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132년 식민지 생활 겪은 <알제리><br><br>"친일파 같은 <하르키…
페이지 정보
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0-08-13 09:55 조회3,852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이번에 49번째 나라로 <알제리>에 대해 다루면서 "8.15광복절
65주년을 맞는 시기에 <알제리>문제를 다루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알제리는 우선 프랑스에 의해
무려 132년 동안이나 식민지 생활을 한 나라이다. 그리고 이 나라에도 우리나라와 같이 일제시대에 일본에
충성하고 아첨아부한 친일파 같은 반민족 세력인, ‘하르키’라는 무리들이 있어 이것을 염두에 두고 이 나라를
살펴 보았다"고 설명한다.이 글을 여기에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65주년을 맞는 시기에 <알제리>문제를 다루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알제리는 우선 프랑스에 의해
무려 132년 동안이나 식민지 생활을 한 나라이다. 그리고 이 나라에도 우리나라와 같이 일제시대에 일본에
충성하고 아첨아부한 친일파 같은 반민족 세력인, ‘하르키’라는 무리들이 있어 이것을 염두에 두고 이 나라를
살펴 보았다"고 설명한다.이 글을 여기에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연재]132년 식민지 생활 겪은 <알제리> 친일파 같은 <하르키>15만명 처형 친프랑스 반민족적 “하르키” 15만명 처형 친일파가 잘사는 남한과는 딴판 <##IMAGE##> 8.15광복절 65주년을 맞는 시기에 <알제리>문제를 다루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알제리는 우선 프랑스에 의해 무려 132년 동안이나 식민지 생활을 한 나라이다. 그리고 이 나라에도 우리나라와 같이 일제시대에 일본에 충성하고 아첨아부한 친일파 같은 반민족 세력인, ‘하르키’라는 무리들이 있어 이것을 염두에 두고 이 나라를 살펴 보았다. 알제리가 하르키 15만명을 처형했다는 역사를 접하면서 우리의 해방정국과 함께 등장한 이승만과 그를 지원한 미군이 <반민특위>까지 백색테러로 탄압하면서 친일매국 세력을 청산하려는 반민족처벌특별위원회와 그 인맥들을 살해하고 해체시켰다는 역사와 대조를 이뤄 한층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선 프랑스가 걸어 온 발자취를 알아본다. 1830년에 프랑스가 알제리를 강점하여 132년 동안 식민지로 삼았다. 그런데 그당시 프랑스 내각 수반을 두 번 역임한 쥘 페리 수상은 프랑스의 식민지 팽창 정책을 정당화 하고 옹호하는 연설을 의회에서 했다 그의 연설을 간략하게 요점을 소개한다. <<여러분, 프랑스의 식민지 팽창정책은 경제, 사상, 문명을 최대한 널리 전파하는데 있어서 절대로 중요한 정책입니다. 독일과 영국 그리고 미국과의 무역 경쟁을 하기 위하여 프랑스는 반드시 출구를 넓혀야 합니다. 이러한 시안들은 식민지 팽창정책과 긴밀히 연결되여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프랑스인들은 보다 정직하게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들 “고급인종” 들은 사실 아프리카와 동방의 월남등 미개한 나라들의 “저급인종”들에 대하여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터놓고 말을 해야만 합니다. 프랑스는 우월한 고급민족으로서 권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열등한 민족들을 문명화 해야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분, 프랑스의 식민지 팽창을 위하여 프랑스 해군은 공해에서 안전기착기지와 방어기지 그리고 보급기지들을 확보하기 위하여 프랑스해군은 사이공과 인도차이나, 튀니지, 마다가스카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해군의 관점에서 반드시 필요하고 중요한 조치입니다. 여러분, 만일 프랑스가 유럽과 세계무대에의 치열한 경쟁가운데서 철수한다든가 혹은 기권정책을 취한다면 그것은 오직 프랑스의 망국의 지름 길이 될뿐 입니다. 프랑스가 위대한 나라가 되는 길은 유럽의 동맹국들 보다 더 앞서서 아프리카와 동방으로 식민지 팽창을 힘차게 열어 나감에 있습니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침공하여 식민지로 삼았으며 1830년에는 알제리를 침공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침공하기 위하여 전함 103척, 포함 500척 그 리고 병력 37,000명을 투입시켰다. 1830년 7월 5일에 프랑스는 오스만 터키를 알제리에서 몰아냈다. 알제리 태수는 프랑스에 대한 항복협정서에 서명을 했다. 그리고 프랑스는 1879년에는 알제리 식민 통치수단으로 “크레미유 법”을 제정하여 그당시 알제리에 살고 있던 3만 5 천명의 유태인들에게 특별 대우를 하여 시민권을 우선으로 부여하는 차별 정책을 시행 했다. 알제리는 코리아반도의 11배되는 큰 면적을 가지고 있으며 아프리카에서 수단 다음으로 면적이 넓은 나라이다. 알제리는 리비아, 니제르, 말리, 모로코, 모르타니아, 튀니지 그리고 서사하라등 이웃 나라들과 넓은 지역의 국경선을 가지고 있다. 주민의 90%가 이슬람 교도이며 국민의 대부분이 아랍화되여 있다. 그 밖에 유대교와 기독교가 있으며 국어는 아랍어이고 원주민 베르베르족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투아레그족과 수단계의 아프리카 흑인 혼혈족이 사하라사막 지대에 퍼져 살고 있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약 50-70만년 전에 알제리에 직립 원시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입증하고 있으며 BC 12세기경에 페니기아인들이 침입하였고 그후에 카르타고의 지배에 들어 갔으며 기원전(BC) 2세기에는 로마제국의 침략을 받았다. 그러나 알제리는 7세기에 이르러서 아랍인의 침략을 받아 이슬람화가 시작되였고 한때 이슬람 우마이야드족이 지배했으며 그후 11세기에는 이슬람 여러 다른 왕조들이 바뀌면서 15세기까지 알제리를 지배하면서 이슬람 전성기를 이루고 있었다. 1515년에는 알제리가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 갔으며 오스만은 총독부를 설치하여 총독으로 데이(Day)를 임명하여 세습으로 계승하여 알제리를 통치하도록 했으며 알제리와 모로코를 통합하여 식민통치를 오래 동안 계속했다. 17세기에 이르러서 오스만 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육상교역은 쇠퇴해지고 해상교역이 활발해짐에 따라서 해적을 토벌하는 열강들 사이에 전투가 맹렬히 벌어지고 있었다. 1830년에 프랑스는 해적을 제압한다는 이유를 핑계삼아 알제리에 프랑스 원정군을 상륙시키고 오스만의 데이정권을 격파시킨 후에 알제리를 완전히 점령하고 오스만 터키를 알제리에서 부터 완저히 몰아 냈다. 1830년 7월5일에 알제리 태수는 프랑스에 대한 “항복 협정서”에 서명함으로써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지배시대의 막이 열렸고 이후 132년 동안 프랑스의 알제리식민통치는 계속 되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식민 폭정에 대한 알제리 최초의 저항은 알제리 민족해방운동의 선구자인 압델 카테르 투사의 등장으로 시작 되었다. 프랑스 식민통치에 대한 무장투쟁이 1837년부터 시작되여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특히 서 사하라에서 프랑스는 식민통치에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었다. 하지만 압델 카테르 투사의 알제리 민족해방운동은 성공하지 못하고 1847년에 프랑스군에 체포되여 다마스커스로 유배되여 사라져 없어지고 그후 무장투쟁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프랑스는 알제리의 모든 산림과 농토를 프랑스의 국유화로 전환하여 프랑스의 경제발전에 부를 더해주는 식민통치를 아무 어려움 없이 시작 했다. 프랑스인들이 알제리로 이주해 옴으로 1860년경에 유럽인구는 19만영으로 급증했으며 유대인 수도 35,000명 이었다. 프랑스 식민통치자들은 알제리인의 귀중한 농토 550,000 헥타르를 몰수하여 프랑스 이주자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했다. 1881년에 프랑스는 알제리인들이 이슬람교를 포기하지 않으면 프랑스 시민권을 획득할 수 없으며, 알제리 본토인들은 무기도 소유할 수 없도록 법을 제정했으며 통행증 없이는 통행할 수 없는 법률등 27개조 조항을 만들어 놓고 통치수단으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알제리 출생인들에 대한 귀화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에는 알제리 청년 173,000명을 강제로 징집하여 26,000명을 죽음으로 몰았다. 프랑스는 그 당시 알제리의 유용한 토지를 빼앗아 강점하고 있었다. 1930년의 통계에 의하면 알제리의 거주하고 있는 26,000명의 프랑스인들이 알제리의 국토 40%에 해당하는 2,5000,000헥타르의 유용한 토지를 독점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1930년에 프랑스는 알제리 침공과 식민통치 100주년을 맞아 이를 축하하면서 대규모로 <식민지 박람회>를 파리에서 개최했다. 프랑스의 의도는 식민주의를 정당화하고 세계에 과시함으로써 알제리와 프랑스와의 관계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프랑스의 자존심을 유럽인들의 마음속에 스며들게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에는 알제리인 15만명이 프랑스군으로 참전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드골의 망명정부의 본거지로 알제리를 이용했으며 미국,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알제리를 작전지로 활용 하고 있었다. 프랑스 드골은 독일에 대한 레지스탕스의 근거지로 알제리를 할용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지 통치시대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알제리인 700만명에 프랑스인들은 100만명 이상 이였는데 그 비율은 7:1의 비율 이었다. 이것은 프랑스의 알제리에 대한 식민지 동화정책이 어떠했는가 하는것을 가히 잘 말 해주고 있다. 1919년에 일본의 조선침략에 항거하여 우리 동포들이 <조선독립만세 3.1운동>을 일으켰듯이 알제리에서도 프랑스의 침략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이 100년이 지난 후에야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알제리 독립운동의 수장인 칼레드의 지도하에 <알제리 청년 운동>이 처음 창설 된 것은 1912년이었다. 그리고 그때 또한 북아프리카 무슬림 대학생연합 (AEMNAF)이 창설되었다. 1914년에는 알제리인들의 <메카 순래>를 금지하는 법령이 완전히 철폐됨으로써 그동안 금지되었던 알제리 이슬람 교도들의 숙원인 메카 순례가 가능해 졌다. 1926년에는 알제리 민족운동 지도자 메살리 핫지에 의하여 현지 토착민들의 조직인 <북아프리카의 별>이 창설됨으로 알제리 독립운동은 지하에서 지상으로 활발하게 출현하기 시작했다. 그 운동이 일환으로 문화운동도 활발해졌다. 1932년에 아프리카 독립정신을 상징하는 <네그리튜드 운동>의 시작으로 알제리에서 대표적인 유명한 작품들이 발표되었다; <가려진 얼굴 닫힌 영혼> <정당한 방어> <흑인 대학생>등의 명작품들이 계속 발표되었고, 그 후 5년뒤인 1937년에는 독립운동가 아하메드 메살리가 <알제리 인민당>을 창설했으며 이어서 민족운동 단체들이 3개 분파로 형성발전 되었다. 1943년에는 독립운동가 압버스가 알제리 인민들의 정치적 자결권을 요구하는 <알제리인 성명문>을 선포했다. 이때 드골은 알제리에 대한 <식민정책 변혁>을 예고하는 암시적 발언을 했는데 드골의 콘스탄트노이스에서 행한 연설은 알제리 독립운동에 큰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다. 그 결과 1944년 3월 7일에는 프랑스 정부가 무슬림을 차벌하는 예외적 악법조항을 철페시키는 형식적 조치를 취함으로서 시대적 변화의 서광이 나타났다. 1945년 5월 8일을 기점으로 하여 알제리 민족주의자들은 총력투쟁의 봉기를 일으켰다. 그 봉기는 드디어 알제리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 났다. 세티프에서, 겔마에서, 케라타에서, 알제에서, 보네에서, 콘스탄트노이스에서, 바트나에서, 비스코라에서 봉기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마치도 조선반도에서 3. 1운동, 광주학생운동 등이 일어났던것 처럼 알제리에서도 반프랑스 항쟁이 전국적으로 일어 났다. 그 결과 프랑스인 124명이 사망하고, 110명이 부상 당했다. 이러한 불상사는 다만 항쟁의 초기에 발생한 희생이였다. 한편 프랑스 군부의 초기의 무력진압은 민중항쟁이 절정에 이름에 따라서 점점 더 잔인해 졌는데 프랑스의 고급 문명인의 모습과 기독교의 자선은 찾아 볼 수 없었다. 1945년 5월에 시작된 봉기로 인하여 이른바 <세티프 학살>에 죽임을 당한 알제리 민중의 수는 45,000명이다. 하지만 프랑스는 1,500명이라고 사망자수를 축 소하여 발표했다. 당시 프랑스의 잔악성은 더욱더 폭로되었다. 이에 대하여 후에 역사가들은 <세티프 학살>의 희생자 수는 알제리인 18,000명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어쨋던 <세티프 학살> 사건은 알제리의 독립운동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점 되었다. 1950년에는 알제리 전투조직(OS)이 창설되었고, 민족 해방전선 (FLN)이 창건되었으며 또한 민족해방군(ALN)이 결성 되었다. 1954년 3월에는 알제리 <혁명통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그 이후 1954년 11월 1일에는 드디어 알제리 독립운동의 역사적인 날이 도래했다. 알제리는 드디어 <독립전쟁>을 개전 하기위해 프랑스를 향하여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당시 알제리 독립군의 총 병력은 13만명 이였다. 독립전쟁은 8년 동안 계속 되었다. 알제리 독립군 총 병력 13만명을 대항하여 프랑스는 NATO의 지원을 받으면서 80만명의 병력을 동원했고, 5조 프랑의 군사비를 투입했다. 그당시 프랑스 의회는 우파 강경파들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알제리에 대한 온건 정책을 극구 반대하면서 추가로 군인 40만 명이상을 징집하고 있었다. 1956년 당시에는 영국이 프랑스를 지원하면서 전쟁에 개입하고 있었다. 1956년에 프랑스 정부와 군부 사이에 알제리 전쟁문제로 갈등이 증폭되고 있었는데 정계에서 은퇴한 드골이 등장하여 강경파와 온거파 양편의 중계를 위해 전권을 부여받고 있었다. 드골은 알제리에게 자결권을 허용하자고 군부에 충고했는데 군부는 결사 반대했다. 하지만 드골은 1960년 6월 14일에 알제리 혁명군에게 정전 협상을 제안하여 난관을 속히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그리하여 1960년 12월 19일에 유엔 총회는 알제리의 자결권과 독립권을 인정하는 발표를 하였지만 이것은 당시 전혀 실효성 없는 헛소리에 불과했다. 그 이듬해인 1961년 4월에는 알제리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 장성들이 프랑스 정부가 드골의 정전제안을 받아들여 알제리 해방군과 정전협정을 맺으려는 동향에 대하여 결사 반대하여 쿠테타를 일으키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 병사들이 전혀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쿠테타 음모는 실패했다. 이에 격분한 드골은 쿠테타 음모를 꾸민 장교들을 군사 재판으로 엄하게 처벌했다. 쿠테타를 꾸민 장성들과 고급장교들은 파면과 함께 투옥되고, 처벌을 받았다. 1962년 3월에는 휴전과 함께 알제리의 독립을 약속하는 <에비안 협정>이 체결되여 독립전쟁은 종결되었고 1962년 7월 1일에 알제리 민족 자결권에 대한 알제리 국민 투표가 실시되어 95%의 찬성으로 그해 7월 5일 역사적인 알제리 독립이 드디어 선포되었다. 프랑스가 알제리를 강점한 후부터 132년 동안 계속한 식민통치는 드디어 1962년에 끝이 났다. 이러한 결과는 알제리 국민과 민중들의 민족의식이 형성됨으로써 비로소 자주독립이 쟁취되었다. 그 동안 독립을 위한 전면전으로 알제리 민중 100만명이 죽었고, 70만 명이 투옥을 당했다. 프랑스군도 1만 2천명이 사망했다. 알제리가 독립을 쟁취한 후에 37년 동안 프랑스는 알제리에 대하여 아무 말이 없었다. 한편 독일 정부는 나치가 프랑스인을 대량 학살한데 대하여 용서를 구했는데, 어찌하여 프랑스는 알제리인들을 학살했음에도 이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지 않았는가. 이와 같은 따가운 국제적 여론에 못이겨 1999년 6월에 프랑스 사회당이 집권에 성공한 후에야 비로서 프랑스는 알제리에 대한 침략과 전쟁, 그리고 양민학살에 대하여 프랑스의 과오와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했다. 프랑스와 알제리 두 나라 사이에서 기회주의적 행동과 반민족적 반역자 노릇을 자행한 약 20만 명의 알제리인들을 가리켜서 <하르키>라고 부른다. 하르키는 자기자신이 혈통으로는 틀림 없는 알제리 민족성원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인처럼 행세하면서 민족반역자들이 되고 있었다. 특히 1954년에 시작하여 8년동안 계속한 알제리 민족해방전쟁 때 20만 명의 하르키들은 프랑스 편에 서서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에 대항하여 싸웠다. 20만 명의 하르키들의 가족까지 합친다면 약 160만명의 하르키들이 알제리에서 프랑스편에 서서 프랑스를 돕고 있었다. 하르키는 마치 조선인들이 일제시대 친일 노릇으로 일제에 아첨아부하던 세력과 유사하기도 했다. 민족해방전쟁이 알제리의 숭리로 끝나자, 그 동안 독립을 쟁취한 후에 프랑스에 충성한 하르키들은 길거리에 끌려 나와 몰매를 맞고 돌팔매질에 맞아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20만명의 하르키 중에서 약 15만명은 공식적으로 민족반역적 행위에 대하여 법적 혹은 초법적으로 처형을 받았다. 그리고 간신히 처벌과 처형을 면한 하르키들은 약 3만여명이 구사일생으로 프랑스로 도망하여 지금까지 프랑스에서 생존하고 있다. 그런데 프랑스에 충성한 하르키들이 구사일생으로 프랑스로 건너 가기는 했지만 하르키들이 오늘 프랑스에서 어떻게 살아 가고 있는가? 프랑스에서 태어난 하르키들의 2세와 3세들은 지금 프랑스에서 어떻게 살아 가고 있는가? 프랑스 정부는 알제리의 하르키들을 도대체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 프랑스에서 생활하는 하르키들의 운명은 참으로 비참하다. 프랑스에 건너온 하르키들은 겨우 프랑스의 합법적인 주민으로 <주거 신분증>을 얻기는 했지만 프랑스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충성한 하르키들은 처음 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버린 헌신짝의 신세가 되었고, 프랑스의 귀찮은 불청객들이 되고 말았다. 하르키들은 프랑스에서 버림받은 채 도시 주변의 빈민굴에 정착하여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다. 하르키들은 피부 색갈로는 백인들이다. 하지만 하르키들은 아프리카 식민지의 태생이라 하여 <검은 발> 이라는 운명적 차별을 프랑스에서 받고 있다. 하르키들은 백인처럼 행세하여 좋은 직장에 취직이 되었지만 만일 직장에서 <검은 발> 이라는 사실이 폭로되고 밝혀지면 그 자리에 붙어 있기 쉽지 않을 정도로 차별대우를 받는다. 프랑스에서 알제리 하르키 2세, 3세들은 도시 변두리에서 범죄와 폭력의 유혹에 빠지고 학교도 중도에 떠나는 일이 흔하였다. 그들은 백인 주류사회에서 <검은 발>의 후손으로 정체성의 혼돈을 겪고 있다. 프랑스 인구 6,000만 명중에서 약 500만 명(8%)이 이주민들이다. 이 500만 명의 이주민들이 오늘 프랑스에서 소요를 일으켜 국가적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소요를 일으키고 있는 문제의 이주민들 중에서 하르키들은 더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오늘 프랑스 사회에서 하르키 후손들을 가리켜 <뵈르 Beur>라고 부르고 있다. 프랑스의 실직자들의 35%가 뵈르들인데 만일 뵈르들이 취직을 하려고 이력에 거짓으로 프랑스식 이름을 가록했다가 발견되면 곧 거절을 당한다. 노벨상 수상자 까뮈는 알제리 침략자 프랑스인 3세로써 알제리에서 태여 났다. 그의 명작 <이방인> <페스트>는 둘 다 알제리를 무대로한 작품들이다. 그럼으로 까뮈도 알제리 <검은 발>이라는 비아냥적인 소리를 듣고 있다. 하지만 진짜 알제리에서는 까뮈에 대하여 매우 냉담하다. 까뮈는 알제리 무장 항쟁 8년 전쟁에 대하여 말하기를 <하나의 불의를 바로잡기 위해 또다른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라고 말했다. 까뮈는 이런 말을 함으로 인하여 그는 알제리의 <해방무장투쟁>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면서 프랑스의 식민지 침략행위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이런 발언 때문에 까뮈의 정체성에는 문제가 있다고 비판을 받고 있었다. 까뮈는 1962년에 알제리가 무장투쟁의 승리로 독립을 쟁취하기 바로 2년 전인 1960년에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만일 그가 살아 있었다면 알제리의 무장 투쟁의 승리와 독립에 대하여 뭐라고 말을 했을까 하고 모두 궁금해 하고 있다. 어쨋든 까뮈는 알제리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은것은 사실임으로 분명히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까뮈가 FLN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데 대하여 까뮈는 흥분 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 했다. <나는 정의의 편에 선다. 그러나 만일 정의와 내 어머니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면, 나는 어머니를 택한다> 까뮈가 죽은 후에 까뮈를 위해 세운 기념비는 박살이 났고, 이방인 소설에 등장하는 알제리 현지의 거리 이름이 프랑스 이름으로 되어있는 곳들은 모두 다 알제리 이름으로 고쳐 졌다고 한다. 까뮈의 명성보다 더 유명하여 프랑스와 알제리 모두 양편에서 칭송을 받는 사람 이 있다. 그 사람는 프랑스의 축구 스타 “지단”이다. 지단은 알제리 하르키의 후손인 <검은 발>이다. 하지만 지단은 프랑스 국가의 유공자로 대우를 받고 있다. 지단은 프랑스와 알제 리 이중국적을 가지고 있음으로 최근 알제리가 월드컵에서 잉글랜드와 맞붙는데 그는 알제리를 도우려 나서기도 했다. 까뮈보다 지단은 더 솔직하다. 그러면 남한의 친일파들은 어떠한가? 우리 나라로 치자면 일정 때 친일파들은 모두 다 <남한판 하르키>들이다. 남한판 ‘하르키’들은 분명히 조선 민족의 핏줄을 이어 받은 조선사람들인 것이 확실 한데 이들은 일본제국주의에 충성하면서 일본의 한일합방을 열렬히 지지하고 일본에 충성 했다. 일본을 찬양하는 소설과 시를 쓰고 일본에 아부하는 노래도 작사 작곡하여 일본사람 처럼 행세를 했다. 남한의 친일파 하르키들의 자식들은 소학교, 중학교와 대학을 호화롭게 졸업하고 지식인들이 되였고 부자들이 되었다. 그리고 8.15 해방후에 친일파 부자들과 자식 인들은 미군정의 보호와 함께 이승만 정권과 합세하여 특권과 특별 대우를 누리면서 이른바 ‘대한민국 건국의 중요한 애국자들’처럼 부상했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부귀를 누리던 친일파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또한 일본군 장교로 복무한 박정희가 쿠테타를 통해 대통령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가하면 오늘 날 이명박 정부는 그 어느 때 보다 사대주의 외교를 벌이면서 화해하고 협력해야 할 이북을 적대시하면서 미군과 일본까지 끌어들어 북을 침략할 각본에 의해 미국의 핵항공모함까지 동원한 합동군사훈련을 벌이기도 했다.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 세력은 과거 그 어느 정권보다 노골적인 사대매국 정권으로 비판받고 있다. 특히 남한의 대표적 하르키로는 이명박 대통령 부부가 꼽히고 있다. 이들 부부는 일본의 천황 <덴노헤이가>를 접견하면서 허리를 아래 깊숙히 굽혀가며 아부하는 모습들이 뉴스에 반영되어 해 내외동포들로부터 빈축을 사기도 했다. 알제리의 하르키들의 운명에 비교하면 남한의 하르키들은 딴판이다. 남한 친일파들은 아직도 청산되지 않고 남한 기득권 세력의 중심에 있는 한심한 상황이 바로 남한의 현주소이다. 다시 말하면 남한은 여전히 하르키들의 천국이 된 꼴이다. 알제리 국민들은 독립을 쟁취하고 1962년 9월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그동안 독립투쟁에 공헌한 국민해방전선 (FLN)이 승리하여 압바스를 초대 대통령으로 세우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 했다. 그 다음해인 1963년 9월에 압바스 초대 대통령은 퇴진하고 벤벨라 국무총리가 제 2 대 대통령이 되어 사회주의 체제의 기초를 다졌다. 그러나 1965년 6월에 군부의 무혈 쿠테타가 일어났다. 국방장관인 부메디엔이 제 3 대 대통령이 되었다. 부메디엔 대통령은 알제리식 사회주의국가를 세운다 고 주장하면서도 헌법을 개정하여 변형된 사회주의 제도를 실시하다가 1978년 12월에 갑작스럽게 사망 했다. 그의 죽음은 아직도 의문사로 남아있다. 알제리에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한다. 1979년 2월에 이슬람 <국제전선, FIS>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샤도리가 제4대 대통령이 되었다. 샤도리 대통령은 알제리 독립 투쟁에 평생을 공헌한 애국자들의 <국민해방전선 FLN>을 무시하고 새로운 정치세력인 <구제전선 FIS>를 내세웠다. 그는 기존의 교조주의적 사회주의는 탈피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에 해당되는 법규들을 개정하고 새로운 헌법 개헌을 통해 새로운 체제를 시도한다. 알제리는 경제난에 봉착한다. 그래서 1988년 10월에 이르러서 경제악화와 빈부격차로 인한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여 노동자들이 중심된 폭동이 일어났다. 이에 당황한 샤도리 대통령은 노동자들의 폭동을 정치적 강압책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헌법개혁을 강행하고 의회가 복수정당을 인정하도록 지시하고 새로운 선거법을 도입했다. 샤도리 대통령은 이렇한 흉계를 감행하면서 알제리 독립투사들의 정치적 세력의 기반인 <국민해방전선, FLN>의 존재 뿌리를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샤도리 대통령의 야욕과 흉계는 민심을 잃어가면서 좌절되고 말았다. 1992년에 실시한 의회 선거에서 샤도리 대통령은 참패하고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그러자 곧 이어 군부가 알제리 수도를 장악했다. 하지만 군병력을 대항하여 싸우는 FSI의 강경 투쟁도 만만치 않게 지속되여 유혈사태가 장기화 되었다. 이 사태로 주민 수만 명이 사망하고 알제리 사회는 혼돈으로 빠져들었다. 이 과정에서 알제리는 1995년에 역사상 최초로 다당제 선거를 실시한다. 여러 명의 대통령 후보자들이 나와 혼전을 벌였다. 여기에서 제루알이 제 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새로 취임한 제루알 대통령은 5년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그만 물러나고 말았다. 그래서 1999년 4월에 다시 실시한 대선에서 <국민민주연합 RND>의 후보자인 부테플리카 후보자가 당선되여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부테를리카 대통령은 2004년에도 유권자의 85% 지지로 재선되었고, 2009년 4월 9일에 치려진 대선에서도 당선되어 3선 대통령으로 자리잡았다. 정치적 안정이 정착된 상황으로 보이지만 그 내막은 여전히 복잡성을 띄고 있다. 금년 나이 72세인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2014년까지 알제리의 권좌를 지키게 된다. 1962년에 독립을 쟁취한 알제리는 바로 3년후인 1965년에 군부의 쿠테타로 시 작된 분열과 분쟁이 34년동안 이나 계속되었다. 1954년에 시작하여 6년 동안 프랑 스와 싸운 독립전쟁 그리고 독립을 쟁취한 후에 내부의 소요로 8년동안 내전을 치룬 알제리는 옛날에 유명했던 최고의 기독교 성자 성 어거스틴의 고향이며 <이방인>이라는 소설을 쓴 작가 까뮈와 축구 스타 ‘지단’의 고향이기도 하다. 알제리는 석유와 가스자원이 엄청나고 아직도 미개발된 자원이 가득한 나라이다. 프랑스는 아직도 알제리를 포기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고 있는 눈치를 보인다. 그 뿐만 아니라 석유자원과 풍부한 지하자원 때문에 미국과 다른 서방 나라들도 알제리의 풍부한 지하자원에 눈독을 드리고 있는 형국이다. 오늘 알제리의 석유산업은 이 나라의 생명이라고 볼 수 있다. 알제리는 아프리카의 주된 석유 및 개스 생산국으로서 2003년 발표에 의하면 총18억 바렐의 원유를 획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천연가스도 유럽연합의 총수요의 25%를 알제리가 공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알제리에는 허다한 문제들이 쌓여 있다. 필자가 꼬집어 낸 제일 큰 문제는 알제인들의 ‘정체성의 상실’이다. 130년 동안에 걸친 프랑스의 식민 통치의 결과로 보여진다. 프랑스의 오랜 동화정책으로 인하여 알제리인들이 전통을 잃었는데 하류층 보다 오히려 상류층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혼돈하고 있다. 알제리 부유층들은 프랑스에서 못된 것들을 모두 배워서 지금도 흉내 내고 있는 실정으로 분석된다. 독립 후에 초기 정부가 추진한 고상하고 이상적인 이슬람식 사회주의적 유산들은 사라지고 퇴폐한 자본주의 부패한 문화들이 알제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것도 알제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오늘의 알제리는 또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사회문제로 나타난다. 이 밖에 현역 군인들에 대한 과도한 대우, 고위 관리와 정치인들의 부와 기득권과 서민들의 가난은 대조를 이룬다. 그럼에도 국가예산은 가진자들에게 유리하게 편성되고 있다. 빈민촌에 거주하고 있는 30%에 육박하고 있는 실업자들 문제는 알제리가 석유수출로 벌어들이는 막대한 돈과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거액의 돈은 이들 가난한 알제리인들에게는 배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알제리 집권층은 이러한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일체 침묵하며 외면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이슬람 반제반미>세력들의 온상이 되고 있을 뿐이다. 이슬람 반제반미 세력의 극단적 행동이 언제 어디서 터져 나올지에 대한 해답은 오직 3선에 성공하여 2014년까지 권좌를 지키게 된 부테플리카 대통령이 서구정치세력의 포위 속에서 알제리의 운명을 앞으로 어떻게 풀어 나갈 것이냐에 달려 있다.(끝)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