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밍스, 조미관계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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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3-01-04 00:00 조회1,53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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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내 한반도 문제 전문가인 브루스 커밍스(59) 시카고대 교수. 그는 1980년대 <한국전쟁의 기원>을 펴내며 한국현대사 특히 한국전쟁 연구에서 ‘수정주의’라는 새로운 화두를 던진 학자다. 한국의 민주화, 남북한 관계와 미국의 역할, 동아시아 정치경제 등 광범한 분야를 아우른 그의 연구는 미국내에서 척박했던 한국학의 위상을 고양시킨 계기가 됐다.
그는 한국 현대사에 대한 통찰을 기초로, 지난 몇 년 동안 숨가쁘게 전개된 한반도 정세에 대해서 활발하게 발언해왔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한국전쟁 이후 가장 성공적인 대북정책”이라고 본 그는 부시행정부 출범 뒤의 상황을 “물이 없어서 항해하던 배가 멈춘 것처럼 역사가 멈춘 것 같다”고 묘사한 바 있다. 또 지난해 미국이 북한을 ‘깡패국가’로 지목하며 미사일방어체제(엠디) 구축의 빌미로 삼으려 하자, 북한쪽에 “유럽, 일본을 상대로 미사일개발에 대한 협상에 나서, 스스로 표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여중생 사망 사건이 지핀 반미감정의 불길이 전국으로 번지고, 북한의 미사일 수출과 핵개발 문제가 새롭게 수면위로 떠오르는 어수선한 상황을 그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변화의 기로에 선 한국내 대미인식과 얽힌 실타래 같은 북·미 관계 등을 짚어보기 위해, 지난 12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토요일 저녁이면 광화문과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미군 궤도차량에 깔려 숨진 두 여중생을 추모하는 대규모 촛불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이번 사고는 분명 과실치사다. 가령 폭풍이 치는 날 도로를 건너는 두 여학생을 운전자가 보지 못해 사고를 일으켰다면 운전자는 기소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사고와 관련된 두 사병은 통신기기가 고장났는데도 신경쓰지 않았고, 전방을 주시할 의무마저 소홀히했다. 미국 사법체계에서 이런 상황은 사고를 낸 사람이 어떤 의도를 갖고 있었는가와 무관하게 과실치사에 해당된다. 고속도로에서 내가 두 소녀를 치었다면 당연히 기소됐을 테고, 감옥에서 몇 년을 보내야 했을 거다.
지난 6월 사고가 일어났을 때, 미국 대통령의 공식적인 사과가 있어야 했다. 부시 정권은 동아시아 문화를 이해하는 데 무척 미숙하다. 취임초 미 핵잠수함이 일본 수산고교의 어업실습선과 충돌해 9명이 숨졌을 때도 사과하는 데 2주가 걸렸다. 지난해 중국 하이난에서 미군 정찰기와 충돌한 중국 전투기 조종사가 목숨을 잃었을 때는 아예 유감을 표시하지도 않았다. ‘아무에게도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힘의 오만함을 보여 온 것이다.
최근의 반미시위는 과거와 다른 양상을 보인다. 가족 단위로 참여하는 이들이 많고, 스타 운동선수와 연예인들까지 포함돼 있다.
1980년대 반미시위는 학생운동세력이 이끌었다. 미국이 전두환 정권을 지지했고, 광주에서의 대량 학살에도 참여했다는 젊은 세대의 자각 때문이었다. 이에 반해 최근 촛불시위에 참여하는 보통 시민들의 반미감정은 대북 포용정책을 거부하는 미국의 태도가 불러일으켰다고 보인다. 부시 정권은 방미한 한국의 대통령을 푸대접했는가 하면, 서울 한복판에 놓인 용산 미군 기지는 도무지 옮기려 하지 않았다. 이에 더해 심미선, 신효순 두 소녀의 죽음이 한국민의 분노감을 더욱 깊어지게 했다.
불평등한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는데.
진짜 문제는 한반도에 미군이 너무 오랫동안 주둔했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군사적 개입을 한 지 57년이 지났지만, 아직 한반도 문제에 대한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유사시 대형 수송기로 병력을 실어나를 수 있는데, 3만7000명이나 되는 지상군을 머무르게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만약 미군이 남북 정상 회담에서 논의된 대로 정직한 중재자의 역할을 맡는다면, 미 주둔군의 존재가 정당화될 수 있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독일 주둔 미군이 지역의 안정을 가져온 것처럼 말이다. 만약 미군이 독일에서 철수했다면, 다른 유럽 국가들이 통일을 반대했을 것이다. 나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 클린턴 정부의 한반도 정책이 이런 인식틀 안에 놓여 있었다고 생각한다.
1960년대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왔을 때, 미군과 한국인의 관계를 보곤 상당히 놀랐었다. 당시 미군은 한국의 역사나 문화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는데, 이런 상황은 35년이 지난 뒤에도 바뀌지 않았다.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지금보다 평등하게 정립돼야만, 미군이 앞으로 이 땅에 머무를 수 있을 것이다.
지난 9일 미국은 스페인 해군에 의해 나포된 북한 화물선 서산호를 억류했다가 이틀 만에 풀어주었다. 미국이 전달하려 한 메시지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미국은 예멘으로부터 300마일 떨어진 곳에서 배를 붙들었다. 아마 그 지점에서 배가 예멘행인지, 아니면 이라크로 향하는지를 분명히 파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예멘으로 미사일을 보내줘야 했지만 어쨌든 북한이 여전히 스커드 미사일을 수출하고 있다는 사실을 세계에 알렸다.
이번 사건을 두고 미국이 북한을 봉쇄하려 했다고 보는 견해는 지나치다. 대북 봉쇄는 서산호를 나포해 국제적 여론을 환기한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만약 미국이 남포항에서 그 배를 막았다면, 그건 전쟁행위라 할 수 있다. 반대로 서산호가 유엔의 제재를 받고 있는 이라크로 향했다면 미국은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이라크 문제가 부시의 대북 태도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보나.
북한과 미국의 관계는 이라크 문제가 어떻게 풀리는지를 봐야한다. 중요한 건 전쟁의 길로 가느냐 아니면 그걸 피하느냐다. 유엔의 도움으로 이라크의 무장해제에 성공한다면, 부시는 북한의 대량살상무기나 재래식 군비 문제를 포용정책으로 풀어나가게 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의 경우는 이라크보다 쉬울 것 같다. 북한이 미사일이나 핵개발 문제를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활용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부시가 이라크와의 전쟁으로 나아갈 경우, 우리는 기다리면서 상황을 더 지켜봐야 한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열렬히 지지해온 것으로 안다. 그동안 한국내 보수세력들은 대북지원이 ‘퍼주기’라고 꾸준히 주장해왔는데, 이번에 대선에 출마한 후보들 사이에서도 이에 대한 입장이 엇갈리고 있다.
상호주의는 바람직하다. 그러나 북한이 받기만 하지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북한은 매우 값비싼 영변의 핵시설을 포기했고, 중장거리 미사일 개발도 동결했다. 북한은 상호주의에 응할 준비가 돼 있고, 또 그렇게 해왔다. 남한과의 관계에서도 다를 게 없다. 정상회담이나 금강산 관광을 그런 틀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북한은 상호주의를 위해 지불할 ‘돈’은 없지만, 대신 ‘정책의 변화’를 보여줬다.
●브루스 커밍스는 누구?
1943년 미국 뉴욕주 로체스터에서 태어난 브루스 커밍스는 1960년대 후반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한국땅을 밟으며 한국학과 인연을 맺었다. 컬럼비아대 대학원을 다니며 ‘진지한 아시아학 연구모임’ 회원이 됐지만, 정작 박사학위는 정치학과에서 받았다. 그는 지금도 동아시아 정치·경제를 연구하는 국제사 전공자를 자처한다.
1981년과 90년 그가 펴낸 <한국전쟁의 기원> 1·2권은 미국의 한국학 관련 서적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저서로 꼽힌다. 이 책은 한국의 분단과 이승만 독재정권 수립과정에 미국이 막대한 책임이 있음을 보여주는데, 미국의 기록자료들이 그의 논리를 뒷받침한다. 냉전이 시작된 책임을 미국에게도 동등하게 묻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관점은 ‘수정주의’라 불린다. 커밍스가 한국학에 기여한 또 다른 점은 <한국사 개설서> 등의 저서를 통해 처음으로 북한을 진지한 학문연구 대상으로 다뤘다는 것이다. 그는 이밖에도 <전쟁과 TV>(1993), <한국현대사>(1997), <양지 속의 한국>(1997) 등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
●인터뷰 낙수
브루스 커밍스는 여중생 사망 사건을 언급하면서 미국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끔찍한 일을 겪은 가족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고 밝혔다. 내년에 14살이 되는 아들을 둔 그는 여중생 사건에 대한 재판의 부당성 등을 얘기하면서 잠시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한편 그는 대선과 관련된 모든 질문들에 대해 답하기를 거부했다. 다만 이번 대선을 “한반도에서 선거 제도가 생긴 이래 가장 중요한 선거”라고 자리매김했는데, 그 이유를 “한미관계와 북한문제가 복잡한 상황에서 이회창과 노무현 두 후보가 상이한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지난 대선 이후 북한과의 관계가 획기적으로 변했지만, 그런 경험을 불과 5년밖에 하지 못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출처:인터넷한겨레 2002-12-16]

여중생 사망 사건이 지핀 반미감정의 불길이 전국으로 번지고, 북한의 미사일 수출과 핵개발 문제가 새롭게 수면위로 떠오르는 어수선한 상황을 그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변화의 기로에 선 한국내 대미인식과 얽힌 실타래 같은 북·미 관계 등을 짚어보기 위해, 지난 12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토요일 저녁이면 광화문과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미군 궤도차량에 깔려 숨진 두 여중생을 추모하는 대규모 촛불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이번 사고는 분명 과실치사다. 가령 폭풍이 치는 날 도로를 건너는 두 여학생을 운전자가 보지 못해 사고를 일으켰다면 운전자는 기소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사고와 관련된 두 사병은 통신기기가 고장났는데도 신경쓰지 않았고, 전방을 주시할 의무마저 소홀히했다. 미국 사법체계에서 이런 상황은 사고를 낸 사람이 어떤 의도를 갖고 있었는가와 무관하게 과실치사에 해당된다. 고속도로에서 내가 두 소녀를 치었다면 당연히 기소됐을 테고, 감옥에서 몇 년을 보내야 했을 거다.
지난 6월 사고가 일어났을 때, 미국 대통령의 공식적인 사과가 있어야 했다. 부시 정권은 동아시아 문화를 이해하는 데 무척 미숙하다. 취임초 미 핵잠수함이 일본 수산고교의 어업실습선과 충돌해 9명이 숨졌을 때도 사과하는 데 2주가 걸렸다. 지난해 중국 하이난에서 미군 정찰기와 충돌한 중국 전투기 조종사가 목숨을 잃었을 때는 아예 유감을 표시하지도 않았다. ‘아무에게도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힘의 오만함을 보여 온 것이다.
최근의 반미시위는 과거와 다른 양상을 보인다. 가족 단위로 참여하는 이들이 많고, 스타 운동선수와 연예인들까지 포함돼 있다.
1980년대 반미시위는 학생운동세력이 이끌었다. 미국이 전두환 정권을 지지했고, 광주에서의 대량 학살에도 참여했다는 젊은 세대의 자각 때문이었다. 이에 반해 최근 촛불시위에 참여하는 보통 시민들의 반미감정은 대북 포용정책을 거부하는 미국의 태도가 불러일으켰다고 보인다. 부시 정권은 방미한 한국의 대통령을 푸대접했는가 하면, 서울 한복판에 놓인 용산 미군 기지는 도무지 옮기려 하지 않았다. 이에 더해 심미선, 신효순 두 소녀의 죽음이 한국민의 분노감을 더욱 깊어지게 했다.
불평등한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는데.
진짜 문제는 한반도에 미군이 너무 오랫동안 주둔했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군사적 개입을 한 지 57년이 지났지만, 아직 한반도 문제에 대한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유사시 대형 수송기로 병력을 실어나를 수 있는데, 3만7000명이나 되는 지상군을 머무르게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만약 미군이 남북 정상 회담에서 논의된 대로 정직한 중재자의 역할을 맡는다면, 미 주둔군의 존재가 정당화될 수 있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독일 주둔 미군이 지역의 안정을 가져온 것처럼 말이다. 만약 미군이 독일에서 철수했다면, 다른 유럽 국가들이 통일을 반대했을 것이다. 나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 클린턴 정부의 한반도 정책이 이런 인식틀 안에 놓여 있었다고 생각한다.
1960년대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왔을 때, 미군과 한국인의 관계를 보곤 상당히 놀랐었다. 당시 미군은 한국의 역사나 문화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는데, 이런 상황은 35년이 지난 뒤에도 바뀌지 않았다.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지금보다 평등하게 정립돼야만, 미군이 앞으로 이 땅에 머무를 수 있을 것이다.
지난 9일 미국은 스페인 해군에 의해 나포된 북한 화물선 서산호를 억류했다가 이틀 만에 풀어주었다. 미국이 전달하려 한 메시지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미국은 예멘으로부터 300마일 떨어진 곳에서 배를 붙들었다. 아마 그 지점에서 배가 예멘행인지, 아니면 이라크로 향하는지를 분명히 파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예멘으로 미사일을 보내줘야 했지만 어쨌든 북한이 여전히 스커드 미사일을 수출하고 있다는 사실을 세계에 알렸다.
이번 사건을 두고 미국이 북한을 봉쇄하려 했다고 보는 견해는 지나치다. 대북 봉쇄는 서산호를 나포해 국제적 여론을 환기한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만약 미국이 남포항에서 그 배를 막았다면, 그건 전쟁행위라 할 수 있다. 반대로 서산호가 유엔의 제재를 받고 있는 이라크로 향했다면 미국은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이라크 문제가 부시의 대북 태도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보나.
북한과 미국의 관계는 이라크 문제가 어떻게 풀리는지를 봐야한다. 중요한 건 전쟁의 길로 가느냐 아니면 그걸 피하느냐다. 유엔의 도움으로 이라크의 무장해제에 성공한다면, 부시는 북한의 대량살상무기나 재래식 군비 문제를 포용정책으로 풀어나가게 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의 경우는 이라크보다 쉬울 것 같다. 북한이 미사일이나 핵개발 문제를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활용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부시가 이라크와의 전쟁으로 나아갈 경우, 우리는 기다리면서 상황을 더 지켜봐야 한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열렬히 지지해온 것으로 안다. 그동안 한국내 보수세력들은 대북지원이 ‘퍼주기’라고 꾸준히 주장해왔는데, 이번에 대선에 출마한 후보들 사이에서도 이에 대한 입장이 엇갈리고 있다.
상호주의는 바람직하다. 그러나 북한이 받기만 하지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북한은 매우 값비싼 영변의 핵시설을 포기했고, 중장거리 미사일 개발도 동결했다. 북한은 상호주의에 응할 준비가 돼 있고, 또 그렇게 해왔다. 남한과의 관계에서도 다를 게 없다. 정상회담이나 금강산 관광을 그런 틀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북한은 상호주의를 위해 지불할 ‘돈’은 없지만, 대신 ‘정책의 변화’를 보여줬다.
●브루스 커밍스는 누구?
1943년 미국 뉴욕주 로체스터에서 태어난 브루스 커밍스는 1960년대 후반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한국땅을 밟으며 한국학과 인연을 맺었다. 컬럼비아대 대학원을 다니며 ‘진지한 아시아학 연구모임’ 회원이 됐지만, 정작 박사학위는 정치학과에서 받았다. 그는 지금도 동아시아 정치·경제를 연구하는 국제사 전공자를 자처한다.
1981년과 90년 그가 펴낸 <한국전쟁의 기원> 1·2권은 미국의 한국학 관련 서적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저서로 꼽힌다. 이 책은 한국의 분단과 이승만 독재정권 수립과정에 미국이 막대한 책임이 있음을 보여주는데, 미국의 기록자료들이 그의 논리를 뒷받침한다. 냉전이 시작된 책임을 미국에게도 동등하게 묻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관점은 ‘수정주의’라 불린다. 커밍스가 한국학에 기여한 또 다른 점은 <한국사 개설서> 등의 저서를 통해 처음으로 북한을 진지한 학문연구 대상으로 다뤘다는 것이다. 그는 이밖에도 <전쟁과 TV>(1993), <한국현대사>(1997), <양지 속의 한국>(1997) 등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
●인터뷰 낙수
브루스 커밍스는 여중생 사망 사건을 언급하면서 미국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끔찍한 일을 겪은 가족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고 밝혔다. 내년에 14살이 되는 아들을 둔 그는 여중생 사건에 대한 재판의 부당성 등을 얘기하면서 잠시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한편 그는 대선과 관련된 모든 질문들에 대해 답하기를 거부했다. 다만 이번 대선을 “한반도에서 선거 제도가 생긴 이래 가장 중요한 선거”라고 자리매김했는데, 그 이유를 “한미관계와 북한문제가 복잡한 상황에서 이회창과 노무현 두 후보가 상이한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지난 대선 이후 북한과의 관계가 획기적으로 변했지만, 그런 경험을 불과 5년밖에 하지 못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출처:인터넷한겨레 2002-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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