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남본 신창균 명예의장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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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5-03-05 13:49 조회1,76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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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 신창균 선생이 오늘(5일) 저녁 9시 9분 과천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98세.
고인은 오늘까지 미음을 드시고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환한 표정으로 평온하게 숨을 거뒀다. 빈소는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으로 정하기로 했으며, 고인의 자택은 경기도 과천시 결량동 주공 아파트 403동 401호이다.
<##IMAGE##>홍원식 백범정신실천겨레연합 사무처장은 "한 시대의 통일의 산 역사가 6.15공동선언 상황 속에서 통일의 희망을 안고 소천하셨다"고 애통해 했다.
신창균 선생은 1946년, 백범 김구 선생이 당수로 있던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 독립운동을 펼치고 1949년 남북지도자연석회의 당시 김구 선생과 함께 김일성 주석과의 단독회담을 진행하는 등 조국의 통일을 위해 오직 한길만을 걸어온 노 애국자다.
故 신창균 선생 약력
<약력>
1908년 충북 영동 生
1919년 12세의 나이로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일제경찰에 체포
1922년 대전제일보통학교 3학년 재학중 항일 동맹휴학을 주동해
무기정학
1927년 충북사범학교(청주 소재)로 진학
이후 10년간 청주, 음성, 음성 등지에서 교편
1940년 33세의 나이로 중국으로 망명
이후 중경임시정부 마카오 연락책으로 독립운동
1945년 귀국
1946년 한국독립당(당수 김구) 중앙집행위원, 연락부장, 재정부장,
재정위원장, 상무위원 (∼1950)
1948년 4월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 위한 남북협상 한국독립당
8인 대표(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김구, 조소앙,
조완구, 엄항섭, 신창균, 김의한, 조일문, 최석봉)의
일원으로 방북 (1948. 4. 18, 평양)
평양 체류 중 김일성 북조선인민위원장(당시)과 단독회담
KNCC 재건위원, 실행위원 역임 (∼1956)
1949년 백범 김구 주석 국민장 장례 실무 총책임자
1957년 진보당 재정위원장
1958년 진보당 사건으로 옥고
1961년 통일사회당 총무 및 정책심리의장
5·16 군사쿠데타 세력에 의해 혁신계 인사로 분류돼 옥고
1973년 민추협 서울시 대표
1983년 민족통일촉진회 회장
1988년 민족자주통일협의회 고문
1990년 전국민주민족운동연합(전민련) 공동의장
남·북·해외동포 조국통일범민족대회 예비회담 남측
대표단장, 범민련 공동의장
1992년 민주개혁민주정부수립 국민회의 공동의장
3차 범민족대회 대회장
1994년 범민족대회 상임본부장
1995년 4.19 혁명상 수상
1996년 범민족대회 대회장
1997년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 범민족대회 대회장
6월 민주항쟁 10주년 사업 범국민추진위원회 고문
1998년 백범 서거 50주기 추모공연위원회 위원장 (∼2000)
1999년 범민족대회 대회장
2001년 "6·15 남북공동선언 1주년 기념 민족통일대축전(금강산)"
주석단 공동대표(최고령참가)
사단법인 백범정신실천겨레연합 수석 공동대표
2002년 제7회 `늦봄 통일상` 수상
2004년 제1회 백범정신실천상 수상
현 재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명예의장, 통일연대 명예대표,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공동행사준비위
남측준비위 상임고문
<저서>
가시밭길에서도 느끼는 행복 (도서출판 해냄, 1997)
김치관 기자
고인은 오늘까지 미음을 드시고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환한 표정으로 평온하게 숨을 거뒀다. 빈소는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으로 정하기로 했으며, 고인의 자택은 경기도 과천시 결량동 주공 아파트 403동 401호이다.
<##IMAGE##>홍원식 백범정신실천겨레연합 사무처장은 "한 시대의 통일의 산 역사가 6.15공동선언 상황 속에서 통일의 희망을 안고 소천하셨다"고 애통해 했다.
신창균 선생은 1946년, 백범 김구 선생이 당수로 있던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 독립운동을 펼치고 1949년 남북지도자연석회의 당시 김구 선생과 함께 김일성 주석과의 단독회담을 진행하는 등 조국의 통일을 위해 오직 한길만을 걸어온 노 애국자다.
故 신창균 선생 약력
<약력>
1908년 충북 영동 生
1919년 12세의 나이로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일제경찰에 체포
1922년 대전제일보통학교 3학년 재학중 항일 동맹휴학을 주동해
무기정학
1927년 충북사범학교(청주 소재)로 진학
이후 10년간 청주, 음성, 음성 등지에서 교편
1940년 33세의 나이로 중국으로 망명
이후 중경임시정부 마카오 연락책으로 독립운동
1945년 귀국
1946년 한국독립당(당수 김구) 중앙집행위원, 연락부장, 재정부장,
재정위원장, 상무위원 (∼1950)
1948년 4월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 위한 남북협상 한국독립당
8인 대표(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김구, 조소앙,
조완구, 엄항섭, 신창균, 김의한, 조일문, 최석봉)의
일원으로 방북 (1948. 4. 18, 평양)
평양 체류 중 김일성 북조선인민위원장(당시)과 단독회담
KNCC 재건위원, 실행위원 역임 (∼1956)
1949년 백범 김구 주석 국민장 장례 실무 총책임자
1957년 진보당 재정위원장
1958년 진보당 사건으로 옥고
1961년 통일사회당 총무 및 정책심리의장
5·16 군사쿠데타 세력에 의해 혁신계 인사로 분류돼 옥고
1973년 민추협 서울시 대표
1983년 민족통일촉진회 회장
1988년 민족자주통일협의회 고문
1990년 전국민주민족운동연합(전민련) 공동의장
남·북·해외동포 조국통일범민족대회 예비회담 남측
대표단장, 범민련 공동의장
1992년 민주개혁민주정부수립 국민회의 공동의장
3차 범민족대회 대회장
1994년 범민족대회 상임본부장
1995년 4.19 혁명상 수상
1996년 범민족대회 대회장
1997년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 범민족대회 대회장
6월 민주항쟁 10주년 사업 범국민추진위원회 고문
1998년 백범 서거 50주기 추모공연위원회 위원장 (∼2000)
1999년 범민족대회 대회장
2001년 "6·15 남북공동선언 1주년 기념 민족통일대축전(금강산)"
주석단 공동대표(최고령참가)
사단법인 백범정신실천겨레연합 수석 공동대표
2002년 제7회 `늦봄 통일상` 수상
2004년 제1회 백범정신실천상 수상
현 재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명예의장, 통일연대 명예대표,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공동행사준비위
남측준비위 상임고문
<저서>
가시밭길에서도 느끼는 행복 (도서출판 해냄, 1997)
김치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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