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호동지 부인 황길영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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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 작성일03-01-25 00:00 조회1,46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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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뜻이 이뤄질 때까지 시신을 수습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 배달호씨가 분신했던 9일, 하늘이 무너질듯한 충격에 정신을 잃었던 부인 황길영(42)씨는 사건 이틀째인 10일 밤 겨우 심신을 수습해가는 모습이었다. 말을 아끼며 한마 디, 한마디 자신의 마음을 내비쳤다.
“처음 소식을 듣고 달려오면서 믿겨지지가 않았어요. 가족을 버렸다는 생각에 속도 많이 상했고….” 하지만 오열속에서 펼친 유서를 읽으며 마음을 바로 잡았다고 한다. 황씨는 “유서를 읽 어보니 가족을 뒤로 하면서까지 노조와 조합원들을 위해 분신할 수밖에 없었던 남편의 마음 을 알 수 있었다”며 “항상 평범하게 살자고 고집했었지만 지금은 유서에 남긴 남편의 뜻 을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고인은 유서를 통해 “해고자 18명, 징계자 90명정도, 재산가압류, 급여가압류, 노동조합 말살, 악랄한 정책으로 우리가 여기서 밀려난다면 전 사원의 고용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 라며 “동지들이여 끝까지 투쟁해서 승리해주기 바란다”고 밝혔다.
또한 “불쌍한 해고자들 꼭 복직 바란다”며 “항상 우리 민주광장에서 지켜 볼 것”이라 고 덧붙였다.
2남4녀의 장남으로 과묵한 성격의 부산 사나이였던 고 배달호씨. 부인은 고인을 평상시 말이 없고 마음을 잘 표현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자주 딸들과 대화를 갖기 위해 노력했던 자 상한 아빠로, 잘못된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곧은 사람으로 기억한다.
고인은 자신보다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이해를 더 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지난해 파업 때문에 남편이 구속됐다가 집행유예로 나올 때 저나 다른 수배자 부인들도 한사람이라도 복귀되면 좋겠다고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사람은 혼자서 복귀한 것에 대해 미안해하며 너무 힘들어 했어요.” 9월 집행유예로 나온 후 3개월 정직이라는 징 계를 받았다. 징계기간이 끝난 12월22일 복직을 앞둔 배씨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당시 교섭위원이던 고인은 임단협 과정에서 수많은 해고자와 징계자가 발생하고 조합원 개인의 재산과 급여에 대한 가압류 등 현안문제를 풀지 못하고 복귀하는 것에 대해 큰 죄책 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회사에 복귀한 후 출근한 며칠간의 생활은 고인에게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안겨주었던 것 으로 보인다.
“관리자들이 조합원을 못 만나게 하며 가압류를 빌미로 조합활동에 대한 회유를 하는 등 자신을 힘들게 만든다며 자주 술을 마셨어요.” 그러던중 7일밤 늦은 시간 술을 많이 마신 고인은 작은 딸을 안고 오열을 했다. 미안하다 며, 괴롭다며.
다음날 그는 월차를 내고 집안 수도를 고치며 집안일을 한 후 부인과 오붓하게 저녁을 먹 었다.
“과자를 한아름 안고와 갑자기 우는게 평소에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못해준 것이 미안해 그런 줄만 알았어요. 월차 다음날은 평상시보다 1시간 일찍 집을 나서 회사에 가더라고요.” 그리고 9일 오전 6시께 고인은 출근할 때 매일 지나던 `노동자광장"에서 온몸에 시너를 붓고 분신했다.
“남편의 뜻은 동료들이 다시 힘을 갖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남편의 시신을 노조에 맡기 겠습니다.”
2003년01월13일 11:30:16
[출처; 노동일보 2003-1-13]
“처음 소식을 듣고 달려오면서 믿겨지지가 않았어요. 가족을 버렸다는 생각에 속도 많이 상했고….” 하지만 오열속에서 펼친 유서를 읽으며 마음을 바로 잡았다고 한다. 황씨는 “유서를 읽 어보니 가족을 뒤로 하면서까지 노조와 조합원들을 위해 분신할 수밖에 없었던 남편의 마음 을 알 수 있었다”며 “항상 평범하게 살자고 고집했었지만 지금은 유서에 남긴 남편의 뜻 을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고인은 유서를 통해 “해고자 18명, 징계자 90명정도, 재산가압류, 급여가압류, 노동조합 말살, 악랄한 정책으로 우리가 여기서 밀려난다면 전 사원의 고용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 라며 “동지들이여 끝까지 투쟁해서 승리해주기 바란다”고 밝혔다.
또한 “불쌍한 해고자들 꼭 복직 바란다”며 “항상 우리 민주광장에서 지켜 볼 것”이라 고 덧붙였다.
2남4녀의 장남으로 과묵한 성격의 부산 사나이였던 고 배달호씨. 부인은 고인을 평상시 말이 없고 마음을 잘 표현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자주 딸들과 대화를 갖기 위해 노력했던 자 상한 아빠로, 잘못된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곧은 사람으로 기억한다.
고인은 자신보다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이해를 더 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지난해 파업 때문에 남편이 구속됐다가 집행유예로 나올 때 저나 다른 수배자 부인들도 한사람이라도 복귀되면 좋겠다고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사람은 혼자서 복귀한 것에 대해 미안해하며 너무 힘들어 했어요.” 9월 집행유예로 나온 후 3개월 정직이라는 징 계를 받았다. 징계기간이 끝난 12월22일 복직을 앞둔 배씨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당시 교섭위원이던 고인은 임단협 과정에서 수많은 해고자와 징계자가 발생하고 조합원 개인의 재산과 급여에 대한 가압류 등 현안문제를 풀지 못하고 복귀하는 것에 대해 큰 죄책 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회사에 복귀한 후 출근한 며칠간의 생활은 고인에게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안겨주었던 것 으로 보인다.
“관리자들이 조합원을 못 만나게 하며 가압류를 빌미로 조합활동에 대한 회유를 하는 등 자신을 힘들게 만든다며 자주 술을 마셨어요.” 그러던중 7일밤 늦은 시간 술을 많이 마신 고인은 작은 딸을 안고 오열을 했다. 미안하다 며, 괴롭다며.
다음날 그는 월차를 내고 집안 수도를 고치며 집안일을 한 후 부인과 오붓하게 저녁을 먹 었다.
“과자를 한아름 안고와 갑자기 우는게 평소에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못해준 것이 미안해 그런 줄만 알았어요. 월차 다음날은 평상시보다 1시간 일찍 집을 나서 회사에 가더라고요.” 그리고 9일 오전 6시께 고인은 출근할 때 매일 지나던 `노동자광장"에서 온몸에 시너를 붓고 분신했다.
“남편의 뜻은 동료들이 다시 힘을 갖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남편의 시신을 노조에 맡기 겠습니다.”
2003년01월13일 11:30:16
[출처; 노동일보 200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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