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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green>한총련 김형주 임시의장 대담</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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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minjok.c… 작성일02-04-13 00:00 조회1,5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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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주 한총련 임시의장은 월간 자주민보 4월호에서 신형석 기자와 특별대담을 갖고 백만학도의 대표조직인 한총련의 향후 방향에 대해 제시했다. 이 내용을 전재한다. [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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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cy-kimhyungju.jpg운동진영은 요즘 마음이 급하다. "올 한해가 그야말로 분수령과도 같은 해"이기 때문이다. 2003년 북-미 제네바협상 만료시한을 1년을 앞두고 북-미간의 막판 대결이 더욱 격해질 것이다. 그 대결의 중심에는 공동선언이 있다. 지금껏 운동진영을 이끌어 온 공동선언이 확고해지는가? 아니면 퇴보 하느냐?를 가늠할 대선이 하반기에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3월3일 한총련 임시중앙위원회는 10기 한총련 임시의장으로 김형주(전남대 총학생회장)씨를 선출하였다. 1월 정도면 임시의장 체계로 출발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10기 한총련이 이 바쁜 시기에 지각을 한 셈이다. 2002년 온 신경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는 중요한 시기인 만큼 기대가 큰 한총련은 어떤 생각과 준비를 하고 있을까? 그리고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한총련 10기 김형주 임시의장 인터뷰

한총련이 올해 뭔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신형석 기자

대학 초년생 시절, 꾸벅 꾸벅 졸면서도 "의장님" 소리에 벌떡 일어나 진군가에 맞추어 팔을 흔들 때의 그 느낌은 묘한 감동같은 것이었다. "군중심리"일까?라는 자문을 지나, 그 느낌이 일체감이라는 것을 자답할수 있었다. 몇 만명의 사람이 하나가 될수 있는 일체감, 그리고 그 일체감을 모아내는 정점이 바로 "의장님"이었다.

10년이 지나 마주앉는 "25살 의장님"의 첫 인상은 군데 군데 엣 띤 모습의 미소년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대화 간간이 섞여 나오는 남도 사투리와 웃을 때 맺히는 눈가에 보조개가 참 인상적이었다. "25살 의장님"은 대화 내내 선배에 대한 깍듯한 예우를 잃지 않았고, 정말 뜨겁게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밥 퍼주는 총학생회장"
김형주 임시의장은 전남대 총학생회장이다. 작년에 어어 전남대가 2년 연속 임시의장을 하는 셈이다. 그러다보니 전남대 학생들이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가 총학생회장 얼굴 좀 보자는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 들으면 가슴이 뻑뻑해집니다. 그러나 전남대 학우들이 만든 투쟁 중심, 실천 중심, 대표자 중심의 기풍이 또한 한총련으로 하여금 민족 전남대를 다시 요구한다고 봅니다." 서울로 올라오기 전까지 김형주 임시의장은 "얼굴 좀 보고 살자"라는 이야기를 풀기 위해 학생식당에서 점심시간마다 밥을 퍼주었다고 한다. "총학생회장 김형주"라는 명찰을 달고 식당에서 밥 주걱을 들었다고 한다.

학생회장이 "슈퍼맨"이던 시절도 옛말이고 새내기들만의 학생회장이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요즘 대학가 한 단면이다. 영향력이 떨어진 총학생회장, 과연 밥 퍼줄 때 학생들이 냉소적이진 않을까?

"학우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먼저 믿어야죠. 처음에는 시큰둥한 얼굴로 볼 수도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꾸준한 모습을 보이면 진심으로 받아들입니다. 도서관이고 식당이고 거침없이 만나가야 합니다. 학생회장이라는 직함은 강력한 무기입니다.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 많이 자신감을 잃은 것 같습니다. 비판도 많이 받고 하다보니 위축이 된 것도 있을 것이고, 솔직히 맘 상하는 경우 많이 겪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공격적으로 그런 틀을 깨야 합니다. 잘못하면 고치겠다고 말하고, 잘 모르면 실무일꾼에게 물어봐 대답하겠다. 하고 솔직하게 아는 것만큼 학우들 만나면 됩니다. 밥 퍼주면서 학우들과 많은 이야기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나중에는 언제 밥 퍼주냐고 꼭 간다고 하는 분들도 있었으니까요."

임시의장을 결심하는데 있어 가장 힘들었던 것은 1년을 함께 하겠다고 약속했던 학우들이었다는 김형주 임시의장. 서울에 올라와 부시 방한을 앞두고 명동성당에서의 11일간의 단식농성을 하면서 고민을 정리할수 있었다고 한다. "학교와 지역에서 한총련을 책임지는 자리를 결심하고 나서부터 신경도 예민해지고 고민도 많아졌습니다. 판단도 잘 안서고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마음도 몸도 여유가 없어졌거든요. 그럴 때 한총련의 실천하는 한 사람으로 살아가자며 단식농성을 결심했습니다. 백만청춘을 투쟁으로 추동해내고 살아갈 각오가 되어있는가를 저 자신 스스로 시험해보자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 열 하루의 시간동안 여유도 많이 생기도 자신을 돌아볼수 있었습니다. 단식농성을 끝내고 품이 넓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일 지지해주러 오는 서총련 학우들과 시민들을 만나면서 자신감이 붙었습니다."

한총련 10년의 화두 "영광찬 계승"과 "공격적 혁신"
그는 한총련 10년 역사의 화두를 "영광찬 계승, 공격적 혁신"이라고 한다. 한총련이 지난 몇 년간에 걸친 물리적 탄압에 의한 상처도 있고, 굳건히 조직을 지켜왔으면서도 적극적이고 주동적이지 못한 오류도 있었다고 한다. 나이 어린 청년학생들이다 보니 열정에 비해 노련함이 떨어졌던 모습도 있었음을 인정한다고 한다.

"그러나 어떻게 극복할지가 중요합니다. "영광찬 계승"은 학우중심, 민중중심의 한총련의 사상대로 나가려는 모습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온갖 시련과 난관을 극복하고 뛰어넘고 가는 모습입니다. "영광찬 계승"은 "혁신과 비약"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동안 혁신을 강조하면서 계승의 의미를 수세적이고 낡고 진부한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혁신과 계승을 상반적 의미로 보면 안됩니다. 한총련 운동의 정당성과 전통을 패배적으로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계승 따로 혁신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한총련 10년의 역사동안 잘한 것도 있고, 못한 것도 있을 것인데 혁신을 한다고 해서 잘한 것까지 덮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97년 한총련 5기의 전민항쟁 노선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97년 한총련은 당시 5기 한총련은 전민항쟁을 통해 김영삼 정권을 타도하겠다고 밝혀 운동진영에 논란을 던진 적이 있었다.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이는 한총련이 이적단체로 규정되는 원인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나이 어린 학번이라 평가하기는 뭐하지만 당시 한총련의 투쟁은 정당했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정말 그때 한총련이 거리에 나와 투쟁하면 시민들이 지지가 대단했습니다. 부모님도 "너희들이 맞다"고 하셨을 정도였으니까요. 온갖 비리와 민생파탄의 주범 김영삼 정권 퇴진은 민중들의 요구였습니다. 이를 한총련이 선도적인 투쟁으로 뚫은 것은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하는 부분입니다. 저희가 그 투쟁을 하면서 잘못한 것이나 부족한 면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민중들의 요구대로 투쟁한 것까지 패배적으로 청산해서는 안됩니다. 역사가 제대로 평가 해주는 날이 올 것이라 믿습니다."

김형주 임시의장이 말하는 공격적 혁신 "일단 하자. 이겁니다."
한총련이 혁신을 제기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한총련이 아닌 개인이나 조직이나 누구나 발전을 위해서는 혁신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말잔치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이룰 것인가?하는 것이다. 특히 총론만 있고 방도를 제시 못하면 그야말로 말잔치가 아니겠는가? 더욱이 한총련 기층의 대중세가 많이 약해졌다고 하는데 보다 밑으로 내려가는 방도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어보았다. 예를 들어 어떤 학교에서 김형주 임시의장이 혁신을 일군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통상 사업을 진행하면 총학생회가 단대학생회를 강제해내고 끌어오는 것은 경우가 많습니다. 강제해야 될 것은 강제해야겠지만 그것이 주를 이루어서는 안됩니다. 사례를 든다면 전남대 이야기 좀 하겠습니다. 미국의 전쟁책동 반대를 위한 50일 강행군 시기가 있었습니다. 50일 강행군을 천막농성으로 진행했는데 총학생회는 큰 틀만 잡아주고 50일을 나누어서 우선 제일 잘하는 단대학생회에 천막농성을 맡겨버렸습니다. 단대가 맘대로 해라 이겁니다. 이러면 일이 안될 것 같은데 오히려 단대의 특성에 맞는 창조적 방법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총학생회 단위 선전사업과 교양사업을 스스로 준비하면 학교운동을 보는 눈이 넓어집니다. 총학생회 일꾼들은 다른 단대 지도사업을 내실있게 전개할수 있었습니다. 다른 단대는 하는데 우리라고 못하겠냐는 경쟁심을 통해 한 단대의 성과가 다른 단대들로 퍼지게 됩니다. 어떤 단대는 합숙을 하기도 했습니다. "

"그리고 또 하나 대중세가 약해졌다고 지적하셨는데 맞습니다. 지금 기층에서 힘들어하는 것은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있어야 대중들도 만나는데 재생산이 안된다는 고민입니다. 사고를 바꾸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운동지향이 있는 사회과학 소모임이 있다면 선배들 주도로 단순히 학습만 하고, 여유 되고 결의 되면 집회나가는 차원이 되서는 안됩니다. 선배가 다 할려고 하지말고 소모임 자체에서 판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학습을 했다 이겁니다. 그리고 그냥 집회가자, 이러지 말고 스스로 집회를 준비해보는 겁니다. 누구는 유인물을 한번 만들어 보고, 누구는 시내에 나가 시민들의 의식, 정서를 파악보고, 누구는 뒷풀이 준비도 해보고 하는식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후배들이 자체적으로 움직일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잘 안될수도 있고, 금방 효과가 안날수도 있습니다. 되려 후배들이 부담가지고 떨어져 나갈수도 있구요.

그러나 그런 경험을 가진 후배들은 스스로가 선배가 해주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느낄것입니다. 선배가 주도하지만 나중에는 자신들이 하게끔 만들어 줘야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일꾼들만이 대중을 조직화합니다. 더 나은 방식으로요.

그래야 하나가 열이 되고, 열이 백이 됩니다. 내가 안하면 우리 학교 운동이 죽어버린다는 생각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그는 이제 학생회가 조·종례 사수 같은 것은 뛰어넘는 혁신이 필요하다고 한다. 공격적 혁신이란 적극적, 조직적, 실천적 혁신을 의미한다고 한다. 특히 실천적이라는 말을 강조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무엇이든 계획이 너무 무성하면 실천하는데 용두사미가 될수 있다고 한다. 철저한 계획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빠르게 실천적 과정을 가져가면서 부족한 부분을 고쳐가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한총련이 혁신을 내걸고 많은 성과들을 냈지만 일회성이고 이어지지 못한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혁신이아는 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야 되는 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올해는 혁신의 모범이 서면 모범으로 따라배우는 기풍을 세우겠다고 한다. 대중들로 하여금 이것이 바로 한총련이구나 하는 것 말이다.

한총련 더 크게 통일하고, 더 크게 단결하겠다.
공동선언의 탄생은 학생운동의 방향성을 바꾸어 놓았다고 한다. 예전처럼 선도적으로 투쟁하기보다는 공동선언이라는 큰 틀을 기준으로 삼고 민중들과 함께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한총련 또한 거기에 맞추어 달라진 새 시대의 운동적 요구와 높아진 대중들의 요구에 맞게 변화발전해야 하는데 아직은 좀더 빠르게 진행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임시중앙위원회가 울음바다가 되었거든요. 동지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무한한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한총련의 통일 단결을 위해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한총련 그 본연의 모습을 찾아야겠다라는 결심…. 눈물속에서의 감동. 끈끈한 것이 느껴졌습니다. 마치 한총련 그 10년의 역사가 그 순간에 녹아져있는 것 같았습니다."

느낀대로 자신부터 실천적으로 한총련의 통일단결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한다. 당장이라도 정견을 달리하는 학생들과도 만나서 함께 할수 있는 것부터 찾겠다는 것이다. 운동과 거리가 있는 학우들도 만나서 이야기하고 함께 할려고 하는데 같은 시대에 운동을 하는 이들과 함께 못하면 잘못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지금의 통일단결의 구호는 한총련의 문제를 풀기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올 하반기 대선은 향후 공동선언 지지세력의 강화냐, 아니면 퇴보냐를 가늠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대선에서 승리의 담보는 전체 운동진영의 통일단결에 달려있습니다. 한총련이 먼저 통일단결의 모범을 창출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힘을 가지고 대선투쟁에서 전체운동진영의 통일단결을 모색해 오겠다는 의지입니다."

그렇다면, 한총련 올해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한총련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겠다? 한총련은 공동선언이 탄생했던 해, 통일운동단체들이 정부·관과의 사업을 머뭇거릴 때 과감하게 시도하는 전형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작년에는 특별하게 기억나는 일이 없는 것 같았다. 올해 통일운동에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물어보았다.

"우선 2000년도와 작년은 다릅니다. 부시 행정부의 출범으로 북미관계가 달라졌습니다. 하다보니 정부를 대상으로한 운동세력의 노력이 부족하고 주춤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봅니다. 정부당국이 함께해야 되는 측면과 함께 투쟁의 대상이 되는 측면이 동시에 존재한것입니다. 그렇다보니 큰 행사 보다는 투쟁을 중심으로 해서 기억나는 것이 없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동선언의 성장에 기인하기도 합니다. 공동선언 초장기에는 한총련이 먼저 뚫고 가야 할 요구가 있었지만, 작년에는 공동선언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와 합의속에 합법 공간이 늘어나고, 통일연대라는 조직을 통해 한총련이 함께 하려는 모습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하기에 6·15통일대토론회나 8.15평양행사가 가능했다고 봅니다."

2000년에는 공동선언이 대중들에게 일반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총련의 활동이 눈에 확 드러나보였는 것이다. 그러나 작년같은 경우는 공동선언이 일반화되고 한총련도 그 속에 녹아들어가 있기에 밖에서 보기에는 안보일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올해 전체운동의 목표와 한총련의 목표가 다르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한총련의 제 몫을 다하고 주동적 적극적으로 목표를 실현해야 겠다라는 생각입니다. 저는 한총련처럼 투쟁과 사업에 있어 풍부한 경험과 실천력이 있는 조직은 없다고 자부합니다. 당면해서 무기도입 반대, 용산미군기지 등 사안별 반미 투쟁이 벌어지고는 있으나 전쟁책동을 분쇄하는 힘으로 모아지고 있지 못한 상황입니다. 한총련이 주저주저하는 분위기를 깨고 힘을 집중하여 투쟁에 나설 것입니다. 3월과 4월, 학원자주화의 바람을 민족자주화 투쟁으로 집중하고, 아리랑 축전으로 연결시켜 민족대단결로 몰아갈 것입니다. 이런 투쟁을 통해 상반기안에 6월15일, 8월15일을 넘어 공동선언이 대세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랬을때 대선에서도 공동선언을 지지하는 세력을 당선시킬수 있습니다. 아직 특정세력을 지칭할 수는 없습니다. 공동선언이 대세를 이루면 보일것입니다. 아마 제도권 안에서도 각성이 일것이라 생각합니다. 제도권 후보조차도 그 기세에 밀려 "나의 통일관이 부족했다. 공동선언을 적극 실현하는데 힘쓰겠다"고 대선때 밝힐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물론 그러지도 않겠지만 이회창은 안됩니다."

또한 이런 활동을 더욱 힘있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올해 안에 이적규정의 문제를 매듭짓겠다고 한다. 특히 "한총련 범사회인 대책위"까지 꾸려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한총련에 대한 애정과 관심에 대해 반드시 올해 무엇인가를 보여드리겠다는 한총련 10기 임시의장 김형주.

의미가 각별한 올 한해 우리는 한총련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 한총련의 의미를 크게 보든 작게 보든 전국적 조직을 갖추고, 헌신적으로 일사불란한 실천력을 가진 이들이기 때문이다. 지난 10년간 노동자든, 농민이든, 빈민이든, 지식인이든 어디든지 녹아 들어가는 이들이 바로 한총련이었음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부디 한총련을 거쳐왔고, 지금의 한총련을 만들고 있고, 한총련을 지켜보는 모든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면 한다. 10년전 느껴보았던 그 묘한 감동, 소름끼치는 일체감을 다시금 느끼고 싶다. 우리 모두 아무리 늦은 새벽일지라도 기꺼이 기다릴수 있으며 진군가에 맞추어 팔을 함께 흔들어 줄 것이다.

[출처:월간 자주민보 4월호 특별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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