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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1]제3세계 눈으로 세계열강을 파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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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2-06-04 16:01 조회2,3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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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그동안 제국주의 나라들로부터 수난을 받아 온 나라들 가운데
무려 87개국을 상세히 소개하는 글들을 발표하여 해내외 동포들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그중 일부는 "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1)"라는 제목으로 평양출판사에서 발행했고, 오는 9월께 그 두번째 책이 출판될 것으로
예정되어 있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가해자로 알려진 나라들과 함께 그 가해자들과 결탁한 종교계에 대해
집필중에 있다. 해내외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확신한다.새로 시작하는 그 첫번째 글을 여기에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연재-1]제3세계 눈으로 세계열강을 파헤친다




*글:유태영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IMAGE##> 역사적으로 서구 열강들은 지역적으로나 인종적으로 “백인”이라고하는 우월감과 종교적으로 “기독교”라고하는 우월감에 의하여 두개의 실체가 오래동안 역사적인 결합을 통하여 서구 열강의 역사를 조성해 왔다. 이 두개의 결합체는 더 많은 땅과 더 많은 재물을 차지하기 위하여 제3세계를 마구 정복하고 식민지로 삼았다.

5세기 말에 유럽에서 서구 열강의 역사의 새로운 통치의 형태와 질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구 열강의 통치의 시작은 590년에 그레고리 1세가 로마 교황의 권좌에 올라앉음으로서 이때부터 제1대 교황이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그때 당시 제1대 로마 교황인 그레고리 교황은 지상에서 “베드로의 계승자” 또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추앙을 받으면서 유럽의 거의 모든 곳에서 통치자로 인정되였다. 국왕이나 군주들은 교황의 통치 밖에서는 그 어떠한 권한이나 자주권이 허락되지 않았다.

기독교적인 서구 문명의 역사는 이렇게 처음 시작되였던 것이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 제국이 됨으로 서구 열강들도 게르만족과 프랑크족을 비롯한 유럽 전지역에 이르기까지 교황을 “papas-아버지”로 부르게 됨으로서 기독교적인 유럽이 되고 있었다.

비기독교 족속은 멸망시켜도 되는 권리, 곧 살인면허증을 허락한 권세를 가진 특별한 제국이 있었는데 오늘 우리는 그 제국을 가리켜 “로마 교황의 나라”라고 부른다.

로마 교황의 권세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서구열강들은 5세기부터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수 백년 동안 아프리카, 남북 아메리가 대륙, 아시아를 향하여 비백인과 비기독교인의 땅을 침략하고 정복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백인 침략자들은 비백인과 비기독교 세계의 사람들을 동물처럼 살육하고 땅과 재산을 탈취하고 또 그들을 노예로 삼았다.

유럽인들이 제3세계를 침략하고 정복하여 식민지로 삼고 또 사람을 죽여도 살인면허를 부여 받은 것은 “로마의 평화, Pax Romana를 위하여 크게 공헌하는 행동이 되기때문에 무조건 정당화 되었다.

오늘 전세계적으로 제3세계 나라들이 서구 백인 나라들에 의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는 역사적인 배경의 뿌리를 우리는 Pax Romana에서 찾을 수 있다.

기독교로 대표되는 서구 열강의 통치문화가 우리 조국 남녁에서도 민중의 삶의 전반에 걸쳐서 골수까지 지배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민족의 자주의식을 망각하고 포기할 뿐만 아니라 외세에 의하여 영혼까지 세뇌당하고 있는것이 오늘날 제3세계의 현실이다.

필자는 서구 열강의 패권의 꿈이 오늘 세계 역사의 모든 부분속에서 내면화 되고 있는 뼈아픈 사실을 지난 2,3년동안 민족통신에 투고하여 제3세계 나라들이 당하고 있는 비극의 역사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하여 필자는 세계역사는 분명히 제3세계의 눈으로 보아야만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이났는지를 냉철히 판단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특별히 제3세계와 전통적으로 직결되여 있는 서구 열강들의 탐욕과 침략의 역사는 반드시 제3세계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그 모순을 발견하리라고 판단했다.

분명한 사실은 2000년전의 Pax Romana의 전통이 오늘에 이르러서 Pax Europ 또는 Pax America로 보다 대담하고 보다 효과적으로 딱지를 붙이고 있다. 그럼으로 오늘 우리는 제3세계의 눈으로 서구 열강에 대하여 올바른 인식을 하고 또 올바른 대응을 함으로써 제3세계와 함께 공감대와 연대를 강화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연재-1]제3세계 눈으로 세계열강을 파헤친다


로마 제국과 교황의 통치 세력


지난 시기 서구에서는 교황청이 지배구조의 상층부를 차지하고 좌지우지해 왔다. 즉 기독교와 기독교 문화가 판을 쳤다.

기독교적인 유럽의 발달은 AD 313년 3월에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로마 캐톨릭 교회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한 데서부터 시작됐다.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모든 비기독교적 관행을 금지시키고 이교도의 신전들을 기독교의 “예배당”으로 전환시켰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 제국이 됨으로써 로마제국의 정치적 안전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로마 제국의 보다 더 안전을 위하여 590년에 그레고리 1세가 로마 캐톨릭 교회의 대교황이 되여 제1대 교황의 칭호가 주어 졌으며 그는 로마 캐톨릭 교회의 “교황제도”를 영구적 제도로 창설하는 주요한 개척자가 되었다.

로마 캐톨릭 교황은 교황의 종교적 권한을 뛰어넘어 모든 도시들에서 제1인자가 되었으며 교회들의 수는 점점 증가하여 유럽 전체가 기독교화 되고 말았다.

하지만 로마 제국의 황제가 정치적 필요에 따라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기는 했지만 로마 황제는 로마 교황의 지나친 권력에 대하여 불안을 느끼고 교황의 권력행사에 개입하기를 원했다. 종교적권력과 세속 정치적 권력 사이에 갈등의 씨앗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카톨릭 교회의 역사적 자료


그레고리 1세가 로마 케톨릭 교회의 제1대 교황이 되여 많은 업적을 남기고 604년에 죽었는데 그 시대에 있어 로마 케톨릭 교회의 역사적 자료로 아주 놀라운 것들이 많이 있다.

ㄱ. 성만찬 제도의 창설. 그레고리 1세 교황은 성만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실제적으로 접촉한다는 “임재설,The Real Presence”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 “임재설”은 “화체설”로 수정되여 논쟁이 게속되었으며 1215년에야 로마 캐톨릭 교회의 교리로 공포되었다.

ㄴ. 연옥설. 그레고리 1세 교황은 이 교리를 주장했으며 중세 캐톨릭 교회는 교권을 옹호하는 방법으로 활용되었으나 1439년에 이르러서 연옥설은 신앙의 조항에서 삭제되었다.

ㄷ. 마리아 숭배.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로 숭배하는 전통이 5세기 부터 광범위하게 시행되었으며 그녀의 중보적 역할을 중요시한다. 한편 마리아 숭배를 미신적이라는 비평이 항존하지만 그 비평은 그 이후 끊어지지 않고 지속되었다.

ㄹ. 비밀 고해성사. 로마 케톨릭 교회의 초기 시대부터 죄의 고백은 교회를 세우기 위한 회복의 수단으로 공개적 행사로 필요했다고 한다. 하지만 공개적인 고백은 추문을 조장하는 것으로 보임으로 신부 앞에서 개인적으로 고백하는 제도를 763년에 처음으로 제정되었다.

ㅁ. 제사장 제도 확립.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 개념은 완전히 사라지고 오직 신부에게만 특별한 은총이 주워짐으로서 신부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가 됐다. 그리하여 교회 건물안에 특별한 제단을 만들어 이곳은 신부와 평신도를 구분하는 장소가 되었다. 신부의 사제복은 평신도와 구별하기위한 필수적 복장이 되었다.

ㅂ.로마 캐톨릭 교회의 발전사 중에서 매우 특기할 것은 수도원 제도의 기록이다.수도원에 대한 기록은 초대교회의 사도 바울시대부터 이미 출현하기는 했지만 비정상적인 금욕주의적 수도행위는 기독교의 큰 문제로 등장했다.

529년에 창설된 베네딕트 수도원은 훈련이 엄격한 수도원으로 중세기 초에 매우 유명했다. 하지만 수도원의 번영과 성공이 오히려 퇴화와 오용을 초래하여 캐톨릭 교회 역사에 큰 오점으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910년에 창설된 클러니 수도원은 부패된 수도원 운동을 깨뜨리고 성직자의 깨끗한 독신생활을 끝까지 견지하는 수도원 운동의 영향을 중세기에 광볌위하게 퍼뜨렸다. 수도원 제도는 중세기 교회의 중요한 요소의 하나였으며 긍정적인 공헌 이상으로 부정적 작용으로 퍼져 나가기도 했다.

유럽에서 새로운 기독교의 지적인 문화의 내용은 로마적인 것과 결합시키면서 고전적 기독교문화라고 말할만 했다. 이교의 신화와 문화에 대하여 사람들은 무조건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교의 신화와 문화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엄격한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엄격한 기독교인들은 이교와 기독교 가운데 하나만 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오직 기독교 성서에 기초한 교리를 정교화했던 기독교인들에게 확산되고 있었다.

아직까지 이슬람이 유럽에 접근하지 못한 시대에 있어서 유럽은 완전히 기독교와 동일시할 수 있었다.

로마 캐톨릭 교회의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베드로의 후계자”이라고 하는 전통적 권위에 의하여 무소불능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1073년에 교황의 자리에 앉은 힐데브란도 교황은 모든 사람의 소유물을 줄 수도 있고 취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중세기 무소불능의 교황 권위


한 나라의 황제로부터 낮은 농부에 이르기까지 지상의 모든 사람들은 로마 캐톨릭 교회의 교황의 권위를 인정해야만 하는 중세기의 시대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에 한가지 이변이 발생했다. 독일의 황제 헨리 4세는 로마 캐톨릭 교황의 권리의 부당성을 주장하여 독일 의회에 “교황 파면”을 건의했다.

로마 교황은 헨리 4세 황제를 “금지령”에 가두어버렸다. 교황의 금지령은 사형선고와 같은 최고의 형벌이었다. 교황의 “금지령”하에 있는 헨리 4세 황제에게 음식이나 거할 곳을 제공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교황의 금지령에 갇혀있는 헨리 4세는 그는 추운 겨울에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교황의 용서와 화해를 위하여 알프스를 넘어 교황의 궁정이 있는 카눗사를 찾아 갔다.

헨리 4세 황제는 맨발에 비참한 참회자처럼 옷차림을 하고 눈 속 마당에 3일동안 서 있었다. 4일째 되는 날에 교황이 그를 맞아 주었다. 헨리 4세 황제는 교황의 발앞에서 복종을 표시하고 겨우 사면을 받았다. 이 짧은 이야기는 로마 케톨릭 교회의 교황의 전성기를 잘 말해 준다.

이 글을 끝 맺으며,


로마 케톨릭 교회의 전성기는 1216년에 인노센트 교황과, 1303년에 보니페이스 교황이래 1417까지 많은 교황들이 등장하여 전성기를 유지했다.

그러나 교황청 내부에서 한 가지 문제가 겨우 해결되면 ,또 다시 더 큰 문제가 발생하여 결국 교황청에 분파가 발생했다. 분파의 원인은 참된 “베드로의 후계자”는 누구인가에 대한 분쟁이였으며 또 어느 파가 참된 “그리스도의 대행자”인가에 대한 싸움이었다.

로마 캐톨릭 교황청은 내부에서의 반대와 분열 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종교개혁 운동과 시대적으로 “르네쌍스”의 물결을 막을 수 없었다.

(필자에게 조언해 주실분은 전화:201-750-7379 혹은 이메일: taiyoo27@gmail.com 로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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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보도자료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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