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담]예정웅 선생 수감 10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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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평화통신 작성일05-04-17 00:55 조회3,56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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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프트=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참자, 내가 여기서 자신과의 싸움에서 무너진다면 말이 되겠는가. 무엇때문에 내가 여기 갇혀야 하는지 생각하면 할 수록 분노만 쌓인다. 그러나 나는 인내하자고 자신에게 다짐했다."-이 말은 예정웅 선생이 수감된 이후 보낸 첫 편지에서 표명한 반응이다.
<##IMAGE##> 조국통일을 열망한 것이 죄가되었다고 말하는 예정웅 선생(62)이 수감된지 1백일을 맞았다. 기자는 2005년 4월15일 이른 아침 두시간 가량 운전하여 예 선생이 갇혀 있는 캠프를 찾아갔다. 면회절차를 마치고 오전 9시에 그를 만났다. 그가 수감된 이후 첫 면회였다. 처음 당분간은 가족이외 면허가 불허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시간이 지난 후에 면허신청자 허가를 받아야 하는 제도때문이기도 했다.
기자가 그를 만나는 순간 둘은 으스러지도록 부등켜 안았다. 그는 절친한 친구였다. 이민 생활33년에 둘은 가장 오래 사귄 친구관계 였기에 그 만남의 포옹은 더욱 뜨거웠다. 그는 무척 반가워했다. 눈 언저리가 이슬에 맺힌 듯 살짝 젖어있었다.
"내년 여름이면 출감하게 된다"고 말하며 지난 1백일의 생활들을 설명해 준다. 면회실에 위치한 25개의 탁자들에 앉은 수감자들 주변에는 가족들, 애인들, 부부들, 친지들로 보이는 방문객들로 가득차 있었다.
<##IMAGE##> 이 캠프는 형무소라기 보다는 사막 한 가운데 지어놓은 학교 기숙사 같은 곳이었다. 중범자들을 수용하는 시설이라기 보다는 2년미만의 죄수들, 미국시민권자들로서 초범자들이 주로 머무르는 곳으로 사설기관에서 시범적으로 운영하는 열린 공간이기도 했다. 중범자들도 섞여 있긴 했으나 이들은 과거에 중범형무소에서 지내다가 모범수로 인정받아 이곳으로 온 장기수들이라고 한다.
오전 오후 두차례 잠시 인원점검만 있을 뿐 이곳 수감자들은 대부분 실내외에서 자유스런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철봉을 잡고 3번 정도 당겨 올리기를 했으나 지금은 20여번 가쁜히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근육에 알통이 생긴다. 매일 운동장을 7-8 바퀴정도 걷는데 이 거리는 약 3만보 정도 된다."고 말한다.
"이 캠프에 들어 온 이후 전에 있었던 변비가 없어졌다. 그러나 앨러지는 약을 복용하고 있는데 아직 완쾌되지는 않았으나 그 외에 별다른 병은 없다."며 캠프생활의 규칙성으로 건강이 오히려 좋아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의 얼굴은 수감 이전에 비해 살이 붙었고 엷은 구리색을 띄고 있었다. 건강한 모습이었다. 하루 생활은 지루한 때도 있긴 했으나 대부분 바쁜 일정들이라고 말한다. 신문 잡지보기에서 시작해 운동하기, 편지쓰기, 캠프생활 수기쓰기, 단상시간 등으로 그는 자신을 스스로 바쁘게 만든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그 동안 무려 30편의 <캠프생활 수기>를 썼다. 이 정도면 책 한권을 만들 수 있는 분량이기도 하다. 제목도 다양하다. <감방에서 제1신>을 포함하여 <미국이 인권국가라고 하는데...>, <구치소 생활-2>, <내 어린 시절>, <생이란 무엇인가>, <한인연방수사국 직원들과 일제시대 조선인 고등계 형사>, <구치소 음식>, <사회가 범죄를 만든다>, <김치로 단결했지...>, <나의 증언>, <이유있는 변명>, <그리운 사람들>, <역사에서 찾아야 할 교훈>, <한 수감자의 경험담>, <처와의 첫 만남>, <미국에 쓴 소리>, <독도와 민족공조>, <젊은 추억의 그림자>, 등...
<##IMAGE##> "사실 미국생활하며 책 한권 쓴다는 것이 참 어렵다. 이런 기회에 내 자신을 돌아보며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은 내 나름대로의 보람도 느낀다. 캠프를 떠나 사회로 돌아가기 전에 서너 권의 책을 만들 글들을 쓰려고 노력중이다. 이런 작업은 또 캠프의 고독한 생활을 달래주기도 한다."
그는 캠프의 자유스런 생활환경을 설명해 주었지만 그 안에서의 외로움과 답답함도 감추지 않았다. 감옥은 감옥인데 울타리없는 감옥이라고 하여 캠프라고 부르는 곳이지만 연방정부가 예산을 줄이기 위해 개인에게 운영권을 줘서인지 이곳의 식사는 구치소보다 못한것이 수감자들의 불평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 대신 돈있는 수감자들은 캠프 내에 있는 일종의 식료품같은 커미서리에서 맛있는 음식자료를 사먹을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도 가진자와 없는 자의 차별성이 반영된다.
캠프생활 중 가장 기쁜시간이 언제냐고 묻자 그는 "아무래도 편지받는 순간"이라고 답변한다. 그는 또 가장 애로를 느끼는 일에 대해 "가까운 친구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앉은 자리에서 6시간을 보냈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죽은 시체를 가마니에 돌돌 말아 8살 어린 나이에 지개에 메고 가서 효창공원 뒤에 묻던 비극의 날, 민족분단으로 가족들이 산산이 흩어져 살던 이야기 등 평소에는 전혀 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들려주기도 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나오는 이야기들 처럼 그는 지난 과거들을 술술 실타래 풀듯 말했다. 예정웅 선생의 삶, 그 자체가 우리 민족문제의 현주소였다. 그는 "나는 지난 과거에 부끄러워 했던 가족사를 더 이상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면서 자신의 이야기와 옥중수기를 앞으로 민족통신/평화통신에 연재하는 것을 동의했다.
오후3시가 되자 면회실 감독이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면회를 끝내 주십시요"라고 소리친다. 둘은 또 다시 강한 포옹으로 작별인사를 하고 손을 흔들고 또 흔들며 헤어졌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며 혼자 중얼거렸다. "저렇게 양같은 사람, 법이 없이도 살수 있는 선한 사람이 감옥에 갇혀야 하는 미국은 과연 인권이 있는 나라인가?" 그리고 또 생각했다. "하루 속히 우리 민족이 통일되어야 한다. 통일은 해방이며 자주이며 평화이며 우리 민족의 살길이다." 그렇다. 그래서 남과 북, 해외동포들은 2005년을 맞아 <평화통일 원년>을 염원하며 그것을 이루자고 절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예정웅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려면 다음 주소로 하면 된다.*
Joung W. Yai
21658-112(Unit A-4B)
P.O.Box 7001
Taft, CA 93268
<##IMAGE##> 조국통일을 열망한 것이 죄가되었다고 말하는 예정웅 선생(62)이 수감된지 1백일을 맞았다. 기자는 2005년 4월15일 이른 아침 두시간 가량 운전하여 예 선생이 갇혀 있는 캠프를 찾아갔다. 면회절차를 마치고 오전 9시에 그를 만났다. 그가 수감된 이후 첫 면회였다. 처음 당분간은 가족이외 면허가 불허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시간이 지난 후에 면허신청자 허가를 받아야 하는 제도때문이기도 했다.
기자가 그를 만나는 순간 둘은 으스러지도록 부등켜 안았다. 그는 절친한 친구였다. 이민 생활33년에 둘은 가장 오래 사귄 친구관계 였기에 그 만남의 포옹은 더욱 뜨거웠다. 그는 무척 반가워했다. 눈 언저리가 이슬에 맺힌 듯 살짝 젖어있었다.
"내년 여름이면 출감하게 된다"고 말하며 지난 1백일의 생활들을 설명해 준다. 면회실에 위치한 25개의 탁자들에 앉은 수감자들 주변에는 가족들, 애인들, 부부들, 친지들로 보이는 방문객들로 가득차 있었다.
<##IMAGE##> 이 캠프는 형무소라기 보다는 사막 한 가운데 지어놓은 학교 기숙사 같은 곳이었다. 중범자들을 수용하는 시설이라기 보다는 2년미만의 죄수들, 미국시민권자들로서 초범자들이 주로 머무르는 곳으로 사설기관에서 시범적으로 운영하는 열린 공간이기도 했다. 중범자들도 섞여 있긴 했으나 이들은 과거에 중범형무소에서 지내다가 모범수로 인정받아 이곳으로 온 장기수들이라고 한다.
오전 오후 두차례 잠시 인원점검만 있을 뿐 이곳 수감자들은 대부분 실내외에서 자유스런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철봉을 잡고 3번 정도 당겨 올리기를 했으나 지금은 20여번 가쁜히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근육에 알통이 생긴다. 매일 운동장을 7-8 바퀴정도 걷는데 이 거리는 약 3만보 정도 된다."고 말한다.
"이 캠프에 들어 온 이후 전에 있었던 변비가 없어졌다. 그러나 앨러지는 약을 복용하고 있는데 아직 완쾌되지는 않았으나 그 외에 별다른 병은 없다."며 캠프생활의 규칙성으로 건강이 오히려 좋아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의 얼굴은 수감 이전에 비해 살이 붙었고 엷은 구리색을 띄고 있었다. 건강한 모습이었다. 하루 생활은 지루한 때도 있긴 했으나 대부분 바쁜 일정들이라고 말한다. 신문 잡지보기에서 시작해 운동하기, 편지쓰기, 캠프생활 수기쓰기, 단상시간 등으로 그는 자신을 스스로 바쁘게 만든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그 동안 무려 30편의 <캠프생활 수기>를 썼다. 이 정도면 책 한권을 만들 수 있는 분량이기도 하다. 제목도 다양하다. <감방에서 제1신>을 포함하여 <미국이 인권국가라고 하는데...>, <구치소 생활-2>, <내 어린 시절>, <생이란 무엇인가>, <한인연방수사국 직원들과 일제시대 조선인 고등계 형사>, <구치소 음식>, <사회가 범죄를 만든다>, <김치로 단결했지...>, <나의 증언>, <이유있는 변명>, <그리운 사람들>, <역사에서 찾아야 할 교훈>, <한 수감자의 경험담>, <처와의 첫 만남>, <미국에 쓴 소리>, <독도와 민족공조>, <젊은 추억의 그림자>, 등...
<##IMAGE##> "사실 미국생활하며 책 한권 쓴다는 것이 참 어렵다. 이런 기회에 내 자신을 돌아보며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은 내 나름대로의 보람도 느낀다. 캠프를 떠나 사회로 돌아가기 전에 서너 권의 책을 만들 글들을 쓰려고 노력중이다. 이런 작업은 또 캠프의 고독한 생활을 달래주기도 한다."
그는 캠프의 자유스런 생활환경을 설명해 주었지만 그 안에서의 외로움과 답답함도 감추지 않았다. 감옥은 감옥인데 울타리없는 감옥이라고 하여 캠프라고 부르는 곳이지만 연방정부가 예산을 줄이기 위해 개인에게 운영권을 줘서인지 이곳의 식사는 구치소보다 못한것이 수감자들의 불평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 대신 돈있는 수감자들은 캠프 내에 있는 일종의 식료품같은 커미서리에서 맛있는 음식자료를 사먹을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도 가진자와 없는 자의 차별성이 반영된다.
캠프생활 중 가장 기쁜시간이 언제냐고 묻자 그는 "아무래도 편지받는 순간"이라고 답변한다. 그는 또 가장 애로를 느끼는 일에 대해 "가까운 친구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앉은 자리에서 6시간을 보냈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죽은 시체를 가마니에 돌돌 말아 8살 어린 나이에 지개에 메고 가서 효창공원 뒤에 묻던 비극의 날, 민족분단으로 가족들이 산산이 흩어져 살던 이야기 등 평소에는 전혀 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들려주기도 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나오는 이야기들 처럼 그는 지난 과거들을 술술 실타래 풀듯 말했다. 예정웅 선생의 삶, 그 자체가 우리 민족문제의 현주소였다. 그는 "나는 지난 과거에 부끄러워 했던 가족사를 더 이상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면서 자신의 이야기와 옥중수기를 앞으로 민족통신/평화통신에 연재하는 것을 동의했다.
오후3시가 되자 면회실 감독이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면회를 끝내 주십시요"라고 소리친다. 둘은 또 다시 강한 포옹으로 작별인사를 하고 손을 흔들고 또 흔들며 헤어졌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며 혼자 중얼거렸다. "저렇게 양같은 사람, 법이 없이도 살수 있는 선한 사람이 감옥에 갇혀야 하는 미국은 과연 인권이 있는 나라인가?" 그리고 또 생각했다. "하루 속히 우리 민족이 통일되어야 한다. 통일은 해방이며 자주이며 평화이며 우리 민족의 살길이다." 그렇다. 그래서 남과 북, 해외동포들은 2005년을 맞아 <평화통일 원년>을 염원하며 그것을 이루자고 절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21658-112(Unit A-4B)
P.O.Box 7001
Taft, CA 93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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