의 신중성을 외치면서 북의 공산주의자들과의 대화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1972년 7월4일에 남북공동성명서에 의하면 통일방법으로 자주적으로, 평화적으로, 민족대단결로 하자는 세 방법이 제시되었다. 한국기독교계에서 이 성명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문익환, 박형규 목사들의 지도 밑에서 민족통일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고, 기독교와 주체사상과의 대화를 주장하다가 감옥까지 가야 했던 박순경 교수와 같은 신학자들의 업적 때문에 적지 않은 효과를 거뒀다고 생각한다. 또한 홍근수 목사의 인도 밑에서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이 활발히 뛰고 있는 것이 퍽 다행이다. 이들이 기독교의 면목을 지켜 온 셈이다.

그러나 한국기독교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민족통일 운동에 가담하여 <이웃 사랑>의 정신을 실천해야 할 때라고 역설하고 싶다. <이웃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지 않는 교회는 존재의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교회는 그 존재의 목적을 잃게 된다. 교회 존재 목적은 사회에서 소외된 백성들에게 안위를 주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도움을 주기 위함이다. 그런 실천이 없이는 교회 존재가 필요치 않다는 말이다. 교회의 장래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한국교회도 통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한국교회가 존재하는 중요한 의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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