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사투리를 허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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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minjok.c… 작성일02-06-23 00:00 조회1,46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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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어는 폭력이다
길준범 기자 dwarfgil@sogang.ac.kr
붉은 악마 = 서울 중심주의?
최근 한국 사회에서 가장 많은 조명을 받고 있는 이들은 바로 "붉은 악마"일 것이다. 한국 전체가 "빨간 색"으로 들썩거리고 있는 기분이다. 과거에 언제 그렇게 "빨갱이"라는 "괴물"들을 사냥한 나라였느냐는 듯 맹렬하게 불고 있는 "붉은 악마, 붉은 색" 열풍은 갑작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그 전까지 프로 축구를 응원하던 서포터들이 그렇게 많았던가? 프로축구가 열리는 구장에 관중들이 그렇게 많이 몰렸었던가? 수많은 "붉은 악마"들의 탄생은 분명 축구의 인기 현상과는 그 맥을 달리한다. 즉 스포츠를 통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추구하는 성향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의 "붉은 악마" 열풍은 강렬한 한국 내셔널리즘, 민족주의를 담고 있다. 분명 이건 축구와 관련된 팬덤 현상이 아니라 순전히 내셔널리즘적인 현상이다. 혹자는 최근 한국축구 붐을 "축구 팬은 없고 국가대표 팬만 있다"며 꼬집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사회에서 "국가대표급"만이 위세를 떨치고 있는 부분은 축구 외에도 많다. 우리가 매일 식탁에서 먹고 있는 김치만 해도 그렇다. 공장에서 만들어지고 해외로 수출되기도 하는 우리의 김치제품은 일괄적으로 배추김치의 형태가 대부분이다. 즉 우리가 사먹을 수 있는 김치는 대체로 배추김치의 형태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배추의 김치는 수백가지가 넘고 지역마다 그 종류와 방법도 달라 각 지역마다 고유의 맛깔스러움을 가지고 있다. 경상도의 무말랭이 김치, 충청도의 총각무 동치미, 전라도의 고추김치는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들이다. 경상도 울진에서 자라신 외할머니는 김치에 해산물이 들어간 해물김치를 만들어주신다. 다른 곳에서는 사먹으려 해도 구할 수 없는 김치이다.
지금대로의 상황이 계속된다면 이런 해물김치를 쉽게 맛보기는 어렵게 될 것 같다. 아마 외국인들은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수많은 김치의 종류 중 한가지일 뿐인 배추김치가 "김치"라는 전체의 이름을 대표하게 된다.
이러한 "국가대표 밀어주기"의 뒤에는 중앙과 지방을 가르고 그 대접을 달리 하는 "중앙, 서울 중심주의"의 논리가 숨어있다. 그 배경에는 공통적으로 폭력적인 문화 단일주의가 존재한다. "붉은 악마"는 한국 국가 대표팀 응원을 통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추구한다. 여기서 이 정체성은 스스로의 의미를 담지 못하고 단지 외국과 "차별"되는 데 의의를 둔다.
정작 "축구" 그 자체는 큰 의의를 가지지 못한다. "붉은 악마"는 현실적으로 빈약한 우리의 축구문화라는 지방성을 생략하고 있다. 대신 국가대표팀 응원을 통한 한국의 정체성 추구라는 새로운 중앙, 서울의 영역을 쌓고 있다. 김치의 경우도 "국가 대표" 김치만이 살아남는다. 실제 삶에서도 우리는 늘 "서울"에 가야 사람 구실을 한다는 말을 듣고 있다. 또한 방송에서도 그러한 얘기를 듣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표준어는 권력이다
지방에서 사람들을 인터뷰할 때 재미있는 것은 인터뷰하는 사람들의 어색한 표준어이다. 자기들끼리는 사투리로 신나게 떠들다가도 마이크만 갖다 대면 신기하게도 다들 익숙하지 않은 표준어로 말하는 것이다. 그건 우리의 방송이 표준어가 아닌 언어는 방송에서 금기 언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암묵적으로 세뇌시킨 결과일 것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지방 사람들은 자신들의 언어와는 다른 서울말이 오히려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까? 가까운 부산 친구들도 서울말은 닭살 같다며 거부감을 보이는데 말이다. 왜 부산의 방송에서는 부산 사투리로 방송을 할 수 없는 것일까? 왜 광주의 방송에서는 광주 사투리로 방송을 할 수 없는 것일까? 각 지방의 사투리가 그 지역 사람들에게는 더 자연스럽게 들릴 것임을 모르는 것일까? 자신들이 쓰지도 않는 말을 듣도록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 아닐까?
방송에서 표준어만을 사용하도록 한 것은 명백히 서울, 중앙 중심적인 가치관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서울 중심이라 하면 방송의 표준어를 구사하는 것이 사투리를 구사하는 것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을 포함한다. 잘생기고 에쁜 연예인들은 한결같이 깨끗한 표준어를 구사한다. 즉 그들과 같은 매력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표준어 구사는 필수라는 공식이 성립한다.
지독한 사투리를 쓰는 핑클이라. 상상이 가질 않는다. 뉴스도 표준어로만 진행된다. 정보의 전달에 있어 그 형식의 틀은 정보 자체를 신뢰하는 하나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같은 정보라도 표준어로 구사된 정보가 더 공신력있는 것이 된다. 서울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부산에서 태어난 사람보다 서울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나운서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먼저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방송에서도 종종 사투리를 찾아볼 수 있기는 하다. 먼저 깡패 드라마에서다. 재미있게도 경상도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정권하에서는 호남 사투리의 전라도 깡패가, 전라도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정권 하에서는 영남 사투리의 경상도 깡패가 등장했다. 경상도, 전라도에서 사투리 쓰는 사람은 깡패밖에 없단 말인가?
다음으로 최근 명랑소녀로 바람몰이를 한 장나라의 충청도 사투리가 생각난다. 귀여운 이미지를 연출하는 데 있어 그녀의 어눌한 말투의 사투리는 잘 어울린다. 그러나 실상 그녀의 사투리는 희화화된 캐릭터를 연출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듯 보인다. 충청도 사투리 쓰는 사람들은 그렇게 만화같은 사람들 밖에 없는가?
마지막으로는 가장 거침없이 사투리를 구사하는 이들이다. 바로 로버트 할리나 미즈노 페이같은 외국인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유일하게 방송에서 자신의 사투리를 마음껏 얘기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도 이들의 사투리에는 거부감을 보이지 않고 신기해한다. 이들이 사투리로 방송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까닭은 이들이 정식으로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이들은 "한국인은 표준어를 사용해야 한다"라는 암묵적인 전제에서 벗어나 있다. 우리의 언어인 사투리, 지역 언어를 역설적으로 외국인들이 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 역설적이지 않는가?
사실 원래부터 "표준"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표준어의 정의도 모호하다. "서울에서 살고 있는 교양있는 중산층이 사용하는 말"이 표준어의 정의이다. 그럼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온 "교양있는 중산층"의 말은 표준어가 아니란 말인가? 그 정의에서 벗어난 것이 없지 않은가. 또한 "교양있다"는 것도 애매하기 짝이 없다. 대학교를 나온 이들은 교양이 있는 것인가? "교양"의 기준은 무엇인가?
표준어는 실상 그 사회의 권력 지형도에 따라 정해지기 마련이다. 신라 시대에는 경주 지역의 말이 표준어였다. 같은 한국말이지만 북한에서는 평양지역의 말을 문화어라 하여 표준어로 정의하고 있다. 즉 정치, 사회, 경제적 맥락의 구조가 "표준"의 표준을 정하는 것이다.
사투리를 허하라
여전히 모든 정치, 경제의 중심이 서울인 한국의 현실에서 지방은 상대적으로 빈약한 대접을 또한 강요받고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중앙집권적이었던 우리의 국가 구조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살펴본 방송의 표준어 중심 정책은 무의식적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서울 신드롬의 결정판이라 할만하다. 흔히 "언어는 민족의 흥망을 좌우하는 마지막 열쇠"라는 말을 한다. 이를 우리 내부에 적용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
비단 한국어로서의 가치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지역의 언어도 그 지역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소중한 가치인 것이다. 이제 "한국"이라는 내셔널리티에 숨겨진 우리의 자화상들을 살펴보자. 어느 특정 지역이 한국이라는 정체성을 대표할 수는 없다. "한국"이라는 정체성은 각기 서로 다른 우리 내부의 정체성들이 "구성"해 나가는 것으로 봐야한다.
경상도 사람은 자신이 경상도 사람임을 긍정할 권리가 있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서로간의 이해는 명확한 자신의 정체성 확립에서 나온다. 자신이 누구이고 그에 자신감을 갖는 사람이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여유를 갖기 마련이다. 사투리의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제안을 하자. 사극에서 사투리를 쓰자.
재미있는 인터넷 유머가 있다. 계백과 화랑 관창의 이야기다.
관창 : "고마 죽이라!"
계백 : "참말로 죽고 싶지비이?"
이 대사가 코미디처럼 들리는 게 우리 사회에서 사투리의 위치가 추락했음을 이야기하면서였다. 그런데 정말 이 대사가 코미디처럼 어색할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계속 들으면 단조로운 사극 어투에서 탈피하여 당시 국가간의 차이를 드러내주는 박진감을 연출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왜 의상이나 무기는 공들여 고증하면서 정작 제일 중요한 언어의 문제는 생략하고 있는 것인가?
삼국시대에 "서울말"로 이야기하는 장수들. 오히려 우습지 않은가? 게으른 후손들 덕분에 저승에서 "표준어"를 배우느라 고생하고 있을 선조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2002/06/13 오후 7:52
[출처; 오마이 뉴스 ⓒ 2002 OhmyNews]
길준범 기자 dwarfgil@sogang.ac.kr
붉은 악마 = 서울 중심주의?
최근 한국 사회에서 가장 많은 조명을 받고 있는 이들은 바로 "붉은 악마"일 것이다. 한국 전체가 "빨간 색"으로 들썩거리고 있는 기분이다. 과거에 언제 그렇게 "빨갱이"라는 "괴물"들을 사냥한 나라였느냐는 듯 맹렬하게 불고 있는 "붉은 악마, 붉은 색" 열풍은 갑작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그 전까지 프로 축구를 응원하던 서포터들이 그렇게 많았던가? 프로축구가 열리는 구장에 관중들이 그렇게 많이 몰렸었던가? 수많은 "붉은 악마"들의 탄생은 분명 축구의 인기 현상과는 그 맥을 달리한다. 즉 스포츠를 통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추구하는 성향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의 "붉은 악마" 열풍은 강렬한 한국 내셔널리즘, 민족주의를 담고 있다. 분명 이건 축구와 관련된 팬덤 현상이 아니라 순전히 내셔널리즘적인 현상이다. 혹자는 최근 한국축구 붐을 "축구 팬은 없고 국가대표 팬만 있다"며 꼬집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사회에서 "국가대표급"만이 위세를 떨치고 있는 부분은 축구 외에도 많다. 우리가 매일 식탁에서 먹고 있는 김치만 해도 그렇다. 공장에서 만들어지고 해외로 수출되기도 하는 우리의 김치제품은 일괄적으로 배추김치의 형태가 대부분이다. 즉 우리가 사먹을 수 있는 김치는 대체로 배추김치의 형태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배추의 김치는 수백가지가 넘고 지역마다 그 종류와 방법도 달라 각 지역마다 고유의 맛깔스러움을 가지고 있다. 경상도의 무말랭이 김치, 충청도의 총각무 동치미, 전라도의 고추김치는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들이다. 경상도 울진에서 자라신 외할머니는 김치에 해산물이 들어간 해물김치를 만들어주신다. 다른 곳에서는 사먹으려 해도 구할 수 없는 김치이다.
지금대로의 상황이 계속된다면 이런 해물김치를 쉽게 맛보기는 어렵게 될 것 같다. 아마 외국인들은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수많은 김치의 종류 중 한가지일 뿐인 배추김치가 "김치"라는 전체의 이름을 대표하게 된다.
이러한 "국가대표 밀어주기"의 뒤에는 중앙과 지방을 가르고 그 대접을 달리 하는 "중앙, 서울 중심주의"의 논리가 숨어있다. 그 배경에는 공통적으로 폭력적인 문화 단일주의가 존재한다. "붉은 악마"는 한국 국가 대표팀 응원을 통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추구한다. 여기서 이 정체성은 스스로의 의미를 담지 못하고 단지 외국과 "차별"되는 데 의의를 둔다.
정작 "축구" 그 자체는 큰 의의를 가지지 못한다. "붉은 악마"는 현실적으로 빈약한 우리의 축구문화라는 지방성을 생략하고 있다. 대신 국가대표팀 응원을 통한 한국의 정체성 추구라는 새로운 중앙, 서울의 영역을 쌓고 있다. 김치의 경우도 "국가 대표" 김치만이 살아남는다. 실제 삶에서도 우리는 늘 "서울"에 가야 사람 구실을 한다는 말을 듣고 있다. 또한 방송에서도 그러한 얘기를 듣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표준어는 권력이다
지방에서 사람들을 인터뷰할 때 재미있는 것은 인터뷰하는 사람들의 어색한 표준어이다. 자기들끼리는 사투리로 신나게 떠들다가도 마이크만 갖다 대면 신기하게도 다들 익숙하지 않은 표준어로 말하는 것이다. 그건 우리의 방송이 표준어가 아닌 언어는 방송에서 금기 언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암묵적으로 세뇌시킨 결과일 것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지방 사람들은 자신들의 언어와는 다른 서울말이 오히려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까? 가까운 부산 친구들도 서울말은 닭살 같다며 거부감을 보이는데 말이다. 왜 부산의 방송에서는 부산 사투리로 방송을 할 수 없는 것일까? 왜 광주의 방송에서는 광주 사투리로 방송을 할 수 없는 것일까? 각 지방의 사투리가 그 지역 사람들에게는 더 자연스럽게 들릴 것임을 모르는 것일까? 자신들이 쓰지도 않는 말을 듣도록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 아닐까?
방송에서 표준어만을 사용하도록 한 것은 명백히 서울, 중앙 중심적인 가치관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서울 중심이라 하면 방송의 표준어를 구사하는 것이 사투리를 구사하는 것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을 포함한다. 잘생기고 에쁜 연예인들은 한결같이 깨끗한 표준어를 구사한다. 즉 그들과 같은 매력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표준어 구사는 필수라는 공식이 성립한다.
지독한 사투리를 쓰는 핑클이라. 상상이 가질 않는다. 뉴스도 표준어로만 진행된다. 정보의 전달에 있어 그 형식의 틀은 정보 자체를 신뢰하는 하나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같은 정보라도 표준어로 구사된 정보가 더 공신력있는 것이 된다. 서울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부산에서 태어난 사람보다 서울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나운서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먼저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방송에서도 종종 사투리를 찾아볼 수 있기는 하다. 먼저 깡패 드라마에서다. 재미있게도 경상도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정권하에서는 호남 사투리의 전라도 깡패가, 전라도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정권 하에서는 영남 사투리의 경상도 깡패가 등장했다. 경상도, 전라도에서 사투리 쓰는 사람은 깡패밖에 없단 말인가?
다음으로 최근 명랑소녀로 바람몰이를 한 장나라의 충청도 사투리가 생각난다. 귀여운 이미지를 연출하는 데 있어 그녀의 어눌한 말투의 사투리는 잘 어울린다. 그러나 실상 그녀의 사투리는 희화화된 캐릭터를 연출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듯 보인다. 충청도 사투리 쓰는 사람들은 그렇게 만화같은 사람들 밖에 없는가?
마지막으로는 가장 거침없이 사투리를 구사하는 이들이다. 바로 로버트 할리나 미즈노 페이같은 외국인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유일하게 방송에서 자신의 사투리를 마음껏 얘기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도 이들의 사투리에는 거부감을 보이지 않고 신기해한다. 이들이 사투리로 방송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까닭은 이들이 정식으로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이들은 "한국인은 표준어를 사용해야 한다"라는 암묵적인 전제에서 벗어나 있다. 우리의 언어인 사투리, 지역 언어를 역설적으로 외국인들이 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 역설적이지 않는가?
사실 원래부터 "표준"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표준어의 정의도 모호하다. "서울에서 살고 있는 교양있는 중산층이 사용하는 말"이 표준어의 정의이다. 그럼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온 "교양있는 중산층"의 말은 표준어가 아니란 말인가? 그 정의에서 벗어난 것이 없지 않은가. 또한 "교양있다"는 것도 애매하기 짝이 없다. 대학교를 나온 이들은 교양이 있는 것인가? "교양"의 기준은 무엇인가?
표준어는 실상 그 사회의 권력 지형도에 따라 정해지기 마련이다. 신라 시대에는 경주 지역의 말이 표준어였다. 같은 한국말이지만 북한에서는 평양지역의 말을 문화어라 하여 표준어로 정의하고 있다. 즉 정치, 사회, 경제적 맥락의 구조가 "표준"의 표준을 정하는 것이다.
사투리를 허하라
여전히 모든 정치, 경제의 중심이 서울인 한국의 현실에서 지방은 상대적으로 빈약한 대접을 또한 강요받고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중앙집권적이었던 우리의 국가 구조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살펴본 방송의 표준어 중심 정책은 무의식적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서울 신드롬의 결정판이라 할만하다. 흔히 "언어는 민족의 흥망을 좌우하는 마지막 열쇠"라는 말을 한다. 이를 우리 내부에 적용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
비단 한국어로서의 가치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지역의 언어도 그 지역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소중한 가치인 것이다. 이제 "한국"이라는 내셔널리티에 숨겨진 우리의 자화상들을 살펴보자. 어느 특정 지역이 한국이라는 정체성을 대표할 수는 없다. "한국"이라는 정체성은 각기 서로 다른 우리 내부의 정체성들이 "구성"해 나가는 것으로 봐야한다.
경상도 사람은 자신이 경상도 사람임을 긍정할 권리가 있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서로간의 이해는 명확한 자신의 정체성 확립에서 나온다. 자신이 누구이고 그에 자신감을 갖는 사람이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여유를 갖기 마련이다. 사투리의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제안을 하자. 사극에서 사투리를 쓰자.
재미있는 인터넷 유머가 있다. 계백과 화랑 관창의 이야기다.
관창 : "고마 죽이라!"
계백 : "참말로 죽고 싶지비이?"
이 대사가 코미디처럼 들리는 게 우리 사회에서 사투리의 위치가 추락했음을 이야기하면서였다. 그런데 정말 이 대사가 코미디처럼 어색할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계속 들으면 단조로운 사극 어투에서 탈피하여 당시 국가간의 차이를 드러내주는 박진감을 연출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왜 의상이나 무기는 공들여 고증하면서 정작 제일 중요한 언어의 문제는 생략하고 있는 것인가?
삼국시대에 "서울말"로 이야기하는 장수들. 오히려 우습지 않은가? 게으른 후손들 덕분에 저승에서 "표준어"를 배우느라 고생하고 있을 선조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2002/06/13 오후 7:52
[출처; 오마이 뉴스 ⓒ 2002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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