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미국 지원 <온두라스>쿠테타의 현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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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9-10-07 14:50 조회3,29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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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79. 민족통신 논설위원)은 그 동안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등 여러나라들을 연구하여
고찰한 글들을 집필한 소감에 대하여 "미국은 국제연합 기구도 아니면서 지구촌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기비위에 맞지 않으면 간섭하고 침략하며 마치 깡패처럼 행동하여 왔는데 이를 보고 할말을 못하고
있는 국제사회의 질서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번에 남미 나라중
빠진 나라, <온두라스>를 다루며 "지난 2009년 6월 28일에 온두라스에서 미국이 사전에 시인한 군부
쿠테타가 발생했다. 그 때 남미지역의 13개 나라들은 일제히 미국을 비난하고 나섰다. 그런데 쿠테타가
발생한지 3개월이 지났는데도 온두라스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야말로 오리무중에 쌓여 있다."고
분석하고 이 나라 동향에 대해 고찰했다. 이글을 여기에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고찰한 글들을 집필한 소감에 대하여 "미국은 국제연합 기구도 아니면서 지구촌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기비위에 맞지 않으면 간섭하고 침략하며 마치 깡패처럼 행동하여 왔는데 이를 보고 할말을 못하고
있는 국제사회의 질서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번에 남미 나라중
빠진 나라, <온두라스>를 다루며 "지난 2009년 6월 28일에 온두라스에서 미국이 사전에 시인한 군부
쿠테타가 발생했다. 그 때 남미지역의 13개 나라들은 일제히 미국을 비난하고 나섰다. 그런데 쿠테타가
발생한지 3개월이 지났는데도 온두라스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야말로 오리무중에 쌓여 있다."고
분석하고 이 나라 동향에 대해 고찰했다. 이글을 여기에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기획]미국 지원 <온두라스>쿠테타의 현주소 <##IMAGE##> 유태영 박사(79. 민족통신 논설위원)은 그 동안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등 여러나라들을 연구하여 고찰한 글들을 집필한 소감에 대하여 "미국은 국제연합 기구도 아니면서 지구촌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기비위에 맞지 않으면 간섭하고 침략하며 마치 깡패처럼 행동하여 왔는데 이를 보고 할말을 못하고 있는 국제사회의 질서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번에 남미 나라중 빠진 나라, <온두라스>를 다루며 "지난 2009년 6월 28일에 온두라스에서 미국이 사전에 시인한 군부 쿠테타가 발생했다. 그 때 남미지역의 13개 나라들은 일제히 미국을 비난하고 나섰다. 그런데 쿠테타가 발생한지 3개월이 지났는데도 온두라스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야말로 오리무중에 쌓여 있다."고 분석하고 이 나라 동향에 대해 고찰했다. 이글을 여기에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지난 2009년 6월 28일에 온두라스에서 미국이 사전에 시인한 군부 쿠테타가 발생했다. 그 때 남미지역의 13개 나라들은 일제히 미국을 비난하고 나섰다. 그런데 쿠테타가 발생한지 3개월이 지났는데도 온두라스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야말로 오리무중에 쌓여 있다.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를 연결하는 중앙아메리카에는 온두라스를 비롯하여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등 5개국이 있는데, 맥시코와 파나마를 추가하여 7개국을 중부아메리카 라고 칭한다. 온두라스의 인구는 7,300만 이며 면적은 112,492 평방km이며 중앙아메리카의5개국 중에서 두 번째로 큰 나라이다. 1502년에 콜럼버스가 제4차여행 때 처음 온두라스에 상륙한 곳인데 이 지역의 해안이 매우 깊다.하여 <깊음>이라는 지방어로 <온두라스>라는 국명이 생겼다고 알려져 있다. 1539년부터 중앙아메리카 전역에서 금 은 광산이 발견되여 에스파냐식민지가 본격화 되였으며, 1541년에 스페인 황제는 이곳에 과테말라 총감부를 창설하여 1821년까지 280년 동안 침략과 착취의 통치로 지배해 왔다. 1822년에 중앙아메리카는 멕시코 제국에 편입되었으나 2년 후에 무너졌으며 그 후 중앙아메리카 5개국은 280년 동안의 식민지 통치에서부터 완전히 벗어나 독립된 <중앙아메리카연방공화국>을 창설했다. 그러나 5개의 연방공화국은 각국의 이해관계가 대립되어 1835부터 서로 제각기 독립국가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온두라스는 1838년에 완전 분리 독립을 달성했다. 하지만 온두라스는 독립 후 미국의 내정간섭과 외교의 불안정이 계속되어 정권교체가 수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1933년에 카리아스 대통령이 등장하여 17년간 무서운 독재를 하면서 정국을 어느 정도 안정시켰다. 하지만 미국의 유나이티드 브랜즈사의 노예적 독점자본의 진출로 인하여 온두라스는 바나나, 커피,설탕과 목재를 생산 수출하는 완전히 경제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미국에 종속되는 수출공화국이 되고 말았다. 1982년에 처음으로 온두라스국회가 새 헌법을 공포하여 형식적인 민정이 실현되기는 했으나 그 기반이 취약하여 정치적, 사회적 불안이 증대될 때마다 미국이 지원하는 군부가 여전히 배후에서 지배하고 있었다. 2009년 6월 28일에 발생한 온두라스 군사쿠테타와 그 정치적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미국이 개입한 중요한 역사적 배경을 다음과 같이 살펴 본다. 1982년에 온두라스에 역사상 처음으로 민간정부가 들어 서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행정부는 중앙아메리카지역 내에서 <공산주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하여 명목상 보호라는 이유로 <더러운 전쟁, dirty war>을 전개 했다. 미국은 니카라과에서 발생하고 있는 <반미혁명정부>를 붕괴시키기 위하여 이른바 <콘트라반군>을 창설하여 니카라과 내전을 일으켰는데, 그 반군의 육성 훈련을 바로 옆 나라 온두라스 내에서 실시 했다. 물론 그 대가로 미국 CIA는 막대한 달러를 온두라스 정부에게 지불했다. 오늘 온두라스의 비극적 역사의 주된 원인은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미국이 중남미에서 준군사조직과 암살행위를 행하고 있는데 대하여 온두라스는 미국의 대리 전을 하는 핵심적 역할을 하면서 친미기조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미국 CIA가 그 후부터 온두라스에 쏟아 부은 막대한 자금은 예전 식민지 시절부터 정권을 장악해 온 지배층 계급에게 부와 권력을 계속 누릴 수 있도록 했다. 지금은 미국이 온두라스를 전부 소유하고 있다고 할 정도로 온두라스는 미국에 완전히 종족되고 있다. 오늘의 온두라스는 미국의 군사기지나 조금도 다름이 없다. 온두라스의 대부분의 중산층과 지배층의 사람들은 모두가 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며 특히 2009년 6월 28일에 군사 쿠테타를 일으킨 군인들은 전부 다 미국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친미성향의 군인들이다. 온두라스의 셀리야 대통령은 2006년 1월 27일에 야당인 자유당 소속으로 50.8%의 득점을 얻어 <온두라스에 새로운 빛> 이란 희망으로 대통령에 취임을 했다. 셀리야 대통령은 집권 후 3년 동안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을 60% 인상시키고 공장 소유자들에 대한 강력한 조치를 취하면서 미국에 맞서는 중남미의 주요 좌경적 나라들과 함께 남미 <볼리바르대안 ALBA> 에 온두라스를 가입시키는 정책을 감행 했다. 이와같은 셀라야 대통령에 대하여 민중들은 환호 했다. 하지만 미국과 기득권 보수반동 세력들은 심사가 뒤틀려 셀라야 대통령의 개혁정책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미국 CIA의 승인 하에서 보수세력은 군부를 앞세워 군사 쿠테타를 일으켰다. 2009년6월28일 일요일 새벽에 침실에서 잠옷을 입고 있는 셀라야 대통령을 무장한 군인들이 총칼로 납치하여 바로 이웃나라인 코스타리카로 추방했다. 쿠테타를 일으킨 온두라스 군부는 군인 출신인 로베르토 미셀리티 국회의장을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했다. 그런데 미국과 쿠테타 군부가 셀라야 대통령을 추방하여 하필 코스타리카로 추방시킨 이유는 무엇인가? 코스타리카의 아리아스 대통령은 온두라스 쿠테타로 동장한 미셀리티 임시 대통령과 미국 군사학교에서 군사교육을 함께 받은 친미적 군인출신 동창생들 이다. 그래서 미국은 추방을 당한 셀라야 대통령을 코스타리카의 아리아스 대통령에게 보내어 형식상으로 쿠테타로 임시 대통령이 된 미셀리티장군과 화해를 시키도록 연극을 꾸미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원수끼리 화해를 시키라는 책임을 아리아스에게 위탁했다. 아리아스는 온두라스의 두 원수 대통령 사이에서 화해자로 중재역할을 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미국의 꼭두각시 역할만을 할 뿐 화해보다는 오히려 시간 끌기 작전으로 사건을 점점 더 오리무중으로 끌고 가는 역할만 지금까지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코스타리카의 아리아스 대통령은 남미의 챠베스 대통령, 룰라 대통령 그리고 모랄레스 대통령등 유력한 좌파지도자들의 건의와 충고를 교묘하게 회피하고 완강히 거부하면서 오직 미국의 하수인 역할을 하면서 화해가 아니라 악화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민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셀라야 대통령은 본래는 중도적 노선에서 2006년 1월27일에 대통령에 취임을 했다. 하지만 집권을 하면서 점차적으로 진보적 정책으로 전환 했다. 셀라야 대통령은 전체 인구 70%를 차지하고 있는 빈곤층을 위한 임금을 인상시키는 포고령을 내리기도 했다. 외교관계에서도 미국의 영향에서부터 벗어나는 독립적 노선을 택하여 미국의 심기를 건드렸다. 셀라야 대통령은 온두라스를 남미의 반미국가들과 친선을 맺 으면서 ALBA에 가입하는데 있어서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셀라야 대통령은 미국이 지원하는 친 기업적인 <자유무역지대>에 반대하여 중남미의 좌파국가들과 지역적 유대를 더욱 공고히 했다. 이와 같은 셀라야 대통령에게 시급한 과제는 온두라스의 낡은 헌법을 개정하는 일이었다. 현행 온두라스의 헌법은 1980년대에 미국의 레이간 대통령의 <더러운 전쟁> 당시 미국의 지배하에서 강제로 제정된 불공정한 헌법이다. 이러한 헌법하에서 는 셀라야 대통령의 개혁정책을 도저히 시행해 나갈 수 가 없다. 헌법의 개정을 위해서는 제일 먼저 여론투표로 민중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그리하여 셀라야 대통령은 2009년 3월에 국민투표에 관련된 대통령 특령을 내리고 6월 28일에 <국민투표> 를 실시하려고 했다. 국민투표를 통하여 압도적 결과가 나온다면 이를 근거로 하여 <제헌의회>를 소집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총선도 다시 치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셀라야 대통령이 이와 같은 목적으로 제안한 <국민투표>에 대하여 노동조합과 사회 단체들 그리고 온두라스의 민중 대다수는 절대적으로 지지를 보냈다. 이러한 긴박한 시점에서 대통령의 포고로 이미 예고된 <국민투표>가 6월 28일 에 실시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6월 28일 <국민투표 날>새벽에 미국이 사전에 승인한 군사 쿠테타가 발생하고 말았다. 바스케스 장군의 명령을 받은 무장한 군인 60명이 6월 28 일 새벽에 대통령관저에 침입하여 실탄을 쏘면서 세실라 대통령을 납치하여 코스타리카로 추방했다. 6월 28일의 국민투표가 무산되고 셀라야 대통령은 추방되었으니 11월에 있을 대선은 어찌될지 불투명 하다. 셀라야 대통령은 진보파 동맹국인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볼리비아 등 여러 나라에서 성공한 것처럼 온두라스에서도 제헌의회를 설립하여 개혁주의적 정권의 안정을 구축하려 했던 것이다. 세실라 대통령이 개혁주의적 안정된 정권을 구축하려는 꿈은 친미적 군사쿠테타를 발생시키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쿠테타 발생의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미국, UN, EU 등 친 서방국가들을 비롯하여 베네수엘라, 브라질, 에콰도르 등 좌파동맹국들은 일제히 한 목소리로 온두라스 군부의 정치개입을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국제 사회의 비난의 수위는 현격히 차이가 있다. 중남미를 비롯하여 전세계의 좌파국가들은 미국을 온두라스 쿠테타의 배후 조정자로 지명하고 있다.이들 좌파 나라들은 자국의 대사나 국민에게 위험이 있을 경우 전쟁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을 것 이라고 강경한 입장을 표명하면서 셀라야 대통령의 무조건적 복귀를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국제 사회의 반응에 대하여 미국의 입장은 완전히 다르다. 미국은 성명을 발표하여 <민주주의적 규범과 헌장을 존중할 것을 촉구한다> 라고 원론적인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미국은 셀라야 대통령의 추방을 <쿠테타> 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하는데 대하여 유보적이라는 애매한 태도를 취하면서 반미성향의 셀라야 대통령의 복귀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추방중에 있는 셀라야 대통령은 그동안 수차 비밀로 미국 Washington을 방문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이나 힐러리 국무장관은 한번도 대면을 허락하지않았다. 오히려 공화당의 보수세력은 오바마 행정부가 추방당한 셀라야 대통령에게 보다 더 강력한 압력을 가하지 않는다고 맹비난을 퍼붓고 있을 뿐이다. 미국의 전반적인 입장은 만일 셀라야 대통령이 복귀한다 할지라도 복귀조건은<개혁정책포기> <친중남미정책포기> <좌파정부정책포기>등을 주장하면서 거세된 셀라야 대통령의 조건부 복귀를 바라고 있다. 오늘 미국이 취하고 있는 온두라스정책과 미국이 취하고 있는 <한반도정책>은 조금도 다를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온두라스 문제는 당연히 우리의 관심사 이다. 추방중인 셀라야 대통령은 그 동안 여러 번 귀국을 시도 했으나 실패했다. 그의 귀국은 체포 아니면 암살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지난 6월28일에 군부에 의하여 축출된 셀라야 대통령은 3개월 만인 9월 21일에 영화에 나오는 극적인 장면 처럼 15시간 산길을 걸어서 온두라스에 귀국 했다. 셀라야 대통령은 그의 부인과 동반자 모두 4명과 함께 15시간 동안 산과 강을 건너 니카라과의 국경을 넘어 여러 번 차량을 갈아 타면서 극적으로 온두라스의 수도 테구시갈파로 잠입하여 브라질 대사관으로 들어가 신변 보호를 요청했다. 셀라야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귀국담화를 발표하면서 <나는 평화를 사랑하며 대화를 원한다> 라고 하면서 쿠테타 과도정부에게 폭력사태가 발생하지 않을 것 을 요구했다. 그는 또 <미주기구 OAC> 호세 미겔 인술사 회장과 온두라스 주재 유엔사무소 측과도 협의할 것을 요구 했다. 하지만 쿠테타 과도정부와 미국은 셀라야 대통령의 귀국과 귀국성명에 대하여 그저 냉담할 뿐이다. 미국 크리스천모니터는 <11월 선거를 앞둔 이 시점에 셀라야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귀국은 놀라운 도박이다> 라고 냉정한 반응을 보였다. 셀라야대통령이9월21일 귀국을 강행한 것은 유엔총회가 개최되는 시기를 앞둔 계획된 행동이 아닌가 하는 분석이 있다. 하지만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고의적으로 아주 대수롭지 않게 반응을 보이면서 상투적인 코스타리카의 아리아스 대통령의 꼭두각시 중재역할에 대해서만 언급을 할 뿐 이였다. 쿠테타 과도정부는 어떤 반응을 보였던가? 처음에는 셀라야 대통령의 귀국을 낭설 헛소문 이라고 부인 하다가 얼마 후에는 15시간 통행금지령을 전국에 내렸다.공항을 모두 철페하고 주요 고속도로에 검문소를 설치하여 삼엄한 분위기를 전국적으로 조성 했다. 남미 좌익 나라들의 국제적 압력에 대항하여 쿠테타 정권의 미첼리티 임시 대통령은 <외국의 간섭에 굴복하지 않겠다>라고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사실은 미국의 뒷밭침만을 믿고 있기 때문에 당당한 모습이다. 온두라스의 혼란은 극심해질 전망이다. 전국 교사노조6만 명은 셀라야 대통령의 귀국을 지지하면서 무기한 파업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온두라스 군부는 브라질 대사관을 포위하고 삼엄한 경계를 하고 시민들의 통행금지를 강요하고 있다. 미국이 은근히 쿠테타를 지지하고 있는 동안에 수 없이 많은 무명의 시민들이 쿠테타 군인들에 의하여 살해당하고 투옥되고 있었다. 쿠테타 군부는 군인들이 약탈행위와 여성들에게 무차별 강간을 밤낮 자행하고 있지만 군인들의 사기앙양 명목으로 처벌을 소홀히 하고 있다고 서방의 외신은 간략하게 보도하고 있었을 뿐이다. 미국은 쿠테타를 사전에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쿠테타 세력 굳히기를 위하여 교묘하게 양측의 대화를 요구하면서도 쿠테타 세력을 암묵적으로 동등한 당사자로 대우해 주면서 시간을 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지원하는 쿠테타세력을 반대하는 온두라스 민중들이 현재 온두라스 주요 도시에서 마다 꽉차 셀라야 대통령의 복귀를 열광적으로 요구하면서 시위를 벌리고 있다.위기는 기회라 했듯이 이러한 동향을 생각해 볼 때 1979년 부마사태와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연상하게 된다. 또한 2002년에 남미의 베네수엘라에서 차베스 대통령을 축출하려다 실패한 쿠테타를 회상하면서 온두라스 셀라야 대통령의 행운의 복귀를 기대해 본다. 이것이 온두라스의 숨겨진 진실이 아니겠는가?(끝) *필자소개: 유태영 고문은 1930년 9월27일 화해도 신천에서 출생하여 평양성화신학교를 수료하고 대한예수교장로교 총회신학을 졸업, 미국 드류대 목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70년부터 베드포드 팍 장로교회에서 시무하다고 30년 목회생활을 정리하고 2000년 은퇴했다. 그는 그 동안 뉴욕지구 한인교회협의회 회장, 뉴욕목요기도회 회장, 국가보안법철폐 및 양심수석방을 위한 미국운동본부 뉴욕지역위 위원장, 1990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재미본부 공동의장을 15년동안 역임해 오다가 지난 해 고문을 맡고 있다. 그는 또 재미동포전국연합회 수석부회장, 동부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해 왔다.지금은 <민족통신> 논설위원으로 선우학원 박사와 함께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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