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red>미군에 폭행감금 당한 한 기자 </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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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minjok.c… 작성일02-07-08 00:00 조회1,49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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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에게 강제연행, 고문당한 한유진기자의 수기가 인터넷 언론, 민중의 소리 1일자가 다뤘다. 전문을 싣는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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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기자는 미군에게 있어서
짐승만도 못한 존재인가?
폭력연행, 강제구금..한유진 기자, 악몽의 2시간
△한유진 기자
구속될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나오게 되어 글을 쓰게 된 것에 대해 너무나 기쁘게 생각하며 저를 도와주신 동료 직원들과 대책위 여러분, 그리고 모든 기자 여러분들께 뜨거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또 파렴치하고 뻔뻔스런 미군에 분노하며 또 다른 언론의 역할을 자임하며 저의 소식을 알려주고 경찰과 검찰이 압력을 느낄만큼 여론을 만들어 주신 수많은 네티즌 여러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제가 이글을 남기는 것은 미군의 직접 피해를 입은 당사자로 그동안 저보다 더한 일을 당하고도 말 한마디 못하고 고통을 삼켜야만 했던 수많은 피해자들을 대신해서 미군의 만행을 사실 그대로 생생하게 국민들 앞에 알리기 위해서 입니다. 단지 그 만행을 과장되게 부풀려서 분노만 자아내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자정신에 입각하여 사실을 근거로 제가 느낀 감정과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입니다. 그런만큼 자신의 시각과 다르다고 호도하거나 색깔논쟁으로 끌고가며 저의 체험을 왜곡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제가 미군 영내로 들어가게 된 것은(경과는 이후에 서술하겠지만) 기자의 첫째 임무인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입니다. 언론자유 앞에 그 어떤 성역이 있을 수 없건만 주한미군은 국민들의 알권리에 철저히 가려진채로 정권의 비호와 소파협정의 우위에서 50년 넘게 국민과 국가위에서 군림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간 50년동안 일어난 수천 수만건의 주한미군 관련 사건과 범죄들을 보면서 너무나 알려지지 않은채 묻혀버린 사건들이 많았다는 것에 놀랐고, 전동록씨의 죽음이나 두여중생의 죽음을 보면서 뻔뻔하리만치 무책임한 주한미군의 태도에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거대 보수언론들의 외면속에 묻혀가고 있는 이 문제가 바로 진정한 언론이 주시해야할 민족의 문제라는 생각에 저희 방송국과 기자들은 적극 나서게 된 것입니다.
그날 저는 집회 전반부를 촬영하고 후반부에는 이정미 기자에게 카메라를 맡기고 보조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잡혔을 당시는 이정미기자가 촬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4시부터 시작된 집회가 점점 무르익어가면서 관련 대책위 대표들이 항의서한을 전달하는 순서가 되면서 집회대오와 전경들의 몸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저는 뒷쪽에서 취재에 필요한 정황들을 살피고 있다가 정문 오른편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을 보고 그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인 안쪽에 철조망이 뚫려있는 것이 보였으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철조망 바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미군 영내가 환희 들여다 보였으며 일부의 사람들이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 같더니 여러 사람들이 우루루 저를 밀치면서 영내로 들어가기 시작하였으며 그 바람에 저도 얼결에 영내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일단 발을 들여놓자 정문 뒷쪽의 상황이 궁금했고 5,6m를 더 나아가 정문쪽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상황을 살펴볼 겨를도 없이 바로 미군들 30여명 정도가 이쪽으로 우루루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급히 철조망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하였고 저도 몸을 돌려 철조망 앞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안에서 촬영을 하던 이정미 기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뒤를 돌아보니 이 기자가 미군들이 바로 앞까지 왔는데도 얼어붙은 듯이 서있었습니다.(나중에 안 사실인데 이정미 기자는 개나 고양이를 무척 싫어하는 성격인데 당시 미군들이 군견을 끌고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놀라서 발을 뗄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뒤늦게 몇 발자욱 물러났으나 이미 미군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며 5,6명의 미군들이 막무가내로 카메라를 빼앗으며 이 기자를 덮치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급박함을 알고 그것을 제지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고 그곳으로 달려갔으나 주변에 있던 미군들이 이내 저를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무슨 설명을 할 겨를도 없이 한 미군이 저의 목을 잡아 조르면서 복부를 가격하고 자빠뜨렸으며 넘어진 저에게 2,3명의 미군들이 달려들어 저를 엎드리게 한뒤 양팔을 잡고 등뒤로 꺽고, 양다리도 엊갈려 꺽어 꼼짝을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당황스러운 것은 팔을 꺽는 것이 힘을 못쓸 정도로 제압을 할려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울 만큼 아플정도로 꺽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미군은 얼굴을 옆으로 꺽어 돌리더니 발로 밟고 목을 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도데체 목을 왜 조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흑인 병사는 어느정도 제압이 될 정도로 조르는 것이 아니라 숨이 막히다 못해 넘어갈 때까지 조르는 것이었습니다. 두려운 나머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숨이 넘어갈 즈음 잦아들며 나온 말은 "~살려줘!"라는 말이었습니다. 정말 그 흑인병사가 저를 죽이려고 하는줄 알았습니다. 그제서야 힘을 푸는줄 알았는데 숨통이 트이자 다시 손가락에 힘을 주며 목을 졸르고 있었습니다. 그 고통이 멈춘것은 뒤에서 팔을 꺽던 병사들이 손목에 포승을 채우고 끌고갈 때 쯤에야 멈추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언제 포승이 되었는지도 모르게 2명의 병사에게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승이 좀 느슨하게 되었는지 손을 몇번 움직이자 금새 풀을수 있었고 제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아까의 공포가 떠올라 도망가려고 몸부림 치자 다시 5, 6명이 달려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아스팔트 위에서 제압을 당하게 되었는데 목만 안 졸랐지 더 고통스럽게 팔을 꺽고 등을 무릅과 발같은 것으로 짓눌렀습니다. 너무 심하게 꺽고 누르고 등을 짓이기는 바람에 저는 이후에 한국경찰에게 인도된 이후 심한 부상을 입어야만 했으며 조사과정 내내 서있기도 힘들고, 앉아 있기도 힘든 부상을 입어 목 보호대를 하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한 병사는 첫 진압때와 같이 얼굴을 옆으로 꺽더니 두손으로 있는 힘껏 얼굴을 누르는 것이었습니다. 얼굴이 무슨 큰 저항을 한다고 그렇게 힘껏 누르는지 미군들의 동작 하나 하나에서 살기가 느껴졌습니다. 얼굴 오른쪽에 있는 찰과상은 그때 너무 심하게 짓눌러져 생긴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본격적인 고문은 그 순간부터 였습니다.
미군들은 아까 채웠던 플라스틱 수갑을 다시 채우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한번 풀렸던 탓인지 이번에는 작심을 한 것처럼 있는 힘껏 잡아당겨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힘껏 잡아당겨 순간 소리를 질렀습니다.
미군은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저를 양쪽에서 일으키고 한명은 허리띠를 잡고 스스로의 힘으로 가는 것인지 허공에 떠서 가는 것인지 모르게 어디론가 가고 있었습니다.
팔이 조여오는 고통이 시작되었지만 그제서야 숨막힘과 팔꺽임의 고통에서 벗어나 조금은(?) 정신을 차릴수가 있었으며 아까 "사람살려"라고 비명을 지르며 미군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이정미 기자 생각이 났고, 이들에게 무언가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풀어줘라", "기자를 왜 잡아가느냐!", "어디로 가는거야!"라고 소리쳤지만 알아듣는지 못알아 듣는지 미군들은 자기들끼리 뭐라고 말하며 한 막사로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막사는 구조가 가운데에 유리로 된 상황실 같은 것이 있고 "ㄷ"자 모양으로 복도가 나 있으며 그 한쪽에 바깥과 통하는 문이 있고 안쪽에 한명 정도를 수용할수 있는 쇠창살로 된 유치장이 2개가 있고 유치장 사이는 벽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즉 가운데 상황실 같은 곳에서 바깥상황을 볼수도 있고 안쪽의 유치장과 안쪽 방들의 움직임들을 한눈에 알수 있게 되어 있는 구조였으며 상황실 입구는 유치장쪽 복도에 나 있었습니다.
막사에 들어서자 마자 복도에 무릅을 꿇리는가 십더니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다시 "ㄷ"자의 맨 끝쪽에 있는 유치장으로 끌고 갔으며 안쪽에 있는 유치장에 저를 감금했습니다.
저는 풀어달라고 소리쳤지만 그들을 다시 나거버리고 상황실에 MP완장을 한 미군만 남아있었습니다. 잠시후에 상황실 유리 너머로 이정미 기자가 끌려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미군들은 이정미 기자를 들어온 입구에서 무릅을 꿇리더니 잠시 후에 제가 있는 옆 유치장에 감금하였습니다. 그리고 카츄사가 와서는 유치장쪽 입구에 서 있었습니다.
저는 카츄사에게 뒤로 결박한 포승줄이 뭔지 모르겠지만(뒤에서 채웠기 때문에 볼수는 없었으나 촉감으로 플라스틱 종류의 일종이라 생각했습니다.)너무 꽉 조여져서 아프니 좀 풀어달라고 했습니다.
MP완장을 한 미군은 힐끗 처다보더니 뭐라 말을 하는 것 같았고 잠시후 카츄사가 와서는 "그냥 있으래요." 하는 어이없는 말을 하였습니다.
주머니에서는 핸드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하였는데 손이 뒤로 묶여 있어 전화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옆방에서 핸드폰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이정미 기자가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정미 기자도 똑같이 포승을 하고 들어온 것을 보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마 포승이 조금 느슨하게 되어 있어서 요령껏 풀렀던 모양입니다. 전화는 바깥에서 잡혀가는 것을 본 사람들이 두사람의 행방을 파악하기 위해 한 전화였으며 이정미 기자가 저와 함께 미군 영내 유치장에 있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이 핸드폰은 두번째 통화를 하면서 미군에게 뺏기고 말았습니다.
저는 포승을 풀어달라고 소리치기 시작하였습니다.
10분, 20분이 지나자 플라스틱 포승이 점점 살을 죄어오는 것 같았으며 양손이 심하게 저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욕을 하면서 점점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풀어달란 말이야! 이 XX놈들아! 풀기 싫으면 아프지 않게 조금 느슨하게라도 해달란 말이야!" 그리고 계속해서 카츄사에게 호소를 하였습니다.
"카츄사! 다시한번 얘기해봐. 아파 죽겠단 말이야. 제발 부탁이야."
카츄사가 제가 너무 고통스러워 하는 걸 보면서 몇번 더 미군에게 이야기를 하였지만 번번히 그 미군에게서는 "I찮다. 그냥 있어라."라는 말만 되돌아 올 뿐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소리치는 저를 보면서 희죽희죽 웃으면서 약올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옆에서 이정미 기자도 풀어주라고 계속 요구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30분 가량 지났을 때 의무병을 좀 불러달라고 요청을 하였습니다. 의무병이 사태의 심각성을 보면 뭔가 좀 말을 해줄거라 생각했습니다. 의무병은 여성이었는데 제 손을 철창쪽으로 향하라고 하여 돌아서서 보여주었더니 손가락 끝만을 만져보더니 I찮다고 하면서 그냥 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어이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고통스러워 하는데 팔에 피멍이라도 들어야 풀어주려는지... 저의 고통은 계속되었습니다. 저린 부위가 점점 팔을 타고 올라와 팔꿈치 윗부분까지 저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손만 안댔지 저는 고문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소리치고 벽을 발로 차며 항의했습니다.
"너희놈들도 규정이 있을것 아니냐. 규정대로 해라. 피의자나 구금인에 대해 보호하고 인권을 지킬 것에 대한 규정이 있을 것 아니냐! 제발 규정대로라도 해라! 카츄사 제발 다시한번 전해줘, 규정대로 하라고 말이야."
하지만 카츄사가 전해오는 말은 계속해서
"그냥 있으래요." 하는 말뿐이었습니다.
고통스럽고 답답한 나머지 화장실에 가겠다고 요구하였지만
"바지에 싸래요."
물을 달라고 요구하자
"물을 줄수 없대요."
이렇게 미군들은 제가 고문당하며 아파하는 것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저의 계속되는 외침과 요구속에 의무병이 두번 더 다녀갔는데 두번째도 I찮다며 그냥 가버리고 세번째가 되어서야 상황실에 있는 미군에게 풀어주라고 얘기를 하였습니다. 그때가 한시간쯤 지나서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풀어줄 생각을 안하는 것입니다.
카츄사에게 어떻게 된거냐고 물어보니 자를 도구를 가지러 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10분, 20분이 지나도 절단기를 가지러 간 미군은 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미 손이 부을대로 부어있다는 것을 보지 않아도 느낄수 있었고 미군 의무병도 심각한 상태이기 때문에 풀어주라고 했건만, 미군들은 카츄사에게도 순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나중에는 카츄사도 너무 미안하고 어쩔줄을 몰라 제가 소리칠때마다 난감해 하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카츄사도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남의 나라군대에 파견되어 군생활을 한다지만 우리나라 국민의 한사람이고 국방의 의무감을 느낄터인데 제나라 국민을 고문하는 미군앞에 아무것도 해줄수 없는데 대해 민족적 모멸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저는 제 고통앞에 카츄사의 그런 마음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채 그 카츄사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카츄사! 너라도 좀 풀어주라. 이거 풀어주고 징계 한번 받으면 되잖아. 우리나라 지키려고 군대간거 맞잖아. 저놈들이 못하면 너라도 좀 제발 풀어줘라. 내가 팔병신 되면 너도 좋을 것 없지 않냐. 제발 부탁이다."
이미 제 팔의 상태는 "제발"이라는 단어가 빠지면 말이 안될 정도로 심각해져 어깨까지 고통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카츄사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습니다. 아마 풀어주지 못하는 것이 괴로와 뛰쳐나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또 20분 가량이 흘러 소리칠 기운도 빠져 탈진의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는 혹 조용히 있으면 풀어줄지도 모른다는 얕은 생각이 들어 머리를 벽에 기댄채로 가만히 있었습니다. 팔이 아파 움직이지도 앉아 있을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6명 가량의 미군들이 들어오더니 이정미 기자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 기자의 외침소리와 함께 우당탕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정미 기자를 바닥에 엎어놓고 다시 포승을 묶으려 하자 이 기자가 소리치면서 저항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포승이 곧 채워졌는지 미군들이 나오고 철창을 채웠습니다.
하지만 제 포승을 풀어줄려는 미군은 아무도 없었으며 조금후에 10여명 가까운 미군들이 다시 들어왔습니다. 그중 카메라를 든 미군도 있었는데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먼저 이정미 기자가 있는 방에 들어갔는데 이 기자가 저항을 심하게 하는지 이 기자의 비명과 고함같은 것이 들렸고 목적달성을 한 미군들이 제가 있는 방 앞으로 왔습니다. 이미 탈진한 저는 미군들에게 제발 좀 풀어달라고, 풀어주면 사진 찍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미군들이 풀어주겠다고 해서 순순히 사진을 찍게 하였는데 미군들은 또 그냥 나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어짜피 이놈들은 풀어줄 놈들이 아니라는 것을 고통속에서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마구 욕을 하며 벽을 차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차라리 죽는게 낮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카츄사에게 총을 가져오라고 너무 고통스러우니 차라지 총으로 쏴 달라고...
그러던 중에 한국 경찰들이 왔습니다. 아마 바깥에서 우리를 풀어줄 것을 거세게 요구하니까 자기들이 처리하기가 싫었던지 경찰을 요청한 듯 싶었습니다.
어떻게 들어왔든지 저에게 그 경찰들은 한줄기 빛과 같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경찰들에게 다시 호소하였습니다. 하지만 경찰들은 왔다갔다 하면서 미군들과 얘기만 할뿐 좀체로 이쪽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참후 오더니 먼저 이 기자에게 신상을 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기자는 미군들에게 무슨일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인데 신상이 중요하냐며 빨리 풀어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경찰들은 처음에는 신상을 대야 나갈수 있다고 설명을 하더니 이 기자가 계속 거부하자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반응을 보이다가
"그럼 계속 여기 있어!"
하면서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나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저도 어이가 없었습니다.
도데체 이고문을 끝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인가.... 기가 막혔습니다.
조금후에 문을 박차고 나갔던 한국경찰들이 다시 들어와 저와 이정미 기자에게 신상을 알려달라고 다시 요구하였습니다. 저는 제발 포승부터 좀 풀고 얘기하자고 애원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완강하게 말하던 경찰들이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이 불쌍했던지 미군들에게 자신들의 수갑으로 대치를 할테니 풀어달라고 하였지만 미군들은 거절하였고, 그럼 가위를 빌려달라고 했지만 미군은 빌려줄수 없다며 가위로 잘라줄 때에 그 가위를 뺏어 위협하거나 흉기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할수 없이 경찰도 인계되면 풀어주겠다는 말밖에 할수가 없었고 미군과 인계에 대한 대화가 끝났는지 들어온지 1시간 40분 가량 지나서야 철창이 열리고 경찰에게 부축이 되어서 나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묶여진 포승의 아픔을 참을수가 없었습니다. 보다못한 경찰들이 경찰차에 도착하자 막사에 있던 가위를 가지고 와서 잘라볼려고 하였지만 워낙 단단했는지 제 손을 헤집는 고통만 더하고 자르지는 못했습니다.
온몸에 땀이 흥건했고 양팔과 어깨가 쑤시는 듯이 아팠고 경찰들도 애가 탔는지 주변에 있던 소방차를 보고 절단 장비를 좀 빌릴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소방차는 미군 소속의 소방차였지만 다행히 직원들이 한국사람들이서 쉽게 부탁을 하였고, 조금 후 소방수가 절단기를 가져오고 있는데 호송차 앞에 있던 미군이 갑자기 경찰에게 주지 말것을 명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군 영내에서는 포승을 풀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경찰들도 더이상 뭐라 하지 못하고 그저 답답해 하며 빨리 나가는게 상책이라고 판단하여 저와 이정미 기자를 실은 차는 경찰 5명과 같이 출발을 하였습니다.
차는 뒤좌석이 마주보게 되어있는 봉고차였는데 저는 팔에 무언가 닿기만 해도 고통이 가중되어 의자에 똑바로 앉지도 못하고 바닥에 무릅을 꿇고 머리를 시트에 파뭏은채로 부대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견고한 포승을 풀은 것은 경찰서로 가는 도중 길거리에 있는 한 꽃집에서 절단가위를 빌려서 풀게 되었습니다. 급한 고통은 멈추었지만 팔을 움직일수가 없었고 온몸이 뻐근하고 비오듯 땀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이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양손과 팔이 풀리지 않은채 피가 제대로 통하지 않아 저리고 쑤시는 지경입니다.
나중에 경찰서에서 경찰들이 잘라낸 포승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도저히 사람에게 써서는 안될 도구였습니다. 질긴 플라스틱 재질로 길이가 50Cm정도 폭이 1Cm정도 되는데 컴퓨터나 전선 같은 것을 함께 묶을때 쓰는 "타이"라는 공구와 비슷한 것으로 한쪽면이 일정한 요철로 되어있어 조이는 기능만 가능할뿐 풀르거나 느슨하게 하는 기능은 없는 것으로 뺀치나 절단기가 없으면 잘라내기도 힘든 것으로 사람에게는 써서는 안될 도구입니다.
저는 병원에서 전치 3주의 진단을 받았습니다.
의사는 목과 등 주변의 근육이 심하게 상한 상태이고 손과 팔의 저림과 마비증세도 목과 등에 입은 상처가 완치되어야 같이 풀릴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 고통과 악몽의 순간을 벗어나 다시 한번 반문해 보게 됩니다.
비록 2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미군들에게 잡혀있던 나는 어떤 존재였는가? 기자에게 성역이란 있을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기자가 탄압받는 것만큼 비정상적인 사회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진정 미군들에게 나는 무엇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때 나는 대한민국 기자도, 한나라의 국민도, 인권을 가진 인간도 아닌....
한마리의 짐승에 불과했을 것이다.
[출처:2002년07월01일 민중의 소리]
.....................................................................
대한민국 기자는 미군에게 있어서
짐승만도 못한 존재인가?
폭력연행, 강제구금..한유진 기자, 악몽의 2시간
△한유진 기자

제가 이글을 남기는 것은 미군의 직접 피해를 입은 당사자로 그동안 저보다 더한 일을 당하고도 말 한마디 못하고 고통을 삼켜야만 했던 수많은 피해자들을 대신해서 미군의 만행을 사실 그대로 생생하게 국민들 앞에 알리기 위해서 입니다. 단지 그 만행을 과장되게 부풀려서 분노만 자아내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자정신에 입각하여 사실을 근거로 제가 느낀 감정과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입니다. 그런만큼 자신의 시각과 다르다고 호도하거나 색깔논쟁으로 끌고가며 저의 체험을 왜곡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제가 미군 영내로 들어가게 된 것은(경과는 이후에 서술하겠지만) 기자의 첫째 임무인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입니다. 언론자유 앞에 그 어떤 성역이 있을 수 없건만 주한미군은 국민들의 알권리에 철저히 가려진채로 정권의 비호와 소파협정의 우위에서 50년 넘게 국민과 국가위에서 군림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간 50년동안 일어난 수천 수만건의 주한미군 관련 사건과 범죄들을 보면서 너무나 알려지지 않은채 묻혀버린 사건들이 많았다는 것에 놀랐고, 전동록씨의 죽음이나 두여중생의 죽음을 보면서 뻔뻔하리만치 무책임한 주한미군의 태도에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거대 보수언론들의 외면속에 묻혀가고 있는 이 문제가 바로 진정한 언론이 주시해야할 민족의 문제라는 생각에 저희 방송국과 기자들은 적극 나서게 된 것입니다.
그날 저는 집회 전반부를 촬영하고 후반부에는 이정미 기자에게 카메라를 맡기고 보조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잡혔을 당시는 이정미기자가 촬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4시부터 시작된 집회가 점점 무르익어가면서 관련 대책위 대표들이 항의서한을 전달하는 순서가 되면서 집회대오와 전경들의 몸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저는 뒷쪽에서 취재에 필요한 정황들을 살피고 있다가 정문 오른편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을 보고 그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인 안쪽에 철조망이 뚫려있는 것이 보였으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철조망 바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미군 영내가 환희 들여다 보였으며 일부의 사람들이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 같더니 여러 사람들이 우루루 저를 밀치면서 영내로 들어가기 시작하였으며 그 바람에 저도 얼결에 영내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일단 발을 들여놓자 정문 뒷쪽의 상황이 궁금했고 5,6m를 더 나아가 정문쪽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상황을 살펴볼 겨를도 없이 바로 미군들 30여명 정도가 이쪽으로 우루루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급히 철조망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하였고 저도 몸을 돌려 철조망 앞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안에서 촬영을 하던 이정미 기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뒤를 돌아보니 이 기자가 미군들이 바로 앞까지 왔는데도 얼어붙은 듯이 서있었습니다.(나중에 안 사실인데 이정미 기자는 개나 고양이를 무척 싫어하는 성격인데 당시 미군들이 군견을 끌고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놀라서 발을 뗄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뒤늦게 몇 발자욱 물러났으나 이미 미군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며 5,6명의 미군들이 막무가내로 카메라를 빼앗으며 이 기자를 덮치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급박함을 알고 그것을 제지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고 그곳으로 달려갔으나 주변에 있던 미군들이 이내 저를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무슨 설명을 할 겨를도 없이 한 미군이 저의 목을 잡아 조르면서 복부를 가격하고 자빠뜨렸으며 넘어진 저에게 2,3명의 미군들이 달려들어 저를 엎드리게 한뒤 양팔을 잡고 등뒤로 꺽고, 양다리도 엊갈려 꺽어 꼼짝을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당황스러운 것은 팔을 꺽는 것이 힘을 못쓸 정도로 제압을 할려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울 만큼 아플정도로 꺽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미군은 얼굴을 옆으로 꺽어 돌리더니 발로 밟고 목을 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도데체 목을 왜 조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흑인 병사는 어느정도 제압이 될 정도로 조르는 것이 아니라 숨이 막히다 못해 넘어갈 때까지 조르는 것이었습니다. 두려운 나머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숨이 넘어갈 즈음 잦아들며 나온 말은 "~살려줘!"라는 말이었습니다. 정말 그 흑인병사가 저를 죽이려고 하는줄 알았습니다. 그제서야 힘을 푸는줄 알았는데 숨통이 트이자 다시 손가락에 힘을 주며 목을 졸르고 있었습니다. 그 고통이 멈춘것은 뒤에서 팔을 꺽던 병사들이 손목에 포승을 채우고 끌고갈 때 쯤에야 멈추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언제 포승이 되었는지도 모르게 2명의 병사에게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승이 좀 느슨하게 되었는지 손을 몇번 움직이자 금새 풀을수 있었고 제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아까의 공포가 떠올라 도망가려고 몸부림 치자 다시 5, 6명이 달려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아스팔트 위에서 제압을 당하게 되었는데 목만 안 졸랐지 더 고통스럽게 팔을 꺽고 등을 무릅과 발같은 것으로 짓눌렀습니다. 너무 심하게 꺽고 누르고 등을 짓이기는 바람에 저는 이후에 한국경찰에게 인도된 이후 심한 부상을 입어야만 했으며 조사과정 내내 서있기도 힘들고, 앉아 있기도 힘든 부상을 입어 목 보호대를 하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한 병사는 첫 진압때와 같이 얼굴을 옆으로 꺽더니 두손으로 있는 힘껏 얼굴을 누르는 것이었습니다. 얼굴이 무슨 큰 저항을 한다고 그렇게 힘껏 누르는지 미군들의 동작 하나 하나에서 살기가 느껴졌습니다. 얼굴 오른쪽에 있는 찰과상은 그때 너무 심하게 짓눌러져 생긴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본격적인 고문은 그 순간부터 였습니다.
미군들은 아까 채웠던 플라스틱 수갑을 다시 채우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한번 풀렸던 탓인지 이번에는 작심을 한 것처럼 있는 힘껏 잡아당겨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힘껏 잡아당겨 순간 소리를 질렀습니다.
미군은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저를 양쪽에서 일으키고 한명은 허리띠를 잡고 스스로의 힘으로 가는 것인지 허공에 떠서 가는 것인지 모르게 어디론가 가고 있었습니다.
팔이 조여오는 고통이 시작되었지만 그제서야 숨막힘과 팔꺽임의 고통에서 벗어나 조금은(?) 정신을 차릴수가 있었으며 아까 "사람살려"라고 비명을 지르며 미군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이정미 기자 생각이 났고, 이들에게 무언가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풀어줘라", "기자를 왜 잡아가느냐!", "어디로 가는거야!"라고 소리쳤지만 알아듣는지 못알아 듣는지 미군들은 자기들끼리 뭐라고 말하며 한 막사로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막사는 구조가 가운데에 유리로 된 상황실 같은 것이 있고 "ㄷ"자 모양으로 복도가 나 있으며 그 한쪽에 바깥과 통하는 문이 있고 안쪽에 한명 정도를 수용할수 있는 쇠창살로 된 유치장이 2개가 있고 유치장 사이는 벽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즉 가운데 상황실 같은 곳에서 바깥상황을 볼수도 있고 안쪽의 유치장과 안쪽 방들의 움직임들을 한눈에 알수 있게 되어 있는 구조였으며 상황실 입구는 유치장쪽 복도에 나 있었습니다.
막사에 들어서자 마자 복도에 무릅을 꿇리는가 십더니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다시 "ㄷ"자의 맨 끝쪽에 있는 유치장으로 끌고 갔으며 안쪽에 있는 유치장에 저를 감금했습니다.
저는 풀어달라고 소리쳤지만 그들을 다시 나거버리고 상황실에 MP완장을 한 미군만 남아있었습니다. 잠시후에 상황실 유리 너머로 이정미 기자가 끌려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미군들은 이정미 기자를 들어온 입구에서 무릅을 꿇리더니 잠시 후에 제가 있는 옆 유치장에 감금하였습니다. 그리고 카츄사가 와서는 유치장쪽 입구에 서 있었습니다.
저는 카츄사에게 뒤로 결박한 포승줄이 뭔지 모르겠지만(뒤에서 채웠기 때문에 볼수는 없었으나 촉감으로 플라스틱 종류의 일종이라 생각했습니다.)너무 꽉 조여져서 아프니 좀 풀어달라고 했습니다.
MP완장을 한 미군은 힐끗 처다보더니 뭐라 말을 하는 것 같았고 잠시후 카츄사가 와서는 "그냥 있으래요." 하는 어이없는 말을 하였습니다.
주머니에서는 핸드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하였는데 손이 뒤로 묶여 있어 전화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옆방에서 핸드폰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이정미 기자가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정미 기자도 똑같이 포승을 하고 들어온 것을 보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마 포승이 조금 느슨하게 되어 있어서 요령껏 풀렀던 모양입니다. 전화는 바깥에서 잡혀가는 것을 본 사람들이 두사람의 행방을 파악하기 위해 한 전화였으며 이정미 기자가 저와 함께 미군 영내 유치장에 있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이 핸드폰은 두번째 통화를 하면서 미군에게 뺏기고 말았습니다.
저는 포승을 풀어달라고 소리치기 시작하였습니다.
10분, 20분이 지나자 플라스틱 포승이 점점 살을 죄어오는 것 같았으며 양손이 심하게 저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욕을 하면서 점점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풀어달란 말이야! 이 XX놈들아! 풀기 싫으면 아프지 않게 조금 느슨하게라도 해달란 말이야!" 그리고 계속해서 카츄사에게 호소를 하였습니다.
"카츄사! 다시한번 얘기해봐. 아파 죽겠단 말이야. 제발 부탁이야."
카츄사가 제가 너무 고통스러워 하는 걸 보면서 몇번 더 미군에게 이야기를 하였지만 번번히 그 미군에게서는 "I찮다. 그냥 있어라."라는 말만 되돌아 올 뿐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소리치는 저를 보면서 희죽희죽 웃으면서 약올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옆에서 이정미 기자도 풀어주라고 계속 요구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30분 가량 지났을 때 의무병을 좀 불러달라고 요청을 하였습니다. 의무병이 사태의 심각성을 보면 뭔가 좀 말을 해줄거라 생각했습니다. 의무병은 여성이었는데 제 손을 철창쪽으로 향하라고 하여 돌아서서 보여주었더니 손가락 끝만을 만져보더니 I찮다고 하면서 그냥 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어이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고통스러워 하는데 팔에 피멍이라도 들어야 풀어주려는지... 저의 고통은 계속되었습니다. 저린 부위가 점점 팔을 타고 올라와 팔꿈치 윗부분까지 저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손만 안댔지 저는 고문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소리치고 벽을 발로 차며 항의했습니다.
"너희놈들도 규정이 있을것 아니냐. 규정대로 해라. 피의자나 구금인에 대해 보호하고 인권을 지킬 것에 대한 규정이 있을 것 아니냐! 제발 규정대로라도 해라! 카츄사 제발 다시한번 전해줘, 규정대로 하라고 말이야."
하지만 카츄사가 전해오는 말은 계속해서
"그냥 있으래요." 하는 말뿐이었습니다.
고통스럽고 답답한 나머지 화장실에 가겠다고 요구하였지만
"바지에 싸래요."
물을 달라고 요구하자
"물을 줄수 없대요."
이렇게 미군들은 제가 고문당하며 아파하는 것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저의 계속되는 외침과 요구속에 의무병이 두번 더 다녀갔는데 두번째도 I찮다며 그냥 가버리고 세번째가 되어서야 상황실에 있는 미군에게 풀어주라고 얘기를 하였습니다. 그때가 한시간쯤 지나서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풀어줄 생각을 안하는 것입니다.
카츄사에게 어떻게 된거냐고 물어보니 자를 도구를 가지러 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10분, 20분이 지나도 절단기를 가지러 간 미군은 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미 손이 부을대로 부어있다는 것을 보지 않아도 느낄수 있었고 미군 의무병도 심각한 상태이기 때문에 풀어주라고 했건만, 미군들은 카츄사에게도 순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나중에는 카츄사도 너무 미안하고 어쩔줄을 몰라 제가 소리칠때마다 난감해 하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카츄사도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남의 나라군대에 파견되어 군생활을 한다지만 우리나라 국민의 한사람이고 국방의 의무감을 느낄터인데 제나라 국민을 고문하는 미군앞에 아무것도 해줄수 없는데 대해 민족적 모멸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저는 제 고통앞에 카츄사의 그런 마음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채 그 카츄사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카츄사! 너라도 좀 풀어주라. 이거 풀어주고 징계 한번 받으면 되잖아. 우리나라 지키려고 군대간거 맞잖아. 저놈들이 못하면 너라도 좀 제발 풀어줘라. 내가 팔병신 되면 너도 좋을 것 없지 않냐. 제발 부탁이다."
이미 제 팔의 상태는 "제발"이라는 단어가 빠지면 말이 안될 정도로 심각해져 어깨까지 고통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카츄사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습니다. 아마 풀어주지 못하는 것이 괴로와 뛰쳐나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또 20분 가량이 흘러 소리칠 기운도 빠져 탈진의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는 혹 조용히 있으면 풀어줄지도 모른다는 얕은 생각이 들어 머리를 벽에 기댄채로 가만히 있었습니다. 팔이 아파 움직이지도 앉아 있을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6명 가량의 미군들이 들어오더니 이정미 기자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 기자의 외침소리와 함께 우당탕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정미 기자를 바닥에 엎어놓고 다시 포승을 묶으려 하자 이 기자가 소리치면서 저항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포승이 곧 채워졌는지 미군들이 나오고 철창을 채웠습니다.
하지만 제 포승을 풀어줄려는 미군은 아무도 없었으며 조금후에 10여명 가까운 미군들이 다시 들어왔습니다. 그중 카메라를 든 미군도 있었는데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먼저 이정미 기자가 있는 방에 들어갔는데 이 기자가 저항을 심하게 하는지 이 기자의 비명과 고함같은 것이 들렸고 목적달성을 한 미군들이 제가 있는 방 앞으로 왔습니다. 이미 탈진한 저는 미군들에게 제발 좀 풀어달라고, 풀어주면 사진 찍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미군들이 풀어주겠다고 해서 순순히 사진을 찍게 하였는데 미군들은 또 그냥 나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어짜피 이놈들은 풀어줄 놈들이 아니라는 것을 고통속에서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마구 욕을 하며 벽을 차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차라리 죽는게 낮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카츄사에게 총을 가져오라고 너무 고통스러우니 차라지 총으로 쏴 달라고...
그러던 중에 한국 경찰들이 왔습니다. 아마 바깥에서 우리를 풀어줄 것을 거세게 요구하니까 자기들이 처리하기가 싫었던지 경찰을 요청한 듯 싶었습니다.
어떻게 들어왔든지 저에게 그 경찰들은 한줄기 빛과 같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경찰들에게 다시 호소하였습니다. 하지만 경찰들은 왔다갔다 하면서 미군들과 얘기만 할뿐 좀체로 이쪽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참후 오더니 먼저 이 기자에게 신상을 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기자는 미군들에게 무슨일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인데 신상이 중요하냐며 빨리 풀어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경찰들은 처음에는 신상을 대야 나갈수 있다고 설명을 하더니 이 기자가 계속 거부하자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반응을 보이다가
"그럼 계속 여기 있어!"
하면서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나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저도 어이가 없었습니다.
도데체 이고문을 끝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인가.... 기가 막혔습니다.
조금후에 문을 박차고 나갔던 한국경찰들이 다시 들어와 저와 이정미 기자에게 신상을 알려달라고 다시 요구하였습니다. 저는 제발 포승부터 좀 풀고 얘기하자고 애원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완강하게 말하던 경찰들이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이 불쌍했던지 미군들에게 자신들의 수갑으로 대치를 할테니 풀어달라고 하였지만 미군들은 거절하였고, 그럼 가위를 빌려달라고 했지만 미군은 빌려줄수 없다며 가위로 잘라줄 때에 그 가위를 뺏어 위협하거나 흉기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할수 없이 경찰도 인계되면 풀어주겠다는 말밖에 할수가 없었고 미군과 인계에 대한 대화가 끝났는지 들어온지 1시간 40분 가량 지나서야 철창이 열리고 경찰에게 부축이 되어서 나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묶여진 포승의 아픔을 참을수가 없었습니다. 보다못한 경찰들이 경찰차에 도착하자 막사에 있던 가위를 가지고 와서 잘라볼려고 하였지만 워낙 단단했는지 제 손을 헤집는 고통만 더하고 자르지는 못했습니다.
온몸에 땀이 흥건했고 양팔과 어깨가 쑤시는 듯이 아팠고 경찰들도 애가 탔는지 주변에 있던 소방차를 보고 절단 장비를 좀 빌릴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소방차는 미군 소속의 소방차였지만 다행히 직원들이 한국사람들이서 쉽게 부탁을 하였고, 조금 후 소방수가 절단기를 가져오고 있는데 호송차 앞에 있던 미군이 갑자기 경찰에게 주지 말것을 명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군 영내에서는 포승을 풀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경찰들도 더이상 뭐라 하지 못하고 그저 답답해 하며 빨리 나가는게 상책이라고 판단하여 저와 이정미 기자를 실은 차는 경찰 5명과 같이 출발을 하였습니다.
차는 뒤좌석이 마주보게 되어있는 봉고차였는데 저는 팔에 무언가 닿기만 해도 고통이 가중되어 의자에 똑바로 앉지도 못하고 바닥에 무릅을 꿇고 머리를 시트에 파뭏은채로 부대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견고한 포승을 풀은 것은 경찰서로 가는 도중 길거리에 있는 한 꽃집에서 절단가위를 빌려서 풀게 되었습니다. 급한 고통은 멈추었지만 팔을 움직일수가 없었고 온몸이 뻐근하고 비오듯 땀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이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양손과 팔이 풀리지 않은채 피가 제대로 통하지 않아 저리고 쑤시는 지경입니다.
나중에 경찰서에서 경찰들이 잘라낸 포승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도저히 사람에게 써서는 안될 도구였습니다. 질긴 플라스틱 재질로 길이가 50Cm정도 폭이 1Cm정도 되는데 컴퓨터나 전선 같은 것을 함께 묶을때 쓰는 "타이"라는 공구와 비슷한 것으로 한쪽면이 일정한 요철로 되어있어 조이는 기능만 가능할뿐 풀르거나 느슨하게 하는 기능은 없는 것으로 뺀치나 절단기가 없으면 잘라내기도 힘든 것으로 사람에게는 써서는 안될 도구입니다.
저는 병원에서 전치 3주의 진단을 받았습니다.
의사는 목과 등 주변의 근육이 심하게 상한 상태이고 손과 팔의 저림과 마비증세도 목과 등에 입은 상처가 완치되어야 같이 풀릴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 고통과 악몽의 순간을 벗어나 다시 한번 반문해 보게 됩니다.
비록 2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미군들에게 잡혀있던 나는 어떤 존재였는가? 기자에게 성역이란 있을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기자가 탄압받는 것만큼 비정상적인 사회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진정 미군들에게 나는 무엇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때 나는 대한민국 기자도, 한나라의 국민도, 인권을 가진 인간도 아닌....
한마리의 짐승에 불과했을 것이다.
[출처:2002년07월01일 민중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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