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영 박사]황석영 선생에게 드리는 글
페이지 정보
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9-05-17 21:47 조회3,775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유태영 박사(재미동포 통일운동 원로,은퇴 목사,뉴욕 거주)가 황석영 선생에게 드리는 글을 민족통신에
보내왔다. 필자는 1990년 8월 14일에 백두산에서 거행된 <제1차 범민족대회 출정식>에서 황석영 선생이 불을
뿜어내는 열정적인 웅변으로 <쇠붙이는 물러가라>고 웨치던 소리를 잊을 수 없다고 황석영과의 첫 만남을
회고하고 있다.
그 후 독일을 거쳐 뉴욕에 온 황석영과 재회하여 황석영의 부친과 필자의 고향이 같은 황해도 신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필자가 청소년기에 직접 겪은 <신천양민학살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쓴
황석영의 소설 <손님>에 등장하는 주인공 <유요섭>은 필자의 신천사건 경험과 민족관, 역사인식 그리고 6.25
전쟁 때 우리민족이 당한 수난과 점령군 미군에 대한 필자의 분노와는 전혀 다른 소설적 허구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민족통신 편집실]
보내왔다. 필자는 1990년 8월 14일에 백두산에서 거행된 <제1차 범민족대회 출정식>에서 황석영 선생이 불을
뿜어내는 열정적인 웅변으로 <쇠붙이는 물러가라>고 웨치던 소리를 잊을 수 없다고 황석영과의 첫 만남을
회고하고 있다.
그 후 독일을 거쳐 뉴욕에 온 황석영과 재회하여 황석영의 부친과 필자의 고향이 같은 황해도 신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필자가 청소년기에 직접 겪은 <신천양민학살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쓴
황석영의 소설 <손님>에 등장하는 주인공 <유요섭>은 필자의 신천사건 경험과 민족관, 역사인식 그리고 6.25
전쟁 때 우리민족이 당한 수난과 점령군 미군에 대한 필자의 분노와는 전혀 다른 소설적 허구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민족통신 편집실]
황석영 선생에게 드리는 글 요새 일간 신문들의 보도와 인터넷에는 황석영 선생에 대한 보도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 중에서 나에게 제일 충격적인 것은 오늘 아침 서프라이즈에 실린 안효용님의 글 < 당신을 흠모했던 사람들에게 기관총을 난사하는 것이다>이었습니다. 필자도 황석영 선생을 존경했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기관총에 난사당한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안고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IMAGE##>필자가 황선생을 직접 대면해서 만난 것은 1990년 8월 14일 백두산 천지를 바로 뒤에 내려다 보면서 북조선 인사들과 남측, 해외동포들 수백 군중들이 백두산 산상에서 <제1차 범민족대회 출정식>을 거행하던 때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백두산 산장에서 조반식사 전에 황선생은 고 여연구 여사와 함께 아침산책을 하는 길에서 필자와 마주쳐서 첫 인사를 교환한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황석영 선생은 그날 그 <백두산 범민련출정식>에서 불을 뿜어내는 열정적인 웅변을 토하면서 <쇠붙이는 물러가라>라고 웨쳤습니다. 너무나도 멋진 열변이었으며 강력한 구호의 웨침이었습니다. 그 날 황선생이 웨친 그 멋진 구호는 6.25 전쟁 당시 월북한 시인 백인준 문예총위원장이 처음으로 펴낸 그의 시집 첫페지에 쓰여져 있는 반미반제를 부르짖는 멋진 구호와 꼭 같은 구호였습니다. 황석영 선생은 남쪽 민예총 대변인 뿐만 아니라 남측 범빈련 대표로 백두산 범민련출정식에 참석하고 1990년 8월 15일에는 팜문점에서 제1차 범민족대회에 남측대표로 참석하여 민족통일의 큰 역할을 감수하였습니다. 얼마후 황 선생은 독일에서 대한민국 여권 만료로 정치망명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는 소문을 들은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황선생은 미국의 뉴욕에 있는 L대학의 사회정치학 교수이신 J박사님의 노력으로 그 대학총장의 초청으로 뉴욕에 와서 몇년을 지내다가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자 청와대 비서실장 J. N. Kim을 배경삼아 귀국의 용단을 내렸으며 필자에게는 Kim이 청와대에 있는 한 3개월 정도 감옥에 가있으면 될 것이라고 말한 기억이 잊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황석영 선생이 뉴욕시 번화가 고층건물에 사무실을 임대하여 활약을 개시하면서 <동아시아문화연구소>를 개설하여 우리들 몇 사람은 축하화환을 들고가 기쁨의 다과시간을 가졌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그 때 황석영 선생은 동남아시아의 유명 문인들과 작가들과 교류의 폭을 넓히겠다고 역설했으며, 황선생의 명작 <장길산> 영화 제작을 북과남 공동제작으로 추진하겠다는 강한 의욕을 내비치기도 했습니다. 사무직원으로 함께 일했던 김씨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북남합작 <장길산>을 위하여 북측과 상당한 교루가 이뤄지고 있었으나 그 결과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바 없다고 했습니다. 필자는 황석영 선생이 뉴욕에 체류하고 있는 기간에 황선생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보스톤대학과 위스콘신대학을 방문하여 한국 유학생들이 <장길산>의 황석영 선생과 새벽이 되도록 대화를 나누면서 흥분하고 행복해 하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때 비행기와 자동차 안에서 대화를 통하여 <황해도 신천>이 황선생 부친과 필자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신천박물관>과 <신천미군학살사건>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필자는 그 때 10대 후반의 청소년이었는데, 고향동네 기독교인들이 무지막지하게 한 동네의 <빨갱이>들을 구덩이에 밀어 넣고 휘발유를 뿌려 죽였으며, 그 때 그 동리의 기독청년들이 모두 월남하여 목사들이 됐는데 그 목사들은 지금도 그 때 일을 뉘우치지 않고 오히려 반공 반북 이데올로기로 정당화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황선생에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 UN군이 사리원을 지나 평양으로 북진하는 것을 보고 필자의 동네의 기독교 청년들이 일제히 봉기하여 동네 <빨갱이>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고문하고 무자비하게 죽였던 사실을 황석영 선생에게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황선생은 뛰어난 소설가로서 나의 <신천군 남부면 부정리> 약 100호 정도의 집들이 모여 사는 기독교화한 작은 동네에서 일어난 나의 사실적 이야기를 테마로 삼아 소설 <손님>이라는 어마어마한 명작소설을 창작하셨습니다. 뛰어난 소설가로서의 창작능력과 상상력에 감탄하면서 소설<손님> 출판을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필자와 필자의 형님을 <손님> 중에서 손님이 아닌 <주인공>으로 유요섭, 유요한으로 등장시킨데 대하여 소설가의 창작능력과 솜씨에 대하여 감탄사를 보냅니다. 하지만 황선생에게 이 기회에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꼭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필자가 작가인 황석영 선생에게 토로한 나의 작은 고향동네 마을에서 겪은 개인적인 경험담과 또 나의 민족관과 우리 민족에 대한 나의 역사인식 그리고 6.25 전쟁 때 우리민족이 당한 수난과 점령군 미군에 대한 나의 분노 등은 소설 <손님>에 등장한 유요섭에게서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배치된다는 사실입니다. 소설 <손님>을 읽은 많은 독자들로부터 외곡된 내용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지만 또 다시 부언하자면 소설 <손님>이 불러일으키는 혼돈과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외곡에 대하여 <손님>은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물론 필자는 작가의 상상력과 창작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분명히 밝히고 싶은 것은 소설 <손님>이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와 소설 <손님>이 가지고 있는 소재의 허구적 구상들은 필자와 신천의 역사적 현실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 딴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그 후 황석영 선생은 뉴욕에 올 때마다 필자를 불러 함께 점심식사를 같이 하도록 한데 대하여 늘 기쁘게 생각합니다. 언젠가 한국의 대선이 한창 뜨거울때 필자는 민주당의 정동영 후보가 당선되면 좋겠다고 발언했습니다. 그런데 황선생은 뜻밖에도 <아니지 이명박이 돼야지>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때 필자는 묘한 기분과 감정표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순간 난감했습니다. 이명박의 흠집과 타락된 부정부패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황석영 선생은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된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이사람이 이명박 선거운동하러 미국에 온 것 아니냐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당장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고 싶은 충동을 받았지만 참고 있었습니다. 판단력이 둔한 필자는 오늘에 와서야 <아니지 이명박이 돼야지>라고 말한 그 때의 황석영 선생의 정체를 알게 된듯 합니다. 필자의 견해로는 제국주의 침략적인 미국의 공작에 의하여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 같은 생각이 들며 하나의 작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황석영 선생이 그 때에 말한 <이명박이 돼야지>라는 말이 지금에 와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은 바로 3주 전 지난 4월말에 황석영 선생이 뉴욕에 다시 와서 필자와 32가 한국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황선생은 필자가 도저히 알아 들을 수 없는 몽골-투코리아 중앙아시아 구상을 열렬히 말했었습니다. 필자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묵묵히 듣기만 했습니다. 그 말이 이명박 대통령과의 중앙아시아 순방동행과 이명박 정부에서 타이틀도 획득한다는 말이었던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황석영 선생! 황선생은 분명히 필자에게 <이명박 대통령은 기껏해야 제 임기나 겨우 채우고 물러날 것이다>라고 분명히 말했을 겁니다. 필자는 민주당 개혁세력에서 뚜렷한 지도자가 나와야 하는데 큰 걱정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황선생은 <민주당 개혁세력은 저들끼리 싸우니 아무 희망이 없고 이명박 이후에는 박근혜다>라고 필자에게는 폭탄같은 말을 했지요. 이전에 정동영은 안된다고 하면서 <이명박이 돼야지>라고 하던 그 때의 황석영 선생의 모습이 필자의 머리에 다시 떠올랐습니다. 필자로서는 미국의 배후조정으로 인하여 이명박이 대통령이 될것을 황선생은 미리 다 알고 예언을 한 것 같은데 그러면 이번에도 역시 황석영 선생은 <박근혜가 이명박 이후에 대통령이 될것이다>는 것을 벌써 다 알고 필자에게 예언을 하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최근 조중동의 론조를 보면 겉으로는 이-박 계열이 서로 싸우는것처럼 언론 플레이를 하고 있으면서도 내막은 은근히 박근혜 세력확장에 촛점을 맞추고 있는것을 필자는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황석영 성생과의 대화 속에서 필자는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박근혜가 4월초 미국을 방문해 스텐포드대학에서 미 정계와 국무성 관리들, 연구소 인물들을 활발하고 긴밀히 접촉하고 있는 모습도 황선생의 암시와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황석영 선생에게 감히 쓴소리 한 마디로 끝을 맺겠습니다. 이것은 필자가 평소에 그 누구보다도 황선생을 존경하고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냈기에 하는 말입니다. 황석영 선생은 <내년 상반기까지 남북관계를 풀면—느슨한 연방제>라는 터무니 없는 언어를 사용하면서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누가 남한에서 보수이든 진보이든 그리고 개혁주의자들이든 그와 같은 황석영 선생의 허황된 말을 믿겠습니까? 남한에서도 벌써부터 황석영은 변절자, 배신자, 이중인격자라는 말이 돌고 있고 진보진영은 대단히 분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황석영 선생은 이번 이명박정부와의 밀착으로 인하여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변절자로 남한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더욱이 북쪽에서 황석영이 <남북화해>라는 말을 <남용>한다면서 아마 거들떠보지도 않고 대답도 없을 것 같습니다. 황 선생의 말은 <마이동풍>으로, <삶은 소대가리가 웃을 것>으로 하찮게 여길 것입니다. 안호용님의 말대로 왜 나이 늦은 황석영 선생께서 그런 길를 택하셨는지 필자는 분통을 터뜨리면서 황선생이 꼭 그래야만 될 어떤 깊은 이유라도 있는가를 묻고 싶습니다. 어쨌던 뉴욕에 오면 예전과 같이 필자에게 전화하십시요. 만나 옛정을 회포하면서 한잔하는 재회가 이루어지길 바라겠습니다. 속에 쌓여있는 분노를 솔직히 다 털어 보이고 싶지만 이만 줄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요.(끝)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