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22일 비전향장기수 최상원 선생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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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7-07-22 09:47 조회2,36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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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오후 6시 30분경 비전향 장기수 최상원 선생이 오랜 옥고의 후유증으로 부산 광안리 한가족요양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4세. 유족으로는 ‘여자 빨치산’으로 널리 알려진 부인 박순자(77) 씨와 2남 6녀가 있다. 빈소는 부산 광안리 소재 조은강안병원 장례식장 1호실. 장례는 4일장으로 치를 예정이다.
고인은 1923년 6월 8일 경주에서 태어나 동경철도고를 나왔고 1945년 1월 일제에 강제 징병됐으나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혀 수감된 뒤 해방 이후 풀려났다. 해방 직후 고향인 경북 경주군 내남면에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 활동을 하다 수감됐으며, 1972년에는 고정간첩으로 몰려 또다시 투옥됐으며 7.4 남북공동성명 발표로 감형되었다.
<##IMAGE##> 고인은 1975년 사회안전법이 발효되면서 10년간 주거제한에 묶이기도 했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 투쟁과 범민련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1998년 범민련 남측본부 부경연합 고문과 범추본 상임위원장에 선임되었다. 2000년 8.15범민족대회체 참석했다는 이유로 1심에서 징역 1년6월(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모두 5차례 옥고를 치뤘다. 고인은 2004년 10월경 노인성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서 생활해왔다.
고인은 2004년 5월 30일 지리산 대성골 입구에서 열린 ‘남녘 애국통일열사 추모제’에서 “얼어죽고, 굶어죽고, 맞아죽고 조국과 인민을 위해 여한 없이 싸우다 죽은 동지들의 혁명정신은 영원히 우리 민족의 가슴에 살아 숨쉴 것”이라고 추모사를 한 바 있다.
부인 박순자 선생은 “일제 때부터 고문을 많이 받아 약으로 약으로 살아왔다”며 “파킨슨 병이 오고 손도 떨리고 정신이 없을 때는 ‘병원도 감옥이다’, 낯선 사람만 보면 ‘빨리 피해가자’, 돌아가시기 전까지 많이 시달렸다. 감옥 생활로 위장병도 있고 맞아서 골절돼 허리도 아팠다”고 전했다.
<##IMAGE##> 박순자 선생은 “통일을 위해서 일제 때부터 치안유지법으로, 미군정 때는 포고령 위반으로 3년, 그 후로는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을 들락날락 하며 평생을 통일을 위하고 조국을 위해서 일했다”며 “동지로서 가족으로서 끝가지 통일을 못보고 보내드려 진짜 죄송하고, 최 선생 원하는 대로 많은 동지들이 뒤를 따라 잘하고 있고, 잘 하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권오헌 민가협양심수후원회 회장은 “일제시대부터 항일운동을 하셨고 여러 차례 옥고를 치뤘고 더군다나 부인께서도 전쟁시기 빨치산 투쟁을 시작으로 두 분이 같이 험난한 질곡의 역사를 살아오셨는데 결국 통일염원을 잃지 않고 살아오시다 끝내 통일조국을 보시지 못하고 가신 것이 매우 안타깝다”고 회고했다.
권오헌 회장은 “고향이 남쪽임에도 불구하고 2차 송환신청까지 하실 정도로 한평생 조국사랑 정신을 살아오셨는데 슬픔을 금할 길 없다”고 추도했다.
<부고>
▲ 고 최상원 선생
[사진제공 - 범민련부경연합]
평생을 통일운동을 몸바쳐오신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 최상원 선생님께서 향년 84세로 7월 22일 오후6시40분경 영면하셨습니다. 최상원 선생님께서는 10대때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에 나서신 후 해방후 반외세투쟁과 통일운동에 평생을 바쳐오셨습니다.
평생을 청년의 기백으로 한길을 걸어오시던 최상원 선생님께서는 지난 3년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요양을 해오셨으며 안타깝게 통일의 날을 보시지 못하고 우리의 곁을 떠나셨습니다. 선생님의 유족으로는 범민련 고문이신 부인 박순자선생님과 2남 6녀가 있습니다.
빈소는 부산 좋은강안병원 1호실입니다.
연락처 051-610-9671, 010-9753-0213
고인은 1923년 6월 8일 경주에서 태어나 동경철도고를 나왔고 1945년 1월 일제에 강제 징병됐으나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혀 수감된 뒤 해방 이후 풀려났다. 해방 직후 고향인 경북 경주군 내남면에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 활동을 하다 수감됐으며, 1972년에는 고정간첩으로 몰려 또다시 투옥됐으며 7.4 남북공동성명 발표로 감형되었다.
<##IMAGE##> 고인은 1975년 사회안전법이 발효되면서 10년간 주거제한에 묶이기도 했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 투쟁과 범민련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1998년 범민련 남측본부 부경연합 고문과 범추본 상임위원장에 선임되었다. 2000년 8.15범민족대회체 참석했다는 이유로 1심에서 징역 1년6월(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모두 5차례 옥고를 치뤘다. 고인은 2004년 10월경 노인성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서 생활해왔다.
고인은 2004년 5월 30일 지리산 대성골 입구에서 열린 ‘남녘 애국통일열사 추모제’에서 “얼어죽고, 굶어죽고, 맞아죽고 조국과 인민을 위해 여한 없이 싸우다 죽은 동지들의 혁명정신은 영원히 우리 민족의 가슴에 살아 숨쉴 것”이라고 추모사를 한 바 있다.
부인 박순자 선생은 “일제 때부터 고문을 많이 받아 약으로 약으로 살아왔다”며 “파킨슨 병이 오고 손도 떨리고 정신이 없을 때는 ‘병원도 감옥이다’, 낯선 사람만 보면 ‘빨리 피해가자’, 돌아가시기 전까지 많이 시달렸다. 감옥 생활로 위장병도 있고 맞아서 골절돼 허리도 아팠다”고 전했다.
<##IMAGE##> 박순자 선생은 “통일을 위해서 일제 때부터 치안유지법으로, 미군정 때는 포고령 위반으로 3년, 그 후로는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을 들락날락 하며 평생을 통일을 위하고 조국을 위해서 일했다”며 “동지로서 가족으로서 끝가지 통일을 못보고 보내드려 진짜 죄송하고, 최 선생 원하는 대로 많은 동지들이 뒤를 따라 잘하고 있고, 잘 하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권오헌 민가협양심수후원회 회장은 “일제시대부터 항일운동을 하셨고 여러 차례 옥고를 치뤘고 더군다나 부인께서도 전쟁시기 빨치산 투쟁을 시작으로 두 분이 같이 험난한 질곡의 역사를 살아오셨는데 결국 통일염원을 잃지 않고 살아오시다 끝내 통일조국을 보시지 못하고 가신 것이 매우 안타깝다”고 회고했다.
권오헌 회장은 “고향이 남쪽임에도 불구하고 2차 송환신청까지 하실 정도로 한평생 조국사랑 정신을 살아오셨는데 슬픔을 금할 길 없다”고 추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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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최상원 선생
[사진제공 - 범민련부경연합]
평생을 통일운동을 몸바쳐오신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 최상원 선생님께서 향년 84세로 7월 22일 오후6시40분경 영면하셨습니다. 최상원 선생님께서는 10대때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에 나서신 후 해방후 반외세투쟁과 통일운동에 평생을 바쳐오셨습니다.
평생을 청년의 기백으로 한길을 걸어오시던 최상원 선생님께서는 지난 3년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요양을 해오셨으며 안타깝게 통일의 날을 보시지 못하고 우리의 곁을 떠나셨습니다. 선생님의 유족으로는 범민련 고문이신 부인 박순자선생님과 2남 6녀가 있습니다.
빈소는 부산 좋은강안병원 1호실입니다.
연락처 051-610-9671, 010-9753-0213
최상원 선생님 약력 1923년 6월 8일 경북 경주군 내남면 노곡리 출생 1942년 3월 동경철도고등학교 토목과 졸업 1945년 1월 일제하 강제징병된 조선제28특별공병부대에서 탈주를 도모하다가 수감 1945년 8월 해방으로 풀려남. 적산매매 반대운동 전개, 건국준비위원회 내남면 치안대장 1945년 9월 경주군 내남면 인민위원회 보안부장 1945년 10월 경주군 내남면 농민조합 선전부장 1945년 11월 국군준비대 내남면 지대장 1946년 1월 경주군 민주청년동맹 부위원장 1946년 6월 농민조합원 소작권 옹호 투쟁하다가 피검 1946년 10월 10월인민항쟁에 참여 1946년 11월 경주군, 양남면, 양북면, 감포읍 삼면 조직책임자 1947년 7월 경주 동산령에서 야산대 조직 1947년 10월 체포되어 3년 징역 선고 받음 1948년 3월 3.1절 옥중에서 2.7구국투쟁 감행 1948년 4월 김천형무소로 이감 1948년 8월 단독정부수립반대 옥중투쟁 1952년 8월 부산에서 체포 1960년 4월 4.19학생투쟁 후원 및 남북학생회담추진 후원 1960년 10월 경주군 내남면 피학살유족회 결성 1972년 1월 반공법위반으로 체포되어 징역 4년 선고 받음 1975년 5월 사회안전법 발효로 10년간 주거제한에 묶임 1987년 3월 민주화투쟁에 참여 1991년 8월 범민련에 참여 1998년 8월 범민련 남측본부 부경연합 고문, 범추본 상임위원장에 선임 2000년 6월 8.15범민족대회 참석을 이유로 징역 1년6월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 받음 2004년 11월 건강이 악화되어 요양 2007년 7월 22일 오후 6시 40분 영면 <자료제공 - 범민련부경연합> 2007년 07월 22일 김치관 기자 ckkim@tongilnew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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