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87] 지중해 전통과 소련 문화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알바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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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2-04-07 07:36 조회2,49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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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87번째 나라로 수천년 동안 발칸 반도에서 서구 열강들에게
시달려온 알바니아를 다뤘다. 그는 "알바니아는 수천년 동안 발칸 반도에서 서구 열강들에게 시달려 오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4년에 비로서 외국의 도움 없이 민족해방전선이 외세를 몰아내고 공산주의
국가로 독립을 쟁취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60년대에는 모택동의 문화혁명과 함께 동반자가 되여 일대
변혁을 이르키기도 했다" 그 전문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시달려온 알바니아를 다뤘다. 그는 "알바니아는 수천년 동안 발칸 반도에서 서구 열강들에게 시달려 오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4년에 비로서 외국의 도움 없이 민족해방전선이 외세를 몰아내고 공산주의
국가로 독립을 쟁취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60년대에는 모택동의 문화혁명과 함께 동반자가 되여 일대
변혁을 이르키기도 했다" 그 전문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연재-87] 지중해 전통과 소련 문화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알바니아 <##IMAGE##>알바니아는 수천년 동안 발칸 반도에서 서구 열강들에게 시달려 오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4년에 비로서 외국의 도움 없이 민족해방전선이 외세를 몰아내고 공산주의 국가로 독립을 쟁취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60년대에는 모택동의 문화혁명과 함께 동반자가 되여 일대 변혁을 이르키기도 했다. 하지만 알바니아는 오랫동안 가난과 전쟁으로 인하여 야기된 사회적 불안에 대하여 미국을 비롯한 유럽의 열강들은 틈틈이 끼어 들어 알바니아의 사회주의 정권을 사정 없이 흔들어 놓은 것이 독립이후에 지난 날의 역사이며 오늘의 현실이다. 알바니아는 발칸 반도의 동남부에 위치한 매우 작은 나라이다. 면적은 2만 8748km2 이며 조선반도의 경기도와 강원도를 합친 정도이며 국토의 대부분이 산악지대로 이루어진 매우 가난한 나라이다. 인구는 3,800,000명이다. 종교는 수니파 이슬람교가 인구의 70%를 차지하고 있으며 동방 그리스 정교회가 20%로 양대 종교를 이루고 있다. 로마 캐톨릭은 10%에불과하여 종교적으로 유럽의 문화와 정치적 영향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오늘의 알바니아인의 조상인 일리리아인 (Illyrian)은 BC 2000년 경에 중앙 유럽에서 부터 발원하여 이 땅에 정착했으며 주위에 있는 호전적인 나라들과 필연적으로 전쟁에 휘말린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알바니아는 발칸반도를 점령하려는 외세들의 교도부가 되고 있었음으로 2000년이상 외세의 침략을 받았으며 이에 대항하여 항상 맹렬히 저항해 왔다. BC 228년에 강성 로마 제국이 군함 200척을 앞세워 알비바니아 북부를 침공했으며 BC 168년에는 급기야 알바니아는 로마제국에 합병됬다. 그 후 알바니아는 560년 동안 로마제국의 속국이 되여 통치를 받았다. 로마제국이 쇠퇴기에 이르게 되자 알바니아는 AD 395년에 로마제국의 통치에서 부터 벗어 났다. 하지만 560년 동안이나 로마의 지배를 받아 온 후유증으로 인하여 복쪽은 로마 캐톨릭 교회의 지배하에 처해 있었고 남쪽은 그리스 정교회의 영향권에 속해 있는 기현상이 조성되고 있었다. 이리하여 알바니아는 로마제국이 떠나간 후에도 종교적인 분파가 대립하는 후유증을 오래 동안 알코 있었다. 로마제국이 쇠퇴한 후에 알바니아에 등장한 지배세력은 고트족과 훈족과 그리고 슬라브족이였다. 알바니아는 AD 395년에 로마제국이 떠나간 후부터 1385년 까지 길고 긴 990년 동안을 ㄱ.고트족 ㄴ,훈족 ㄷ. 슬라브족의 지배를 받았다. ㄱ. 고트 (Goth)족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기원한 게르만족의 일파이며 매우 호전적이다. 고트족은 로마제국의 일부를 점령하기도 했으며 슬라브족의 뒤를 따라 발칸 반도 전역에 이르렀으며 오랜 기간에 알바니아를 점령하고 지배했다. ㄴ. 알바니아를 한때 지배한 세력은 훈족이었다. 훈족의 통치자는 아틸라 라고 하는 명장이었다. 아틸라는 역사적 인물로 칭기스칸과 알렉산더 대왕과 그리고 아틸라 (395-453) 3인을 그 때 당시 명장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이 3인은 세계적으로 역사에서 유명한 통치자들로 등장하고 이었다.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민족은 게르만족인데 이 게르만족을 대이동 하도록 촉발시킨 장군이 바로 훈족의 지도지 아틸라 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훈족의 본래 기원지는 아시아라고 한다. 그 때 당시 아시아의 훈족은 전 유럽을 떨게하는 맹렬한 위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훈족은 위세를 떨치다가 100여년 후에 살아졌는데 서구의 기독교인들의 적대적인 편견은 훈족을 야만인으로 보았다. 서구의 기독교인들은 죄 많은 로마제국을 심판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훈족의 아틸라를 지상에 내려 보내 로마를 심판하도록 도구로 삼았다고 주장했다. 서구의 기독교인들의 역사관은 매사에 있어서 “아전인수”식으로 이기주의적으로 해석을 하고 있다. 독일의 TV ZDF의 다큐멘터리 시리즈 “역사의 비밀”에 의하면 훈족의 기원은 분명히 아시아 유목민 이라고 추적했다. 실제로 신라인과 가야인의 생긴 모습이 훈족의 모습과 꼭 같다. 뿐만 아니라 훈족의 유물인 편두, 금관, 머리장식물들이 신라와 가야국의 유뮤들과 꼭 같은 것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필자는 여기서 광개토대왕 시대와 고구려가 차지했던 광대한 영토가 서방에 까지이르렀던 것에 대한 역사를 일일히 다 말할 수 없다. 하지만 한가지를 분명히 밝히는 것은 훈족은 분명히 아시아의 “조선민족의 일파”로 여겨진다는 사실이다. 김진산 화백이 그린 훈족의 추장인 아틸라의 초상화는 분명히 조선사람의 모습그대로 이다. 그리고 오늘 유럽에 살고 있는 훈족의 후손들에게서 “몽골 반점”이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ㄷ. 알바니아를 지배한 침략자는 세번째로 발칸 반도의 슬라브 족이었다. 슬라브족중에서 특히 세르비아가 알바니아를 1389년 까지 지배했다. 그런데 1389년에 이르러서 오스만 제국이 발칸 반도 전역을 점령하는 시대가 전개됬다. 그럼으로 알바니아에 대한 세르비아의 통치권은 저절로 끝장이 나고 말았다.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에 밀려서 알바니아에서 떠나 갈 수 밖에 없었다. 알바니아의 기구한 운명의 역사는 계속된다. 이번에는 또 다시 오스만 제국의 가혹한 식민지가 됬다. 알바니아는 1389년 부터 1912년 까지 523년 동안 또다시 오스만 제국의 식민지가 되여 통치를 받고 있었다. 알바니아가 수니파 이슬람국인 오스만 제국의 식민지를 523년 동안이나 받고 있었기 때문에 알바니아 인구의 70%가 수니파 이슬람 교도들이 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가히 이해할 수 있다. 알바니아는 고대로 부터 1900년대에 이르기 까지의 길고 긴 역사를 보면 그야말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는 수난의 역사 뿐이었다. 알비니아의 수난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다시 본다. 1) 알비니아의 기원 BC 2000년경에 중앙 유럽에서 발원하여 이주 정착 2) 로마제국시대 BC 228년 부터 AD 395년 까지 로마제국의 식민지 3) 고트족, 훈족, 슬라브족 세르비아의 침략 AD 395년-1389년 까지 통치 4) 오스만 제국시대 1389년 부터 1912년까지 오스만 이슬람통치의 시대 1912년에 이르러서 오스만 제국이 523년 동안 알바니아를 통치를 했지만 오스만 제국의 역사에 있어서 큰 위기에 처했다. 발칸 반도에서 슬라브 족들, 그리스, 불가리아등 여러 나라들이 동맹을 조직하여 오스만 제국에 도전했다. 알바니아는 오스만 제국이 붕괴되는 대세에 힘입어 1912년 11월 28일에 독립을 처음으로 선언했다. 하지만 알바니아는 열강들이 계속해서 발칸 반도에서 경쟁적으로 이르키고 있는 전쟁으로 인하여 전쟁의 희생자가 되고 있을뿐 1912년에 처음으로 선언한 독립국의 선언문은 휴지조각이 되고 있을 뿐이였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일어나 오스만 제국의 완전한 몰락을 재촉하는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한편 러시아는 유럽의 나라들이 발칸 반도에 진출하여 독점하려는 세력을 미리 막기 위하여 러시아를 중심한 동맹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결국 오스만 제국을 타도하기 위하여 제1차 발칸전쟁이 1912년 10월에 시작되였던 것이다. 하지만 1913년 5월에 런던에서 조약을 맺음으로서 이른바 제1차 발칸전쟁이 끝나고 말었다. 오스만 제국이 쇠퇴해지는 결과로 인하여 발칸반도에서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서로 영토확장을 위하여 제2차 발칸전쟁을 또 다시 이르켰다. 그런데 이 제2차 발칸 반도 전쟁은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을 시작하게 만드는 계기로 연결 됬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순전히 강대국들이 발칸 반도에서 세력다툼 문제로 인하여 발생한 전쟁이였으며 1919년에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패전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남으로 발칸 반도에서 세르비아를 비롯하여 여러 슬라브족의 나라들이 독립국이 됬는데 이 때에 1920년에 알바니아도 독립국이 됬다. BC 2000년경에 일리리안 (Illyan)의 후손들이 알바니아에 정착한 후에 3900년동안이나 서방의 강국들의 지배를 받으면서 지냈는데 1920년에 이르러서 비로서 처음으로 알바니아 공화국으로 완전한 독립국이 되였던 것이다. 알바니아는 1920년에 공화국을 선포하고 타라나 시를 국가의 수도로 정했다. 1924년에 아메드 조고(Ahmet zogu)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알바니아는 국제연맹에 가입했다. 하지만 알바니아는 오랜 세월동안 피침략국으로 살아 오면서 동족들 끼리 평화롭게 혐력하는 훈련이 부족했기 때문에 독립은 쟁취했지만 건설적으로 국가를운영하는데 정치적 어려움이 많이 있었다. 정파간의 분렬과 종교적인 갈등으로 인하여 큰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조고 대통령은 1924년에 대통령에 취임하여 1928년 까지 민선 대통령으로 통치를 했다. 조고 대통령의 가족배경은 오랜 외세의 통치하에서 알바니아의 귀족에속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조고 대통령은 귀족의 가족배경으로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 이었다. 조고 대통령은 정파간의 분렬과 분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명철한 지식과 귀족 출신이라는 가정배경을 활용하여 기발한 정치적 통치수완을 강구했다. 조고 대통령은 1924년-1928년에 대통령으로 4년 동안 집권을 했지만 그 후에 조고 대통령의 직위를 변경하기 위한 비상대책으로 헌법을 새로 제정했다. 새로 제정한 헌법에 의하여 조고 대통령은 대통령제도를 철페하여 <조고 1세> 라고 하는 군주제의 왕위제도를 창설하여 알바니아의 왕으로 격상됬다. 조고 1세는 절대군주로서 왕의 위치와 권위를 발휘하여 1928년 부터 1938년 까지 10년 동안 국왕의 권한을 가지고 군주적 독재정권으로 알바니아를 통치했다. 하지만 조고 1세의 통치수단이 아무리 강력하다 할지라도 그 때 당시 국제정세를 감당할 수 있는 권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알바니아 왕국은 이탈리아의 침공을 또 다시 당했다. 1939년에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무솔리니에게 조고 1세는 항복하여 이탈리아와 합병하는 비극에 또 다시 처했다. 이탈리아에게 항복한 후 조고 1세는 미국으로 망명하는 신세가 됬다. 알바니아가 1912년에 독립을 선포했던 독립선언문은 휴지조각이 됬으며 독립의 꿈은 물거픔으로 끝나고 말았다. 또한 알바니아는 1920년에 두번째 독립을 쟁취하여 아메드 조고 (Zogo) 대통령이 군주제를 창건하여 “조고 1세”의 왕국을 통치했다. 조고 1세는 알바니아를 1939년 까지 대통령과 국왕이 되여 19년 동안 통치했다. 하지만 조고 1세는 국내에서는 무서운 독재로 통치를 했으며 대외 정치에 있어서는 외세를 의존하는 무능한 국왕으로 통치자가 되고 있을 뿐이였다. 조고 1세가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무솔리니에게 쫓기여 미국으로 망명한 후에 알바니아는 즉시 이탈리아의 보호령이 되고 말았다. 알바니아가 이탈리아의 보호령이 되고 있는데 유럽에서는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방금 시작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됨과 동시에 알바니아는 또 다시 독일에게 점령을 당하였다. 알바니아는 제2차 세계대전 이라고 하는 캄캄 한 암혹의 동굴속에서 이탈리아와 독일의 침략을 받아 앞이 보이지 않는 비운에 처해 있었다. 쥐구멍에도 햍빛이 비취는 날이 있었던가? 알바니아에 어둡고 깊은 밤의 역사속에서 밝은 태양이 떠오르는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 아침 역사의 주인공은 바로 엔베르 호자 (Enver Hoxha) 이었다. 엔베르 호자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에 항전하면서 알바니아 민족해방 전선을 이끌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후에 엔베르 호자 는 알바니아 공산주의 정권인 알바니아 노동당 총서기가 되여 신생국 알바니아를통치하게 됬다. 엔베르 호자는 누구? 엔베르 호자를 옳바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그의 간추린 약력을 소개한다. 엔베르 호자는 1908년 10월 16일에 가나한 노동자가정에서 출생했다. 그는 16세 때 고등학교 학생회의 총무로서 반제 독립운동의 선봉에서 활약했다. 호자는프랑스 계통의 고등학교에서 처음으로 공산주의 사상에 접근했으며 “10월혁명"에 대하여 역사적 흥미를 가지고 공부하게 됬다. 뿐만 아나라 프랑스 혁명에 대하여 확실한 지식을 얻게됨으로서 자연히 프랑스 유학을 꿈꾸게 됬다. 엔베르 호자는 1930년-1933년에 프랑스에서 프랑스 공산당 활동에 동참을 비롯하여 맑스-엥겔스에 대한 학구적 연구에 큰 발전을 성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 당시 알바니아의 정부에서는 엔베르 호자의 프랑스 유학을 방해하는 공작이 있었으며 조고 왕정은 그의 장학금을 취소하는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엔베르 호자는 벨지움 브르쉘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맑스-레닌에 대한 연구에 심혈을 기우렸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학비의 어려움 때문에 1936년에 할 수 없이공부를 중단하고 알바니아로 귀국했다. 알바니아로 돌아 온 호자는 프랑스계 학교에서 교사가 됬다. 하지� 1939년에 엔베르 호자는 공산주의자 라는 이유때문에 학교 교직에서 해고를 당했다. 1941년에 엔베르 호자는 알바니아 공산당을 창설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1943년에 공산당 총서기장으로 당선됨과 동시에 1944년에는 공상당원 7만명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엔베르 호자는 7만명 당원들의 열광적인 지지와 군중의 환영을 받으면서 알바니아 대통령으로 취임을 했다. 엔베르 호자의 약력에 대한 자세한 약력은 지면상 제한으로 여기서 끝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엔베르 호자는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고 대통령이됬던 것이다. 하지만 엔베르 호자 대통령에게는 어려운 문제가 태산처럼 쌓여 있었다. 첫째, 제2차 세계대전으로 거의 전파된 국내의 경제문제였다. 전국민의 85%가 문맹인들이며, 800만 인구중에서 2만 8천명이 폭격에 사망했으며 생존자들중에서 평균 수명이 40세를 넘기지 못하는 최악의 사회적 현실이 계속되고 있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적 봉쇄는 공산주의국가라는 이유로완전히 봉쇄를 당하고 계속되고 있었다. 둘째는 소련의 스탈린 정권의 실책과 흐루시초프의 수정주의로 인하여 엔베르 호자 대통령의 철권 공산주의 통치에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었다. 소련의 흐루시초프의 수정주의에 일시 실망한 엔베르 호자 대통령은 중공의 모택통의 강경한 문화혁명 운동에 크게 감명을 받아 중국공산당 정권과 친교를 맺었다. 하지만 얼마 후에 모택동정권 이후의 중국 공상당정권에서는 제3세계 정치이론을 주장하면서 미국과의 극한 대치 정책을 기피하고 이른바 중국식 “수정주의 정치 노선”을 펴나가고 있었다. 중국공산당 정권의 수정주의 노선에 대하여 엔베르 호자 대통령은 또 다시 크게 실망하여 중국과의 인연도 끊어지고 말았다. 세째, 엔베르 호자 대통령과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의 요시프 티토 대통령과의 관계는 발칸 반도에서 유일한 동반자적 공산주의 국가였다. 그런데 요시프 티토는 소련과 인연을 끊고 독자적인 노선을 선택했다. 이점에 있어서 엔베르 호자 대통령과 요시프 티토 대통령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비극이 또 다시 발생했다. 엔베르 호자 대통령은 순수 스탈린주의 숭배자이였으며 또한 순수 맑스-엥겔스주의에 심취된 공산주의적 정치가로서 호자 대통령의 공산주의 정치철학과 그의 통치적 이념은 절대로 변질되거나 또한 노선의 수정과 포기는 한 발자국도 있을 수 없는것 이었다. 소련이 어디 망했는가? 소련은 여전히 영토가 세계에서 제일 큰 나라이며 미국보다 먼저 수소탄과 인공위성을 개발한 나라이다. 또한 핵무장으로 미국에 맛서는 유일한 강대국이 아닌가? 이점에 있어서 끝까지 러시아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을 굳게 갖이고 조금도 변치 않았던 엔베르 호자 대통령의 강한 의지는 오늘에 있어서 높이 평가할만 하다. 1948년 1월에 엔베르 호자 대통령은 집권당의 당명을 노동당으로 개칭하고 5개년 경제 개발게획을 세우고 스탈린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1953년에 스탈린이 서거한 후에 흐루시초푸가 스탈린을 격하하고 동서진영간에 모순된 평화공존을 주장하는 수정주의에 대하여 엔베르 호자 대통령은 분개하여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됬다. 엔베르 호자 대통령은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정책을 반대하고 오히려 스탈린의 위대성을 주장하면서 알바니아를 스탈린주퓽� 중심국으로 만들었다. 1961년에는 소련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중국의 모택동 공산당과 긴밀한 관게를 유지했으며 1969년에는 바르샤바 조약기구에서 탈퇴하고 중국과 방위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이를 어찌하랴; 1970년에 중국이 또 다시 수정주의 노선을 선택하여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실용주의 노선으로 전환하자 엔베르 호자 대통령은 1977년에 중국의 수정주의 노선을 맹열하게 비난하였다. 이로 인하여 중국의 원조도 끊어지게 됬다. 이와같이 소련과 중국으로 부터 배신당하는 말할 수 없는 악조건에 처하게된 엔베르 호자 대통령은 오히려 알바니아의 내부의 정치적 조직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반민족적이며 외세에 추종하는 종교집단들에 대하여 여러가지 제도적 관리와 종교적 부패를 제거하는데 거침없이 강력한 정책에 주력할 수 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엔베르 호자 대통령의 비상대책에 대하여 영국은 “세계 독재자 10명 명단”을 발표하면서 히틀러를 비롯한 유명한 독재자중에 엔베르 호자 대통령을 반드시 포함시켰다. 뿐만 아나라 서방의 언론들은 알바니아를 “무신론국가”라고 일제히 비방하는 포문을 열어 전 세계에 선전했다. 하지만 엔베르 호자 대통령의 사회주의적 통치이념과 스탈린주의적 공산주의에 대한 순수한 굳은 신념에는 조금도 후퇴가 없었으며 바르샤바 조약기구에서부터 탈퇴하여 수정주의 추종자 국가들과 단교하는 용단을 시종 변치 않고 계속했다. 엔베르 호자 대통령은 1985년 4월11일에 애석하개 서거했다. 엔베르 호자 대통령은 그의 나이 77세에 서거함으로 알바니아 사회주의 통치의꿈을 다 이루지 못 하고 아깝게 서거했다. 그의 못다 이룬 꿈을 후계자에게 고스란히 남겨 놓고 아� 말 없이 서거했다. 엔베르 호자 대통령의 서거 후에 라미즈 알리아 (Ramiz Alia)가 대통령으로 선출됬다. 라미즈 알리아 대통령은 집권 초기에는 엔베르 호자 선임 대통령의 통치적 이념인 스탈린 주의와 공산주의 정권을 그대로 계승하겠다고 말로는 주장했다. 하지만 라미즈 알리아 대통령은 서방의 압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또한 외세를 등에 업고 <독재타도 민주주의 국가재건>을 부르짔으면서 설치는 반정부 세력들이 우후죽순 으로 출현하여 라미즈 알리아 정권을 위협하고 있었다. 라미즈 알리아 대통령은 엔베르 호자 대통령의 후계자가 되기 보다는 오히려 전임 대통령인 엔베르 호자 대통령의 통치이념을 망각하고 포기하는 배반자가 되고있을 뿐이였다. 라미즈 알리아 대통령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과 관계를 개선하여 1987년에 처음으로 그리스와 이탈리아에게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 서독으로 부터 6백만 달러 원조를 받아 들였다. 1990년 1월에는 노동당 중앙위원회가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1) 복수 후보자제도를 도입하여 대통령 선거를 실시한다. 2) 국민들의 해외여행을 자유화 한다. 3) 종교활동을 자유화 한다. 4) 사회주의 계획경제 를 포기하고 외국기업들과 합작 하는 것을 허용한다. 뿐만 아니라 1990년 12월에는 알바니아 최초로 야당인 민주당이 창당되여 최초로 친서방 야당의 대통령 후보자가 출마하여 복수 대통령 후보자에게 투표하는 서방이 강요하는 선거제도를 도입했다. 이와 같은 알바니아의 정치적 변화에 대하여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왜냐하면 서구 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알바니아의 앞날의 운명을 결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주의를 끝까지 지지하는 마지막 “보루”로 알려졌던 알바니아는 마침내 이렇게 허무하게 문어지고 말았다. 1992년 3월에 서방의 압력으로 알바니아 정부는 조기선거를 실시했다. 새로 창당한 민주당의 후보자 살리 베리샤 (Sali Berisha)가 당선되여 차기 대통령으로 취임을 했다. 말이 선거로 당선된 것이지 미국과 영국이 짜놓은 다당제민주주의 선거라고 하는 각본에 의하여 치루어진 극히 형식적인 민주주의 선거제도 였으며 외세 자본주의가 알바니아에서 거두어들인 첫번째 결실이었다. 스탈린 주의자 엔베르 호자 대통령의 후계자로 등장한 라미즈 알리아 대통령은 서구 제국주의 침략 세력에 포위를 당하여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되여 대통령의 집권임기를 다 채우지도 못하고 도중하차하고 말았다. 엔베르 호자 대통령은 스탈린 주의자로서 정치적 생명을 끝까지 견지하였으며 미국과 영국,독일등 서구의 무서운 정치적 모략과 맛서 싸우면서 고전분투로그의 일생을 마쳤다. 하지만 엔베르 호자 대통령에게 있어서 그것 보다 더 고통스러운 시련은 오히려 소련을 비롯하여 중국 공산당등 세계 공산주의 진영에서 확산되고 있던 공산주의 변질된 “수정주의”와 싸워야 하는 “노선 투쟁”이 더 큰 어려움이 되고 있었다. 스탈린식 공산주의 정치적 이론과 역사성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확보하고 있는 유럽의 엔베르 호자 대통령과 또한 같은 동시대에 있어서 동양의 사회주의 운동의 거장이신 김일성 주석님을 같은 관점과 같은 맥락에서 국제적으로 위대한 령도자로 평가하는 문헌들을 많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엔베르 호자 대통령의 강고한 스탈린주의를 고수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에 대하여 많은 론쟁이 있�. 스탈린 주의를 고수하기 위하여 끝까지 고전분투한 그의 생애에 대한 평가와 또한 알바니아 공산당의 창시자로서 40년동안 대통령으로 집권한 그의 공헌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성공과 실패”라고 하는 서로 엇갈리는 평가와 반응을 나태내 보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엔베르 호자 대통령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평가를 <성공과 실패>라고하는 서로 엇갈리는 평가와 반응에 대하여 필자는 기탄 없는 성찰을 시도하며 그 요점을 간략하게 기록한다. ㄱ. 엔베르 호자는 1944년에 7만명 공당원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면서 알바니아 공산주의 정권의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엔베르 호자는 프랑스와 벨지움에 유학하여 스탈린주의에 심취되여 깊은 연구와 학업에 수년동안 몰두한것이 그의 공적의 전부이다. 엔베르 호자는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직접 대항하여 싸운 <빨지산 투쟁>의 경험과 제국주의 침략에 <게릴라전>을 전개한 독립투쟁의 전과같은것은 전혀 없다. 그럼으로 호자 대통령의 통치이념속에 백절불굴의 스탈린주의를 끝까지 고수하는 정치철학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호자 대통령의 40년 통치속에는 <ㅌㄷ투쟁>의 경력이나 <주체사상 정치방식>이라고 하는 민족적인 정치적 개념과 통치수단등은 전혀 찾아볼수 없는 것이다. ㄷ. 엔베르 호자 대통령은 40년 통치기간에 알바니아 전국의 국토에 시멘트 또는콘크리트로 구축한 벙커와 토치가를 75만개를 구축하여 제국주의 침략을 방어하는데 심혈을 기우렸다고 한다. 하지만 엔베르 호자 대통령은 제국주의 침략에 대항하여 능동적으로 투쟁하여 국토와 민족을 보호할뿐만 아니라 유사시에 맛대항하여 공격할 수 있는 최고의 군사력을 미리 구축해 놓는 <선군정치 통치방식>에 있어서는 전혀 무대책이며 무능한 통치자가 되고 있을뿐이였다고 인식되고 있다. ㄹ. 엔베르 호자 대통련은 40년 통치가 끝난 후에 정치적 후계자를 세워 놓는데 완전한 실패자가 되고 말았다. 혁명과업의 완수를 위하여 다음 세대의 시대적인 계승이 끊어지면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의 밥이 되고 만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엔베르 호자 대통령은 실패자가 되고 말았다. 혁명의 완수에 있어서 혁명의 계승은 절대적 사명이며 민족의 생명줄이다. 스탈린 주의자로 유명한 엔베르 호자 대통련은 1908년 10월 16일 생으로 77세에 서거했다. 2008년에 그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대하여 알바니아에서 국론이 양분되여 혼란을 이르키고 있었다. 알바니아 사회주의 국가의 창건자로서 40년을 통치한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과 향수적 추억을 잊을 수 없는 것이 민중들의 유산이다. 하지만 오늘의 알바니아의 정치적 현실은 혼란에 빠져있으며 호자 대통령에 대한 평가절하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반제와 반미 투쟁의 길로 지향하고 있다. 이와는 정반대로 임이 친서방적인 친미정권하에서 기득권을 확보하고 있는 일부 알바니아 특권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엔베르 호자 대통령에 대한 향수심의 불을 끄기 위하여 그의 100주년 기념행사를 저지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알바니아는 두편으로 양분되여 사회적 혼란을 거둡 이르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외세의 침략으로 인하여 비슷한 수난의 역사를 알바니아와 공유하고 있는 조선반도의 북녁에서는 김일성 주석님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4월을 맞이하여 전민족이 하나로 단결하여 <강성대국의 문패>를 다는 경축행사의 일환으로<광명성 3호 발사>를 전세계에 선포하고 있다. 알바니아의 100주년 기념행사와 조선민족의 위대한 령도자에 대한 100주년 기념행사를 주목하는 세계의 안목에는 두 나라의 차이점이 하늘과 땅의 차이점임을 분명히 인식하게 된다. 끝. www.facebook.com/kilnam.roh 혹은 www.twitter.com/#!/minjoktongsh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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