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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공수부대원의 "진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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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1-05-20 00:00 조회2,0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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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매일 꿈꾼다. 고산준령의 품으로 돌아가는 꿈을….
중앙대 응용미술학과를 중퇴한 정규형(46)씨는 대학산악부에서도 손꼽히는 `알파이니스트"였다. 해외원정을 떠나 록키산맥의 맥킨리봉에 올랐을 때, 그는 청산을 떠안은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font△ 1980년 5월 특전사 요원으로 광주에 투입됐다가 광주교도소 근처에서 시민 2명을 사살했던 정규형(46)씨가 지난 10일 21년만에 광주 5·18묘지를 찾아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이정우 기자woo@hani.co.kr


그러나 이제 노숙자 신세가 된 정씨가 지하철 역 바닥에서 맞이하는 차가운 새벽은 언제나 악몽으로 끝난다. 악몽 속의 그는 시민을 학살한 특전사 3공수특전여단 11대대 4지역대 하사다.

군복무 중이던 1980년 5월 어느날, 정씨는 광주교도소 앞에서 시민 2명을 사살했다. 악몽의 시작이었다. “폭도들이 밀려온다고 해, 교도소 앞 학원건물 옥상에 전초를 나갔어요. `무엇이든 보이면 발포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죠. 그런데 멀리서 3명의 젊은 남자들이 다가오는 겁니다.”

지난 10일, 20년만에 광주로 내려가 현장에 다시 선 정씨는 그 때의 일을 생생히 기억해냈다. “엠60 기관총으로 정조준하는데, 부사수가 `이러면 안된다"며 말리더군요. `무슨 소리냐"며 제가 뿌리쳤죠. 폭도들을 진압해 나라를 구하겠다는 정의감으로 가득차 있었거든요.”

정씨가 방아쇠를 당기자 2명이 쓰러지고 1명은 달아났다. 내려가 확인한 `폭도"들은 무장하지 않은 와이셔츠 차림의 시민이었다. 급히 교도소 앞 야산에 주검을 묻고 상관에게 보고했다. “난생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저에게 대대장은 `별거 아니니 염려마라. 수고했다"고 하더군요. 광주시내에서 들어온 트럭이 교도소 마당에 시체와 중상자를 쏟아놓던 때였죠.”

며칠 뒤에는 전남도청 진압작전에 투입됐다. “도청 투입 전날 밤, 광주 송정리 비행장 격납고에서 특공조 50여명을 모아놓고 출정식을 열었습니다. 당시 정호용 특전사령관, 3공특전여단 최세창 준장 등도 참석했죠.”

`작전"은 2시간여만에 끝났다. 와이셔츠에 전경투구를 쓴 20대 남자, 넥타이를 매지 않은 양복차림의 30대 남자의 주검을 직접 끌어내 도청마당에 뉘었다. 광주항쟁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본 정씨를 비롯한 3공수특전여단 대원들은 그날 오후 바로 서울로 돌아왔다.

“당시 도청에 투입됐던 대원 대부분이 몇달 뒤, 대통령 경호부대인 `707부대"로 파견됐습니다. `폭도진압"의 공을 인정받은 거죠. 제대할 때 경찰 근무를 제안받았지만 거절했습니다. 더 이상 그 짓을 못하겠더라고요.”

정씨는 피묻은 손을 숨기고 새출발을 준비했다. 82년 5월 전역해 그해 10월 9급 공무원 시험에도 합격했다. 서울지하철공사 역무원이 된 그는 결혼해 가정을 꾸리며 `평온한 일상"을 되찾는 듯했다.

그러나 부인이 정씨 몰래 빌려 쓴 1억여원의 빚이 그를 다시 좌절로 몰아넣었다. 집과 월급까지 압류당한 정씨는 지난 92년 직장을 그만두고 부인과도 이혼했다. 두 아들은 노부모에게 떠맡겼다. “이 나라가 싫었어요. 무조건 떠나고 싶었죠.”

타아에서 관광가이드를 시작했지만 그나마도 오래가지 못했다. `보따리 장사"에 손을 대면서 또다시 빚더미에 올라 앉았다. 빚독촉에 쫓겨 다시 귀국한 것이 지난 99년 3월. 이후 정씨는 서울 을지로역, 시청역 등지에서 노숙생활을 하고 있다.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더 이상 잃을 게 없으니, 이젠 모든 걸 털어놓아야겠다고 결심했죠. 내가 저지른 일이지만 내가 원해서 한 일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죽은 사람들이 그걸 이해해줄까요?”

광주 5·18공원묘지를 찾은 정씨는 끝내 통곡을 참지 못했다. 눈물은 80년 5월21일 사망한 광주 시민 임은택씨의 묘비 위로 떨어졌다. 죽은 자의 묘비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당신의 숭고한 뜻은 커다란 사랑으로 남아 바른 삶의 지표가 됐습니다. 못다이룬 한을 훌훌 털고 가소서".

안수찬 기자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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