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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민련 임민식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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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1-12-09 00:00 조회1,4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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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남 친북은 범민련의 존재 의미"
유학떠난후 30여년째 해외망명 생활
범민련 특집③ [인터뷰] 공동사무국 임민식 사무총장

10여년 동안 합법적인 활동을 보장받지 못한 상태에서도 민간통일운동사의 중심축으로 자리하고 있는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남측본부. 범민련이 민간통일운동진영의 중심축으로 위치하는 데는 "남북해외" 공동조직이라는 단체가 갖는 특성 때문이다. 그래서 철저히 남북해외의 "만장일치제"에 의거한 합의로 조직이 운영된다.

남북해외의 "만장일치합의"를 이끌어내기위해서는 그만큼 잦은접촉과 긴 논의시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남북해외의 토론과 회의에 대한 연락과 중개자 역할을 하는 곳이 있다. 바로 범민련 공동사무국이다. 범민련 남북해외 본부의 모든 사업과 모든 회합·통신은 공동사무국을 거쳐야만 하는 것이다. 현재 공동사무국은 해외본부에서 남과 북의 위임을 받아 운영하고 있다.

공동사무국은 하루에도 수십통의 팩스와 수백통의 전화를 붙들고 일해야 한다. 그리고 전세계 7개 해외본부와 평양과 서울을 연결하는 연락사업을 진행한다. 여기에다 전세계를 상대로 한 범민련 공식 대변실 역할과 각종 연대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모든 사업의 책임자는 공동사무국 사무총장이다. 10여년 동안 해외에서 범민련 활동을 해 온 임민식(59세) 공동사무국 사무총장을 만났다.

임민식 사무총장은 헬싱거 최고의 "항공 이용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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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민련 공동사무국 임민식 사무총장. / 범민련 남측본부

임민식 사무총장은 남측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20대 후반 경희대를 졸업하고 떠난 영국 유학길 이후 단한번도 한국을 방문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임총장은 그래서 정통 "해외파" 통일운동가다. 그가 고국인 한국을 방문하지 못하는 것은 박정희정권 말 외삼촌이 연루된 공안사건으로 인해 "반체제 인사"로 분류됐기 때문이다. 임총장은 지금도 "귀국불허" 대상자다.

그는 현재 살고 있는 덴마크 헬싱거(덴마아크 수도 코펜하겐에서 기차로 1시간 거리의 도시)에서 최고 항공 이용객으로 소문 날 정도로 전세계를 누비며 넘나들고 있지만, 고국인 한국만은 30여년 동안 한번도 들어오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고향인 광주에 어머니를 두고 30년이 넘도록 생이별한 이산가족으로 살아가고 있다.

현재 임총장이 살고 있는 헬싱거는 영국 캠브리지 대학 유학시절 박정희정권의 수배를 피해 옮긴 정치적 망명지였다. 이곳에서 덴마크 현지 여성과 결혼해 "정치경제학" 강사 생활을 해 오다 80년대초 부터 "해외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내란음모 산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을때, 임민식총장도 해외운동조직과 함께 "김대중 구명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특히 서구 유럽 "사회민주주의" 나라들에서 임총장의 "김대중석방운동"은 해외여론을 움직이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해외 민주화 운동… "김대중 구명운동" 적극 나서기도

가난한 유학생에서 저명한 정치경제학 박사로서 생활하던 임총장을 "통일운동"의 길로 이끌었던 계기는 70년대말 세계적 법학자였던 외삼촌의 억울한 죽음과 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이었다. 대학강단을 박차고 시작된 임총장의 "민주화· 통일운동"은 80년대를 거쳐 90년 범민련 결성을 주도한 이후 현재까지 20여년간 이어져 오고 있다. 10여년동안 범민련 해외본부 활동을 주도해 온 임총장은 공안당국이 "범민련의 실세"라고 평가할 정도로 범민련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다.

해외에서 임총장을 만난 지인들은 "그사람만큼 실무능력과 외교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없다. 성실하고 정직한 그의 곁에는 늘 사람들이 많다"라며 임총장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실제로 임총장은 현재 살고 있는 덴마크 헬싱거에서 현지 주민들로 부터 수차례 시장출마 권고를 받을 정도로 주변사람들의 호평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덴마크에서 공동사무국이 위치한 일본을 비롯해 북과 해외 곳곳을 넘나들며 범민련의 폭주하는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공동사무국의 임민식 사무총장과의 서면 인터뷰 내용을 공개한다. 인터뷰내용은 임민식 사무총장이 범민련 남측본부를 통해서 본사로 보내온 것이다.

영국유학 이후 30여년째 어머니와의 생이별

범민련 결성 11돌을 맞는 소감은 먼저 범민련에 대한 관심을 표명해 주신 유뉴스에 감사 한다. 범민련이 결성 11돌을 맞이해 긍지와 자책이 동유시에 교차한다. 11년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 자체가 행복한 일이지만 동시에 씁슬한 감정이 앞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범민련에 대해 남측의 대학생에게 소개한다면 범민련의 결성배경은 70년대초 남북당국이 합의한 조국통일 3대원칙인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정신에서 출발한다. 범민련은 60년대 4.19학생투쟁, 70년대의 민주화운동, 80년대의 광주민중항쟁, 87년의 민중항쟁으로 표출된 민중들의 자주, 민주, 통일의 요구를 집약해 낸 결과이다. 또 냉전붕괴이후, 열강들의 실리주의 노선에 의해 한반도가 영구분단의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이 민족내부의 결집을 요구했다.

범민련은 이러한 현실인식에서 출발했다. 이전의 의 냉전적 사고방식을 털어 버리고 민족의 이해와 요구에 맞게 통일을 이루어야한다는 절박한 요구가 범민련을 탄생시켰다. 다시 말해 우리 분단 민족사에 조국통일의 필연성이 범민련을 낳았다.


범민련의 존재의미는 "친남 친북" 이다

남측에서는 범민련이 이적단체로 규정돼 있는데...
남과 북 사이에 쌓여 온 오해, 불신, 대립과 반목을 씻고 민족의 혈맥을 다시 잇기위해 결성된 것이 범민련이다. 그래서 범민련은 친 남과 동시에 친 북을 통해 존재의 의의를 갖게 된다. 이 친북 자세가 남에서는 "이적"으로 규정되어 결성 첫 시기부터 지금까지 범민련의 활동에 족쇄를 채워놓고 있다. 이러한 조치는 구태의연한 냉전적 사고의 고집으로 도저히 사리에 맞지 않는 억지다.
공동사무국 활동에서 보람과 힘든점이 있다면 또 하나의 조국인 북에 대해서 좀더 가까운 거리에서 접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북을 이해하는데는 만남과 열린 대화가 필요하다. 북은 공동사무국에 신뢰와 열린 자세로 대하고 있다. 한가지 더 보람찬 일은 민족의 얼을 되찾고 간직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힘들었던 일이라기 보다는 괴로웠던 일은 범민련 내부의 문제였다. 한때 제기된 범민련 해소론과 이에따른 혼란과 후유증이 계속되는 과정이 가장 괴웠다. 이로인해 범민련의 정당한 통일운동이 국민들에게 잘못 인식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범민련이 국민들에게 왜곡되게 인식되는 것이 가장 괴로워

해외 동포들에게 범민련은 어떻게 알려져 있는가
범민련은 해외 동포들에게 조국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을 가져 왔다. 통일의 일주체로 민족적 긍지를 갖게 한 것이다. 사실 해외동포들은 조국의 분단으로 이중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김종필 같은 사람은 일본을 방문해 "재일동포들이 빨리 일본에 귀화해야 한다"고 망발을 해 해외동포들의 가슴을 찢어놓기도 했다.
군사독재정권 시절 정부의 간섭은 동포들의 민족애를 위협했다. "동백림사건", "유학생간첩단 사건", "고국유학생 간첩단 사건" 등 해외 동포들이 분단으로 어이없는 희생을 많이 치뤄야 했다. 이러한 동포들에게 범민련 해외본부는 또하나의 조국으로 다가갔다.

실제로 일본의 경우 친 북의 총련계와 친 남의 자주민단계가 범민련 결성에 함께 참여했다. 일본 총련계에 속한 동포의 거의 전부가 남쪽 출신이다. 그 동안 이들은 고향을 등지고 살 것을 강요당했다. 범민련 결성과 참여는 이들에게 고향을 다시 마음에 담게 했으며 고향방문의 꿈을 통일운동으로 담아 냈다. 또한 민단계 동포들에게는 맹목적인 반북 태도를 바꾸어 북도 통일의 한 주체로서 함께 동고동락해야 할 동족임을 확인시킬 수 있었다. 구쏘련 동포들과 중국 동포들이 범민련에 참여한 사실도 통일운동을 향한 큰 진전이었다.

유학후 고국땅을 밟지 못하고 해외에만 계셨는데...
해외의 이주민생활에서 어려운 점이야 개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분단민족의 서러움도 가슴 아픈데 타민족에게까지 분단민족이라는 조롱을 받는 것은 자존심을 상하는 일로 참기 어려웠다. 사실 내가 민족운동에 나서게 된 계기도 해외에서 80년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미국의 오만 무례한 내정간섭을 목격하면서 받은 충격과 그 때의 맹목적인 분노로 시작됐다. 우리 민족은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치면 식민의 멍에를 벗어버릴 능력이 있는 우수한 민족이다. 제국주의 세력은 이를 잘 알기에 우리를 갈라서 지배, 예속하려는 것이다.
범민련 강규 수정은 통일운동의 업그래이드 판

범민련의 강령과 규약이 수정된 것으로 아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범민련의 강령과 규약을 수정한 것은 전적으로 변화된 정세와 상황에 따르기 위한 조국통일운동의 업그래이드판이다. 2000년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엄청난 통일정세의 변화를 맞이했다. 6.15 선언은 좁은 범위로 제한되어 있던 민족대단결 운동을 정부 당국을 포함한 전민족적인 운동으로 확고히 전환시켰다.
6.15 선언이 이행되기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외세의 간섭을 배제해야 하며 힘있는 대중운동을 통해 수구세력의 준동을 제압해야 한다. 2001년 상반기와 평양 민족통일대축전 이후 조성된 정세는 외세와 수구반통일세력과의 투쟁이 얼마나 간고하고 치열한 대결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현재 조국통일운동의 핵심적인 과제는 6.15 선언의 기치 아래 모든 세력과 연대, 연합하여 6.15 선언을 대세로 정착시켜 조국통일의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범민련은 각계각층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와 참여를 기반으로 민족대단결의 모체로서 발전해야 한다. 이것이 범민련의 새로운 진로와 사명이다.

자기의 위치에서 특색있게 통일에 기여하길

남측의 통일일꾼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말은
신념이란 그것을 유지하는 것 보다 고수하기가 몇 곱절 어렵다고 한 선배들의 고백을 들은바 있다. 사실 신념이 흔들리면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고 자신을 믿지 못하면 패배의식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신념에는 지나온 삶도 중요하지만 앞으로의 삶이 반영되어 있다고 믿는다.
결국 신념을 저버리면 미래의 희망을 저버리게 된다. 나는 조국통일의 전사들, 신념의 강자들인 장기수 선배님들에게서 모범을 배우고자 노력한다. 해외에서 망명생활로만 끝날지도 모르는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 나의 사치스런 고민이다.
불행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 편향적 우상숭배는 세계화라는 이름을 바꾼 미국화로 치닫고 있는 느낌이다. 자본주의 시장논리로 모든 관계가 규정 당하는 현실 앞에서 분단시대의 고정관념이 민족의 화해와 단합, 나아가 민족대단결의 시대적 요구에 계속 장애로 될 조짐들이 걱정스럽다. 범민련의 임무는 더욱 막중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유뉴스 독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내가 원하고 바라는 바는 고통의 역사를 희망의 역사로, 억압의 역사를 해방의 역사로, 오욕의 역사를 민족긍지의 역사로 재창조하기 위해 조국이 하루라도 빨리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에서 민중들이 주인 된 세상을 안아 오기 위해 선차적으로 대단결하여 민족의 무궁한 힘을 모아 통일을 앞당겨 오기 위해 자기의 위치에서 특색 있게 기여해 주길 바란다.

[출처;유뉴스 www.u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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