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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영 선생 영전에 바친 추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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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minjok.c… 작성일02-01-16 00:00 조회1,6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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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에 송환되기 전 신인영선생의 수양딸로 지내던 양계숙씨이 남편인 이득행씨가 고인의 영전에 추모사를 바쳤다. 이 내용이 통일뉴스 12일자에 보도됐다. 전문을 싣는다.[민족통신 편집실]
.....................................................................

이득행(고 신인영 선생의 수양딸 양계숙씨의 남편)


"..........
란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 순한 짐승이었다."

『0.75평 지상에서 가장 작은 내 방 하나』 (도서출판 창, 서울, 2000. 8)의 「신인영, 시인이 되고 싶었던 혁명가」 편에서 신인영 선생님은 자신의 삶을 회상하며 그의 당숙(그의 아버지의 사촌 형제)인 신석정 시인의 시 한 수를 읊으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옥중에서 맺은 부녀의 연(緣)


14996_13.jpg [사진은 신인영 선생과 즐거웠던 한 때. 왼쪽부터 양심수후원회 성효진씨, 고 신인영 선생,신 선생의 수양딸 양계숙씨, 양계숙씨의 남편 이득행씨. [사진 제공 - 이득행]

내가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95년경이었다. 머리에 보자기를 둘러쓰고 영정 같은 사진 한 장을 가슴에 붙안은 채 어딘가를 큰 눈망울로 바라보고 있는 한 노인(그의 어머니 고봉희씨, 당시 88세)을 찍어넣은 민가협의 선전물에서였다.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한 노인이 가슴에 붙안은 사진 속에서 반백이 된 머리칼에 엷은 미소를 띠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순하디 순한 모습의 그 남자의 사진 아래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내 기억이 맞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인영아, 보고 싶구나."라고. 다른 사람들의 사진 아래 "......석방하라!", "......철폐하라!" 등등의 구호와는 다른, 구호 같지 않은 그 구호는 내게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후 가끔씩 전단지에서가 아닌 집회장에서 그의 어머니를 만나 사진 속의 그를 만났다. 그러나 그는 내가 아는 다른 비전향장기수 이상의 의미는 아니었다. 그 당시 나는 그 말고도 얼마나 많은 왜곡된 역사의 희생자를 보고 듣고 있었던가!

1996년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가을산행에서 지금의 아내가 된 여성을 만났는데 그녀가 옥중에 있던 신인영 선생님과 편지를 주고받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편지를 주고받던 그들은 마음을 주고받기 시작해 곧 부녀의 연을 맺었다.

그러한 인연으로 나는 조금 더 사심을 보태면서 다른 선생님들과 유다르게 선생님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다음해 겨울에 그녀와 나는 서점에 들러 이 땅의 산하가 웅장하고 아름답게 펼쳐진 사진이 인쇄된 곱게 만들어진 작은 달력 한 권을 사서 선생님께 보내드렸다. 답장에서 선생님은 매일매일 달력을 보고 있으면 잊혀진 줄 알았던 조국의 산하가 하나둘 생생한 모습으로 살아난다고 좋아하셨다.

"어머니! 어머니, 저 인영이 왔습니다....."

나는 그녀와 선생님이 주고받던 편지를 가끔씩 함께 읽으며 우리의 부족한 역사성과 나약한 심성에 힘이 되어줄 양식들을 부지런히 찾고자 노력했다. 그가 가진 의지라면, 더구나 그 의지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역사발전(곧 민중의 행복을 위한)을 위한 큰 뜻에 기반을 둔 것이라면, 그의 말과 표정과 눈빛은 믿어도 좋다는 믿음이 있었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1998년 3월 선생님은 형집행정지로 출소했다. 석방되어 맨 먼저 어머니가 있는 집의 문앞에 도착한 그는 문안으로 선뜻 들어오지 않고 바깥에서 큰 소리로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어머니, 저 인영이 왔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버선발로 미끄러지며 달려나간 고봉희씨는 아들을 얼싸안고 한참이나 그대로 있었다. 고봉희씨는 우는 아들의 얼굴을 양손으로 쓰다듬으며 "인영이 왔냐?"라고 말했다.

나는 그때 처음 그렇게 나이가 많은 사람이 철없는 어린애처럼 울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고 그저 목이 메여 `어머니!` 소리만 되뇌이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서 있었다. 그날 처음 선생님께 나를 소개하고 큰절을 올렸다. 몇 번 마주치는 그의 눈빛은 그렇게 따스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은 1929년 12월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에서 농사를 짓는 아버지의 맏이로 태어났다. 부안읍이 속한 변산반도는 바다와 숲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고장이다. 그의 당숙인 시인 신석정의 시심은 이곳 변산에서 무르익었다고 한다. 그는 어릴적부터 신석정의 집을 드나들며 시를 좋아했다. 시심을 익히며 그도 시인이 될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는 말 대신 몸짓으로 시인이 되었다.

시인의 꿈

신석정에게서 사람을 보는 따스한 마음을 익혔다면 독립운동을 하며 절친한 친구였던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등에게서 세상과 사람, 그리고 역사적 안목 등을 배웠다.

선생님은 청주상업학교 다니던 1946년에는 민주교원축출반대운동의 주모자로 지목돼 청주상업학교에서 퇴학당해 전주의 전북중학교(지금의 전주고등학교)에 편입했다. 이곳에서 `식민지교육반대`, `학원의 자유화민주화`를 요구하는 동맹휴학을 진행하고 `철도총파업`에도 참가했다. 여러 가지 시위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다시 전북중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서울로 올라가 고학을 하여 1947년 서울상대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2월 7일 남조선노동당에 입당했다.

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 정부인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미군정이 극심한 탄압을 하여 남로당이 지하로 잠적하면서 유격대가 조직되기 시작하자 선생님은 이러한 시대의 요구에 따르기로 했다. 1949년 6월 지리산 유격대 72블럭 변산 유격대로 입산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선생님은 신념에 따라 전쟁중 북녘으로 갔다.

1955년 북녘에서 학교 교원이던 이영화 씨를 만나 결혼을 했다. 이후 1남 3녀의 자녀를 낳았다. 전쟁중 선생님은 북녘에서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하고 1957년 졸업했다. 졸업 후 북녘의 전후복구사업에 온 나라가 모든 힘을 쏟을 때 선생님도 그러한 사업에 땀을 닦을 틈도 없이 바쁘게 살았다.

선생님은 1967년 3월 8일 17년만에 부모가 있는, 꿈에도 그리던 고향 변산을 찾았다. 살엄음판을 걷고 있던 남북간의 긴장관계 속에서 몰래 찾은 것이다. 부모를 만나고 돌아가다 동진강에서 체포되어 최종심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시작했다. 주검이 되어 감옥에서 나갈 각오를 했다.

"어머니, 꼭 다시 오겠습니다!"

32년간의 감옥살이는 늘 죽음과 직면해 있었다. 전향공작이라는 이름의 죽음은 비전향장기수들의 문턱에 늘상 도사리고 있는 저승사자였다.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남쪽 정부의 태도에 따라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당하면서 오직 신념과 믿음 하나만으로 버티며 살아냈다. 몸은 죽이고 정신을 살리는 끝없는 투쟁이었다. 몸을 아끼고 살리다보면 신념이 흔들리고 믿음이 없어지기 십상이었다. 선생님은 단 한번도 이 죽음의 유혹에 흔들려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흔들리는 것이 이상했던 것이다.

선생님의 눈빛은 언제나 따뜻했다. 내가 본 바로는 누구에게나 그랬다. 그는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 순한 짐승` 같았다. 무엇이 그토록 여유로운 웃음을 갖게 한 것인지 나는 모른다. 그 웃음 뒤에는 흔들리는 불안한 신념도 없었으리라. 그는 승리했으므로. 그러나 승리자의 자만도 없고 가진 자의 자기 도취와 오만도 없었다. 한없이 자기를 낮추는 형형하고 맑은 눈빛만 있었다. 나는 모른다. 그가 자신의 삶의 어디에서 그러한 희망의 잉걸을 얻었는지. 어디에서 그러한 역사발전의 긍정적인 광맥을 발견했는지를.

선생님은 이웃 동네에 가듯 포옹 한 번, 웃음 몇 번 웃고는 2000년 9월 북녘으로 돌아갔다. 그의 어머니 고봉희씨와 부둥켜안고 울던 모습은 예전 그가 출소하던 날 문간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울던 모습 그대로였다. 그때 그가 한 말은 "어머니, 꼭 다시 오겠습니다!"였다.

선생님이 돌아간 후 나는 북녘을 다녀온 여러 사람을 통해 그의 어머니에게 보낸 사진과 편지 등을 보고 읽었으며 우리 부부에게 보낸 인사말과 당부의 말도 전해들었다. 지병인 골수암도 호전되어 건강하게 지내고 있고 모든 가족을 만나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북녘에 다녀온 사람들이 찍어온 동영상도 보았으며 그 동영상 안에서 북녘에서 환대받는 모습과 평안하고 즐거운 그의 모습도 보았다.

우리 부부는 그의 병환이 나아서(아니면 더 이상 병이 진행되지 않아서) 만나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2001년 6월, 통일을 못보고 별세하신 이종환, 윤용기 선생님의 부음은 우리 가족을 아프게 했다.

지키지 못한 첫 약속

지난 1월 10일 우리는 밤이 깊어가는 시간에 신인영 선생님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가까운 벗이 먼저 알고 전해준 그 소식에 아내는 몸짓을 멈추고 금세 눈자위를 붉히더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모진 사람인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대신 그 안타까움이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와 바늘처럼 이곳저곳을 찔러댔다. 꼭 다시 오겠다고 그의 어머니에게 다짐했던 약속을 그는 어디에 두고 갔을까? 어쩌면 이것이 그가 지키지 못한 마지막 약속이 아니었을까?

나는 바란다. 이것이 그가 지키지 못한 첫 약속이기를. 나는 또 믿는다. 자신이 바라고 조국이 바라던, 그가 민중을 사랑하기 시작한 후 했던 수많은 약속을 지키면서 이 지키지 못한 첫 약속을 어머니께 사죄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눈을 감았으리라고. 그를 옥죄어 오는 병마의 고통도 그의 어머니에게 지키지 못한 약속 때문에 일어나는 아픔을 넘어서지는 못했으리라. 그리고 그는 마지막 눈을 감을 때까지도 예의 `순하디 순한 짐승 같은 따스한 눈빛`을 빛냈을 것만 같다.

사람은 죽는다. 스러져 가는 모든 이름을 남길 때 우리가 그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사뭇 다름이 있기 때문이다. 그 다름이 역사라면 그 이름 위에 역사적이라는 이름 값을 얹고 참된 삶의 이정표로 삼는 것이 무리가 없다면 나는 선생님의 이름을 그 다름의 틀 안에 넣고 싶다. 물론 수많은 다름의 이름을 포함하여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선생님은 죽음이라 말할 수 없는 이름이다."라고.

신인영 선생님, 고이 가십시오. 감히 영전에 명복을 빕니다.

2001년 1월 12일

<출처:통일뉴스 2002-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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