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애국지사 유혁 선생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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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1-05-16 00:00 조회1,77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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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와 민주주의민족통일부산연합 고문으로 활동하셨던 유혁(호: 일정)선생이 12일 자택에서 노환으로 타계했다. 향년83세. 발인은 14일 오전 9시 동아대학교 병원 장례식장이고 장지는 영락공원으로 정하고 이곳 재야단체들에서 민주민족장으로 장례식을 진행하기로 했다. 관계일꾼들의 안내소식을 싣는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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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고 일정 유혁선생 장례 애국지사 일정 유혁선생께서 타계하셨습니다
一丁 劉赫(일정 유혁) 선생 약력
본적 : 경남 양산군 동면 석산리
주소 : 부산시 북구 덕천동 시영아파트 7동 101호
▶1918년 경상남도 양산군 동면 석산리에서 소작농이었던
부친 유수근(劉守根) 모친 배씨의 아들로 출생.
▶1930년 양산공립보통학교 졸업.
양산공립보통학교 시절 유혁은 학업이 우수한 학생으로서 졸업 당시
도지사상을 받을 것을 예상하였으나, 유력자인 학부형을 둔 다른 학생이
수상하게 되었다. 이런 부당함에 항거하여 유혁은 일본 황태자의
탄신일을 기념하는 수상식 행사에 대한 집단 보이콧을 주동하였다.
행사를 망쳐 위신을 구기게 되자 교장은 마땅히 유혁에게 줄 대구
사범학교 진학을 위한 교장 추천권을 주지 않는 것으로 보복하였다.
▶1930년 일본 미야자키현 연강(延岡)고등소학교 유학
▶1932년 귀국.
▶1936년 만주로.
만주에 도착한 직후에, 한말 의병대장으로 유명한 허위의 아들인
허준리(許俊理) 선생을 만나 항일독립투쟁에 대한 큰 감화를 받았다.
一丁(일정)이라는 호를 지어준 것도 허준리(許俊理)선생이었는데
호의 뜻은 "농민이 되면 세계에서 제일가는 농민이 되고, 노동자가 되면
제일가는 노동자가 되고, 무엇을 하든지 제일가는 것이 되라. 한 놈이
되라"는 의미였다.
이후 만주에서 복성국민학교를 만들어 교육 활동을 하고,
빈강성 주하현의 하동농촌농무연합회 소속으로 반일투쟁을 했다.
김원봉 장군과는 일찍부터 연계를 가지고 활동하였는데, 1943년에
하얼빈에서 조선독립동맹의 하부 조직인 북만특별공작위원회를
만들었다.
▶1946년 귀국. 양산지역 귀환동포동지회 위원장, 신민당·남로당
양산군당 부위원장.
▶1947년 경남농민연맹 선전부 문서과장.
▶1948년 경남농민연맹 5대 위원장. 부산을 중심으로 통영, 고성, 사천,
하동, 남해 등 바다에 연해 있는 지역을 연결하는 해양블럭을 만들었다.
▶ 1960년 경남노인회 조직.
경남노인회는 민주민족운동 활동을 하던 지역의 원로들을 총망라한
단체로서 자주적 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경남노인회는 이듬해 결성되는
민족자주통일경남협의회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961년 민자통경상남도협의회 총무부장 및 상임위원, 2대악법반대
경남공투위 기획위원으로 활약.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투옥되어 10년형을 언도받고 5년의
옥고를 치름.
▶1970년대에는 (사)3·1동지회 회장 역임.
▶1987년 민족자주평화통일회의의 결성에 참여하여 민족자주평화통일
중앙, 부산회의 고문으로 활동.
▶이후 조국통일범민족연합과 민주주의민족통일부산연합 고문으로
활동하심. 민주개혁국민연합 부산본부 결성에 참여하시고
부산경남역사연구소 지도 위원으로 활동하시어 오늘에 이르렀다.
▶2001년 5월 12일 덕천동 자택에서 향년 만 83세를 일기로 별세.
▶▶장례일정
-발인 : 5월 14일 09:00(동아대학교 병원 장례식장)
-장지 : 영락공원
애국지사 고 일정 유혁 선생 민주민족장 장례위원회(256-7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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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고 일정 유혁선생 장례 애국지사 일정 유혁선생께서 타계하셨습니다
一丁 劉赫(일정 유혁) 선생 약력
본적 : 경남 양산군 동면 석산리
주소 : 부산시 북구 덕천동 시영아파트 7동 101호
▶1918년 경상남도 양산군 동면 석산리에서 소작농이었던
부친 유수근(劉守根) 모친 배씨의 아들로 출생.
▶1930년 양산공립보통학교 졸업.
양산공립보통학교 시절 유혁은 학업이 우수한 학생으로서 졸업 당시
도지사상을 받을 것을 예상하였으나, 유력자인 학부형을 둔 다른 학생이
수상하게 되었다. 이런 부당함에 항거하여 유혁은 일본 황태자의
탄신일을 기념하는 수상식 행사에 대한 집단 보이콧을 주동하였다.
행사를 망쳐 위신을 구기게 되자 교장은 마땅히 유혁에게 줄 대구
사범학교 진학을 위한 교장 추천권을 주지 않는 것으로 보복하였다.
▶1930년 일본 미야자키현 연강(延岡)고등소학교 유학
▶1932년 귀국.
▶1936년 만주로.
만주에 도착한 직후에, 한말 의병대장으로 유명한 허위의 아들인
허준리(許俊理) 선생을 만나 항일독립투쟁에 대한 큰 감화를 받았다.
一丁(일정)이라는 호를 지어준 것도 허준리(許俊理)선생이었는데
호의 뜻은 "농민이 되면 세계에서 제일가는 농민이 되고, 노동자가 되면
제일가는 노동자가 되고, 무엇을 하든지 제일가는 것이 되라. 한 놈이
되라"는 의미였다.
이후 만주에서 복성국민학교를 만들어 교육 활동을 하고,
빈강성 주하현의 하동농촌농무연합회 소속으로 반일투쟁을 했다.
김원봉 장군과는 일찍부터 연계를 가지고 활동하였는데, 1943년에
하얼빈에서 조선독립동맹의 하부 조직인 북만특별공작위원회를
만들었다.
▶1946년 귀국. 양산지역 귀환동포동지회 위원장, 신민당·남로당
양산군당 부위원장.
▶1947년 경남농민연맹 선전부 문서과장.
▶1948년 경남농민연맹 5대 위원장. 부산을 중심으로 통영, 고성, 사천,
하동, 남해 등 바다에 연해 있는 지역을 연결하는 해양블럭을 만들었다.
▶ 1960년 경남노인회 조직.
경남노인회는 민주민족운동 활동을 하던 지역의 원로들을 총망라한
단체로서 자주적 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경남노인회는 이듬해 결성되는
민족자주통일경남협의회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961년 민자통경상남도협의회 총무부장 및 상임위원, 2대악법반대
경남공투위 기획위원으로 활약.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투옥되어 10년형을 언도받고 5년의
옥고를 치름.
▶1970년대에는 (사)3·1동지회 회장 역임.
▶1987년 민족자주평화통일회의의 결성에 참여하여 민족자주평화통일
중앙, 부산회의 고문으로 활동.
▶이후 조국통일범민족연합과 민주주의민족통일부산연합 고문으로
활동하심. 민주개혁국민연합 부산본부 결성에 참여하시고
부산경남역사연구소 지도 위원으로 활동하시어 오늘에 이르렀다.
▶2001년 5월 12일 덕천동 자택에서 향년 만 83세를 일기로 별세.
▶▶장례일정
-발인 : 5월 14일 09:00(동아대학교 병원 장례식장)
-장지 : 영락공원
애국지사 고 일정 유혁 선생 민주민족장 장례위원회(256-7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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