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아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친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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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4-03-27 13:26 조회4,65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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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노’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라고 규정짓고 싶다.”
최근 ‘노무현시민학교’ 교장에 선임된 유정아 전 아나운서(47·사진)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참여정부 인사는 ‘친노’, 그렇지 않은 사람은 ‘비노’라고 구분 짓는 잣대는 잘못됐다”며 이렇게 말했다. 유 전 아나운서는 지난 24일 서울 마포구 노무현재단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했다.
지난 17일 노무현시민학교 교장에 임명된 유씨는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난 적은 없지만… 난 친노다”라고 말해 화제를 모았다. 이에 대해 유씨는 “‘친노’를 기계적으로 구분하는 정치권을 조롱하는 의미로 했던 말”이라고 밝혔다. 이어 “친노라는 개념을 확산시키고 싶다. ‘깨어있는 시민의 각성된 힘’을 중요하다고 말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신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난 친노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참여정부 인사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친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종북’ 개념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유씨는 “통일을 이루려는 사람들을 ‘종북’이라고 한다면 난 ‘종북’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대 대학을 다녔지만 그의 대학생활은 학생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공부를 그리 열심히 하는 편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저 나만의 세계에 빠져 혼자 방황하는 시절이었다”고 대학생활을 추억했다. 그는 “대학 시절 돌 한번 던져보지 않은 사람이 무슨 노무현시민학교 교장이냐는 시선도 있을 수 있다”며 웃었다.
하지만 “대학시절에는 학생운동에 관심이 없었지만 KBS 입사 후에는 파업에 늘 참여했다”며 “선거 때도 늘 야당 후보를 찍었다”고 말했다.
그가 정치에 관심을 가진 것은 2002년 4·11총선에서 야당이 패배하는 것을 보면서였다고 한다. 그는 “민주당이 야당으로서의 역할을 좀더 잘해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며 “대선 전망도 암울하다고 느껴져 나라도 나서서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의 대변인 역할을 수락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최근 ‘노무현시민학교’ 교장에 선임된 유정아 전 아나운서(47·사진)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참여정부 인사는 ‘친노’, 그렇지 않은 사람은 ‘비노’라고 구분 짓는 잣대는 잘못됐다”며 이렇게 말했다. 유 전 아나운서는 지난 24일 서울 마포구 노무현재단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했다.
지난 17일 노무현시민학교 교장에 임명된 유씨는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난 적은 없지만… 난 친노다”라고 말해 화제를 모았다. 이에 대해 유씨는 “‘친노’를 기계적으로 구분하는 정치권을 조롱하는 의미로 했던 말”이라고 밝혔다. 이어 “친노라는 개념을 확산시키고 싶다. ‘깨어있는 시민의 각성된 힘’을 중요하다고 말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신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난 친노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참여정부 인사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친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종북’ 개념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유씨는 “통일을 이루려는 사람들을 ‘종북’이라고 한다면 난 ‘종북’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유씨는 지난 1월 양정철 전 노무현시민학교 교장으로부터 교장직을 제안 받았다고 한다. 그는 “고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사실 그의 이력은 정치와는 거리가 있다.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의 시민캠프 대변인으로 활동한 이력이 정치권과 관련된 이력의 전부다. 2009년 8월 만들어진 노무현시민학교 교장은 그동안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김용익 전 청와대 사회정책수석(현 민주당 국회의원), 조기숙 전 홍보수석(이화여대 교수), 이백만 전 홍보수석, 양정철 전 홍보기획비서관(우석대 교수) 등 참여정부 출신 인사들이 맡아왔던 것과는 대비된다. 노무현시민학교와의 인연도 지난해 7월 청소년 봉하캠프 ‘노무현 스피치교실’에서 말하기 강연을 한 것이 전부다.
그는 “지난 대선 이후 무력감에 빠져 있던 나에게 새로운 자극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과 노무현시민학교 정신에 공감했기 때문에 교장 자리를 수락했다”며 “대선 패배에 대한 분노와 좌절이라는 감정에 나를 함몰시키고 싶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대선 이후에는 경북 지역, 이를 테면 봉하마을이 아니라 ‘봉화’(웃음)로 이주할까라는 생각도 했다”며 “주민들과 직접 만나 대화하는 것이 대변인 역할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좀더 빠른 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런 생각은 노무현시민학교의 정신과도 맞아 떨어지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항간에 알려진 것처럼 ‘대선 이후 모든 일이 끊겼다’는 등의 소문은 과장된 것이라고 했다. 그는 대선 이후에도 서울대 학부 강의는 계속 했다고 한다. 물론 대선 이후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계약 연장을 하지 않겠다는 얘기를 들은 것은 사실이다. 방송활동도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알려진 내용은 너무 확대해석된 것이라고 했다.
그가 맡게 될 노무현시민학교의 정신은 ‘인간에 대한 존중’이다. 유씨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 정신을 드라마 대사에 비유했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은 “훈민정음이 역병처럼 번져나가 백성들이 익히고 깨닫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고 싶은 것이 생기도록 욕망할 수 있도록 하겠다. 설령 그것이 체제를 전복하는 것일지라도”라고 말한다. 유씨는 “여태까지 들어본 왕의 연설 중 가장 아름다웠다”며 “무언가 선동적인 힘을 느꼈다”고 했다.
겉으로 보이는 유씨는 이른바 ‘엄친딸’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세화여중·고와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1989년 KBS 16기 아나운서로 방송활동을 시작, <KBS 9시 뉴스>, <열린음악회> 등 주요 TV 프로그램을 맡은 경험이 있다. FM 라디오에서 <한낮의 음악실>, <저녁의 클래식> 등을 진행해 클래식 전문 방송 진행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클래식 음악은 아버지가 클래식 마니아였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듣고 자라 친숙하다고 한다. 클래식 프로그램을 좋아하다 보니 진행을 맡았고, 예산이 부족해 작가가 배정되지 않아 원고도 직접 쓴 덕에 관련 지식을 폭넓게 쌓았다고 한다.
아나운서를 지원한 이유는 의외였다. 사실 그의 꿈은 아나운서가 아니라 기자였다고 한다. 유씨는 “외할아버지가 언론인이셨는데 합동통신을 마지막으로 퇴직하셨죠. 외할아버지를 보며 기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고 말했다. 그런 유씨가 기자 대신 아나운서를 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대학교 4학년 때인 1988년 아나운서와 기자 원서 두개를 받아 왔는데, 기자직은 경쟁률이 높아 아나운서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바이올린처럼 높지도 콘트라베이스처럼 낮지도 않은, 딱 첼로 같은 중저음이다. 처음 아나운서를 시작했을 때는 이런 목소리 때문에 지적도 많이 받았다. “선배 아나운서로부터 ‘너도 다른 여자 아나운서들처럼 꾀꼬리 같은 섹시한 소리를 좀 내보라’는 지적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별명도 ‘입 큰 개구리’였다. 그는 “지금 생각해보면 다 성희롱에 걸릴 수 있는 발언들이었다”며 웃었다.
유씨는 입사 9년 만인 1997년 KBS를 그만 두고 당시 개념도 생소하던 프리랜서 아나운서를 선언했다. 이후 여러 방송의 토론 및 문화·예술 프로그램 진행자로, 클래식 전문 사회자로, 그리고 신문·잡지 등의 필자로 활동했다. 퇴사 전 시작했던 공부도 계속해 연세대에서 신문방송학 석사를 받고, 서울대 행정대학원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그는 자신이 논문을 아직 안 썼기 때문에 박사가 아니라 ‘박사 수료’라는 사실을 꼭 밝혀달라고 했다. 그는 “박사로 이력이 잘못 나가는 것은 경기를 일으킬 만큼 싫다”고 했다).
2004년부터는 서울대에서 ‘말하기’ 강의를 시작해 지난해까지 서울대 행정대학원 초빙연구원으로 일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유정아의 서울대 말하기 강의>, <당신의 말이 당신을 말한다> 등의 말하기 책을 펴내기도 했다. 말하기가 직업인 아나운서를 했고, 말하기 강의도 했지만 그는 원래 말하기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혼자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지금도 책을 보면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게 가장 편하다고 한다.
지난해 11월부터는 연극배우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난 대선 이후 일을 쉬면서 한가하게 보내다가 연극 출연 제의를 받아 감사한 마음으로 연극을 하고 있다고 했다. 연극 <그와 그녀의 목요일>에서 종군기자 ‘연옥’ 역할로 일주일에 세 번 공연을 하고 있다. 연극 출연은 연출가와의 술자리에서 우연히 이루어졌다고 한다. “막상 제가 연극 출연 제의를 받아들이니까 제의한 연출가가 후회했을지도 모르겠다”며 “아나운서라서 발성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연기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연극 연습을 하면서 연출가에게 갖은 수모를 당했다고 했다. 가장 힘들었던 점은 “이미 방송인으로서 형성돼 있는 자의식을 지우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많은 일을 하는 것에 대해 그는 “어떤 일을 하고 싶어서 한 적은 없다”며 “어떤 일이 주어지면 그때그때 생각해서 결정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이런 ‘엄친딸’의 이미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거리감을 느끼는 경우도 많다. 유씨가 EBS에서 장애인 관련 프로그램을 맡을 때의 일이다. 당시 방송 관계자들이 그에게 진행을 맡기는 것을 모두 반대했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이미지인데 어떻게 장애인 프로그램을 맡기느냐”는 것이 반대의 이유였다고 한다. 이후 실제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자신을 보며 방송 관계자들이 “유정아가 눈물도 흘리느냐”는 말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유씨는 “남들은 내가 고급 레스토랑에서 프랑스 요리만 먹는 줄 알지만 실제 나는 허름한 집에서 밥 먹는 것을 좋아하고 와인 대신 소주를 마신다”고 말했다. 실제 기자는 유씨와 인터뷰 하기 전 서울 종로구 적선동의 허름한 소줏집에서 그를 몇 번 본 적이 있다. 유씨와 전에 소줏집에서 그를 본 적이 있다는 기자의 말에 “내가 누구와 술을 먹고 있을 때 봤느냐”고 말하며 웃었다.
생활 역시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자신 역시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생활인’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프리랜서라는 게 사실 일이 없으면 백수”라며 “자몽 주스를 좋아하지만 일이 없을 때는 먹고 싶은 것을 참는다”고 했다.
그는 “지난 대선 이후 무력감에 빠져 있던 나에게 새로운 자극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과 노무현시민학교 정신에 공감했기 때문에 교장 자리를 수락했다”며 “대선 패배에 대한 분노와 좌절이라는 감정에 나를 함몰시키고 싶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대선 이후에는 경북 지역, 이를 테면 봉하마을이 아니라 ‘봉화’(웃음)로 이주할까라는 생각도 했다”며 “주민들과 직접 만나 대화하는 것이 대변인 역할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좀더 빠른 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런 생각은 노무현시민학교의 정신과도 맞아 떨어지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항간에 알려진 것처럼 ‘대선 이후 모든 일이 끊겼다’는 등의 소문은 과장된 것이라고 했다. 그는 대선 이후에도 서울대 학부 강의는 계속 했다고 한다. 물론 대선 이후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계약 연장을 하지 않겠다는 얘기를 들은 것은 사실이다. 방송활동도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알려진 내용은 너무 확대해석된 것이라고 했다.
그가 맡게 될 노무현시민학교의 정신은 ‘인간에 대한 존중’이다. 유씨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 정신을 드라마 대사에 비유했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은 “훈민정음이 역병처럼 번져나가 백성들이 익히고 깨닫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고 싶은 것이 생기도록 욕망할 수 있도록 하겠다. 설령 그것이 체제를 전복하는 것일지라도”라고 말한다. 유씨는 “여태까지 들어본 왕의 연설 중 가장 아름다웠다”며 “무언가 선동적인 힘을 느꼈다”고 했다.
겉으로 보이는 유씨는 이른바 ‘엄친딸’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세화여중·고와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1989년 KBS 16기 아나운서로 방송활동을 시작, <KBS 9시 뉴스>, <열린음악회> 등 주요 TV 프로그램을 맡은 경험이 있다. FM 라디오에서 <한낮의 음악실>, <저녁의 클래식> 등을 진행해 클래식 전문 방송 진행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클래식 음악은 아버지가 클래식 마니아였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듣고 자라 친숙하다고 한다. 클래식 프로그램을 좋아하다 보니 진행을 맡았고, 예산이 부족해 작가가 배정되지 않아 원고도 직접 쓴 덕에 관련 지식을 폭넓게 쌓았다고 한다.
아나운서를 지원한 이유는 의외였다. 사실 그의 꿈은 아나운서가 아니라 기자였다고 한다. 유씨는 “외할아버지가 언론인이셨는데 합동통신을 마지막으로 퇴직하셨죠. 외할아버지를 보며 기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고 말했다. 그런 유씨가 기자 대신 아나운서를 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대학교 4학년 때인 1988년 아나운서와 기자 원서 두개를 받아 왔는데, 기자직은 경쟁률이 높아 아나운서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바이올린처럼 높지도 콘트라베이스처럼 낮지도 않은, 딱 첼로 같은 중저음이다. 처음 아나운서를 시작했을 때는 이런 목소리 때문에 지적도 많이 받았다. “선배 아나운서로부터 ‘너도 다른 여자 아나운서들처럼 꾀꼬리 같은 섹시한 소리를 좀 내보라’는 지적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별명도 ‘입 큰 개구리’였다. 그는 “지금 생각해보면 다 성희롱에 걸릴 수 있는 발언들이었다”며 웃었다.
유씨는 입사 9년 만인 1997년 KBS를 그만 두고 당시 개념도 생소하던 프리랜서 아나운서를 선언했다. 이후 여러 방송의 토론 및 문화·예술 프로그램 진행자로, 클래식 전문 사회자로, 그리고 신문·잡지 등의 필자로 활동했다. 퇴사 전 시작했던 공부도 계속해 연세대에서 신문방송학 석사를 받고, 서울대 행정대학원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그는 자신이 논문을 아직 안 썼기 때문에 박사가 아니라 ‘박사 수료’라는 사실을 꼭 밝혀달라고 했다. 그는 “박사로 이력이 잘못 나가는 것은 경기를 일으킬 만큼 싫다”고 했다).
2004년부터는 서울대에서 ‘말하기’ 강의를 시작해 지난해까지 서울대 행정대학원 초빙연구원으로 일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유정아의 서울대 말하기 강의>, <당신의 말이 당신을 말한다> 등의 말하기 책을 펴내기도 했다. 말하기가 직업인 아나운서를 했고, 말하기 강의도 했지만 그는 원래 말하기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혼자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지금도 책을 보면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게 가장 편하다고 한다.
지난해 11월부터는 연극배우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난 대선 이후 일을 쉬면서 한가하게 보내다가 연극 출연 제의를 받아 감사한 마음으로 연극을 하고 있다고 했다. 연극 <그와 그녀의 목요일>에서 종군기자 ‘연옥’ 역할로 일주일에 세 번 공연을 하고 있다. 연극 출연은 연출가와의 술자리에서 우연히 이루어졌다고 한다. “막상 제가 연극 출연 제의를 받아들이니까 제의한 연출가가 후회했을지도 모르겠다”며 “아나운서라서 발성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연기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연극 연습을 하면서 연출가에게 갖은 수모를 당했다고 했다. 가장 힘들었던 점은 “이미 방송인으로서 형성돼 있는 자의식을 지우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많은 일을 하는 것에 대해 그는 “어떤 일을 하고 싶어서 한 적은 없다”며 “어떤 일이 주어지면 그때그때 생각해서 결정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이런 ‘엄친딸’의 이미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거리감을 느끼는 경우도 많다. 유씨가 EBS에서 장애인 관련 프로그램을 맡을 때의 일이다. 당시 방송 관계자들이 그에게 진행을 맡기는 것을 모두 반대했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이미지인데 어떻게 장애인 프로그램을 맡기느냐”는 것이 반대의 이유였다고 한다. 이후 실제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자신을 보며 방송 관계자들이 “유정아가 눈물도 흘리느냐”는 말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유씨는 “남들은 내가 고급 레스토랑에서 프랑스 요리만 먹는 줄 알지만 실제 나는 허름한 집에서 밥 먹는 것을 좋아하고 와인 대신 소주를 마신다”고 말했다. 실제 기자는 유씨와 인터뷰 하기 전 서울 종로구 적선동의 허름한 소줏집에서 그를 몇 번 본 적이 있다. 유씨와 전에 소줏집에서 그를 본 적이 있다는 기자의 말에 “내가 누구와 술을 먹고 있을 때 봤느냐”고 말하며 웃었다.
생활 역시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자신 역시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생활인’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프리랜서라는 게 사실 일이 없으면 백수”라며 “자몽 주스를 좋아하지만 일이 없을 때는 먹고 싶은 것을 참는다”고 했다.

유정아 노무현 시민학교 교장, 노무현시민학교 교장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대 대학을 다녔지만 그의 대학생활은 학생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공부를 그리 열심히 하는 편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저 나만의 세계에 빠져 혼자 방황하는 시절이었다”고 대학생활을 추억했다. 그는 “대학 시절 돌 한번 던져보지 않은 사람이 무슨 노무현시민학교 교장이냐는 시선도 있을 수 있다”며 웃었다.
하지만 “대학시절에는 학생운동에 관심이 없었지만 KBS 입사 후에는 파업에 늘 참여했다”며 “선거 때도 늘 야당 후보를 찍었다”고 말했다.
그가 정치에 관심을 가진 것은 2002년 4·11총선에서 야당이 패배하는 것을 보면서였다고 한다. 그는 “민주당이 야당으로서의 역할을 좀더 잘해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며 “대선 전망도 암울하다고 느껴져 나라도 나서서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의 대변인 역할을 수락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지난 17일 그가 노무현시민학교 교장에 선임됐다는 보도가 나간 이후 노무현재단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자가 폭주해 한동안 접속이 지연되기도 했다. 포털사이트에서는 ‘유정아’라는 이름이 인기 검색어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노무현시민학교 교장에 이처럼 관심을 가져준 것에 감사하다”며 “이를 계기로 시민학교가 시민교육의 열린 장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또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부분은 대중에게 좀 더 친숙하게 다가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그동안 교장을 맡았던 분들이 잘하셨고, 이미 기획된 행사도 많이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내 역할을 하려고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꼬꼬강좌’라고, 한 강사가 다음 강사를 지목하면서 릴레이 형식으로 이어지는 강좌가 있는데 시민들의 호응도가 높다”며 “나도 이 강좌에 참여해 함께 배워나가는 자세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는 “노무현시민학교 교장에 이처럼 관심을 가져준 것에 감사하다”며 “이를 계기로 시민학교가 시민교육의 열린 장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또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부분은 대중에게 좀 더 친숙하게 다가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그동안 교장을 맡았던 분들이 잘하셨고, 이미 기획된 행사도 많이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내 역할을 하려고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꼬꼬강좌’라고, 한 강사가 다음 강사를 지목하면서 릴레이 형식으로 이어지는 강좌가 있는데 시민들의 호응도가 높다”며 “나도 이 강좌에 참여해 함께 배워나가는 자세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싶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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